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시장백과 - 종로 광장시장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1. 5. 3:28
국내 시장백과 - 종로 광장시장
2023.11.04. 10:51조회 14
종로 광장시장
요약 종로 광장시장은 조선시대 배오개시장의 명맥을 잇고, 1905년 광장주식회사의 설립과 함께 시장 개설 허가를 받아 오랜 전통을 가진 전통시장이다. 다양한 먹을거리를 파는 음식점들이 많고, 포목과 구제 상품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1. 종로 광장시장 개요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허가한 시전, 서소문 일대에 있던 칠패시장, 흥인지문 일대의 배오개에 있던 배오개시장이 서울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칠패시장과 배오개시장은 18세기 상업의 발달과 맞물려 한양 주변의 누원점, 송파장 등과 연계해 민간 시장으로 크게 활성화되었다.
개항과 더불어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재빠르게 서울의 상권을 장악했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 상인들이 서울의 시장을 지배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05년 과거 배오개시장이 있던 곳을 근거지로 한국인들이 자본을 모아서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그 이후 광장주식회사가 운영하는 동대문시장은 일제강점기 때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전쟁 이후 동대문시장은 구호물자와 미군 물자 중심으로 시장을 키웠다. 1960년대 초반 동대문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시장이 분리되었고 현재의 광장시장 형태로 바뀌었다. 광장시장은 포목과 구제 상품, 먹을거리 등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고, 2010년에는 광장시장에서 종로 광장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종로 광장시장 입구
먹을거리를 파는 노점들이 가득한 종로광장시장의 내부 모습
2. 종로 광장시장의 어원
광장시장의 광장이라는 말은 구한말에 설립된 광장주식회사에서 유래했다. 광장주식회사의 이름은 과거 청계천에 있던 다리와 관계가 있다. 청계천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회사가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다는 의미에서 다리 이름의 앞 글자를 따 광장주식회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거기서 광장시장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다만 처음에는 광교와 장교의 첫 글자인 광장(廣長)이었지만 훗날 넓게 저장한다는 의미의 광장(廣藏)으로 한자가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3. 지역의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오늘날 광장시장의 위치는 조선시대에 배오개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배오개는 오늘날 종로구 인의동 남쪽에서 종로4가 예지동 일대였다.
배오개는 주변에 배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주장, 배가 올라오던 곳, 호랑이가 출몰해 100명이 모여야 넘는다는 의미의 백고개에서 배오개가 되었다는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 한자로는 이현(梨峴), 즉 배 고개로 써 왔다. 한자를 보면 배오개라는 말은 배나무와 관련되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배오개 일대는 군인들이 기거하는 집단 거주지가 되었고, 17세기에 들어 동대문 바깥은 한양 주민들이 소비하는 채소를 재배하는 지역으로 성장했다. 18세기에 들어서 둔전을 조성하고 점포를 설치해 동대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업 지구가 형성되었다.
한편 이 무렵 원거리 무역이 발달하면서 한양 주변에 광주 송파와 양주 누원점 등이 새로운 상업의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배오개 일대의 상업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배오개가 한양의 대표적인 상업 중심지로 성장한 것도 상업이 활발해진 18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배오개를 대표하는 이현시장(배오개시장)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정조 연간에 박제가가 시전, 칠패시장과 더불어 이현시장을 도성의 3대 시장으로 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일출 전후로 서너 시간 장이 서는 새벽시장의 형태였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조선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시전 중심으로 운영되던 한양의 시장뿐 아니라 시전 상인들의 독점권인 금난전권 영역 바깥에 있던 누원점과 송파장 등의 세력이 커졌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칠패시장과 이현시장 또한 크게 성장했다.
이현시장에서 주로 거래되었던 것은 의류와 목면, 미곡 등이었고, 특히 동대문 바깥에서 많이 재배되었던 채소를 도산매했다.
이렇게 서울의 상권을 이끌던 칠패시장과 이현시장 등은 개항과 함께 외국 상인들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외국 상인은 주로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본 상인들은 일본 주재관이 있던 남산 주변에 자리를 잡고 차츰 영역을 넓혔고, 중국 상인들은 수표교와 남대문 일대, 일부는 광교까지 진출했다.
조선시대에는 쇄국정책을 쓰면서 외국인이 한양에서 거주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따라서 외국인들이 점포를 개설해 장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개항과 함께 외국 사람들의 상주가 허용되었고 외국 상인들 또한 점포를 개설해 장사하기 시작했다.
