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讀>서울중앙지법의 삼학사(三學士)
삼학사(三學士)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중국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와 동시에
척화론(斥和論: 화평을 배척하고 끝까지 항전하자는 주의)을
주장했다가
결국
청나라에 잡혀가
모진 고문과 함께
참혹한 죽음을 당했던
척화파의 강경론자 세 사람
홍익한, 윤집, 오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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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세 분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중과부적으로 항복한 후
척화신(斥和臣)으로 찍혀서
청나라에 끌려갔으며
급기야는
심양(瀋陽)에 잡혀가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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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
청 태종 재위 13년에
청나라의 중건 3주년을 기념하여
홍타이지는
조선의 세 학사의
높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선양에
사당과 비석을 건립할 것을 명령했으며
특히 비석에는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렸다고 한다.
1932년
"삼한산두"(三韓山斗)라고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면서
선양의 춘일공원(春日公園)에 삼학사 유적비가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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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남한산성에는
삼학사를 모신 사당인
현절사(顯節祠)가 설치되어 있다.
매년
삼학사를 기리는 제례를 연다.
후일 송시열은
저서 삼학사전(三學士傳)을 통해
삼학사의 업적을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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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선고한 한성진 판사
https://www.chosun.com/national/court_law/2024/11/16/QN3NH2TNANHZ3JNK6NK3W35J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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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마냥 기쁨에 젖어
이 대표에게 유죄를 선고한
중앙지법 판사님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다.
중앙지법 세 분의 판사께
어떤 식으로 치하를 드려야 하나
생각해 보니
위의 삼학사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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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으며
기꺼이
죽음을 택했던 삼학사다.
고문을 가하기 전
홍타이지는
세 사람에게
전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그들은
결코 의기(意氣)를 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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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結審)의 날,
중앙지법에는 개딸을 비롯한
이재명의
폭력적인 지지자 6천여 명이 운집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저들의 생각과 달리
자칫
불리한 판결을 내릴 경우
반도(叛徒)로 변하여
난동을 부릴 수도 있었으나
우리의
중앙지법 삼학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정의(正意)의 판결(判決) 망치를
이재명 대표의 정수리에 내려치듯
두드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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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삼학사의 쾌거가
이것에 그친 것일까?
그렇게 평가한다면
세 분의 판사님들에게 크나큰 결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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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려친
정의의 판결 망치는,
수없이 남아 있는
이재명 대표의‘사법 리스크’ 결심 공판의
바로미터(Barometer)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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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170쪽의 머릿수로
공권력은 물론
검찰과 사법부를
자신들의 상노(床奴)나
마당쇠 취급하며
공갈과 협박으로
심지어
인격 유린까지 가하며
공무집행이
불가할 정도로 압박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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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지법의 삼학사는
이재명 대표를 비롯하여
170쪽의 머릿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정의의 길을
과감히 열어 재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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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의 삼학사(三學士) 여러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
그리고
이 대표의 남은 재판에도
또 다른
삼학사가 출현(出現)하기를 기대합니다.
by/오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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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학사 잘 보았습니다 진보 성향이라고 그릇된 판결은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