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열두 번째 달을 보내고 있다. 지난 330여 일 동안 빠짐없이 밥숟가락을 들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먹거나, TV를 보느라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거나, 야근하며 허겁지겁 먹거나. 참 열심히도 살았다 싶다.
남아 있는 스무 날 남짓, 그중 어느 날 한 끼쯤은 성대한 만찬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2017년을 누구보다 힘차게, 열심히 살아온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 평소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돌아서는 음식이면 좋다. 올 한 해, 숨 가삐 달려온 나와 우리 가족에게 수고의 선물로.
나를 다독이고 가족을 격려할 밥상을 찾는 그대에게 오마카세를 추천한다. ‘오마카세(お任せ)’는 일본어로 ‘맡기다’라는 뜻. 메뉴를 정하지 않고 셰프가 그날의 가장 좋은 재료로 알아서 요리를 내는 방식을 말한다. 손님 입장에선 ‘알아서 달라’, 셰프 입장에선 ‘주는 대로 먹어라’ 정도가 되겠다. 빼곡한 메뉴판에서 무엇을 먹을 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셰프가 최고의 재료와 테크닉으로 정성스러운 밥을 내어줄 테니까.
![쿠마의 오마카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ong.visitkorea.or.kr%2Fcms%2Fresource%2F30%2F2519630_image2_1.jpg)
[왼쪽/오른쪽]스시효의 오마카세 / 쿠마의 오마카세
‘미스터 초밥왕’의 손가락이 춤추자 초밥이 피어났다, 스시효 청담점
그의 손가락이 춤춘다. ‘요리를 한다’기보다 ‘춤을 춘다’에 가까워 보인다. 알레그로(빠르고 경쾌하게)의 속도로 다섯 손가락을 곧게 펼치거나 살짝 구부리거나 동그랗게 쥐며 리드미컬한 곡예를 선보인다. 날쌔게 움직이던 손이 멈추자 대가의 초밥이 접시에 올라왔다. 그의 이름은 안효주, 스시효 청담점의 오너 셰프다. 요리 경력 40년이 코앞인 초밥계의 거장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으레 ‘초밥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일본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에 나오는 한국인 초밥 요리사의 모델이었던 것이 계기다.
[왼쪽/오른쪽]안효주 셰프의 기민한 손놀림 / 초밥을 만드는 안 셰프
스시효 오마카세에 나오는 초밥은 약 18가지. 개수만 정해져 있을 뿐 어떤 초밥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그날의 식재료 상황이 다르기 때문. 안 셰프의 시그니처 메뉴인 붕장어 초밥도 맛보지 못할 수 있다. “선도가 떨어지는데도 구색 맞춰 내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단호한 음식 철학 덕에 손님들은 그날밖에 먹을 수 없는, 즉 그날 먹어야 가장 맛있는 오마카세를 맛본다.
기자가 간 날은 참치 대뱃살, 성게 알, 불에 그슬린 참치 대뱃살, 단새우, 지느러미살, 연어 알, 전복, 광어, 장어, 고등어 등의 초밥이 고운 빛깔을 뽐내며 줄지어 올라왔다.
스시효 초밥은 밥과 생선의 조화로움이 특징. “초밥은 오케스트라예요. 밥, 생선, 식초, 간장, 고추냉이, 셰프의 테크닉, 이 중 하나라도 엇나가면 맛 전체가 흐트러집니다.” 안 셰프의 말 그대로다. 초밥은 하나같이 샤리(초로 맛을 낸 밥)와 네타(초밥에 얹는 생선)의 균형이 기막히다. 생선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면 그 사이로 밥알 하나하나가 은은히 솟아오른다.
샤리와 네타가 엎치락뒤치락하며 한데 어울리니 입안에서 즐거운 한판 대결이 펼쳐진다. 불그스름한 진주알 같은 연어 알 초밥은 녹진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고, 석쇠로 겉을 살짝 그슬린 참치 대뱃살은 씹지 않아도 입에서 스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럽다. 미끈하게 빠진 모양새와 긴 여운을 남기는 맛에 입과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고운 빛깔의 초밥이 눈부시다.
[왼쪽/오른쪽]참다랑어 등살(아카미) 초밥 / 참다랑어 중뱃살(주도로) 초밥
부재료에 들인 공도 대단하다. 아부리 도로 초밥에 올라간 천일염은 16년이나 간수를 뺀 것이란다. 초밥을 먹기 전 소금만 살짝 찍어 먹고 물을 마셔보라. 짠맛이 아니라 단맛이 난다. 고추냉이는 일본에서 공수해 온 것에 무즙을 섞어 맛의 격을 높였다. 그래서일까.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다. 눈을 감고 재료의 어우러짐을 가만가만 음미하고 싶은 맛이다. <미스터 초밥왕>에서 정성껏 만든 초밥에 눈물 흘리며 감격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음식만큼 공간 구성도 빼어나다. 미닫이문 달린 방이 4개, 일렬로 긴 바가 11석, 바 뒤편의 4인 테이블이 4개다. 테이블 사이 간격도 넓은 데다가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분위기도 인상적이다. 오마카세가 처음이라면 방보다는 바에서 먹기를 권한다. 셰프가 요리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먹는 속도에 맞춰 다음 초밥을 내주어 찬찬히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스시효 내부에는 방 4개가 구비되어 있다.
