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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바뀌다(換)
선선함이 후덥지근하게 변한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6시를 알리는 멜로디가 어김없이 울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느라 무진 애를 쓰는 것은 비단 이 소녀뿐만은 아닐 것이다.
여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평범한 17세 소녀들이 그러하듯 아직까지 졸린 두 눈을 비비는 그녀 또한 학생의 본분을 위해 기어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아직까지 정신은 몽롱하고 온몸에 기운은 쫙 빠져있는 것이 간밤에 격한 꿈을 꾼 것은 아닐까-의심해 본다.
소녀는 아담한 자신의 방 한쪽에 위치한 옷장에서 365일 중 휴일을 제외하고, 방학을 제외하고,기타 질병으로 인한 조퇴 혹은 집안의 경조사에 의한 결석 등 피치 못한 사정이 아닌 이상 하루의 약10시간 이상 착용하고 있을 의복-즉, 교복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라는 고지식한 사고를 이어가는 학교의 교칙에 의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입는 치마는 벌써부터 허벅지에 달라붙어 새삼 여름의 더위를 찜찜하게 일깨워준다.
그래도 다행이면 다행인 것이 두발의 자유라는 것이랄까.
소녀는 결코 머릿결이 좋다고 할 수 없는 허리까지 정성스레 기른 새카만 생머리를 풀어헤친 채 방밖으로 나선다.
오늘은 간밤의 격한 꿈에 지쳐버렸는지 머리 감는 거사(?)는 생략하기로 하고 간단하게 세수와 양치만으로 몸단장을 끝낸다.
거실로 나와보니 평일 오전에는 늘 그랬듯이 아버지는 신문을, 어머니는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고 전생의 철천지원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2살 위의 오빠는 소세지 볶음을 집어먹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일어났냐?"
"밥 먹어라."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바뀌지 않는 아침의 대화였다.
"오-마이 시스털~."
"아 더우니까 들러붙지 말라고. 아 뭐야!! 어따 닦아!"
소녀를 포옹하려 했던 것은 속임수였고 소세지 볶음을 먹던 손을 닦기 위해 오빠라는 작자는 간계(奸計)를 펼쳤다.
당하고 가만히 있을만한 성격의 소녀가 아니었는지라 존경하옵는 오빠의 복부에 고이 접은 주먹을 꽂아본다. 여동생의 깜찍한 앙탈에 오빠는 크게 만족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인다.
"오빠는 매우 아프다, 마이 시스털!!"
"좀 닥치라고. 아...아 배아파. 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
"맞은 건 내 배인데 왜 니가 아프냐?"
"어제...아으씨...거기 딱 있어!"
급작스러운 장(腸)운동에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하루 한번 상쾌함을 가져다 주는 종류의 변(便)은 아닌듯하다.
또한 한번의 발사로 끝낼만한 것이 아니었는지 소녀의 애달픈 신음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덕분에 머릿속을 맑게 해주는 하루의 원동력인 아침밥을 거르게 된 소녀의 등교길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터덜터덜.
같은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먼저 학교로 출발한 오빠에 대한 분노를 삭히며 익숙한 길을 걷는다. 중학교때 마냥 놀기만 한것은 아니었는지 소녀는 자신이 원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자신의 오빠가 다니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었지만 집과 거리가 가까워 끔찍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이혜령!"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소녀는 반응하여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친숙한 얼굴 셋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부터 왜 죽을상이냐?"
검은 뿔테를 착용하고 앞머리를 옆쪽으로 쓸어 넘긴 갈색머리의 소녀가 심기불쾌의 절정을 달리고 있는 혜령의 표정이 신경쓰였나 보다. 그 얼굴 꼬라지의 원인을 재차 묻자 혜령은 간단하게 자신의 현 상황을 내뱉어준다.
"똥 마려."
씹어뱉듯이 내뱉은 한마디는 세 소녀의 얼굴에 대소(大笑)를 자아낸다.
"저 기지배는 변비와는 담쌓고 살거야. 부럽다. 난 요즘 변비끼가 좀..."
"소희 너 벌써 삼일째 아니냐? 약이라도 먹어봐야 하는거 아냐?"
"말도 마. 약도 써봤지. 도통 듣질 않아."
"아니 입으로 먹는 약 말고."
"입 말고...헐. 미란이, 니년의 머리는 좋은 머리다. 내일 한번 해봐야겠어."
다짐하는 단발머리의 소희라 불린 소녀는 비장하게 마음 먹는다. 덕분에 다시한번 큰웃음을 내뱉는 소녀들.
그녀들의 곁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잠시 시선을 두었다 이내 관심을 덮는다.
한창 발육기인 17세 소녀들의 낭랑한 웃음소리는 가끔 소음공해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본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대화에 집중한다.
