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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투 블루(시드니. 한국교민 행방불명 사건)-37
일요일 아침, 강철은 집 앞에서 시드니 한인 교회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 10분이 지났지만 목사는 도착하지 않았다.
비가 후줄근히 내리고있어 강철은 현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가 집을 찾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라는 배려다.
호주의 한인교민 10만여명 중 약 90%가 하나님께 믿음이 있건 없건 모두들 교회를 나간다는 통계 수치가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이민생활이 고달프고 외롭다는 말 이기도 했다.
교민들은 한주간 동안 말 못할 여러 사연들을 안고 교회에 모여 하소연 하고, 위로 받고하는 등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철은 삼개월 전에 이사를 한 이후로 가장 가까운 한인 교회로 출석할 것을 목사와 미리 약속했었다.
토요타 베이지색 밴 한대가 강철의 눈앞을 서행했다.
운전자는 차를 멈추고 조수석쪽 차창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선생님이시죠?”
“예, 목사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젊은 목사는 손을 뻗어 차 문을 열었다.
목사는 약속시간에 늦어진 것에 대해 “차 사고가 있어 혼잡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라 변명했다.
강철은 환한 얼굴의 젊은 목사에게 곧 친밀감을 느꼈다.
강철이 알기로 대부분의 목사들은 얼굴 표정은 웃고 있지만, 겉보기는 매우 겸손하고 친절하지만 그들 마다 스스로 ‘내가 하나님의 종’ 이라며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보이지 않은 거만을 떨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목사가 직접 깅철을 찾아 온 것이라든지 늦어진 것에 대해 금방 사과를 하며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 예의를 잘 갖추는 것에 호감이 갔다.
“설교 준비에 바쁘실 텐데 이렇게 오시게 하여 정말 미안합니다.”
깅철이 웃으며 말했다.
“저야 늘 하는 일이 성도님들 모시는 일입니다만, 김선생님은 이곳 시드니에 오시기전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 브리스베인에 있었습니다. 거기도 한인교회가 숫적으로는 제법 많습니다만 시드니에도 300여 개가 넘는다는군요 교회가.”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숫자로는 아주 많습니다.”
목사가 계면쩍어 하면서 대답했다.
작은 예배당 안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목사는 설교를 끝낸 후 강철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인사를 주선했다.
강철은 월남 전쟁에 참전했다는 한 교인의 권고를 못이기는 척 그 사람과 함께 교회의 식사를 즐겼다.
김용호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같은 동갑내기를 잘 만났다면서 강철을 아주 좋아했다.
깅철이 그와 친해진 어느 날 이었다.
김용호가 철에게 말했다.
“요즘 시드니 치안 상태가 매우 불안합니다. 우리 교인 한 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는데도 경찰에서는 뭣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철이 그에게 물었다.
“한국 사람입니까?”
“그럼요. 우리교회는 한국사람 아니면 오질 않습니다. 다만 깨름직했던 것은 그 사람이 임시 체류 비자를 가지고 있다는것, 이외에는…..”
“그 사람이 행방불명 된지가 얼마나 됩니까? 가족들은요?”
“열흘쯤 됐습니다. 아파트에 혼자 사는 싱글이지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그럼 한국인이라면 이곳 경찰도 경찰이지만 우리 영사관에 신고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우선 그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인적 사항을 알아야 하는데 처음 교회를 나온 사람이라서…… 그럼. 김선생께서 저와 함께 그가 살던 아파트에 한번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살던 집을 뒤져 보면 인적 사항이나 한국주소가 나오겠지요. 이런걸 모른 체 할 수도 없고, 허참”
강철은 김용호와 저녘 식사후 행방불명된 그 사람의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그러나 강철이 김용호와 식당에 마주앉아 밥 먹는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사내가 건너편 찻집 유리창 밑 의자에 앉아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는 것을 철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사내는 강철이 탄 토요타 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뒷모습을 치켜 보다가 모발폰을 꺼내 들었다.
