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②
이때 십만전륜이 정상에 도달한 듯 무겁게 동체를 흔들며 이내 비스듬한 십만철로의 경사를 타고 가공할 속력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망부석처럼 시립해 있던 혈포팔인이 일제히 쌍장을 십만전륜의 바닥에 처박으며 가공할 강기( 氣)를 폭출시키는 것이 아닌가?
"크흑!"
"크아악!"
돌연 처절한 비명이 십촌(十寸) 두께의 쇠바닥을 격하고 울리며 혈포팔인의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천정에 닿을 듯 솟구쳤다.
주희빈이 태연히 입을 열었다.
"금성. 어떤 자들인가?"
"예! 짐작컨대 은하태극삼십육가(銀河太極三十六家)에서 파견된 밀탐간자(密探間者)들로 사료됩니다."
"하하, 빠르기도 하군. 벌써 본대의 동정을 파악하고 간자를 붙이다니."
주희빈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때 자천릉은 혈포팔인의 신형을 직시하며 은은한 놀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군. 나는 전혀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저들이 간자를 처리하다니, 대체 저자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자천릉의 의혹을 눈치챈 듯 주희빈이 싱긋 미소를 떠올렸다.
"하하, 인사가 늦었군. 소개하겠네. 뇌황옥의 신주팔흉(神洲八兇)일세."
- 뇌황옥과 신주팔흉(神洲八兇).
천하무인들이 공포와 전율 속에 한없는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곳이 십팔만사천백와마루라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무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은 바로 뇌황옥이었다.
곤륜 경내의 살상(殺傷)이나 배반(背反)의 음모, 하극상(下剋上)의 반역죄 등을 범한 자들만을 수감하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유일한 뇌옥 뇌황옥.
지하 일만 장 깊이의 유황불 속에 위치하고, 하루에 꼭 팔만 사천 가지의 고통을 맛보며 어김없이 한 치씩 죽어 간다는 곤륜의 지옥(地獄).
그 뇌황옥의 여덟 명의 옥주(獄主)가 바로 신주팔흉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극랄하고 잔인한 여덟 가지 고문술을 지니고 있다는 팔인(八人).
그 고문술을 배울 때 고통이 너무 커 스스로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 내면서까지 익혔다는 그들은 모두 백마서열의 한 자리 씩을 차지하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천장원계에 소속되어 있는 뇌황옥의 옥주인 그들을 만화무대의 주희빈이 어떻게 포섭했으며 더욱이 수족으로까지 부리게 됐는지는 신비였다. 다만 그들을 수하로 포섭함으로써 주희빈의 십팔만사천백와마루 내의 위엄과 지위가 더욱 가공스럽고 엄청나게 인정되었던 것이다.
'이 자! 뜻밖에도 제법 쓸 만한 수하를 거느리고 있군.'
자천릉은 다시 한 번 신주팔흉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주희빈이 금성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본대의 군사(軍師)를 맡고 있는 반신기(半神奇) 금성이라 하네. "
"풋! 반쯤은 신(神)이 됐다고? 그렇다면 그대는 신(神)이겠군."
자천릉이 차갑게 조소를 터뜨리는 그 순간에도 십만전륜은 거산 아래로 가공할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십 수 개의 산봉들이 어깨 너머로 지나치고 촌각도 못될 사이에 광활한 지면(地面)이 눈 앞에 솟구쳐 오고 있었다.
"훗! 이번엔 호수(湖水)인가?"
"그렇지. 대곤륜의 영역은 워낙 광범위한 까닭에 중원오대호(中原五大湖)에 버금가는 저런 거대한 호수도 도처에 산재해 있다네."
십만전륜이 내리 꽂히고 있는 지면은 바다를 방불케 하는 넓디넓은 얼음의 호수였다.
헌데 사시장철 겨울이 계속되는 까닭에 빙호(氷湖)가 되어 있는 호반(湖畔)에는 실로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전장(全長) 오백 장은 족히 될 듯한 거대한 선박(船舶)들이 흡사 대해에 벌어진 거함 들의 열병식(列兵式)인 듯 장쾌하게 도열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박군의 옆에서는 철와차장이 그랬듯 역시 수백 명의 흑의인들이 분주하게 자재를 나르고 다듬으며 조선작업(造船作業)에 땀을 쏟고 있었다.