중국 상인들의 경우 1882년 임오군란 때 군대를 따라 상인들이 40명이 들어와 장사했는데, 2년 뒤인 1884년에는 353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은 도성에 집을 구입하고 점포를 개설해서 장사했고 곧 큰 상권을 형성했다. 그래서 ‘성 내의 큰 집들이 모두 중국인의 집이 되었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10년쯤 뒤인 1893년에는 중국 상인들이 1,254명이 서울에 거주할 정도로 상인들의 규모가 커졌다. 중국 상인 중에 동순태는 정부에 은 20만 냥을 빌려줄 정도로 위세가 컸다.
중국의 상인들은 홍콩이나 상해에서 수입한 서양의 면직물, 중국의 비단, 한약재 등을 주로 판매했고 조선에서 인삼과 소가죽, 해산물 등을 구입해 중국에 수출했다. 이렇게 중국 상인들이 서울의 상권을 장악했다.
중국 상인들이 된서리를 맞은 것은 청일전쟁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뒤 중국의 상인들은 대부분 점포의 문을 닫고 귀국했다. 더러는 다시 돌아와서 점포를 열기도 했지만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 상인들이 중국 상인들을 밀어내고 서울의 상권을 장악했다.
한편 1894년에 갑오개혁으로 시전상인들이 누리던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서울의 시장 또한 큰 변화를 겪었다. 시전의 독점권인 금난전권이 폐지되어 더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가능해졌지만 정작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일본의 상인들이었다.
이와 더불어 서울의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대한제국의 도시 개조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도로의 정비였다. 이 정비를 위해 서소문에 있던 칠패시장을 선혜청의 자리로 옮김으로써,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상설시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장이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이다.
이렇게 남대문시장이 자리하고 일본 상인들이 남산 주변에서 충무로 일대로 상권을 확장해가자 남대문시장에 들어가지 못한 한국의 상인들은 청계천 주변과 종로 일대로 밀려났다. 또한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가 잇달아 개설되면서 서울의 상권이 급속도로 남대문 주변으로 옮아갔다.
여기에 1905년 경무청에서 가로관리규칙에 따라 허가받지 않은 상행위를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1905년 이후 러일전쟁의 승리로 많은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상설시장이 필요해졌다.
한편 일제는 남대문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선혜청 내에 개설된 남대문시장을 종로 쪽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알고 한국인 자본가들이 1905년에 광장(廣長)주식회사를 세웠다. 광장주식회사는 광교에서 장교에 이르는 구간에 시장을 개설한다는 계획에 따라 붙인 이름이었다. 당시 광장주식회사의 자본금은 12만 원으로, 규모가 상당히 큰 회사였다.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었을 때 사장은 김종한이었고, 주주가 30여 명이었는데 확인 가능한 인물은 홍충현, 박승직, 최인성 등이다. 이들 가운데 박승직과 최인성은 배오개시장의 객주 출신이었다. 처음 광장주식회사는 광교와 장교 사이에 시장을 개설하고 배오개에도 따로 시장을 개설할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배오개시장터에 시장을 개설했다. 이 때문에 광장(廣長)주식회사는 이름을 광장(廣藏)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장터가 아침시장이 열리던 배오개시장터로 바뀐 것은 선혜청 내에 있던 남대문시장의 이전이 무산되고, 일제가 광교와 장교 사이에 시장이 개설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광장주식회사는 배오개시장(이현시장) 옆의 밭을 구입하고, 시장을 개설한다는 이유를 대고 주변의 민가를 밀어냈다. 따라서 광장주식회사에서 처음 시장을 개설한 곳은 배오개시장 주변의 밭이었다. 광장주식회사는 밭에 흙을 덮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건물이 완공된 이후 광장주식회사에서 운영하는 동대문시장은 기존의 배오개시장을 주변으로 밀어내고, 서울에서는 남대문시장에 이어 두 번째로 상설시장이 되었다.
그런데 1907년 군대의 해산으로 인해 이현에 있던 친위대 영문이 폐쇄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이현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3사단 사령부가 진고개로 이전했다. 이렇게 해서 공터가 생기자 1908년 이현 주변에 땔감으로 쓰이는 숯과 나무를 파는 시탄시장이 열렸고, 1909년 동대문시장도 과거 동별영이 있던 자리로 이전했다. 과거 군영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따로 건물을 짓지 않고 그대로 입주했다.
