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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현궁터 다른 궁에 비해 큰 규모를 자랑했던 이현궁 자리에는 고층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
선조는 즉위 2년 후에 박응순의 딸과 혼인하고 의인왕후에 책봉한다. 그러나 의인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선조는 후궁 공빈 김씨를 총애했다. 공빈 김씨는 1574년 임해군, 1575년 광해군을 낳았는데 광해군을 낳고 2년 후 산후병으로 죽는다.
이후 인빈 김씨가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4남 5녀를 낳는다. 선조는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는데 조정은 생모는 없으나 총명한 광해군파와 당시의 권력가인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파로 나뉘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장자 임해군은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 학문에 힘쓰지 않고 종들이 제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어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나 광해군은 행동을 조심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백성이 마음으로 따랐다며, 광해군을 세자로 삼을 의도를 비춘다. 그리고 4월 29일 광해군을 황급히 세자로 책봉하고, 4월 30일 새벽 한양을 떠났다. 그리고 신성군은 피란 도중 11월 5일 의주에서 병사한다.
한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피란으로 몸이 약해진 의인왕후는 1600년 46세의 나이로 소생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김제남의 딸이 19세의 나이로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었는데 그가 인목왕후다.
1606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의 마음은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향했다. 이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때까지 광해군은 중국(명나라)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허락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논쟁이 한창일 때 광해군은 34세, 영창대군은 3세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광해군은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다.
공빈 김씨를 모신 봉자전
당시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의 제사는 장자인 임해군이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임해군이 역모로 몰려 진도로 유배를 가게 되면서 광해군은 사친의 신주를 역모한 자의 집에 오래 둘 수 없으니 효경전으로 옮기라고 한다. 그러나 신하들이 효경전이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고 있어 불가하다고 반대하여 연지동의 옛 궁(이현궁)으로 모신다. 2년 후인 1610년에는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숭하고 신주를 의숙공주의 저택에 모시게 되는데, 사당의 이름을 ‘궁(宮)’보다 격이 높은 ‘전(展)’ 자를 붙여 ‘봉자전’이라 했다. 이 곳이 영희전이다. 이현궁은 세자 지(祬)의 가례 때 세자빈이 친영하는 별궁으로 삼기도 했다.
한편 광해군은 많은 선정을 펼치기도 하는데 즉위년에 선혜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백성의 세금을 줄여주려 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을 수리하였고, 경덕궁과 인경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리하게 인력을 동원하는 바람에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1623년에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로 등극한다. 그리고 전국에 대사령을 내리고 반정 명분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처음 광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선묘께서 바꾸려는 의사를 두었었는데, 결국 광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영창대군을 몹시 시기하고 모후를 원수처럼 보아 그 시기와 의심이 날로 쌓였다. 적신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또 그의 악행을 종용하여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해도(海島)에 안치하여 죽이고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멸족하는 등 여러 차례 대옥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했다. 상의 막내 아우인 능창군 이전(李佺)도 무고를 입고 죽으니, 원종대왕(정원군)이 화병으로 돌아갔다.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대비의 존호를 삭제하는 등 그 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선왕조의 구신들로서 이의를 두는 자는 모두 추방하여 당시 어진 선비가 죄에 걸리지 않으면 초야로 숨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했다. 또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고,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히어 크고 작은 벼슬아치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으며, 법도가 없이 가혹하게 거두어들임으로써 백성이 수화(水火) 속에 든 것 같았다. 상이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反正)할 뜻을 두었다.”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어 폐위 후 18년을 더 살았다. 임진왜란의 전장을 뛰어다니며 나라를 구하려 했고, 백성의 세금을 줄이려 노력하던 광해군은 여타의 실정으로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광해군의 유물로는 해인사에서 발견된 광해군과 폐비 유씨의 의복이 있다. 1965년 해인사의 장경판고를 보수할 때 남쪽 지붕 구멍 안에서 의류 4점과 지본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의류 4점은 광해군과 폐비 유씨, 그리고 정5품 상궁의 의류로 판명되어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광해군 때 해인사를 수리하면서 왕과 왕비 그리고 상궁의 복장 유물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의 청색운보문단 솜 중치막
폐비 유씨의 홍색 토주 겹장저고리 1965년 해인사 장경판전을 수리할 때 발견되었다. 의복과 함께 건물 완공에 대한 기록과 상궁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발견되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묘는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에 있다. 묘를 조성할 당시 아래에 풍양 조씨의 시조 조맹의 묘가 있었으므로 봉분을 허물 것을 의논하였으나 조맹이 공빈 김씨에게 외친원조(外親遠祖)가 된다는 이유로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묘호를 ‘성릉’으로 올렸는데, 조맹의 묘소를 파낼 것인지에 대해 의논했으나 신하들이 불가하다고 하여 봉분만 헐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위되자 김씨도 따라서 공빈으로 강등되고, 성릉도 성묘로 낮춰졌다. 인조 때 조맹의 후손 조수이 등이 상소하여 다시 봉분할 것을 청하니, 인조가 허락하고 공빈 김씨의 묘소에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석물들을 헐도록 했다.