십만전륜은 막 호면에 내리꽂히려는 찰나 팽팽해진 십만철로를 타고 거의 수평에 가깝게 호수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훗! 산맥 속의 조선장이라 어째 좀 구린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하하, 구린 냄새가 아니라 사나이들의 야망의 체취겠지. 여기는 사해선청(四海船廳)이라고 한다네. 곤륜에서 이어지는 내륙수로(內陸水路)와 해외무역로(海外貿易路)를 관장하는 대곤륜의 선단(船團)을 만들어 내는 곳이 바로 이 사해선청이지."
- 사해선청.
그것은 대곤륜의 품에 웅크리고 있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거대한 힘과 원대한 야망을 상징하는 생생한 산 증거였다.
대륙 한 가운데 위치한 십팔만사천백와마루가 장강(長江)의 내륙수로와 해외무역로까지를 관장하고 있다면 그 영향력이란 불문가지의 것이 아닌가.
십만전륜이 호수를 지나자 어느덧 거대한 산의 중턱으로 십만철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호! 저 앞으로도 십팔만사천백와마루가 지나고 있군."
"그렇네. 이렇게 십만철로가 서로 교차되는 지점을 교선점(交線點)이라고 하지. 곤륜의 하늘에는 이런 교선점들이 일흔 일곱 군데가 있다네."
자천릉이 탄 십만전륜의 전면에는 세 줄기의 또다른 십만철로가 교차되듯 엇달리며 아득한 폭설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헌데 이때 십만전륜이 교선점을 통과하는 순간 하나의 검은 인영이 지붕 위에서 채찍을 뻗어 엇갈리는 철로에 걸치며 그 탄력으로 몸을 퉁겨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예! 빙궐(氷闕)의 철익비편(鐵翼飛鞭)의 수법을 쓰는 것으로 보아 철편(鐵鞭) 양공권(梁孔權)임에 분명합니다."
주희빈은 금성의 대답을 들으며 창 밖을 향해 권력(權力)을 발출하듯 일 권을 곧게 뻗었다.
"그럼, 죽여줘야지."
주희빈의 권중(拳中)에서 미세한 바늘 하나가 섬전처럼 뿜어졌다.
"크아악!"
검은 인영은 그대로 십만철로 위에서 처절한 비명과 함께 추락하고 있었다.
"하하, 만화세침(萬花細針)이라는 물건이네. 어린 시절 본좌와 고락을 같이 한 좋은 친구지."
주희빈이 권을 거두며 자천릉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주희빈의 팔뚝에 무수한 침흔(針痕)을 남기며 오늘의 주희빈을 태어나게 한 그 인욕(忍辱)과 자기 최면의 바늘이 이 순간 죽음의 암기로 변신하여 있었던 것이다.
지붕 위에서 주희빈 일행을 염탐하던 인물은 만화세침에 의해 십만철로 아래로 사라지고, 십만전륜은 교선점을 통과해 거대한 산중턱을 원을 그리듯 지나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눈 덮인 산중턱 곳곳에 커다란 마을(村)처럼 모여 있는 수백 채의 띠집(茅屋)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헌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수백 명의 흑의여인들이 베틀(織機)과 직조기계들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진 띠집의 내부에는 철골로 주조된 의탁(衣卓)들이 까마득히 늘어서 있었고 의탁 위에는 완성됐거나 완성되어 가고 있는 자(紫) 청(靑) 흑(黑) 황(黃)등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각색의 의상들이 질서정연하게 걸려 있었다.
"이곳이 바로 곤륜포전(崑崙布殿)이네. 본루의 칠십만 문도들이 입을 의복들이 지어지는 곳이지. 심지어는 사막을 넘어 대막이북(大漠以北)과 파사(巴沙) 등의 국가들과 교역할 금의(錦衣)도 만들어지고 있다네."
"후! 정말 어지간히도 끌어 모으는군. 이러다간 천하 전역을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땅이라 주장할 날이 멀지 않겠는데?"
"하하, 그것은 본루의 뜻이 아닐세. 대륙에는 자금성이라는 성역이 있듯, 곤륜에는 아니 무림에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라는 제 이의 성역이 있을 뿐이지."
"성역이라... 시대가 바뀐 지금에도 과연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순간 주희빈의 눈에 아주 미세한 파문이 빠르게 스쳐 갔다.
'그렇지. 그것이 나 주희빈의 가장 큰 의문이다. 허나 본루는 존재해야만 한다. 바로 나, 주희빈을 위해서.'
자천릉의 한 마디와 주희빈의 의문은 당금 천하를 휘감으며 흐르고 있는 엄청난 난세의 흐름(流)을 대변하고 있었다.