“내말 잘 들어, 녀석들이 방금 식당에서 나왔다. 15분쯤 뒤에 그쪽에 도착할 거야”
상대방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 남자는 또다시 어디론가 다른 통화를 위해 전화를 걸고 있었다.
강철과 김용호는 5층짜리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다. 오랜 세월을 버틴 낡은 아파트였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입구의 차단기가 마침 위로 올려져 있었다. 강철이 탄 밴은 열려 진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주차할 빈 자리를 찾기 위해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 지하층이 깊어질수록 불빛도 어두워 강철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들은 차문을 잠그고 희미한 조명아래 계단을 걸어 오르며 강철은 기분을 북돋우기 위해 휘파람을 불었다. 기름으로 더러워진 시멘트 바닥에 두 사람의 구두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고 저 멀리 어딘가로 부터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똑 똑 똑 하고 반복해 들려왔다.
계단이 끝나면서 그들이 1층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었을 때 두 사람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흐릿한 조명아래 커다란 덩치의 남자들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표정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앞을 가로 막고 서 있었다.
공포가 강철의 몸에 전류처럼 흘렀다.
김용호는 얼른 철의 뒤로 물러나 뒷걸음질 쳤다.
한 남자가 팔을 뻗어 닫히려는 문을 힘껏 밀어부쳤다.
그 서슬에 문이 꽝하고 계단실 벽에 부딛혔다가 다시 열렸다.
강철은 재빨리 놈의 정강이를 걷어찰 자세를 취했으나 녀석은 성큼 뒤로 물러났다.
철과 김용호는 몸을 돌려 올라온 계단을 뛰어 내리기 시작했다.
강철이 신고 있는 구두가 콘크리트 바닥의 기름 때에 미끄러져 하마터면 곤두박질 칠 뻔 했다.
뒤 돌아보니 그들이 쫓아 오는 기색이 없어 둘은 마음이 놓였다.
가까스로 지하 1층 출구에 당도하여 문을 열려 했으나 잠겨있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다시 엄습했다.
귀에 들리는 것은 그저 자신의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끊임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물방울 소리뿐이었다.
다른 길은 또 한층을 더 내려가 밖으로 빠져 나가는 차도를 이용 하는 길 밖에 길이 없었다.
그들은 계단을. 정신 없이 뛰어 세워 둔 밴에 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또 다시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차문을 열고 밴의 키 박스를 망가뜨려 시동이 걸리지 않게 해 놓았기 때문이다. 벌써 덩치큰 남자들은 야구방망이를 들고 열려진 차고 출구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계획적인 행동들이 었다
이때 김용호가 강철에게 급히 말했다.
“저쪽으로, 저쪽으로, 저기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차고 중앙에 자동차 전용의 낡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을 그가 발견했다.
자동차 그늘로 몸을 숙이고 둘은 재빨리 엘리베이터쪽으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다른 두 사람은 알루미늄 봉으로 만든 문을 밀어 올리고 올라 탔다.
비상 엘리베이터는 3면 벽을 굵은 철망으로 거칠게 엮어 만든 자동차 전용 낡은 엘리베이터였다.
깅철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1층 버튼을 꾹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곧 덜컹 하고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모터의 울림도 요란하게 엘리베이터는 요동치며 천천히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막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을 뒤 쫓던 사내들이 갑자기 아래쪽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사내들은 서두르지도 않고 침착하게 엘리베이터 조작장치로 다가서며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들 중 한 명이 위를 올려다 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씨익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을 웃는 얼굴의 눈과 강철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강철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놈들의 함정에 걸려 들었다라는 직감으로……
공포에 질린 강철이 스톱 버튼을 계속 눌러댔으나 엘리베이터는 무정하게도 그냥 위로만 올라갈 기세였다. 저놈들은 일부러 우리 둘을 엘리베이터 속으로 몰아넣었구나라 판단했다.