광해군은 1641년에 제주도 유배지에서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1남 1녀가 있었다. 폐세자 지(祬)는 강화로 유배되었는데 탈출하려다 붙잡혀 사약을 받았고, 서인으로 전락해 20세가 되도록 시집 못간 딸은 인조가 혼수를 마련해 박징원과 혼인시켰다. 그리고 이현궁에 살게 하였고, 전택과 노비를 주어 외손으로 하여금 광해군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광해군묘는 어머니가 바라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는 광해군의 유언에 따라 1643년 공빈 김씨묘 아래 오른쪽(공빈 김씨의 묘가 바라보이는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으로 옮겼다. 현재 남양주에는 공빈 김씨와 광해군 그리고 임해군 세 모자의 묘가 가까이 위치해 있어 뒤늦은 회포를 풀고 있는 듯하다.
공빈 김씨묘
광해군묘와 폐비 유씨묘
임해군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세 모자의 묘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계운궁, 숙빈방, 장용영으로 사용된 이현궁터
능양군은 반정을 일으켜 인조로 즉위하고 즉위한 후 생부인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추봉하고, 생모 구씨는 연주부부인에 올렸다. 그리고 연주부부인 구씨를 광해군의 잠저였던 이현궁을 사용하게 하고 ‘계운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인조는 즉위한 후 창덕궁을 법궁으로 사용하였으나,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훼손되어 광해군이 건설한 경덕궁을 사용했다. 경덕궁은 인조의 본가이기도 하였기에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또한 계운궁에서 지내던 어머니를 경덕궁으로 모셨다. 이후 연주부부인 구씨는 경덕궁 회상전에서 운명하였는데, 이는 본인이 살던 본가터에서 죽은 것이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동생 능원대군이 난리를 겪고 집이 없었는데 이현궁을 하사하여 살게 했다.
세월이 지나 숙종 때는 능원대군의 옛집을 사서 최숙의(숙빈 최씨)의 제택으로 삼게 했다. 그뒤 연잉군이 이현궁에서 살기로 했는데 연잉군은 가례 후 숙종이 마련해준 창의궁에서 살게 된다. 1711년에는 이현궁을 환수하면서 공가(公家, 왕실)에서 관리하게 된다. 1718년(숙종 44년)에 소현세자 빈을 복권하면서 세자빈의 옛 신주를 이현궁에 옮겨 잠시 봉안하기도 했다. 영조 때는 당시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던 이현궁을 서 3녀 화평옹주에게 주려고 경복궁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현궁의 현재 위치는 종로4가에서 창경궁으로 가는 창경궁로의 동쪽이다. 이현궁의 위치와 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본영도형〉이 있는데 장용영의 본영을 그린 그림과 도형이다. 이 그림과 도형은 2009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기획논문으로 발표한 이왕무와 정정남의 논문에 의해 알려졌다. 두 논문에 의하면 〈본영도형〉은 세 종류가 있는데 1799년 그린 채색 그림과 1801년 작성한 건물 도면은 장서각에, 1799년 그린 건물 도면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정남에 의하면 〈본영도형〉은 이현궁의 위치와 규모를 알려주는 단서로, 도형 상단부의 기록에 본영의 규모가 원래 66칸에서 증축되어 653.5칸으로 늘어났다고 하니 정조가 죽기 전까지 장용영 규모가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1785년 무예 출신의 칭호를 장용위라 명명했다. 1787년 장용위 영사가 이현궁에 들어섰고, 1788년 장용영으로 승격하여 규모를 늘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순조가 등극하자 영의정 심환지는 장용영을 폐지할 것을 아뢰니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정순왕후)가 이에 따랐다. 이현궁터는 장용영 폐지 이후 훈련도감의 동영(東營)으로 사용되었다.