주희빈은 영락제의 씨에서 태어난 열 네 번째 비운의 서황자인 만화왕자임과 동시에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서열 구 위에 올라 있는 백마의 일 인이며 십왕벌의 핵심 인물이 아니던가?
헌데 그의 부친 영락제는 대명 천하에 더이상의 성역을 용납치 않고 관부의 최강 고수라는 자륭극에게 곤오풍우를 죽이라는 천명을 내렸던 것이니,
두 쌍의 부자(父子), 영락제와 주희빈, 자륭극과 자천릉, 그들의 행로는 천하 대세와 더불어 운명의 쌍곡선(雙曲線)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희빈은 감정을 지우며 산정 가까이의 고원(高原)을 손가락질했다.
"저곳이 만우육간(萬牛肉間)이라 불리는 곳이라네. 쉽게 말하면 본루의 푸줏간인 셈이지."
"쯧! 먹을 것 하난 착실히도 밝히는 집단이군."
자천릉은 냉랭히 조소하며 십만전륜이 막 스쳐가고 있는 아래 폭설이 차단된 고원을 내려다보았다. 수십만 근의 고깃덩이가 시뻘겋게 걸려 있는 기묘한 고원이었다.
사람은 없었다. 단지 보이는 것은 사오 리(里) 거리까지 아득하게 이어진 고기(肉)와 고기의 연속선 뿐이었다.
십만전륜은 이내 만우육간(萬牛肉間)이라 불려진 그 고원을 통과하여 거의 산정까지 치달려 오르고 있었다.
헌데 그때 돌연 또 한 번 십만전륜이 무언가에 걸린 듯 크게 진동하며 한층 배가된 속력으로 퉁겨지듯 산정을 거쳐 하나의 협곡 위로 치솟아 가기 시작했다.
"어? 오르막길에 왜 속도가 빨라지지?"
"하하, 종점(終點)이 가까와졌다는 표시이네. 지금까지 달렸던 탄력을 한꺼번에 뿜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지."
주희빈이 한 곳을 가리켰다.
"보게. 저 석산(石山)이 바로 오대불가사의의 일흔 일곱 교선점의 집결지인 십팔만사천만장석굴(十八萬四千晩長石窟)이라네."
"오대불가사의의 마지막?"
주희빈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높이가 무려 일천 장은 넘을 듯한 거대한 돌산 하나가 이끼와 눈발에 뒤덮여 칙칙한 회색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하, 저 석산은 아득한 태고 시대에 대곤륜산맥이 처음 바다 밑에서 융기(隆起)되어 오를 때 가장 심한 지층(地層)의 뒤틀림(屈曲) 작용을 받았던 곳이지. 해서 원래 칠층(七層)의 지층으로 되어 있던 산의 내부가 벌어지면서 무수한 천연동굴들이 벌집처럼 생겨났다네. 하여 저 산을 벌집(蜂巢)의 탑(塔), 곧 곤륜칠층봉소석탑(崑崙七層蜂巢石塔)이라고도 부른다네."
"흠! 어쨌든 지루하던 오대불가사의가 이제야 끝났군."
자천릉이 비웃는 듯 내뱉자 주희빈의 입꼬리에 보일 듯 말 듯 묘한 미소가 스쳐 갔다.
"하하, 그 마지막에 하나가 더 있어. 이제 육대불가사의로 변하고 있다네."
"?"
"그 마지막 육대불가사의가 나 주희빈이지."
"ㅋ! 그렇다면 이제 칠대불가사의가 되겠군. 나 자천릉이 일곱 번째가 될 테니까."
"하하하!"
주희빈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 십만전륜은 눈부시도록 빠른 속도로 협곡을 스쳐 회색빛 석산을 향해 충돌할 듯 돌진해 가고 있었다.
"응? 십만전륜이 그 만장 뭐라는 곳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지?"
"그렇네. 십팔만사천만장석굴은 모든 십만철로의 종점이면서 또한 이제 자네가 살인경주에서 승리한 대가로 본 만화무대의 명예를 걸고 들어 가야 할 곳이지."
"내가 그곳에 들어간다고?"
그 순간이었다. 돌연 십만전륜이 돌진해 가던 석산 속에서 또 하나의 십만전륜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오며 아슬아슬하게 자천릉이 탄 십만전륜을 비껴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금성. 어디에서 온 자들인가?"
"예! 남사산파(南死山派)의 입굴자(入窟者)를 수송해 온 전륜인 듯 합니다."
