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여행 보고서 박준휘 - ＜성질변화＞

[이충열]

성질변화

물이 끓는데 필요한 시간은 불의 세기에 따라 다르지만 물이 끓기 시작하는 온도는 모두 100°로 같다.

어는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조그만 얼음 바위 속에 갇혀 있었다. 사람들은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이라도 하는 듯 무시하면 나를 부딪쳐 지나갔고 나는 그들에게 부딪쳐 얼어있는 상태에서 더 차가운 무엇인가를 느꼈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느끼는 감정에 관심 갖지 않았고 귀조차 기울여주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친구들이 중학교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학교 수업에 귀조차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선생님들께 반항하는 시기, 그리고 그런 학생들을 더 이상 제자로 생각하지 않는 선생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분위기가 좋은 학교였다. 중학교 2학년, 조금 늦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학 학원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강원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기위해 놀던 시간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점차 바꿔나갔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 1학기까지의 성적을 만들고 과고에 지원하게 된 나는 준비가 부족하여 아쉽게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준비가 부족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지만 과고 불합격으로 인해 공부의 목표가 사라졌고 한 걸음 한 걸음 공부와 멀어져갔다. 하지만 내가 공부와 멀어질수록 부모님의 걱정만 쌓일 뿐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었고 점차 PC방과 게임에 시간을 허비하면서 방황의 길로 접어들었다. 방황의 길로 빠지면 빠질수록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대로 가다가는 서울 역에 앉아서 돈이나 구걸하는 노숙자가 되고 말거야,’또는 ‘평생 부모님께 기대 사는 후레자식이 되면 어쩌지?’라는 온갖 걱정들이 나를 엄습해 왔다. 중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더 이상 중학교에 소속되지 않게 되었을 때 나에게는 시간을 제한하는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 시간들을 PC방과 게임에 전부 쏟아버렸다. 나의 양심은 따끔하게 찌르며 나를 멈추게 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아직 미래를 준비하기에는 조금 어린 나이니까 나중에 생각하면 될 거야,’라고 말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들은 나에게 진통제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진통제가 그렇듯 약의 효과가 끝나면 그동안 잊고 지냈던 고통들이 순식간에 밀려온다. 공부의 목표가 사라지고 고등학교 진학마저 나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지 못하자 사회의 안정된 틀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속감을 잃게 되었고 소속감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보장 된 미래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다가오는 미래라는 시간을 부정하면서도 현재라는 시간을 계속해서 낭비했다. 또한 나는 부모님과의 진지한 대화, 검정고시 등의 여러 가지 방안 가운데 어떤 것도 따르지 않았다. 오직 PC방과 게임만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내 선택의 전부였다.

녹는점

얼음 바위 속에 같혀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느끼지 못한 채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봤다. 이제 보니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해가 떨어져 사방이 어둠과 고요로 칠해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져 주변의 인기척마저 없어졌을 때 나는 왜인지 모르게 외로움을 느꼈다. 그 순간 얼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몸이 어둠속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몸은 아직까지 굳어 있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탓 이었다.

