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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10강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말씀 / 마태복음 8:18-34
요절 / 마태복음 8: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향한 다양한 사람들의 오해(misconception)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비슷할 것 같지만 예수님을 보는 시선과 바람은 각자 다릅니다. 서로 다른 감정과 방향성을 가지고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예수님을 “평가”한다고 하면 불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예수님께 감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실망하고 불평하기도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가진 오해가 무엇인지 알고 올바르게 예수님 알고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8장 전반부 말씀과 연결되면서 진행됩니다. 8장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하여 많은 병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예수님을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다라 지방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는데, 이때 두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19-2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여기서 두 가지 포인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고 제자는 그만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따르겠다는 서기관을 물리고 떠나겠다는 제자는 붙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따르겠다는 사람은 물리치고 떠나겠다는 사람은 붙드셨을까요?
먼저 서기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유대 율법에 충실한 서기관이었음에도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대립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서기관을 제자로 두면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거절하셨습니다. 이유는 20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여기서 “머리 둘 곳”은 일정한 장소 또는 세력을 말합니다. 서기관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보고 예수님 중심의 종교 세력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료하시면 추종하는 세력은 계속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른 시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나중에 큰 공동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머리 둘 곳이 없다”, 세력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서기관은 여기서 돌아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다른 제자의 상황은 어떨까요? 제자 중 하나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입니다. 그가 내보인 공식적인 문제는 아버지의 장례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람이 죽으면 두 번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첫 번째는 사망 당일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1년 후 뼈만 골라내어 유골함에 담아 가족 묘실에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창25:8, 왕하 16:20, 대하 33:20)”라는 구절이 바로 이 두 번째 장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말한 장례는 두 번째 장례를 의미했고, 아들이라면 빠질 수 없는 행사였습니다. 이 제자는 곧 다가올 장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으로 건너가려 하시자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가다라(거라사) 지방은 단순히 강 건너편 동네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이방으로 인식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은 로마 군대가 주둔하는 로마의 자치도시였고 그리스-로마식 신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키우지도 먹지도 않는 돼지를 대대적으로 키우는 동네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나 로마 같은 이방 민족들이 유대인을 지배할 때 억지로 돼지고기를 먹여 동화시키려 한 적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과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냈습니다. 제자는 여기서 강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가족 장례라는 관습은 어찌어찌 넘어섰지만, 이방, 돼지에 대한 거부감은 넘어서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22절에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죽은 전통을 말합니다. 죽은 전통은 죽은 자들에게 영향을 줄 뿐, 산 자들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사실 2차 장례는 갑자기 부활한 전통이었습니다. 왕정 시대까지 유지되다가 중단되었고 BC 20년경부터 AD 70년까지 일시적으로 유행했을 뿐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 또한 예수님이 무너뜨릴, 즉 죽은 전통이 될 것입니다. 죽은 관습, 죽은 전통이 새로운 길을 걸으려는 제자를 막았기에 예수님은 그를 강하게 이끄신 것입니다.
