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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시 자아과 주체
▲ 자아와 주제의 구분
거기 이제 인용문을 보시면 에크리』 94쪽에 나오는데, 아까 굵은 글씨로 쓴 게 인용이죠.
『에크리』에 직접 “아직 운동적 미숙함과 젖먹이의 의존성에 빠져있는 이 유아단계 꼬마 아이
가 자신의 반사된 이미지 되어 가는 열광적인 일체감이 우리에게는 상징적 자궁의 일시적인 상황
처럼 보인다. 이 상황 속에서 '나' 라는 것은 타자에 대한 동일시의 변증법 속에서 객체화되기
도 전에 그리고 언어가 세계 속에서 주체의 기능을 나에게 부여해 주기도 전에 이미 원초적 형태
로 고착된다." 이렇게 나오죠. 거울단계에서 중요한 게 뭐냐면 자아와 주체를 구분을 해서 써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자아, 주체가 비슷한 말이 아니라, 왜냐면 자아는 상상계적인 거고, 주체는
상징계적인 거기 때문에 둘이 달라요. 그리고 분석에서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면 분석이
란 것은 상상적 관계에 매달리고 있으면 안 돼요. 아까 A와 A'의 짝패적인 관계에 매달려 있으면
실패한 분석입니다. 상징계적인 위치를 바로잡아 주는 게 정신분석의 목표이기 때문에 분석가는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 가장 잘 숙지하고 있어야 되는 거죠. 라캉이 왜 자아 심리학에 대해서 반
대를 하냐면 자아 심리학은 AA' 라는 상상적 관계를 분석해서 주요한 걸로 보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분석이라는 것들이 굉장히 이미지적인 것을 계속 강화시켜주는 것으로만 나아가게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죠. 사실은 이미지라는 것은 허구라는 것을 분석은 깨우쳐 줄 수 있어야 됩니다.
물론 허구라는 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자아와 주체의 구분. 흔히 자아라는 것은
불어로서는 자아로 나타나고, moi, 그리고 ego라는 것. 그리고 라캉의 기호에 있어서는 a로 표현
되는 것. 이 a라는 것은 나중에 오브제 아 라는 유명한 개념하고도 연관이 되죠. 오브제 아라는
것은 상상적인 것입니다. 근데 라캉의 특징은 하나의 개념에 고정된 내용을 부여하지는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상상적인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오브제 관심이 내용이 바뀌어 나가지만 여전
히 상상적 관계를 틀로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유지가 되죠. 주체라는 것은 상징계에 의해서 상징
적 질서 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게 주체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섞어서 쓰기도 하지만 사실은 구
분을 철저히 해야 되죠. S가 바로 주체라고 한다면 A라는 것들은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
둘이 표면상 나누어져 있지만 주체성의 구조에서는 쉽게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나누어 있는 걸
체험할 수 있는 게 바로 정신분석적인 진리와 연관되는 담론들이 나올 때죠. 거짓말 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 의도와 무관하게 나올 때는 바로 주체라는 것들이 자아를 뒤집는 주체라는 것들이
그 속에서 언뜻 드러나게 되는 거죠. 주체와 자아의 관계를 구분해야 된다는 게 거울단계의 논문
에서 지적되는 핵심이죠. 그리고 자아라는 것들이 흔히 말하는 철학의 의식. 그리고 코기토. 그
다음에 사유주체, 철학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냐면 거울적 이미지에서 비롯된 의식의 본질에서
문제제기 하지 않고, 세계에 대한 고정점처럼 붙여놓고서, 모든 대상관계를 설명하는 거죠. 그러
다보니까 주체의 자리라는 건 물음이 되지 않습니다. 한 번 고정되면 그건 모든 것에 질문을 할
수 있는 전능한 심판으로 역할을 하죠. 심판이라는 것은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분석하
면서 코기토라는 것은 자기 앞의 모든 것들을 상으로 펼쳐놓고서. 거기에 대해서 심문을 던지는
주체다. 그래서 근대의 주체는 다른 게 아니라 권력의 주체라고 비판하는데, 이게 코기토, 의식
인거죠. 의식의 본질은 거울과 똑같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것을 보고 떠올리듯이 세계의 모든 것
들을 상으로 바꾸어서 인식을 하는 것들이죠. 그래서 거울단계는 최초 분열의 순간으로서 중요한
거고, 최초 분열이 의미하는 것은 두 번째 분열이 있다는 거겠죠? 두 번째 분열은 상징계에서 문
열이 시작됩니다. 상징계는 해소시켜주는 게 아니라 또 한 번 고착화 시켜주는 거죠. 이렇듯 언