2015년, 형이 시즌을 마치고 하반하 1년 코스인 6기를 선택하여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반하 그룹과 함께 외국으로 떠났다. 처음에는 이러한 형의 선택과 결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반하는 일종의 대안학교이며 심지어 졸업장까지 주지 않는다. 이러한 학교에 가기위해 1년만 더 다니면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졸업장까지 주는 학교를 그만두다니,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나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나 잘못된 선택이었기에 형을 따라 하반하에 가라고 권하시는 부모님의 말씀에 “진짜 죽어도 안갈 거야! 절대로!”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의 말은 강한 긍정의 씨가 되었다. 방황하던 나를 위해 부모님께서 생각해 내신 방안은 ‘하반한 세계여행학교’였다. 하반하는 실존하는 ‘Camp Green Lake’였다. ‘HOLES’라는 나의 독해 책에 나오는 ‘Camp Green Lake’는 일종의 수용소로 규칙적인 행동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여 아이들의 좋지 않은 습관이나 사고를 고치는 곳이다. 그리고 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Stanley’는 운동화 절도죄라는 누명을 쓰고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처음에는 하반하와 나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HOLES’를 나에게 추천해 준 형의 의도가 과연 하반하에 대한 형의 생각을 나에게 전하기 위한 고의인지, 아니면 그저 스토리가 재미있다는 순수한 의도인지 궁금했다. 부모님께서 처음 하반하를 제안 하셨을 때는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1년이라는 시간을 다른 때도 아닌 청소년기라는 소중한 시기에 정말로 가기 싫어하는 하반하에 가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소름 돋았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는 편이 나에 대한 부모님의 강요와 제한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로인해 나에게 생기는 시간을 이용하여 PC방을 가고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만나 영화관을 갔다. 만약 그렇게 해서 돈을 다 썼을 때는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폰을 하거나 집 근처에 계시는 외할머니를 찾아뵙고 손주로서 용돈을 받아 그 돈으로 다시 PC방을 갔다. PC방에서 반나절 동안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가 터오를 때 갔던 PC방에서 해가 질 때 나오는 그 기분이란, 나는 평소 잊고 지냈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해외유학, 검정고시, 그리고 하반하 세계여행, 그 중에서 가능성이 없는 해외유학을 제외시켰다. 나도 자신이 없었고 부모님의 지원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검정고시도 추후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배제, 마지막으로 남은 하반하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하반하가 어쩌면 하나의 스펙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세계여행의 스펙, 과고보다 더 좋은 나만의 특별한 스펙이 될 수 있을 거라 판단, 하반하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19°