강철은 즉각 위험을 직감했다.
몇십초 내지 1분여 의 시간 밖에 시간이 없었다.
강철이 소리쳤다.
“용호씨, 빨리 나를 따라 오세요.”
강철은 엘리베이터 천정에 설치된 비상구 덮개를 밀어 올리며 엘리베이터 윗쪽으로 올라섰다.
까마득한 저 멀리 옥상으로부터 4줄의 강철선이 내려와 요란한 소리를 토해내고 있는 모터의 힘으로 엘리베이터가 위로 천천히 끌려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철은 벌써 50여초를 허비했다. 재빨리 아래쪽으로 손을 내미러 김용호를 당겨 올리려했다.
“용호씨, 엘리베이터가 곧 추락할 겁니다. 빨리 내손을 잡아요”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덜컹하고 엘리베이터가 급정지 했다.
순간 정지의 충격으로 발판이 심하게 흔들려 하마터면 강철은 몸의 균형을 잃을 뻔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총알처럼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곤두박질 해 내렸다.
강철은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층 난간에 설치된 문턱에 겨우 매달렸다.
‘쿵- ‘ 커다란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으로 추락해서 울리는 소리는 지축을 흔들었다.
강철은 안간힘을 다해 기어 올라 가 문을 밀어 열었다.
문 밖은 1층 로비였다.
강철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며 재빨리 119 응급 구조 신고를 했다. 그리고 몸을 피했다.
시드니 한인교회.
전 교인이 참석한 기도 시간은 침통하면서도 격앙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초청 목사를 위시하여 교인들이 모두 이번 엘리베이터 사고로 중상을 입은 김용호 장로의 회복을 위해 기도 하기 시작했다.
성령이 강림한 목사와 장로, 권사, 집사들은 알아 들을 수 없는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들은 이것을 방언기도라 했다.
장로들은 찬송가를 불렀으며 권사와 여신도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정신까지 잃었다.
목사의 두 팔이 하늘을 향해 간절히 펼쳐 졌다. 기도자의 외치는 목소리는 더욱 더 커졌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런 행동을 공포스런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목사의 통성 기도는 그 간구함이 하도 간절해 땀을 비오듯이 쏟아 내고 있었다. 그것은 더운 날씨 탓 뿐만이 아니었다.
목사 주변에서는 기절하는 사람들까지 속출했다.
강사 목사는 병을 치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목사로서 십수년간 이런 집회의 경험을 통해…. ….
어느 순간에 신자들이 절정에 오르고, 어느때에 신자들의 흥분이 식어지는 지를 잘 알아서 바로 그 적절한 때에 기도를 멈춰야 했다.
지금이 바로 멈추어야 할 그 순간이 었다.
목사는 연단을 꽝 하고 내리쳤다.
통성 기도 소리가 서서히 잦아 들고 음악도 멈추고 환상의 시간은 이제 끝이 났다.
기절했던 여 신도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집사들의 흐르는 눈물도 이제는 그쳤다.
장로도 권사도 울던 아이도 그 울음을 이제는 멈추었다.
붉은 성복을 휘날리며 목사는 팔을 벌려 한번 더 김용호의 회복과 그의 가정을 위해 축복했다.
*
시드니로 차를 몰며 강철은 최근에 얽힌 이상한 일들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일련의 사고들이 마치 자신을 궁지로 몰기위해 미리 계획된 사건 인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회 친구 김용호는 엘리베이터 추락 사고로 뇌와 척추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어쩌면 그는 평생을 식물 인간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사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김용호가 그날 밤 홀로 고장난 엘리베이터를 무리하게 운행하다 당한 불상사로 만 알고 있었다.
강철은 이 사고가 마음에 걸렸다. 또한 행방불명이 되었다라는 그 한국인에 대해서도 좀더 알아보면 무언가가 새로이 나타날 것이라 는 심증이 들었다.