이는 주체를 구원해주면서 동시에 주체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는 게 라캉의 기본적인 진단입니
다. 그래서 자아와 대립되는 주체라는 것들이 정신분석의 경험들이 드러내야 되는 것임에도 불구
하고, 최종적인 해결은 아니, 주체와 자아의 역설적인 공생관계.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 자
제가 분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른 말로 1차 분열이라고도 얘기하죠. 상상
계에서 이루어지는 분열. 그다음에 상징계와의 2차 분열이 시작되게 되는 기죠. 그리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조각난 몸의 이미지. 그리고 조각난 몸의 이미지를 라캉이 예술적 회화에서 잘 보여
주는 게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들을 보면 별의별 것들이 다 그려져 있죠? 최후의 심판 같은
것을 보면 지옥의 모습 같은 것. 거기서 인간과 동물을 섞어 놓은 듯한 형태들, 그리고 하나의
어떤 덩어리들. 이런 것들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그런 것에서 조각 난 몸에 환상이 표현되어 있
다고 얘기를 하죠. 그래서 거울 단계는 최초 분열로부터 최초 분열이라는 것은 자아와 주체의 문
열이라는 걸 수도 있고, 이미지와 몸의 분열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미지를 눈앞에 보이
는 이미지로 생각하시면 안 되고, 작용적인 차원에서 얘기를 해야 되요. 무슨 얘기냐면 인간 주
체가 갖고 있는 특이성들은 외부세계에 적응해 나가는 게 아닙니다. 외부세계에 적응해 나가는
건 동물들이죠. 예를 들어서 푸른 풀잎에 숨어서 풀잎과 똑같은 색깔과 똑같은 모양으로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변형된 사막이니 이런 곤충들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동물들이 외
부세계에 자기를 적응해 나가는 이런 과정을 잘 보여주는 거죠. 근데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적응해
나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이미지의 상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외부세계
를 기기에 재구성을 하는 기록. 쉽게 말하면 우리는 환경에 적응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간다는 얘기가 되는 기기든요. 바로 이런 것들이 편집
중이나 인식 상에서 본질상 차이가 없어요. 단지 편집증은 이 과정이 좀 더 강화되어서 나타나는
것들이고, 누구나 우리는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이미지를 통해서 밖에는 다가갈 수밖에 없는 것이
죠. 그러다보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건 언제나 편집증적인 본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게 라
강의 생각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건 사실은 그렇게 차이가 없는 기죠. 너는 편집증자이고
나는 정상이고, 이런 개념이 의미가 없다는 거죠. 왜냐면 네가 세계를 보는 거나 내가 보는 거나
본질에 있어서는 상상적인 것을 매개로 해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똑같다. 단지 정도의 차이
만 있는 것들이고, 여기서 일상과 정신병의 경계라는 것들은 모호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최초 이미지인 거울상이 부여해주는 것들은 이런 식으로 자아를 매개로해서 주체성을 구성해주는 어떤
토대가 된다. 최초 순간. 동시에 이 주체성은 소외된 주체성 타자적인 주체성으로 고착화된다.
이게 바로 첫 번째 얘기가 되는 거죠.
▲ 거울단계의 본질
아까 똑같이 인간의 욕망은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애초부터 인간의
욕망은 고정된 게 아니라는 얘기와도 똑같습니다. 그리고 욕망은 지극히 인간적인 현상이라는 말
과도 똑같죠. 나중에 라캉은 욕망과 욕구와 요구를 구별하는 데 이건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고,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염원이라든지 정념 같은 것들은 욕망이 아닙니다. 그리고 욕망은 흔히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처럼 이해가 되지만 사실은 그 대상을 타인도 똑같이 바라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집착을 하는 거지 타인들이 바라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무슨 얘긴지 알겠죠? 욕망
에 가치를 부여해주는 것은 타인이 만들어내는 시선이지 내 스스로 부여한 시각은 아니라는 거죠.