"집에서 싸고 오지."
"이미 한탕하고 왔거든? 이건 니들이 부러워하는 하루 한번 쾌변이 아니라 탈나서 그런거야."
"혼자 뭐 맛있는걸 먹었길래 배탈이냐."
검은 뿔테의 미란이라 불린 소녀가 안경을 고쳐쓰며 묻는다.
"아오 진짜...내가 맛있는 거 먹고 이러는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아 짜증나. 어제 말이야..."
혜령의 슬픈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때는 지난 밤으로 돌아간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혜령은 미리 집에 와 있는 오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새끼 오늘 야자 띵깠구나!를 쉬이 짐작할 수 있던 혜령은 피곤한 몸을 이끌어 소파에 기대었다. 옷 갈아입고 씻고 해야지 하는 마음은 있지만 따로 노는 몸은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다.
딱 오분만 이러고 있자 하는 혜령의 몸은 글쎄, 과연 오분만일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소파 위에 아예 퍼질러 눕고 말았다.
"야야, 여기서 자지 말고 니방 가서 자."
"자는 거 아니거든?"
"꼬라지가 딱 잘 폼 이구만."
"생각하는 거거든?"
"퍽이나."
오빠라 쓰고 웬수라 발음하는 존재는 샤워를 막 끝냈는지 머리칼에 촉촉히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 상태에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대었으니 머리칼 끝에 방울방울 매달려있던 물기는 단숨에 혜령의 싸다구를 때릴기세로 떨어져내렸다. 단숨에 기분이 나빠진 혜령은 짜증을 확 내었고 오빠는 냅다 부엌으로 도망간다.
따라갈 기운도 없었던지라 그대로 눈을 감고 만다.
그대로 잠이 들락말락한 상태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혜령 본인의 생각으로는 자신의 인생에 크게 도움은 못될 지언정 방해나 안되면 다행인 오빠라는 존재가 어쩐일로 기특한 짓을 하는게 아닌가.
"야-. 이 우유 마시고 정신차려서 니방 가서 자."
"오빠가 웬일이냐."
마침 갈증이 있었던지라 혜령은 순순히 건내 준 컵을 받아 우유를 시원하게 마셨다. 우유가 미지근하다 느껴졌지만 그러려니 하며 단숨에 컵을 비웠고 몽롱한 상태에서 씻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내내 혜령은 분통하고 원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대없는 설사병에 화장실을 들락거린게 벌써 여섯번!
혜령은 설마하고 부엌으로 달려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우유가 없다. 싱크대 위를 살펴보았다. 500ml짜리 빈 우유갑이 있었다. 전날 밤에는 없었으니 이것이 자신이 먹었던 우유를 담고 있던 통이 분명하렷라. 부엌불을 켜고 우유 상단에 적혀있는 숫자를 읽어보았다.
"아 씨브아알...."
유통기한이 일주일은 지나있었다.
"캬하하하하하하하하!!!"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웃음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혜령의 가슴아픈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혜령의 얼굴은 더 굳어진다.
"웃기냐? 응? 재밌냐? 앙?"
"헉헉..아 나죽어. 진짜 너네 오빤 대박이다."
요즘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즐겨 하는 머리스타일인 상투머리-머리를 높게 묶어올린 머리. 약간 헐렁하게 묶어서 옆머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하는 것이 포인트다-를 한 소녀가 숨을 헐떡이며 웃음으로 인한 후유증을 호소한다. 다른 검은 뿔테 안경소녀나 변비에 고달파 하는 소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희들이 친구냐? 나는 지금 밤새 헐어버린 나의 똥꼬가 쓰려 죽겠거늘..."
"크하하하하하하!!"
까칠한 휴지에 여러번 쓸린 항문에 미안함을 가지고 있던 혜령은 친구들의 이런 반응이 영 달갑지 않았다. 더욱이 다시 한번 뱃속의 장이 길게 용트름을 하자 더이상 못 버티겠는지 다급하게 한마디 남기곤 서둘러 학교 건물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나 또 신호 온다. 먼저 간다!"
그 한마디에 혜령의 세 친구들은 눈에 눈물까지 비치며 열렬히 배웅한다. 본인들도 어서 교문안으로 들어서야함을 잊은 듯 한참을 웃더니 겨우겨우 진정해본다.
"혜령인 말이야-."
변비의 선두주자 소희가 웃느라 지친 자신의 입주변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운을 띄웠다.
"얼굴은 참 예쁜데 말이야. 여자인 내가 봐도 참~이쁜데 말이지."
상투머리의 세미가 말을 받는다.
"입만 안열면 청순가련형이지. 중학교때도 남자애들한테 인기 많았잖아."
