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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이기는 믿음의 시
성경본문|시편 102: 1~ 11
1.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6.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8.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9.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10.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11.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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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필재목사
여러분 모두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한번쯤은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대학 노트 하나 사 가지고 아주 그럴듯한 제목을 붙여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감상적인 시를 쓰고 아주 로맨틱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제가 사춘기 시절을 보내던 시대에는 전화 문화나 통신 시설이 아주 귀하던 시절이라서 마음의 전달은 언제나 편지를 써서 주고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마 그 시절에 받으신 연애편지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계신 분이 계시면 꺼내서 다시 한번 읽어보시면 문장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섰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 시절 시골에는 편지를 대신 써주는 전문가도 있었습니다.
언제나 첫머리는 아주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요즈음 같은 겨울에 쓰는 편지라면 “천지가 얼음으로 변하는 이 엄동설한에 기체 후 일향망강 하옵시며 가내 제절 두루 평안하신지요?”하고 시작을 하고, 제일 많이 쓰는 문장이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르고 흘러 양춘가절이 다가오는 때에 삼가 문안드리옵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문장이 좋은지 그 시절에는 전화라고 하는 것은 최고 부자들이나 놓고 살았기 때문에 보통 일반 서민들은 일년에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요즈음에는 우리 학생들은 전화 없으면 살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은지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24시간 전화를 달고 살면서 한번 들었다 하면 2~3시간이고 무슨 얘기가 그렇게 중요한 게 많은지 전화를 받은 딸이 30분 만에 전화를 끊길래 엄마가 하도 이상해서 왜 그렇게 일찍 끊었느냐 했더니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기계 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시적 감정이 너무나 메말라 가기 때문에 삶이 풍성하지 않고 삭막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이 전부 악에 받친 것 같고 풍성한 인간 삶이 사라져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시골에서 달밤에 귀뚜라미 소리만 들어도 시적 감각의 시가 줄줄 나오고 개울에 송사리 떼만 보아도 마음이 풍성해졌는데 요즘에는 하도 많은 스트레스 때문에 삭막해져가서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풍성하게 살아가야 되는데 점점 더 메말라 간단 말입니다. 시를 잘 읽고 잘 쓰면 삶이 풍부해지는 행복이 있고, 또 너무 시적 감정에 사로잡히다 보면 현실과 거리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시골에 한문으로 한시를 즐기는 젊은 청년이 시골 산골짜기에서 살면서 자신의 모든 삶을 선비처럼 한문으로 시를 표현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어느 날 하루는 장인어른과 같이 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갔어요. 그
런데 그만 호랑이가 나와서는 두 사람 중에 장인 되는 사람을 물고서 잡아먹으려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젊은이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동네로 내려와서 빨리 도움을 구하려고 동네 사람들에게 이 급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유식한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전산지 맹호출(前山之 猛虎出) 오지장인지취(五之丈人之取) 주지후산야(走之後山也)라.”
“앞산에 호랑이가 나와서 나의 장인을 물고 뒷산으로 갔습니다.” 그런 말이란 말이에요.
“유창자 지창래하고 유죽자 지죽래하고 유몽둥자 지몽둥래하라. (창이 있는 자는 창을 가지고 대나무 창이 있는 그것을 가지고 몽둥이가 있는 자는 그것을 가지고 나오라.)”
동네 사람들이 “저 자식 또 잘난 체 한다.”
아무도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 호랑이가 그 장인을 다 잡아먹어 버렸어요.
나중에 관가에서 알고 “야, 이놈아!” 데려다 혼을 내주는 거예요.
“아니, 호랑이가 나와서 너희 장인을 물어뜯고 있는데, 뭐? 전산지 맹호출? 이 놈의 자식!” 그래서 아주 혼을 냈더니 맨 나중에 하는 말이 “인명사 유식자 백벌 당연하오니 이후 문자 부용 하오리다.” “사람을 죽게 한 유식자는 백 번 벌을 받아 마땅하오니 내가 이 다음에는 문자를 쓰지 않겠나이다.”
역사가들이 밝힌 민족 고난에 대해서 세계가 다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제일 고난 역사를 살아온 민족이 어느 민족인가?”에 대해서 세 민족을 손꼽았어요.
첫째가 히브리 민족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맞아요.
둘째가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이다.