깅철은 그 아파트를 한번 더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이웃으로부터 무슨 단서라도 건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서 였다.
웰 스트리트, 피닠스 아파트 101동
십여일 전에 김용호와 함께 온 그 기분 나쁜 주차장 입구가 동굴처럼 음흉하게 입을 벌리고 강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은 차를 길 건너편에 세우고 주위를 세심하게 살폈다.
아파트 현관에 여자 아이 한 명이 쪼그리고 앉아 있을 뿐 주위는 정막했다.
강철은 차에서 내려 한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찌르며 아파트 쪽으로 길을 건넜다. 아파트 현관 안으로 통하는 바깥 문에 초인종 버튼이 눈에 띄었다.
관리실과 연결된 버튼인 모양이다.
강철은 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현관 홀 가득히 시끄러운 부저 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을 따라 현관을 들어서니,
“무슨 일이오?”
관리인이 창문 사이로 빠끔히 얼굴을 내밀며 강철에게 물었다.
“여기 살고있는 송 이라는 한국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당신뿐만이 아니오. 모두가 그를 찾고 있소.” 흥미 없다는 듯한 얼굴로 늙은 관리인이 대답했다.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만......”
강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리인은 탕 하고 창문을 닫아 버렸다.
철은 뒤돌아 나가려다 관리인이 창문을 닫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관리실 앞을 통과해 3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아파트 3층 2호,
302호까지 숨차게 뛰어 올라온 강철은 행방 불명된 그 한국인이 살았던 집 현관에 도달했다.
문을 노크 했지만 인기척이 없다.
문 손잡이를 돌려보았으나 잠겨있었다.
순간 눈앞에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창문이 보였다.
강철은 그 비상 계단쪽 창을 열고 기어 올라 아파트 외벽으로 나왔다.
아파트 외벽에 설치된 비상계단은 철 구조물로 바닷 바람에 녹이 쓸어 있었다.
비상계단에 올라선 강철은 가능한 아래쪽을 내려다 보지 않으려 애 쓰면서 외벽면에 손을 대고 천천히 게 걸음으로 걸어서 마침내 302호 발코니까지 당도하는데 성공했다. 다행히 발코니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이렇게 남의 집에 침입하는 강철의 수상한 행동을 누군가가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철은 아파트의 거실로 들어섰다.
실내는 온통 곰팡이 썩는 냄새가 진동 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강철은 어질러진 방 침대를 돌아 옷장 문을 열어보았다. 속에는 미쳐 세탁하지 못한 옷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몸을 돌려 욕실을 들여다 보니 양변기의 물은 한동안 쓰지 않은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나왔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시드니 모닝헤럴드지는 2주 전 신문이었다. 부엌으로 가니 싱크대 설거지통 속 밥 그릇들이 검은 곰팡이로 뒤 덥혀 있었고 식탁위는 먹다가 남긴 밥이 시커멓게 썩어 말라있었다.
분명히 이 집주인은 금방 되돌아올 생각으로 잠시 집을 비운 것이리라 짐작 된다.
집 주인의 신상에 분명 좋치 못한 일이 발생된 것 이 리라,
강철은 재빨리 한국 총영사관 경찰 담당 영사에게 알려야겠다라 생각 했다.
그러나 부엌을 한 발짝 나왔을 때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강철은 흠짓 놀랐다.
이것은 분명 문이 여닫히는 소리였다. 철은 몸을 낮추어 숨 죽이고 기다려 보았으나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 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순간 강철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순간적인 공포감으로 그만 기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현관문, 거기에 매달려 있는 방범용 체인줄이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습관화 된 강철의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 밑 권총 홀더를 찿아 더듬었으나 철은 총을 휴대하지 않았다.
강철은 또다시 무슨 소리가 들릴 때까지 조용히 귀 기울이며 부엌 대형냉장고 옆에 숨어서 기다렸다.