"응 그치. 입만 안 열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는 미인이지. 입만 열면 애가 저질이 돼."
"풉! 미란아. 그건 좀 심했다. 저질이 뭐야, 키키킥."
"그래. 좋게 말함 털털한거고..."
나쁘게 말함 저질인건가-...
혜령은 초,중 동창인 절친한 친구 셋이 자신을 어떻게 매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학교 안 여교사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있었다 전해진다.
혜령의 오늘은 참으로 새벽녁부터 고달프기 짝이 없는 듯 하다. 그래도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 학교가 일찍 끝나는 것은 당연하고 야간자율학습도 없는 날이었다. 혜령은 얼른 집에 가서 전날 못잔 잠을 푹 자리라 다짐했다.
이제 한 시간만 더 버티면 안락한 침대를 향해 달려나갈 수 있으리라. 그러한 생각이 들자, 쉬는 시간이 다 끝나가도 아쉽지 않았다.
"-그런데 혜령아, 쟤 말이야."
세명의 친구 중에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반인 단발머리의 아담한 몸, 귀여운 얼굴의 소희가 아까부터 혜령의 옆자리에 앉아 조잘대고 있다.
"누구?"
"김재하...쟤~"
혜령은 소희가 눈짓으로 가르키는 곳을 흘긋 쳐다보았다. 창가쪽에 앉은 자신과는 반대로 복도쪽 자리에 앉아 있는 남학생이 보였다.
잘생긴 얼굴에 훤칠한 키 때문에 입학초부터 간간이 같은 반 여학생들의 이야기 소재거리가 되어온 존재였다.
혜령은 별 관심없는 나른한 표정으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희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더니 비밀이야기를 말하듯 속삭인다.
"쟤네집말야~, 무당집이래."
"...그거 확실한거야?"
지그시 쳐다보는 혜령의 눈을 피하며 소희가 입을 오물오물거린다.
"소문이 그래, 소문이."
"그럼 아닐수도 있겠네."
"에이-. 소문이 괜히 나겠어? 확실히 쟤 좀 특이한 구석이 있잖아. 애들하고 잘 못어울리는 것도 있고 가끔 엉뚱한 소리도 하고...하늘의 뜻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별로 관심있는 이야기가 아닌지라 혜령의 반응은 싱거웠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남이사 무당집 아들이던 재벌집 딸이던 무슨 상관이냐는 말에 소희는 쌜쭉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날름인다.
"됐다, 됐어. 너랑 무슨 얘기를 하겠냐? 똥이나 싸고 와."
"이미 안정기가 찾아왔다네 친구여. 삐졌냐?"
"이런 일이 한두번이니? 주위에 관심좀 가져라. 모처럼 잘생긴 남자애가 같은 반이 되서 눈 좀 호강하려나 했더니 무당집 아들이라는데 안 아쉽냐고. 요즘 우리반 여자애들 그거때문에 김 팍 새고 있는거 너만 모른다?"
그게 아쉬워할 일인가.
집안이 무당이라고 그 자식까지 무당이겠나? 그것 때문에 김이 팍샌다는건 또 뭔지. 역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그저 말뿐인가보다.
혜령은 화재가 되었다는 남학생을 다시 한번 지그시 쳐다보았다가 마지막 교시의 시작을 알려오는 종소리를 듣고는 곧 시선을 거두었다.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소희에게 끝나고 보자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지루한 수업이었지만 곧 집에 가서 뒹굴수 있다는 상상을 하니 50분의 시간은 예상외로 빨리 지나갔다. 땀을 흘리며 열심히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시키고자 했던 선생님의 노력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종례도 짧았고 청소당번도 아니었다. 혜령은 가벼운 마음으로 책가방을 챙겨 소희와 함께 교실 뒷문으로 향했다. 미란이와 세미네 반은 아직 종례가 끝나지 않았는지 언제나 뒷문에 서서 서성거렸을 그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혜령과 소희가 그녀들의 반 뒷문에서 서성거려야 할 판이었다.
"엇."
연신 조잘대는 소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뒷문을 막 나설 때였다.
혜령의 발 앞으로 걸레 하나가 툭 떨여졌고, 고개를 올려다 보니 교실복도쪽 창틀 위에 앉아있는 남학생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 소희와 나눈 이야기의 소재가 된, 무당집 아들 타이틀을 거머쥔 김재하였다.
그는 씨익 웃으며 혜령의 발에 떨어진 걸레를 가리켰다.
"미안한데 그것 좀 주워줄래?"
다른 남학생이었다면 '야, 걸레.' 하고 사과는 커녕 짧은 말로 거만하게 요구했을 텐데 그는 정중하게 부탁한다. 혜령은 그의 예의바름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걸레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넘겨주려던 찰라-,
'찾았다-!'