동대문시장 내에는 미곡상, 청과상, 잡화상, 신탄상 등이 자리를 잡았는데 가평과 뚝섬, 이천, 철원 등지에서 물자가 공급되었다.
동대문시장이 이전하자 배오개시장에는 기와로 된 장옥 50여 개와 양철 지붕을 두른 다수의 노점들이 들어섰다. 여기에 입주한 상인들은 200여 명이었다. 시장 주변에 흙으로 울타리를 두르고, 동서남북 문을 만들어 해가 지면 문을 닫았다.
광장주식회사는 1912년 주식총회에서 양반 출신인 사장 김종한을 몰아내고, 배오개시장의 객주였던 박승직이 사장의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해서 양반 출신이었던 중역들이 밀려나고, 상인과 중하위 관료 출신들이 새롭게 경영진에 참여했다. 대한제국이 몰락하면서 정부 고위 관료와의 교섭이나 로비가 불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한편 동대문시장이 개설된 배오개 일대는 예부터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 거주지였다. 영조 때에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파낸 흙을 쌓은 흙더미가 주변에 있었는데, 여기에 땅군이라고 불리던 거지들이 모여 살았다. 이 거지들이 사라진 것은 192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따라서 남산과 충무로 일대 일본인들이 장악한 거리는 상점들이 즐비하고 화려했다. 하지만 배오개 일대는 낙후되고 남루한 지역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차이는 점점 심해졌다. 동대문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가난한 한국인들이었다.
또한 1910년대 말기에 총독부는 종로와 화원정에 매일 장이 열리는 상설시장을 개설해 주변에 있던 동대문시장을 압박했다. 특히 화원정 공설시장은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동대문시장과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취급하는 품목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 동대문시장의 장세는 더욱 약해졌다.
당시 동대문시장의 주요한 점포 구성을 살펴보면 1916년경에 미곡상이 37곳, 잡화상이 23곳, 과일상이 10곳, 어물상이 7곳, 과자상이 11곳 등 모두 126곳의 점포가 있었다. 여기에 지게에 물건을 지고 와 파는 상인들이 하루 300여 명 정도였으며, 하루 거래액은 평균 약 3,000원이었다.
1940년에는 미곡상이 23곳, 과일상이 24곳, 정육이 9곳, 해산물이 17곳, 과자상이 8곳, 주류상이 3곳, 고물상이 1곳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대문시장은 도소매를 겸했지만 남대문시장과 비교하면 소매의 비중이 훨씬 컸다. 동대문시장은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 양대 시장으로 자리매김했고, 1922년까지는 남대문시장보다 거래 규모가 컸다. 하지만 그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남대문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2위 자리로 밀려났다.
남대문시장이 일제가 세운 중앙물산주식회사에서 운영한 것과 달리 동대문시장은 한국인들이 세운 광장주식회사에서 운영했다. 이 때문에 남대문시장과 달리 경영자와 상인들 사이의 마찰이 적었다. 1931년 4월에는 상인들이 광장주식회사를 상대로 요구한 차지료 인하를 수용하기도 했다.
동대문시장의 점포 임대료는 1936년 점포 1칸에 2원에서 4원 50전 사이였다. 남대문시장이 같은 시기에 29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이런 사정 때문에 남대문시장의 상인들이 동대문시장의 사례를 들어 경영자들에게 점포 임대료 인하를 요구하기도 했다.
1937년 3월에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은 시장의 허가 기간이 만료되었다. 일제는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통합해 경성중앙도매시장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동대문시장은 가까운 곳에 있던 이마무라 양행의 부지와 건축물을 매입하고, 시장 내 시설을 확충하고 시장 건물을 개축했다.
그러나 일제는 여러 사정으로 처음의 계획과 달리 규모를 줄여서 경성중앙도매시장을 개설했고,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시장의 허가 기간이 만료된 이후에도 계속 영업했다. 또한 경성중앙도매시장이 이름에서 보듯 도매시장이었기 때문에 도매 중심의 남대문시장과 달리 소매 중심의 동대문시장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4. 해방 이후 시장의 발달과 변천 과정
해방 후 일본이 떠난 다음해인 1946년 1월에 일제강점기 때 있던 동대문시장상인연합회가 부활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새로운 회원 신청을 광장주식회사 사무실 내에 있는 동대문시장상인연합회로 해달라는 내용이 있다. 가입비는 100원이었다.