몸의 떨림은 잦아들었지만 얼음 바위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던 시간 때문인지 계속해서 콧물이 흘러내렸고 기침이 고요한 밤의 정적을 한 순간에 깨버렸다. 몸에서는 서서히 열이 올랐고 숨이 가빠졌을 때 문득 죽음이 가까워 진 것 같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이르렀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떠올리려 했지만 한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에게 행동의 동기나 성취감, 자신감을 준다는 하반하는 내 생각보다 더 철저한 프로그램으로 나의 생각들을 변화시켰다. 이런 과정에 대해 설명하려면 먼저 대장님과 써니쌤 두 분의 가족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대장님과 써니쌤께서는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의해 당신의 자녀분들이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자 한국을 떠나 세계여행을 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세계여행에서 3개월 동안 여행의 맛을 즐기시다가 더 이상 이렇게 놀면서 지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 하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정산’이라는 프로그램이며 정산이란 매주 토요일마다 자신이 쓴 시간들을 증명하기 위한 일기, 독해, 단어와 각종 수업들의 결과물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돈을 받는 것이다. 인간에게 돈이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편리한 도구이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계속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돈보다 더 많은 양의 돈을 소유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하반하의 정산 프로그램은 인간의 소유욕을 자극하고 결국 학생들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학교가 원하는 방향으로 생활부터 공부까지 스스로 하게 된다. 하반하가 운영 된지 8년이 지나고 9년이 시작되었을 때 내가 하반하 비밀명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24시간 365일을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동안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나의 이기적인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워커를 해야할 때는 가장 쉬운 접시의 물기 제거하기를 했고, 공지가 있을 때는 돌아다니기 귀찮아서 나보다 번호가 낮은 동생들을 대신 시켰다. 또한 선생님의 지적과 가르침을 듣고 일단은 수긍하는 척 했다. 그럴수록 공동체 생활인 하반하에서 나에 대한 평판은 중간을 넘지 못하였고 나의 이기심은 나 자신을 고립시켰다. 하반하 학생들 가운데 누구하고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던 나는 공동체 생활 속에서 학교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을 때와 같은 소외감을 느꼈고 그 소외감은 나에게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라며 계속 나를 몰아세웠다. 마침내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이기심 따위 버리기로 결심했다. 이기심을 버리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하반하의 로봇이 되었다. 설거지 워커에 있어서 선택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명령에 따라 물과 세제거품을 손에 묻혀야 했고 공지를 알릴 때도 타인에게 대신 시키지 못하고 내가 뛰어다니며 명령받은 공지를 전달했다. 로봇이 된 결과는 놀라웠다. 워커를 하면서 손에 묻히는 물과 세제거품의 양이 늘어날수록 학생들은 나와 함께 워커를 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고 나의 평판도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평판은 공동체 속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줬고 나는 더 이상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것은 오직 자리뿐이었고 그 자리는 인간의 몸과 마음 중 몸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소외감은 사라졌지만 편안함과 행복이라는 마음의 쉼터는 아직 하반하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마음이 그때까지 한국에 머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49°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눈부시게 환해져 있었다. 아직까지 나는 살아있었고 그 사실에 감사했다. 다시 주변에서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들어 아직 빛에 적응하지 못한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나를 중심으로 원을 만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 밖으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눈데 들어왔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무전여행’의 기회가 찾아왔다. 종윤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무전여행 프로젝트의 리더는 종윤쌤과 진성쌤이셨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학생의 수는 3명으로 제한되었다. 써니쌤께서는 무전여행에 지원하고 싶은 사람은 금요일까지 지원서를 작성해 제출하라고 말씀하셨다. 무전여행 지원서를 작성할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였고 그날은 주말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주말을 만끽하느라 지원서 작성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전여행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고 지원서를 잊지 않고 작성해서 제출했다. 만약 3명 이하의 학생이 지원서를 제출했다면 100% 확률로 무전여행 팀의 멤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나를 포함한 2명의 학생이 지원서를 제출했고 나는 무전여행 팀의 최종 멤버가 되었다. 인도 뱅갈로르부터 폰디체리까지 진행 된 무전여행은 내가 걱정했던 식사와 숙소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인도인의 도움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었고 도움을 받을 때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 챙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도움주기를 거절하고 우리를 마을에서 쫓아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친절하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무전여행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두 가지 도전을 했다. 도전의 첫 번째는 도움주고 도움받기, 두 번째는 동정심을 유발하여 도움받기였다. 무전여행 2일째 밤이었다. 이미 한번 교회에서 문전박대를 당해서 마음속으로 ‘저딴 것도 교회냐’며 사이비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노숙은 하기 싫어서 적당한 건물을 찾고 있을 때 눈앞에 커다란 연회장이 나타났다. 연회장 앞에는 커다란 트럭이 한 대 보였고 몇 명의 사람들이 박스를 트럭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도와 보기보다 무거운 물건들을 옮겼다. 한 시간 후 일이 끝나자 택배를 관리하는 관리자 비슷한 분께서 잠자리와 함께 한 사람당 50RP의 일당을 주셨다. 그렇게 도움주고 도움받기는 성공, 다음으로 불쌍한 척 동정심을 유발하여 도움받기는 오히려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과 거지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생겨났다. 결론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도움주고 도움받기였다. ‘Give and take’ 무엇인가를 주면 반드시 돌려받아야 한다는 그동안의 나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무전여행을 하며 아무것도 준 것이 없는데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보며 무엇이 사람들을 돕게 하는지 궁금했다. 풍족한 도시보다는 조금 부족한 시골 마을에서 더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돈의 영향은 아니었다. 도움주고 도움받기, 하지만 도움을 받기만 했던 적이 더 많았다. 그렇다면 바라는 것 없이 그저 베푸는 것이 가능할까? 무전여행을 통해 내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79°

원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 2m다가와 1m의 거리를 두고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기에 몸을 조금 비틀며 괴로움을 몸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한 손으로 나의 이마를 짚으며 열을 쟀다. 그동안 나는 다시 잠에 빠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사람들의 시선이 있다는 안도 속 편안한 휴식이었다.