침 삼키기 조차 힘들 정도의 긴장감이 철의 심장을 압박 했다.
이때 멈추어 있던 냉장고의 모터가 갑자기 ‘위잉~ ‘ 다시 돌기 시작했다. 철은 이 소리에 그만 너무 놀라 신음까지 토해 내고 말았다.
심장이 멈출 것 같았지만 5분 정도만 더 기다려 보고 그 때까지도 주위에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다면 이것은 나이 먹은 자신의 착각으로 돌리고 이 집을 빠져나가기로 강철은 마음 먹었다.
드디어 강철이 살며시 거실로 나와 침실을 들여다 보았다.
비상 계단 쪽으로 조금 전에 열어둔 창문이 열린채로 밖이 내다 보였다.
방 안 검은 커튼이 창문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또다시 오싹하는 공포감이 철을 엄습했다.
일초쯤이면 이 방을 가로질러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겠구나라고 철은 시간을 계산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지 못할 하나의 희망이되고 말았다.
강철이 열린 창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을 때 쏜살 같은 그림자 하나가 방 문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철이 미처 대응준비도 하기 전에 명치에다 커다란 주먹을 날려 철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말았다.
*
그날 밤. NSW주 경찰국
NSW주 경찰국 집계에 의하면 그날밤 열여섯 건에 달하는 절도 강도 사건이 발생 되었다라 했다.
그 중에서 경찰을 가장 당황케 한 사건은 남부 시드니에서 유대인이 경영하는 총포사가 습격 당한 사건이 었다.
범인들은 총포사의 경보 장치가 작동 되지 않도록 한 후에 강력한 전기 절단기로 뒷 골목에 면한 창문 쇠창살을 절단하여 그리로 침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보통 도둑들은 값비싼 산탄 엽총을 훔치기 마련인데 그것들은 도난 당하지 않았다.
유대인 주인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범인들이 훔쳐간 것은 정밀하기로 유명한 독일 헤클러& 코흐사 제품의 라이플 ‘PSG-1’ 한 정과 그 총탄 1상자 그리고 야간 조준경 세트, 권총 2자루 정도에 불과했다.
라이플의 실탄은 고속 세열탄으로 관통력과 파괴력이 모두 뛰어난 것들이었다.
특히 주목할 사항은 스타라이트 스코프라 불리우는 저격용 라이플의 야간 조준경 도난이었다. 어두운 밤, 올빼미 눈의 커다란 망막처럼 작용하는 이 야간 조준경은 환상적인 야간 사격의 필수장비였다.
원래는 군사용으로 개발된 것이지만 최근들어 경비회사 같은 곳에 간혹 판매되고 있었다.
*
한편, 명치를 가격당한 강철(姜鐵) 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거실로 끌려나가 소파 위에 내동댕이 쳐지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철은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럽게 생각됐다.
철은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있는 지갑을 꺼냈다가 다시 되돌려넣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이자가 도둑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맞지 않았다. 만약 도둑이라면 지갑이 되돌려질 이유가 없었다.
강철은 머리를 흔들었다.
점차 사물들이 분명하게 보이면서 의식이 좀더 뚜렷해졌다. 자기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회색 자켓과 줄무늬 티 셔츠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
“안녕하시오. 정신이 돌아와 다행입니다. 미스터 강”
티 셔츠 남자가 철에게 말 했다.
철이 몸을 움직여 보았으나 다친 곳은 없었다.
“자아~ 제임스 강, 당신이 지금 이 아파트에 무엇을 하러 들어왔는지를 설명 해 주지 않겠소?”
“아무것도 할 말이 없오.”
철은 탁해진 목소리로 말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목안이 좀 거북스러웠다. 아마도 소파위로 난폭하게 내던져질 때 무언가 목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우리가 지금 당신과 농담하는 것이 아니오.” 남자가 담배에 불을 댕기며 느긋하게 말 했다.