이현궁의 은행나무
세월이 흐른 후 일제강점기에는 동영 자리에 일본군 보병 59연대 1대대가 주둔했으며, 1908년 부대가 용산 병영으로 이전한 뒤에는 1909년 동아연초주식회사 사택으로 대여했다가 그해에 다시 북측의 기존 가옥을 철거하고 경성재판소 관사의 신축이 결정되었다. 이후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로 사용되다가 1993년 대치동으로 이전하면서 국민은행, 태승플래닝으로 넘어가 현재는 효성쥬얼리시티가 들어서 있다.
이외의 인의동 48번지 일대는 국가 소유로, 서울특별시선거연수원(창경궁로 110, 구 인의동 48-25), 경찰공제회(창경궁로 103-106, 구 인의동 48-26), 혜화경찰서(창경궁로 112-16, 구 인의동 48-57) 등 관공서가 들어섰으며 일부는 개인에게 넘어갔다. 개인 소유로는 종로플레이스(인의동 28-2 외), 인의빌딩(인의동 28-9) 등이 있다.
한편 2010년 12월 완공된 종로플레이스의 신축으로 이현궁의 유물이 발굴될 시기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크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이현궁 표지석은 서울시재향군인회 건물 앞에 있었다. 나는 수차례 답사를 하며 이 표지석과 표지판을 중심으로 아무리 이현궁의 그림을 그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하던 때가 있었다. 학자들에 따라 이현궁의 위치를 다르게 보기 때문이었다. 이때 맞은편의 공터를 계속 지켜보았는데 이곳에 종로플레이스가 들어섰다. 그런데 〈본영도형〉이 발견되고 나서 이현궁의 위치가 인의동 28번지와 48번지임이 확인되었고, 표지석도 은행나무 앞으로 옮겨졌다. 〈본영도형〉은 그 이전부터 있었으나 2009년 연구 결과로 이현궁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이현궁의 크기에 대한 기록으로는 숙종이 ‘이현궁은 주위의 넓고 큼이 다른 궁에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연(輦)을 타고 지날 때마다 마음이 항상 미안하다.’ 하였고, 영조 때 좌의정 서명균은 그 크기가 어의궁보다 크다고 했다.
앞의 두 논문에서 장용영은 일제강점기에 인의동 28번지 10,734㎡(3,247평)와 48번지 20,955㎡(6,339평)로 10,000평 가까운 면적이라고 했다. 현재의 면적을 확인해보니 인의동 28번지 1에서 50호까지 11,368㎡(3,439평), 48번지 1에서 62호까지 20,183㎡(6,105평)였다. 즉, 전체 면적이 31,551㎡(9,544평)였다. 실제로 이현궁은 10,000평 정도의 규모로 다른 궁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컸던 것이다.
또한 〈본영도형〉에 나오는 은행나무는 1981년 수령 465년으로 서울특별시보호수 1-3으로 지정되었다. 〈본형도형〉의 은행나무와 현재의 위치와 비교해 보면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이현궁의 옛 흔적을 알 수 있게 된다. 〈본형도형〉의 발견으로 이현궁의 확실한 위치를 알게 되었으니 큰 수확이라 하겠다.
은행나무 조선 시대에 이현궁 부근에 있던 은행나무로 1981년 기준 수령 465년이며, 현재까지 남아 있다.
나는 종로4가 로터리에 서서 이현궁의 모습을 그려본다. 옛 운중로 현재의 종로4가 안쪽으로 들어가면 피맛골이 나오고 이현교를 건너면 커다란 연못과 언덕이 나오고 그 언덕 위에 솟을대문과 은행나무가 보일 것이다. 그 규모가 다른 궁보다 크다고 하였으니 규모나 내부 구조 및 건축의 화려함도 궁궐에 버금갔을 것이다. 광해군이 대권에 관계없는 차남으로 혼인하여 살았고, 그리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의 생모가 살았으며,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아들을 낳자 내려주었던 숙빈방이었던 이현궁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오래된 은행나무만이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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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선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광해군일기》중초본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35쪽.
국사편찬위원회, 《인조실록》
남양주시지출판위원회, 《남양주시지 2》, 남양주시지편찬위원회, 2000, 266쪽.
국사편찬위원회, 《숙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이왕무, 〈‘본영도형’을 통한 조선후기 장용영의 모습〉, 장서각 21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8 · 14 · 21쪽
정정남, 〈장용영의 한성부내 입지와 영사의 건축적 특성〉, 장서각 21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8 · 14 · 21 · 42 · 53 · 56 · 57 · 61쪽.
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정조 9년 1785년 7월 2일.
국사편찬위원회, 《순조실록》
이규철, 《대한제국기 한성부 군사관련 시설의 입지와 그 변화》, 서울학연구, 2008, 130 · 131쪽.
글 이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