인간에게 최고의 휴식은 잠이다. 그리고 그 휴식을 위한 72시간 숙면 프로젝트는 무전여행 때와는 다르게 참여를 원한다고 손을 든 사람이 나를 포함해 5명뿐이었고 지원한 5명의 학생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물과 음식 없이 3일 72시간 동안 침대위에서 자는 것이 규칙의 전부였고 간단한 규칙과 원하는 만큼 충분히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에 나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72시간의 타이머가 시작되고 나는 눈을 안대로 가렸다. 그동안 하반하에서 잠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나는 72시간 숙면 프로젝트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날 24시간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야한다는 규칙을 그대로 지키며 잠을 잤다. 그 다음날, 방안에 물이 담긴 병이 놓여있었다.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갖다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몸은 이미 병뚜껑을 열고 입속으로 유혹을 쏟아 넣고 있었다. 물 다음에는 써니쌤께서 영양보충제라고 하시며 쿠키를 갖다 주셨다. 누가봐도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지만 ‘이 정도 작은 쿠키라면 먹어도 규칙에는 위반되지 않겠지,’ 나 자신과 타협하며 쿠키를 먹었다. 써니쌤께서 람부탄을 갖고 오셨을 때도 나는 나 자신과 또 다시 타협했다. 타협의 연속, 그리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그때까지도 허기와 심한 갈증으로 지친 나는 눈이 반쯤 감긴 몽롱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그리고 잠이 들기 바로 직전에 써니쌤께서 72시간 숙면 프로젝트를 하고 있던 5명의 학생을 부르셨다. “선택을 할 때는 그 선택이 타인에게 이로운지, 그리고 나에게 득이 되는지 생각해야해!” “그런데 너희들의 선택을 보렴, 시간마다 선생님들이 너희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잖아,” “박준휘, 너는 키 크고 싶다고 먹는 양을 늘리던 애가 마지막에 와서 먹는 걸 포기하고 잠을 자려해?!” 써니쌤의 말씀을 듣고 난 후 나는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자는 동안 먹지 못하기 때문에 키가 크고 싶은 나에게는 최악의 프로젝트였고 선생님들께서도 우리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심지어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서도 나를 걱정하신다고 하셨다. 어리석은 선택이었고 좋지 못한 결과였다. ‘Life is C(choice) between B(birth) and D(death)’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수많은 선택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 나만을 위한 선택을 했었다. 하지만 72시간 숙면 프로젝트를 통해 나만이 아닌 부모님, 선생님, 친구를 위한 좋은 선택의 기준점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나’, 박준휘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나의 선택으로 내가 만들어지고 그에 따른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내 이미지가 입력되는데, 그럼 ‘나’는 누구인가?

99°

꿈이었다. 고개를 들자 커다란 칠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 학생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펴둔 채 서로 수다를 떨고 있었고 머리위에서는 에어컨이 차가운 냉기를 계속 뿜어내고 있었다. 너무 많이 자서 그런지 머리가 아팠고 생생한 꿈을 꾸고 나니 지금 이것도 꿈이 아닐까하는 의혹이 생겼다. 그래서 오른손으로 볼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악!” 너무 세게 꼬집었다.

학교를 다니며 나는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성적이 바닥을 치던 내가 높은 성적을 받았을 때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시선이 180° 바뀌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높은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학교에서 나는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공부보다는 생활면을 더 높게 평가하는 하반하 작은 사회 속에서 나는 ‘열등생’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동안 학교를 다니며 혼자서 공부만 하던 나에게는 모두 함께 지내는 공동체 생활이 힘들었다. “이기적이다, 이타적인 사람이 되라,”등 내가 하반하 초기에 주로 들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학기 초와 여행이 끝나가는 지금의 나의 이미지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공동 일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의사표현이 더 정확해졌다, 운동에 적극적인 아이가 되었다,”라는 답변과 함께 “여행 초반에는 네가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모든 일에 적극적인 아이가 지금의 너의 이미지야,”라고 답하는 학생도 있었다. 놀라웠다. 내가 하반하의 로봇이 되고 지금까지 오직 외부의 명령으로만 움직여 왔는데도 다른 학생들의 눈에는 내가 변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니면 내가 정말로 변하기라고 한 것일까? 어쩌면 로봇이라는 나의 선택이 내 변화의 시작이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중학교 3학년 이후 하반하 비밀병기부터 공동체 생활, 무전여행, 72시간 숙면 프로젝트까지 나는 많은 선택을 해왔고 가끔 실패의 쓰디쓴 맛을 느껴야 했지만 나의 모든 도전은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식사를 할 때 정우형님과 세훈이가 빠지면 누군가 알아보고 농구를 할 때는 윤수형님이 없으면 게임의 재미가 사라진다. 또한 스피킹을 할 때는 준우형님이 빠지면 경쟁의식이 사라지고 배드민턴하면 호근형님과 호준형님, 체스는 준형이, 전자기계하면 민석이가 떠오른다. 생일파티의 진행자는 다양한 컨셉의 동군형님, 누군가 아프거나 힘들어 할 때 도움을 주는 지원형님, 마지막으로 은재형님은 하반하의 공부벌레다. 그럼 나는? 그동안 피해왔던 질문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하반하의 로봇이었어. 하지만 더 이상 외부의 명령만으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야. 타인과 나를 위해 선택하고 행동하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나는 하반하의 학생이야.