프라하에 가시면 인사말이 외국에 하도 침략을 많이 당해서 외국군을 보고 하는 말이 “어서 오십시오. 와서 여기서 사십시오. 전쟁을 끝내고 가면 또 오십시오.”
이게 인사말인데,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는 그게 문화화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 째가 불행하게도 조선 민족 대한민국이라고 역사가들이 밝혔습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에는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민족 고난과 개인 고난을 시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 가운데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는데, 이 헬레니즘의 유산은 쓰레기뿐이다.
폐허가 된 문명의 빈터가 쓸쓸히 남았고 헤브라이즘의 유산은 빛이 나는 영혼의 갈 길과 정신문화를 남겼다. 저는 유대인에 대한 감사를 이렇게 합니다.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민족 고난 속에서도 성경을 보존시켜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이 지구상에서 무엇이 다 없어져도 이것 하나만 존재하면”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가시화해서 역사에 많은 물리적 힘이 성경을 없애려고 그렇게 많이 노력을 했지만 완벽한 보존이 이루어져 오늘 우리는 이렇게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한 손에 들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고난 속에서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고 자신들의 고난의 삶을 시로 엮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우리 사회에서도 시를 쓰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가난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영혼에서 시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 전체가 시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민족적 고난과 개인적 고난을 그 영혼을 통해서 우러나오게 하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시가 성경이라는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창조의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공중에는 새가 날고 바다에는 종류대로 고기가 있으라. 해와 달과 별이 있어 조화를 이루고 땅은 채소를 내라. 사람은 다스리며 살고 남자, 여자는 한 몸을 이루라 조화된 세상을 보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얼마나 아름다운 시입니까?
출애굽기에는 김삿갓 같은 방랑시로 되어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났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너희는 볼지어다 여호와의 손이 너희를 구원하실 것이니 너희는 이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저 조상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니라.”
얼마나 희망의 방랑시입니까?
노래하여 가로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욥기에는 고난의 시가 있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에게 호소하며 변백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민족 고난도 아주 풍부한 시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애가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한 시인이 그 성을 바라보면서 불타 없어진 잿더미가 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슬프다 이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외로운 여인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슬퍼 내가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는 자 중에 위로자가 없으니 아, 시온의 영광이 떠나갔도다.”
민족 슬픔을 시로 표현하는 여유 있는 믿음의 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사랑하시는 청년들은 말이죠, 아가서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게 얼마나 로맨틱한 사랑의 표현이 잘 나와 있습니까?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 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부탁하노니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한번 그 아가서를 머리 속에서 줄줄이 외면서 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에는 예언의 시가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또한 잠언은 지혜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지식을 버렸도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시가 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모든 눈물은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왜 성경을 안 읽습니까?
이것은 시집입니다.
전도서를 보시면, 허무의 시로 되어 있잖아요? 세상 살기 싫은 사람은 다 전도서를 보세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것도 큰 은혜가 됩니다.
집사님 가운데 부부싸움을 아주 지독하게 치른 한 남자 집사님이 저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내가 예전에 몰랐는데 참으로 성경은 성경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무슨 은혜를 그렇게 또 받았습니까?”
부부싸움을 아주 심하게 하고 잠언을 보니까 그 중에 말씀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다투는 여자와 궁궐에서 함께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게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모른다고….
영혼의 시가 가지는 실제적 효과, 믿음의 시는 그 자체가 다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한 고난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가련스러운 자기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의 고난은 오늘 성경말씀에 나와있는 대로 “음식 먹는 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의 심각 수준이 되었다. 나는 외로운 광야의 당아새 같고 적막한 밤중의 부엉이 같이 되었으며, 둥지를 잃은 외로운 참새가 지붕에서 홀로 떨고 밤을 지새우는 것과 똑같이 내 신세가 가련하며, 서리를 맞아 힘없이 쓰러지는 쇠잔하는 풀과 같고 기울어지니라. 눈물을 마시고 탄식 소리로 인하여 살이 뼈에 붙어 피골이 상접한 몰골의 인생이 되었나이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인생의 표현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자기 고난의 형편을 말하기에 앞서 1절에는 이 고난의 시의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그리고 나서 자기의 형편을 다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 일반인들이 쓰는 시도 마음의 소원이 다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 시는 더욱 그러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편과 잠언에 제일 많은 시의 저자를 다윗과 솔로몬이라고 기자들이 말했습니다.