그럼 왜 서기관은 막으시고 제자는 데리고 가셨을까요? 말투를 보면 그들의 차이가 보입니다. 서기관은 “저는 따르리이다(19절)”고 하였고 제자는 “허락하옵소서(21절)”라고 하였습니다. 말투일 뿐이지만 그들의 마음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서기관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려 하고 제자는 예수님께 주도권을 드립니다. 사실 저를 포함한 신앙인들이 삶에서 서기관과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기도하고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행동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앞서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예수님이 이끄시는 길이라면 불편한 마음을 안고서라도 따라야 합니다. 마음 자세가 달랐기에 서기관은 따르지 못했고 제자는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가다라 지방은 로마 군대가 주둔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이들이 “군대” 귀신에 들렸다고 설명합니다(“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눅8:30)”). 그래서 그런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29-3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귀신이 쫓겨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만, 돼지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밀어냈습니다. 누가는 이 지점에서 나음을 받은 사람에게 주목했지만(눅8:38,39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마태는 예수님을 밀어낸 사람들을 주목했습니다. “온 시내” 사람들이 몰려와서 떠나시기를 간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9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은 가다라 지방의 전도를 마치지 못하고 본 동네로 돌아가셨습니다. 사실 그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귀찮고 거친 귀신 들린 사람 때문에 큰 손해를 입었다면 다들 비슷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사람 하나를 밀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구원의 주를 밀어냈고 그분은 다시 가다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가다라 주민들은 눈앞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했고 구원과 기쁨은 그 땅에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한 사람을 돕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금쪽이라면 정신적, 물질적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움이 안되는 사람은 밀어내는 게 더 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밀어내기 시작하면 결국 남는 자가 없어집니다. 특히 우리 같은 신앙공동체는 한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가 될 수 있어도 예수님은 그 손해를 더 큰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잘 품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과 기쁨이 차고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서기관, 제자 중 한 사람, 이방인들의 오해를 다루었다면 이제부터는 핵심 제자들의 오해를 볼 차례입니다. 23-2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당시 유대인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전부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마16:16)”라고 고백했지만 지금의 신앙고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는 다윗의 재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다윗의 별’을 자신들의 국기에 새겨넣을 만큼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은 확고하고 정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메시아를 기대했던 제자들에게 바다에서 마주친 '큰 놀(헬라어- seismos(지진, 거대한 흔들림))'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련과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죽음을 각오하기도 했습니다(마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하지만 바다에서 부딪힌 문제는 달랐습니다. 사람의 힘, 용기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 열정이 벽에 부딪히면 그 사람의 평소 신앙 자세(attitude of faith)와 방향성이 드러납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you of little faith)”이라고 책망하셨을까요? 문맥을 보면 그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안전이 보장된 롤러코스터를 타도 무서운데 죽음이 눈앞에 닥쳐오면 누구나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경험에 따른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8장 전반부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병환자, 중풍병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신 것을 목격했습니다. 특히 백부장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다양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올바로 믿지 못했다면,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NIV 영역본으로 보면 더 분명하게 보입니다. “What kind of man is this?” 제자들이 감탄하는 장면에서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8장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한 사람과의 관계에 집중하셨습니다. 나병환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와 병든 자들, 서기관, 제자 중 한 사람, 가다라의 귀신 들린 사람. 복음서 전체로 확장해도 예수님이 한 사람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보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도 예수님의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백부장이 받은 칭찬 중 일부는 그가 하인 한 사람을 귀하게 생각했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스쳐 지나는 사람들도 아끼셨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얼마나 아끼시겠습니까? 예수님께 그들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자연재해에 죽도록 내버려 두실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 확실한 인격적인 관계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한 신앙고백의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오랫동안 사귀어도 그 사람을 다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오늘 말씀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어떤 신앙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서기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현실적 이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때로 물질적으로 축복해 주시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머리 둘 곳’ 없는 삶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때로 과거의 전통이나 관습, 자신만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담을 쌓는 분이 아니라 허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임을 확신한다면 나만의 기준, 고집을 내려놓고 따라야 합니다. 가다라 사람들을 통해서 현실적인 이익 너머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환경이 아니라 사람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올바른 관계성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그분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할 수 없는 ‘큰 놀’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 오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오해를 다룹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만의 오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자리에서까지 유대가 언제 독립할지를 물었습니다. 이것이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계속 고민하고 말씀을 통해 생각을 넓혀야 합니다. 예수님은 때로 서기관과 같은 우리의 욕심을 끊으시고, 제자와 같이 가기 싫은 곳으로 이끄시며, 때로는 큰 놀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과 함께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방향 전환이 있을 때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쫓지 말고 예수님의 손을 먼저 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함께하시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매 순간 각자의 상황에서 믿음을 배우고 성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