끓는점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받은 한권의 책을 가방에서 꺼냈다. ‘연금술사’ 책의 제목이었다. 연금술사하면 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연금술사를 다시 정의 내렸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여행을 오기 전 나는 개인주의를 지향하며 살았고 왜 남을 배려해야 하는지 크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삶에는 2가지 요소가 잘 혼합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여행을 마치는 지금 든다. 첫 번째 요소는 개인주의 적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전에 추구하던 개인주의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나는 개인주의자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요소는 이타주의 적인 것이다. 내가 키워온 나의 능력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 내가 능력을 키우는 이유의 답이다. 나는 하반하 세계여행을 통해 공부도 중요하지만 타인과의 관계가 조금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학생이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인 이상 공부는 인생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타인과의 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하루는 침대에서 자다가 일어났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그동안 느끼려하지 않아서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 두려움, 상실감을 한 번에 느꼈을 때, 그때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사람이라는 실험 결과가 있다. 그래서 외향적인 사람들의 행복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이다. 하반하에서 서로 이름을 불러가며 만들어 갔던 타인과의 관계, 내향적인 나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행복이었다. 내가 하반하에서 배운 다른 하나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돈이다. 그리고 그 돈을 어디에, 얼마나 투자할 지는 자기 자신의 선택이다. 하반하에서 정산을 하면서 타임미스를 받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시간을 잘 관리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후회였다. 그리고 그 후회는 반성으로, 반성은 시간관리를 잘하자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일을 미루지 않고 미리 했으며 쓸모없는 낮잠시간은 차츰 줄여나갔다. 덕분에 이제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여가시간까지 생겼다. 이 정도까지 시간관리를 할 수 있는 나는 내년에 갈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최우선에 둘 것이다. 그러나 공부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삶에서 2가지 요소가 잘 혼합되어야 하는 것처럼 고등학교 생활에서도 공부와 재능, 그리고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부에 시간을 묻으면서 그 속에서 나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재능을 통해 사람들을 돕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99°이후 100°가 되면 물이 끓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99°에서 더 이상 달아오르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머물렀을 온도, 그리고 포기했을 온도 99°, 아니 어쩌면 99°까지 오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의 포기는 없다. 하반하 덕분에 100°까지 달아오른 ‘나’이기에 뜨거운 용광로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와 아름다운 변화를 기다리는 ‘금속’을 위해.

[비밀병기 박준우맘]

부모님들과의 기대와는 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하반하라는 배에 올라탄 우리 동기생들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젠 누구보다 단단해진 동기생들의 각오가 가슴에 팍느껴지는 글들을 보니 부모님들과 함께 같은 곳을 보면서 걸을수 있겟구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생많으셨고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준휘빠_박병원]

사랑하는 준휘에게
일년 보고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준휘가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함께한 하반하 선생님들과 친구들 덕분일 것입니다.
준휘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족의 마음을 더욱 잘 살필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더 써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사랑하는 엄마가 -

[준휘빠_박병원]

글쓰기의 연금술사.
청소년 시기의 1년 멋지게 보낸 듯.
변화된 모습의 표현 보고서 참 멋지게 잘 썼네요. 청소년기에 도전과 실행 참 중요한 듯.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8기,비밀병기 우진맘-신래순]

한편의 수필을 읽은 이 뿌듯함이 뭔지 모르겠지만 하반하 1년의 경험과 변화를 너무 멋지게 표현한 준휘 역시 엄지척👍
200도 300도 더 뜨겁게 달아오를 준휘의 성장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