“나도 당신들에게 똑같은 말을 묻고 싶어.” 철이 말했다.
“좋아, 다시 한번 묻겠소. 당신, 이 아파트에 들어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이 집 주인 송씨와 친구요. 그렇지, 친구라 말 할 수 있지. 같은 한인교회에 다니고 있으니깐.”
남자는 입안 가득 담배연기를 천정으로 내 뿜었다.
“친구든 뭐든, 내가 당신에게 묻는 말은 당신이 왜 비상계단으로 이 아파트에 불법 침입했느냐는 것이오. 내 말 알아들어?”
철이 빠르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잠복 경찰관들인 것 같아 내가 사실대로 말하겠소. 여기 살고 있는 송아무게 라는 사람은 같은 교회 친구로 2~3주전에 행방불명된 상태요. 우리 한인들은 이 사실을 한국 총영사관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며칠 전에 이곳을 찾은 같은 교회 김용호라는 사람 역시도 어느 누군가에 의해 습격 당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이 곳을 침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제야 조금은 납득하겠다는 듯이,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창문을 통해 아파트로 들어온 이유가 충분치는 않은데?” 옆에선 또 다른 남자가 말 했다.
“그야 순간적으로 생긴 호기심 때문이였지요, 행여 송씨가 멀쩡하게 집 안에서 빈둥거리며 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오.”
남자들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정적과 함께 피로감이 강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들이 경찰인 것은 분명한가?’ 그래서 철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저 친구가 궁금했을 따름이오.”
침묵을 지키던 남자가 다시 말 했다.
“당신 말을 믿어 주겠소. 당신이 바로 제임스 강 이지요? 신분증을 보니 알겠오. 고스포드 당신집에 침입한 위조달러 범인도 직접 잡아서 경찰에 넘긴 바로 그 사람이 당신 맟지요?”
철은 이제서야 좀 안심이 되었다. 남자는 담뱃불을 비벼 끄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 한 장을 꺼내 철에게 내밀었다.
명함에는 ‘알버트 마쉰, 연방 수사관’이라 적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북한 봉수호 마약 사건을 비롯해 당신이 잡아준 위조달러 범인 사건, 이번의 한국인 실종 사건 등을 같은 맥락에 놓고 지금 수사를 진행하고 있오. 이 집에 살고 있는 송이라는 이 사람도 그가 북한 출신이라는 것과 그를 찾는 사람들이 누군가로부터 계속 테러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우리는 이 아파트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소. 그러나 며칠 전 우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 아파트 엘리베이터 추락 사고가 생겼고, 그때도 역시 송을 찾아온 김용호라는 한국사람이 죽을 뻔 했었소. 앞으로도 이 같은 일이 있으면 당신 홀로 무모한 행동을 하지말고 꼭 나에게 연락 하시오.”
철은 이제야 무엇인가를 좀 확연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강철은 응웬이 한 말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았다.
그녀와 캔버라 전쟁 기념관에서 처음 만나던 날,
바로 그날 밤,
그녀는 자기 집을 침입한 흑인 남자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옷이 찢기우거나 신체적으로 당한 그런 고통때문이 아니라 섬세한 그녀 자신의 자존심을 그 놈이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다라는 것이 그녀를 흥분케 했다.
그것도 사랑하는 강철을 40여년 만에 만나 가슴 설레했던 바로 그 날에,
블라우스 위로 솟은 여자의 소중한 상징인 젖가슴을 그 더러운 놈의 손으로 함부로 유린당한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 그녀는 섬뜩한 정막 속에서 숨 죽여 울었다고 말했다. 저 목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절규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놈을 체포해 경찰에 넘겼어야 했지만, 그녀는 강철과 자신의 사랑이 CIA에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놈을 풀어 주었다고 말했다.
강철은 그 흑인 놈을 잡아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놈은 어이 없게 야간 열차 사고로 죽어버렸다.
- 계속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