유행 같은 것을 생각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유행은 사물 자체가 부여한 가치가 아니라 그 시대가
만들어 낸 일종의 유행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다들 좋아하고, 입으려고 하고, 쓰려고 하고, 달고
다니려 하다 보니까 똑같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인간의 욕망을 타인적으로 고착화 시
키려는 게 거울단계의 본질인 거죠. 여기서 타인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아까 나르시시즘적인 본성으로서 생각을 합니다. 타인과의 어떤 긴장관계. 도덕이라는 것들. 윤
리의 법칙이라는 것들은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을 금지라는 형태를 통해
서 보여주기도 하죠. '살인하지 말라. 이건 어떻게 보면 우리의 공격성들을 은폐하기 위한 명
언일 수도 있어요. 마찬가지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에서 라캉은 짝폐, 두
블쌍블랑. 유사자와의 긴장과 갈등을 보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죠. 사랑해야
되니까. 왜냐면 나니까. 그렇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길 통해서 그 갈등관계가 완전히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긴장이 있는 거죠. 여기서 프로이트가 얘기한 양가성의 개념을 라캉이 인간적
인 관계에서 어떻게 발전시키는지 보면 굉장히 재미있어요. 거듭 얘기하지만 프로이트 얘기는 안
할텐데, 프로이트 얘기를 이해를 하지 않고서는 라캉이 왜 이렇게 바꾸는지를 생생하게 이해를
못합니다. 프로이트는 충동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양가성을 얘기했는
데,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미움과 사랑은 본질이 동일해요.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이 한동안
배신하면 아주 미워하고, 엄청나게 잔인하게 나오고 이런 걸 알 수가 있잖아요. 최근에 보면 SBS
에서 스토킹, 스토킹이 왜 심각하냐면, 모르는 사람한테 그러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헤어진 연인들에 벌어지는 스토킹은 거의 지옥이 따로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서로 좋아했기 때
문에 상대방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이 사람이 누구를 만나고 누가 친구고, 어딜 가는지 잘 알
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순식간에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드러나거든요? 타
자와의 관계가 이런 겁니다. 이건 나중에 라캉은 여자와 남자의 사랑의 관계에 대입을 시키죠.
여자와 남자는 시로 하나를 꿈꾸지만 사실은 사랑이란 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죠. 왜냐면 본질
적으로 너와 나의 사이는 쌍블랑의 관계기든요. 긴장과 갈등이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 언제나
사랑의 이면에는 또 하나의 칼이 있는 기죠. 그러기 때문에 사랑과 미움이 양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인간의 충돌이 아니라 상상계적인 관계가 본질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도식에서
보여 지듯이, 그래서 이 상상계적인 측은 A에서 S로 가는 것을 단절을 시키면서 동시에 왜곡 시
키는 지점이죠. 첫 시간에 무의식이 바로 여기에 깃든다는 얘기를 말씀드렸죠? 무의식이 상상계
적인 축을 거치지 않으면 무의식은 있어요. 상상계를 거치면서 왜곡이 되는 거죠. 그리고 인간적
인 관계에서 그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우리는 서로 듣고 싶어하는 얘기만 듣습니다. 상대방과
얘기할 때. 내가 듣고 싶어하고. 내가 기대하는 남은 상대방에게서 들으려고 그러지 그러다보니
까 오해가 생겨나고, 오해가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최초의 오해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오해에요. 더 정신분석이 더 강조하는 얘기는 타인과 나와의 오해가 본질이 아니라. 내가 나 자
신을 아는데서 오해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들이죠. 왜냐면 그건 거울적인 단계를 매개로 해
서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래서 나르시시즘은 동시에 오인과도 연결이 되는데, 이것은 불이의 말
장난을 가지고 얘기를 하죠. 이게 재귀동사인데, 나 자신을 안다는 얘기입니다. 이 둘을 붙여서
명사를 만들면 오해라는 뜻입니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은 오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불어를
갖고 말장난을 치료. 무꼬네트르를 합치면 메꼬네상스가 된다. 메꼬네상스는 '오해' 라는 말입
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것. 이게 최초 거울단계에