이 무렵 서울의 시장은 기존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에 더해서 미곡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성동시장이 개설되었다. 규모만 따지만 성동시장이 가장 컸다. 성동시장의 점포 수는 263개, 남대문시장의 점포 수는 215개, 광장주식회사가 운영하는 동대문시장의 점포 수는 188개 순이었다.
1949년에 동대문시장은 점포 수가 209개로 증가했다. 일제강점기 때까지 소매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시장의 운영이 도매 중심으로 강화되면서 상권이 확장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동대문시장은 실질적인 서울의 중앙 시장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은 서울을 폐허로 만들었고, 동대문시장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상인들은 폐허 속에 천막을 치고 임시로 장사를 해나갔다. 또한 구호물자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 등을 불법으로 거래하며 장사를 했다. 1952년 5월 말에 동대문시장의 점포 수는 188개로 1946년의 수준으로 회복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에는 위의 세 시장이 서울의 상권을 주도했다. 성동시장은 양곡이 중심이었고, 남대문시장은 생선과 어물, 동대문시장은 청과와 의류가 특화된 시장이었다. 1953년 하루 거래액이 동대문시장의 경우는 3억으로, 1억을 기록한 남대문시장을 앞질렀다.
동대문시장은 경기가 살아나면서 청계천 천변을 따라 동쪽인 종로5가 방향으로 확장해갔다. 당시 동대문시장에 이어진 점포들은 10m 정도의 도로를 무단으로 점용해 허가를 받지 않은 판잣집을 세우고 규모를 계속 키웠다. 이들 건물은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철거 대상이 되었고, 1954년에는 200여 호의 점포가 철거 명령을 받았다.
동대문시장은 한때 정치 깡패들의 소굴이 되기도 했다. 이정재가 경무대 경호 책임자인 곽영주의 권세를 등에 업고 동대문시장으로 들어와 광장주식회사의 횡포를 막겠다며 강제로 동대문상인연합회 회장이 되었다. 이정재는 기존의 간부들을 모두 몰아내고, 시장에 죽치고 앉아 연합회의 경비를 전횡했다. 이들을 시장에서 몰아낸 것은 4.19혁명 이후의 일이다.
광장시장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종로4가에서 동대문까지 형성되어 있는 시장은 동대문시장으로 통칭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동대문시장에 더해서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들과 전쟁의 피란민들을 중심으로 종로5가와 종로6가 쪽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시장이 분리되었다. 광장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시장이 광장시장이 되고, 새롭게 형성된 시장은 동대문시장이라는 이름을 차지했다.
또한 1970년에 4,300개의 점포를 갖춘 동대문종합시장이 개설되면서 1970년대에 과거 배오개시장이 있던 예지동에 광장시장, 종로5가에 동대문시장, 종로6가에는 동대문종합시장이 도열하듯 거대한 상권을 형성했다.
따라서 동대문시장은 좁게는 종로5가의 동대문시장과 종로6가의 동대문종합시장을 가리키는 말이고, 넓게는 예지동의 광장시장에서 신당동 일대의 신평화시장까지를 포함한 명칭이 되었다.
지리적으로 보면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서울의 상권을 주도했다. 청계천 북쪽에는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동대문종합시장이 들어섰고, 청계천 남쪽에는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 신평화시장 등이 개설되었다.
이들은 각각 특화된 물품들을 판매했는데, 동대문시장은 혼숫감과 포목이 주요 거래 품목이었고, 평화시장은 의류였다.
동대문시장과 동대문종합시장은 실제적으로 지역 상권을 지배했다. 1975년 동대문종합시장은 재산세 납부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1980년대 넓은 의미의 동대문시장은 전국 최고의 의류 도소매시장으로 자리매김했고, 통금이 해제된 1983년부터 관광버스를 대절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인들로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었다.
동대문시장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둔 것은 1990년대였다. 의류 시장을 두고 남대문시장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크게 성장했다. 이를 배경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동대문시장 주변에 거평프레야타운,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 거대 패션몰들이 문을 열었고, 그 이후로도 디자이너클럽, 유어스 등 많은 패션몰이 세워졌다. 새로운 형태의 패션몰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끌며 유명해졌다.
현재의 광장시장은 한국전쟁 때 불탄 이후 1959년에 지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처음 건물을 지었을 때 1층은 추첨을 통해 기존의 상인들이 그대로 입주했다. 2층의 거의 비어 있었고, 과일 도매상들이 창고로 쓰기도 했다.