다 기도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자기가 수고하여 건축해보는 것을 “내 평생 소원 이것 뿐”이라는 영혼 소원의 시로 노래한 것이 84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아름답도소이다. 내 영혼이 주의 성전 뜰을 사모하여 애태우다 지쳤음이여 내 마음과 몸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참새도 깃들일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칠 보금자리를 얻으니 당신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 복됨이여 그들이 항상 주를 찬미하리이다. 왜 나로 하여금 성전 건축을 막으시나이까?”
다윗은 그의 영혼이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때 그 중에서도 한편의 회개의 시를 남겼습니다.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사오며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으며 나는 처음부터 죄악 중에 출생된 자이며 모친도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시며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떠한 경우에서도 자기의 모든 형편을 시로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 있는 영혼의 풍요로움이 성경 전체를 시집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느 때는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낄 때에도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갈급한 나에게 시냇물 같은 시원한 물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도 시인입니다. 갈 곳이 정해지지 아니한 불안한 미래를 제자들이 걱정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한편의 시를 씁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오직 인자만이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자신의 고난을 객관성 있게 바라보며 읊으신 자신의 고난의 시가 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 대한 미래 불안을 걱정하는 무리들이 “이런 인간 고난의 문제에 대한 당신의 해결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또 한편의 시로 대답합니다.
“들에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길쌈도 아니하지만 솔로몬의 입은 옷이 이 꽃만 못하였느니라.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희망의 시로 답변하십니다. 예수님의 시인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천국의 그림자 하늘나라 도성의 상징인 예루살렘! 주님은 예루살렘의 환영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세계를 구원하는 중심지가 될 것을 소원하셨지만, 예루살렘이 그 정반대의 길을 가서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곳에서 자행될 것을 내다 보셨을 때 그 고통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슬픈 독백 같은 시 한 편을 남겨주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 적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애국시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 가운데 마지막 시는 비가(比價)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려가 멸망할 때 한 충신이 자국 멸망의 슬픔을 참지 못하고 벼슬을 버리고 저 강원도 정선 마을 산마루턱을 넘으면서 하나의 글을 남긴 것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오.” 그것이 오늘의 정선 아리랑이 되었습니다.
신라시대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은 가난한 선비라고 해서 백결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명절이 되어서 이웃집들은 모든 명절 떡을 만드느라고, 떡방아를 찧느라고 행복한 소리가 들리는데 이 집은 너무나 가난해서 떡을 못하는 슬픔에 잠겨있는 그 아내를 바라보면서 “아, 여보시오! 내가 떡방아를 찧어 줄 테니 들으시오.” 낡은 거문고를 뜯으면서 한 편의 시를 썼습니다.
“쿵쿵 쿵덕쿵 쿵덕쿵 쿵더쿵” 그것이 오늘의 방아 타령이라고 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김활란 박사가 처녀들로 구성된 전도단을 이끌고 노방 전도를 하다가 일본 경찰들에게 붙잡혀 감옥 있을 때 민족의 슬픔을 생각하며 지은 믿음의 시가 지금 우리가 찬송가로 부르고 있습니다.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
감옥 중에서 지은 시란 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바라보며 부르는 노래는 무엇인가?
내가 쓰는 내 인생의 고난의 시는 무엇이며 행복의 시는 무엇인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고난도 행복도 믿음의 시를 쓰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많은 다윗의 시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 시편 23편이라고 하는데, 23편 시의 절정이 무엇입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의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썼기 때문에 그 시가 가장 빛이 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요즘의 어려운 때에 여러분의 삶의 모든 주변은 어떤 형편에 있던지 성경 말씀과 같이 믿음의 시를 쓰시면서 영혼이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약속의 비밀
(시 102:1-28)
찬송 382장
시편 102편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시대를 그 배경으로 지어진 시편으로 개인적인 시편 같지만 그게 아니고 민족적 수난을 자기 개인적 고통으로 표현하면서 이스라엘의 곤고함을 탄식하며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절히 열망하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려한 민족적 애가입니다.
시편 기자의 이와 같은 열망과 구원의 확신은 13절에도 나오듯이 예레미야 선지자로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을 그 근거로 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간구한 것은 겔36:37에 나오듯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하신 대로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의 상황이 이처럼 어둡고 난감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불변의 말씀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응답의 확신 가지고 돌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