주희빈과 금성의 문답에 자천릉이 흠칫 시선을 또 하나의 십만전륜이 사라진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종점(終點)이라는 말이 어울리도록 아득한 먹구름과 찌푸린 곤륜의 하늘을 가르며 수십 수백 개의 십만철로가 뻗어 나와 석산 너머로 모여들고 또 뻗어 나가고 있었다.
더불어 멀리 몇 대의 십만전륜들이 누군가를 실은 채 가공할 속력으로 그 십만철로 위를 오가고 있었다.
광활한 대곤륜산맥의 동맥(動脈), 십만철로가 모여드는 집점(集點), 그것은 정녕 위대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자, 이제 들어가네."
주희빈의 짧은 음성이 떨어지는 순간 십만전륜이 석산 중턱에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꼭 한 대가 통과할 만큼 협소한 동굴 속으로 굉음과 함께 관통해 들어가고 있었다.
삽시간에 주위는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주희빈의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십팔만사천만장석굴은 본루와의 삼천 년 역사와 역대의 무학이 송두리째 잠들어 있는 사실상 본루의 모든 것이며 또한 가장 완벽한 영재 수련의 장(場)이네."
자천릉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자네는 도합 일백명(一百名)의 기재 중의 한 명으로 만장석굴에 입굴 하게 되는 것이지. 본대에서 살인경주를 거쳐 자네를 뽑았듯이 똑같은 방법으로 대곤륜백팔십일방계에서 선발된 마흔 명과 태대각께서 천거한 서른 명, 천장원에서 추천한 서른 명을 합해 일백 명의 입굴자가 구성된다네."
"풋! 영광스럽기도 한 일이군."
"하지만 지나치게 좋아할 필요는 없네. 왜냐하면 지금 자네가 들어가고 있는 만장석굴은 영재 교육장인 동시에 또한 가장 어려운 죽음의 관문이기 때문이지. 이에 비한다면 처음 자네가 통과한 살인경주는 겨우 예선(豫選)에 불과하다고 할까?"
"이곳이 말하자면 본선(本選)이란 말이지?"
"그런 셈이네. 단지 장소가 다르고 인물들이 절대기재들이라는 사실이 다를 뿐, 방법은 살인경주와 다를 것이 없네. 만장석굴 내에서는 어떤 수단으로 어떤 자를 죽이든 모든 죄가 면책되니까!"
주희빈이 신비한 미소를 흘렸다.
"수업 기간은 오년(五年), 그것이 끝난 뒤 나오는 자가 몇 명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네. 아니 한 사람도 없을 수도 있지. 많은 적을 죽일수록 자신의 서열이 올라가고, 또 소속된 계파의 힘을 신장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백 명의 입굴자들은 사력을 다해 상대를 죽이게 될 것일세. 이것이 삼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본루의 영재 교육 방법이네."
"풋, 아무튼 죽이면 죽일수록 좋다는 말이지? 훌륭한 규칙이야."
주희빈이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하하, 하지만 만장석굴이 꼭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곳만은 아니라네."
그는 자천릉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만장석굴은 중원인들의 무덤(塚)이라 칭해질 만큼 엄청난 중원 무학의 보고인 동시에 역사가 존재하는 모든 기연들의 창고(倉庫)와도 같은 곳이지. 해서 이곳의 기연을 수습하고 살아 나오는 자에게는 본루 최고의 특혜가 마련되어 있다네."
"중원인들의 무덤(塚)?"
"그건 이제 들어가 보면 알게 되는 일이네. 본좌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자네가 살아서 나오면 서열 이백위(二百位) 이내의 인물로 인정되어 단 번에 팔백 위의 서열을 뛰어오를 수 있다는 사실 뿐이네."
"서열 이백 위라... 재미있는 조건이군."
그때 무섭도록 어두운 동굴 속을 질주하던 십만전륜이 돌연 굉음을 토하며 멈춰졌다.
"다 왔네. 여기가 바로 십팔만사천만장석굴의 진정한 입구일세."
십만전륜은 석산 한 가운데를 도끼로 깎아 버린 듯 날카로운 천연의 석벽 앞에 멈추어 있었다. 석벽 중앙에는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을 뿜어내는 하늘 천(天)자가 거대하게 새겨져 있고 그 주위로 혈포를 걸친 두 명의 무인이 장승처럼 시립해 있었다.
'아까 신주팔흉이라는 자들의 혈포에 새겨졌던 호랑이의 문양이 저들의 가슴에도 수놓아져 있다. 허면 저들도 백마의 인물?'
자천릉은 주희빈을 따라 십만전륜을 내렸다.