당시 청계천 너머에 있는 방산시장에는 한국전쟁의 피란민들과 월남민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고, 음식점과 유흥가, 고물상, 술집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팔려나가며 노점들과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물자가 귀했기 때문에 거래는 활발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불이 나서 폐허가 되고, 서울시가 이들의 재건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때 광장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이정재가 시장 건물의 비어 있던 2층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이들에게 세를 받고 임대했다. 첫해는 임대료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과 광목을 파는 상인들이 광장시장의 2층으로 대거 입주했다.
포목과 주단을 파는 가게들
양품점을 비롯해 포목과 주단을 파는 점포들이 들어서며 시장은 한동안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미군 물건을 팔던 양품점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포목과 주단을 파는 점포들이 자리를 늘려갔다. 일부 양품점은 1층으로 내려가고, 2층 점포는 대부분 포목과 주단을 파는 점포들로 바뀌었다. 당시 광장시장의 90% 정도는 피란민과 북쪽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이었다.
구제 의류를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골목
오늘날 광장시장의 2~3층은 구제품 상가로 유명하다. 광장시장 전체에서 보면 큰 규모는 아니지만 단골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팔리는 90%는 헌 옷, 즉 구제품들이다.
광장시장은 2004년부터 시설 현대화 사업을 통해 건물 외장 공사와 간판 정비, 계단의 보수, 전광판 설치 등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비를 막을 수 없던 북1문 구간의 시장 진입로에 아케이드가 설치되었다.
2010년에는 광장시장이라는 이름을 종로 광장전통시장으로 시장의 명칭을 변경했다. 종로 광장전통시장은 2013년 문화관광형 시장 육성 사업에 선정되었고, 청계천 복원과 종로, 청계천 관광특구 등을 통해 100년 넘은 전통을 살려 세계적인 시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쉴 새 없이 빈대떡을 부쳐내는 상인들
5. 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종로 광장시장은 조선시대에 한양을 수도로 정한 이후 줄곧 서울의 중심이던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들의 사당이던 종묘를 비롯해 창덕궁, 창경궁 등이 가까운 곳에 있다. 물론 서울의 규모가 커지면서 지금의 지역은 구도심이 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의 문화를 이끄는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종로 광장시장을 찾으면 서울의 전통문화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또 주변에 동대문시장을 중심으로 한 동대문패션타운을 비롯해 청계천 인근에 많은 시장들이 위치해 있어 여러 시장들을 함께 돌아볼 수도 있다.
종로 광장시장은 지하철을 사용하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 8번 출구로 나가거나, 지하철 2호선, 지하철 5호선 을지로4가역 4번 출구로 나가 청계천을 다리로 건너면 곧바로 종로 광장시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종로 광장시장은 긴 장방형 사각형의 모습인데 청계천을 따라 길게 위치하고 있다.
종로 광장시장은 한복을 중심한 포목, 직물, 의류, 잡화 등과 먹을거리를 파는 식당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시장에서 국수를 먹는 사람들
가게마다 불을 밝혀놓은 먹을거리 장터의 풍경
6. 먹을거리
광장시장은 전통이 오래된 것에 비례해 먹을거리도 많이 판매되고 있다. 광장시장 먹을거리 장터에는 90여 개의 식당이 등록되어 있으며 육회, 잔치국수, 토스트, 순대, 마약김밥, 족발, 모듬전 등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다. 이들 가운데 마약김밥과 빈대떡은 광장시장을 대표하는 먹을거리이다. 마약김밥은 한 번 맛을 보면 마약처럼 계속 먹게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또한 최근에 광장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육회골목이다. 종로4가 광장시장 쪽으로 종로5가 방면으로 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육회를 파는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육회골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또 하나 유명한 음식 골목으로 닭한마리 골목이 있다. 종로5가역 6번 출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닭한마리 골목은 198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었는데, 처음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칼국수에 닭고기를 넣어 팔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골목에는 닭칼국수라는 간판이 종종 눈에 띈다.
‘닭한마리’는 큰 양푼에 닭과 육수를 붓고 그대로 끓이는 음식이다. 닭이 익으면 소스에 찍어 먹고, 고기를 다 먹고 나면 칼국수를 넣어 끓인다. 닭한마리 골목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소문이 나서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찾는 곳이다.
철판 위에서 익어가는 빈대떡 반죽
포개어 쌓아놓은 빈대떡
족발과 꼬마김밥
[네이버 지식백과]
종로 광장시장 (국내 시장백과, 이경덕, 박재영, 가디언 출판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