서 비롯되는 것들이죠. 그래서 이건 타자와의 관계인데, 타자와의 관계는 여기서 타자라는 말을
주목하셔야 되는데, 나를 압도하거나 나를 없앨 수 있는 그런 타자가 아닙니다. 바로 나의 이미
지이면서 동시에 이질적인 이미지가 바로 타자인거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게 바로 타자의 이미지인데, 그게 바로 거울의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타자는 동시에 내가 사랑할 대상이면서 나를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한데, 이건 그대로 거울상의 반영이라는 것들이죠. 그래서 주체의 비극적 운명은 뭐냐면 이런 자아의 분열상을 안고서 세계와의 관계와 타인과의 관계를 시작할 수밖에 없고, 끝끝내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저는 말씀드릴 때 시식에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데, 그러면 라캉이 이렇게 분류해서 말하듯이 번뇌와 고민을 끊고, 하나의 진리의 세계를 도달하는 것에서 얘기를 하냐 그러는데, 라캉은 그런 얘기를 안 합니다. 가능하죠. 메꼬네상스인데 그걸 벗어던
지면서 나의 어떤 완고한 자아를 벗어던지면 거기서 무념무상의 경지에 도달하냐. 절대 그건 아
니죠. 라캉은 그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얘기가 됩니다. 비관론자라고도 볼 수 있죠.
▲ 라캉과 근대적 주체
제가 햄릿의 대사를 잠깐 짧게 읽어드리겠는데, 왜냐면 이게 타자적인 그 두 가지 관계가 햄릿의
대사에서 잘 나타나요. 마지막에 햄릿이 결투를 하게 되죠? 궁정에 들어가서 클로디어스 왕이 제
안하는 대로 레어티스와 결투를 하게 되는데, 이 레어티스는 햄릿이 사랑했던 오필리어의 오빠이
면서 햄릿이 죽인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요. 아들이죠. 햄릿은 레어티스와 명예를 위한 결투에
들어가게 되는데, 결투의 직전에 햄릿이 레어티스에게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근데 이 찬사를 라캉은 과장이 아니라 거울적 이미지에 열광하는 원형으로 보죠. 사실 레어티스는 자기의 맞수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에 찬사를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건 과장이거나 상대방을 기
분 좋게 하기 위한 건 아닙니다. 물로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그걸 염두에 둔 건 아니지만 라캉은
그렇게 말을 한 거죠?
레어티스를 모욕하는 것이 햄릿이었던가?
아냐! 결코 햄릿이 아니었네. 그렇다면 누구지? 그의 광기지. 그렇게 따지고 보면 햄릿도 피해자
가 되는 셈이네. 그의 광기는 가여운 햄릿 자신의 적이기도 하네.
햄릿 : 내 무딘 검은 자네를 돋보이게 할 걸세. 레어티스 미숙한 나에 비하면 자네 솜씨는 밤하
늘의 별처럼 빛을 뿜겠지.
레어티스 : 놀리지 마십시오.
햄릿 : 아니야 정말이야.
여기서 레어티스의 찬사를 라캉은 햄릿이 하는 아부가 아니라 바로 레어티스에게서 자기의 모습
을 보는 거죠. 똑같이 죽은 자기의 아버지를 복수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거고. 레어티스
는 햄릿에 의해서 죽은 똑같이 자기 아버지. 그리고 햄릿 탓은 아니지만 햄릿 때문에 죽었다고
믿는 자기 동생의 명예를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거죠? 둘 다 덴마크 최고의 검객이라고 찬
사를 받는 사람들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둘은 라이벌이면서 서로를 보여주는 거울인거죠. 그
러다보니까 헵릿은 마지막에 레어티스를 향해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마지막에 보이게 되는 이미
지는 어떻게 보면 최초 상황에 똑같은 방향인데, 그 뒤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있죠. 둘 다 죽어야
끝나게 되는 거니까. 이렇듯 나와 타자의 관계는 우리가 상상계적인 우주 속에서는 절대로 해소
될 수가 없는 거죠. 오히려 그때그때 우리는 타인의 이미지에 대해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햄릿처럼, 동시에 그것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따라 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
이 이제 햄릿의 대사에서 보여 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아의 이미지는 한편으로는 구성하는 이미
지이면서 동시에 구성되는 이미지라는 것들이죠. 구성하면서 동시에 구성되는 이미지고, 바로 그
것이 거울 이미지에 상태입니다. 근데 라캉은 이 거울적 이미지가 데카르트 이후로 근대 철학에
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했던 주체가 바로 기술적 이미지의 반영이다. 라고 얘기를 하죠. 그래서
'철학 자체는 다 편집중이다.' 라고 얘기를 해요. 무슨 말이냐면 철학이라는 것들은 합리성과
이성을 통해서 세계를 자꾸 설명을 해보려고 하는데, 사실은 출발 자체에서 기술적 이미지에서
비롯된 건데 어떻게 세계를 견고하게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게 라캉이 철학을 비판하는 이유죠.