바에 앉으면 셰프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안효주 셰프가 전하는 초밥 먹기 팁>
”초밥을 먹을 때 밥에 간장을 찍는 건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밥이 스펀지 역할을 해서 간장을 흡수해 버리거든요. 그럼 간장 맛이 너무 강해져서 초밥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죠. 생선에 간장을 찍어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간장이 생선 위를 미끄러지면서 적절히 배어요.“
화통한 용왕님의 화끈한 만찬, 쿠마
“여의도 용왕님의 은총에 배 터져 죽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 해산물을 이 집만큼 주는 집은 서울 시내에 존재하지 않음.” “공복 필수, 양 많음 주의.” 쿠마를 검색하면 나오는 리뷰들이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쿠마는 회 좀 먹어본 사람들에게 꽤나 알려진 오마카세 맛집이다. 바다 냄새 물씬한 부산 사나이, 맨손으로 일본에 가 음식 솜씨 하나로 이름을 날린 일식 요리계의 고수, 김민성 셰프가 맛을 책임진다. 사람들은 그를 ‘용왕’이라 부른다. 깊은 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듯 싱싱한 해산물을 양껏 구해서 큼직하게 썰어다 무더기로 퍼주기 때문이다.
[왼쪽/오른쪽]‘용왕’이라 불리는 쿠마 김민성 셰프 / 쿠마의 아늑한 실내
용왕이 차려낸 오마카세는 다음과 같다. 대방어, 참다랑어 머리 부위 살, 참다랑어 대뱃살과 속살, 말고기, 과메기, 방어구이, 얇게 뜬 참마를 올린 해삼 내장, 연어 알, 대하장, 가자미찜, 어육탕. 10여 가지 음식을 그야말로 상다리 부러지게 낸다.
김 셰프는 음식은 배불리 먹어야 한다는 신조를 지녔다. 배부름도 일반인 기준이 아니다. 순전히 대식가인 자기 기준이다. 쿠마의 음식을 먹다 보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말이 생각난다. 통째 구운 방어구이는 어른 팔뚝만 하고, 편으로 뜬 참다랑어 뱃살과 속살은 두툼한 절편 같다. 회는 접시가 아니라 30cm가 넘는 옥돌판에 담는다. 온도에 민감한 회 맛을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란다.
[왼쪽/오른쪽]통으로 구운 방어구이 / 영롱한 연어 알
[왼쪽/오른쪽]참다랑어 대뱃살 / 참다랑어 속살
맛은 어떨까. 참다랑어는 참치류 중 최고의 횟감으로 꼽힌다. 대뱃살은 기름기가 있어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최상급 치즈처럼 농밀하다. 술 한 잔이 절로 떠오르는 맛이랄까. 속살의 적색은 짙은 레드와인 또는 붉디붉은 동백을 닮았다. 뱃살보다 담백하고 씹을수록 고소함이 진해 참치 고수들이 즐겨 먹는 부위란다. 비릿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말고기는 군맛 하나 없이 혀에 찰팍하게 감겨들고, 겨울 맞아 제철인 방어는 씹어도 끝이 안 나는 두께다. 두껍게 썰었지만 억세지 않다. 단단한 살이 너울너울 풀어지며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맛에서는 꼼수가 보이지 않는다. 용왕이 얕은 조미료나 화려한 꾸밈새로 변화구를 쓰지 않고 정공법으로 요리하기 때문이다. 재료 본연의 맛과 셰프의 예리한 칼날이 맞물린 진수성찬이다. 푸짐한 오마카세는 ‘재료가 좋아야 음식이 맛있다’는 그의 음식 철학과 맞닿아 있다. 재료 공수를 위해 그는 밤 10시 퇴근 후 매일 노량진 수산시장에 간다. 매출의 70%를 재료비에 쓸 정도로 크고 신선한 횟감만 골라온다. 참치는 일본에서 참치 유통회사를 하는 친구에게서, 말고기는 제주도에서 전해 받는다.
실내는 연말 모임이나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 제격이다. 길고 좁다란 바, 4인용 테이블, 8~9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까지 고루고루 구색을 갖췄다. 손이 자주 가는 티셔츠를 입은 듯 분위기 또한 편안하다. “어서 오이소. 밥 한 그릇 단디 먹고 가이소.” 주인장의 호탕한 말투 뒤에 숨겨진 ‘뜨순’ 배려 탓이리라.
[왼쪽/오른쪽]제주도산 말고기 / 전날 수산시장에서 가져온 15kg짜리 대방어 단면
절편만큼 두툼한 방어 한 점
연말 모임이나 비즈니스 미팅으로 마침한 실내
<김민성 셰프가 전하는 회 먹기 팁>
“방어는 새우장에 꼭 찍어 먹으소. 손님들 많이 멕일라고 직접 개발한 장이다. 초장 맛은 너무 세서 방어 맛을 다 잡아 삐니까. 한 숟갈 푹 떠서 두툼히 펴 발라도 된다. 아, 해라. 하나도 짜지 않제?”
여행정보
스시효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46길 25 유현빌딩 1층
- 문의 : 02-545-0023(예약 필수)
- 홈페이지 : sushihyo.modoo.at
- 영업시간 : 12:00~14:30, 18:00~22:00(브레이크 타임 14:30~18:00)
- 쉬는 날 : 없음
쿠마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방로69길 7 충무빌딩 2층
- 문의 : 02-2645-7222(예약 필수)
- 영업시간 : 11:30~13:00, 18:00~22:00(브레이크 타임 13:00~18:00)
- 쉬는 날 : 일요일
글 : 이수린(여행작가), 사진 : 이완기(사진작가)
※ 위 정보는 2017년 12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