"사대주를 뵙습니다."
"오셨습니까, 사대인!"
두 혈포인이 공경스럽게 포권하며 허리를 접었다.
"봉아탑(蜂衙塔)의 수석호령(首席護令), 빙해검탑(氷海劍塔) 목한설(木寒雪)이 사대주를 뵙습니다."
"차석호령(次席號令) 화염산(火炎山) 차륭( 隆)이 사대인께 인사드립니다!"
- 봉아탑.
대곤륜백팔십일방 중 핵심방파의 하나로 십팔만사천만장석굴의 내외(內外)를 총괄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곳. 이들 두 혈포인이야말로 자천릉의 짐작대로 백마 중의 인물이며 봉아탑의 호탑사무(護塔事務)를 관장하는 고수들이었다.
"하하, 조금 늦었소. 이 아이가 본대를 대표하여 만장석굴에 들어가게 될 것이오."
주희빈이 미소하며 자천릉을 가리키자 혈포인들의 싸늘한 시선이 자천릉을 향했다.
자천릉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훗! 제법 차가운 눈빛이야, 한 가닥하겠군.'
이때 왼쪽에 섰던 지극히 차갑고 강팍한 인상의 사내, 빙해검탑 목한설이 한 벌의 청포(淸泡)를 들고 자천릉에게 다가왔다.
"너는 이제 이 청포로 갈아입고 본 굴에 들어가게 된다. 일백 인의 입굴자를 위해 곤륜포전에서 특별히 제작된 옷이지. 또한 이 청포는 오 년 뒤 만장석굴에서 살아 나오는 자의 신분을 상징하게 된다."
자천릉이 묵묵히 청포를 받아 드는 순간 목한설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아울러 너는 청포를 바꿔 입으면서 지니고 있는 모든 소장품들을 꺼내 놓아야 한다. 입굴 후 자신을 지킬 병장기 이종(二種)을 제외하고 아무거나 휴대할 수 없다. 그것이 본 굴에 입굴 하는 자의 관례다."
"소지품을 내 놓으라고?"
"내 놓는 것이 아니라 보관시키는 것이다. 잃어버릴 위험은 없다. 내게 맡긴 물건이 분실된다면 나의 목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흠! 그렇다면 그대의 목이 백 개쯤은 있어야겠군."
자천릉은 머뭇거리지 않고 등에 매고 있던 보퉁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좌중의 시선이 커다란 보퉁이로 몰렸다. 자천릉이 기물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먼저 붉고 푸른 두 줄기 눈부신 보광이 주희빈과 혈포사내들의 시선에 쏘아 들었다.
"그것은?"
"놀랍군. 자네가 난세십승의 이국십보 중 청룡소와 홍황적을 갖고 있었다니!"
자천릉이 맨 처음 꺼내 놓은 물건은 바로 청룡소와 홍황적이었던 것이다. 잇따라 자천릉의 손에서 계속 자린벽슬과 설상루, 팔타단창 등 난세십승의 이국십보가 차례로 쏟아져 나왔다.
"이 아이가 난세십승의 이국십보를 모두 독점하고 있는 장본인이었다니."
"자네는 뜻밖에 좀 복잡한 인물인 것 같군."
좌중의 인물들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빨간 고추잠자리, 홍익청차가 던져지고 그 위를 라마성불삼계법품이 든 주머니가 둔중한 음향과 함께 쏟아졌다.
"고추잠자리의 공포, 충왕 천지청군 아사달의 유물이!"
"저것은 달라이아수백팔마라혈염주와 삼십삼천불연환대선장! 놀랍군! 대원을 지배했던 라마성불삼계법품까지 자네의 손에 있었다니!"
멍청해진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주희빈과 목한설과 차륭은 연이어 라마교 최후의 유산인 제국보림장경대전도와 홍앵십이난도, 패각비도, 칠채홍우, 천리화엽산유화 등, 그들로써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기물들이 쏟아지자 그만 탄성을 터뜨릴 것도 잊고 있었다.
'이 꼬마가 이렇게 많은 기보를 가지고 있었다니, 음! 이 아이의 배경이 궁금하군. 살인경주에 원래 참가했던 아이가 아니라는 보고가 있었는데, 누가 이 아이를 본루에 침투시켰단 말인가?'
'자천릉, 이 아이는 좀더 자세히 정체를 조사해 둘 필요가 있겠군!'
목한설과 주희빈의 뇌리를 엇갈리며 스쳐가는 상념이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즐감하며 노고에 감사합니다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