그래서 철학을 내던지는 게 아니라 철학의 의식적 주체를 뒤집고, 그 자리에다가 무의식적 주체
를 넣음으로써 철학적 주체가 감추었던 또 하나의 분열된 주제를 회복시키고 이렇게 함으로 해서
철학이 은폐했던 진리의 자원을 다시 정신분석이 일으킬 수 있다. 정신분석은 철학의 보완물이사
새로운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게 라캉의 생각이죠. 프로이트는 철학에 대해서 적대적이었고, 생
문학이나 의학에는 굉장히 가까웠어요. 강은 오히려 생물학이나 의학적 경향과 단점을 하고,
정신분석은 철학이나 예술에 더 가깝다고 보게 되죠. 이게 바로 라캉의 특이성이고, 그 당시에
주류 정신분석과는 대립되는 경향입니다. 사실은 강의를 통해서는 오늘날 편하게 얘기하지만 라
킹의 삶을 보면 주류에서 배척 되는 것은 사실 사회적인 죽음이나 마찬가지에요. 의사가 실지
로 우리 조직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대한의사협회와 관계를 끊을 거다. 거기서 나를 인
정해주든 말든 나 앞으로 회비도 안내고, 무관하게 활동할 거다. 이러면 사실상 의사에서 매장
도리 수가 있는 거죠. 라캉이 선택한 게 이거예요. IPA에서 단절이 되는 걸 볼사 하면서 까지도
자기 생각들을 포기하지 않은 거거든요? 그런 것들의 주된 이유는 IPA가 자아 심리학적 경향에
너무 치우쳐 있고, 또 IPA 1세대가 정신분석을 프랑스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했던 방법 중의
하나가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의 연관성을 굉장히 강조를 한 겁니다. 분석가가 되려면 정신의학을
먼저 배워라. 의학공부를 하고 생물학을 배워야 정신분석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정신분석은 대학에서 의학과 더 가까운 분야다. 라고 마리 보나파르트를 비롯한 1세대 프랑스 정
신 분석가들이 이런 경향을 굉장히 강조했어요. 라캉으로서 보면 이게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인거
죠. 그리고 프로이트가 자기 한계 속에서 벗어나려 했던 패러다임인데, 여전히 이걸 가지고 정통
프로이트라고 하니까. 나중에 라캉으로 보면 그건 프로이트 주의가 아닌 거죠. 그래서 53년 이후
에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라고 하면서 초기의 프로이트. 그리고 동시에 후기에 죽음 충동을 강조
했던 그런 프로이트로 돌아가면서 자아 심리학과 대비되는 또다른 정신분석을 만들려고 하게 되
죠. 그 때 중요한 근거로 삼게 되는 게 바로 철학인데, 바로 철학의 출발점은 이런 식으로 주체
에 대한 재해석으로부터 시작이 되죠. 물로 나중에 데카르트적인 주제는 다시 라캉이 복원을 합
니다. 거울단계에서는 데카르트적인 주체에 대해서 비판을 하게 되지만 나중에 가면 정신분석이
끝까지 걸고 갈 수 있는 주체는 결국 데카르트적인 주체다. 왜냐면 데카르트적인 주체는 단순한
철학의 주체가 아니라 근대의 주체이자 과학의 주체이고, 모든 이성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주
체조 동시에 그러면서 소외시켰던 게 바로 근대적인 주체이기 때문에 그 이중성을 제대로 드러
내 보여주면 된다고 라캉이 생각을 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