순간 아찔함이 밀려와 혜령의 몸이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소희가 간신히 받쳐줘 넘어지진 않았지만 잠시 눈앞이 깜깜해지며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온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고개를 저으며 두눈을 깜빡거려본다.
다행히 아찔함도, 닫혔던 시야도 금새 트였다.
"혜령아, 왜그래?!"
걱정스러운 소희의 물음이 들려왔다.
혜령은 가볍게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빈혈인가봐."
"뭐? 니가?"
"그 썩은 표정은 뭐냐?"
"글쎄. 믿지 못할 현실에 대한 부정?"
"뭐래."
"난 널 그렇게 연약한 아이로 키운적이 없는데."
누가 누굴 키웠냐고 반박하던 혜령은 여전히 손에 들려있는 걸레와 자신에게 걸레를 달라며 손을 내밀고 있는 그를 인지해내곤 '미안'하고 한마디 던져준 뒤 걸레를 넘겨주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창틀 닦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지그시 재하를 바라보니 확실히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뽀얀 피부는, 이맘때쯤 학생들에게 자주 보이는 여드름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 얼굴이 미소를 지으니 과연 여자애들이 난리피울 만도 하다.
그를 잠시 감상하던 혜령은 이내 관심을 거두고 다시금 소희와 함께 미란과 세미의 반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 그녀의 발을 붙잡은 것은 창틀을 열심히 닦고 있을 그의 목소리였다.
"아, 이혜령!"
혜령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반응한다. 아까보다 더 아슬아슬하게 창틀에 올라타 있는 재하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집 밖에 안나가는게 좋을 거 같아. 계속 여기 있고 싶으면-."
이건 또 뭔 소리야.
"뭐?"
그의 말을 못들어서 반문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의도가 궁금하여 되물은 질문이었지만 그는 그저 웃으며 교실안쪽으로 몸을 넣고 말았다.
소희가 옆에서 ,
"역시 이상한 애야, 소문이 사실인가봐"
하고 속닥였고 혜령도 괜시리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신경을 꺼버렸다.
그런 걱정 안해줘도 그녀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 저녁식사까지 혹은 다음 날 아침까지 잠이나 잘 계획으로 밖에 나갈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미란과 세미의 반도 종례가 끝났고 우르르 빠져나온 그녀들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잡다한 이야기 및 소음공해를 일으키며 하교길을 걸었다.
"아, 졸려-."
드디어 집에 도착한 혜령은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아무데나 던져놓고 침대위로 몸을 날렸다. 구겨지는 교복따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 것만 같았다.
교복을 다리는 것이 누군지나 알고 저러는 것일까! 만일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지금 이 모습을 보았다면 궁둥이를 걷어찼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의 어머니는 외출중이었다.
아아! 이 폭신하고 안락한 기분!
그녀로서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구름 위의 신선(神仙)이 된것 마냥 행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은 느닷없이 나타났다.
"마이 시스털~. 오예 베이붸~."
저 목소리는 틀림없이 혜령의 모든 스트레스의 원인이자 인생의 웬수인 오빠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저렇게 혀꼬인 발음으로 부른다면 십중 팔구 귀찮은 일이 벌어지리라.
혜령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는 척을 해본다.
"뭐하냐?"
지금 이렇듯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으면 과연 무얼하는 걸로 보이는 것일까. 뻔히 알면서 묻는 오빠의 말에 친절히 '나 자려고 누웠소-'하는 답변은 쓸데없는 친절이라 생각되어졌다.
"자냐?"
이 질문 역시 답할 필요가 없었기에 혜령은 어서 저 인간이 자신의 성역(聖域)에서 나가주기를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안자는거 다 알거든? 나가서 놀자. 심심하다."
저 인간은 같이 놀 친구도 없단 말인가! 얼마전 생일이랍시고 우르르 몰려와 식신강림의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간 친구들은 다 뭐였단 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잠을 설쳐서 이러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
한바탕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러다 졸음이 싹 달아날거 같아서 조용히 무시해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오빠란 작자는 그냥 웬수가 아니었다. 무언가 주섬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이불이 젖혀지고 혜령의 입과 코를 막는 천뭉치가 느껴졌다.
흡!하고 눈을 떠 반사적으로 호흡기관을 막는 천뭉치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소릴 빽 지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 본다.
"이 인간이!!! 어따 양말을 쑤셔넣어-!! 나가, 나가란 말이야!!"
"나가 놀자잉~"
끔찍하게 윙크를 날리며 애원하는 오빠의 모습에 살심이 일었다. 생각만 같아선 저 주둥이를 길게 늘려 잡아서 ‘다 같이 돌자 동네한바퀴~♪’스킬을 시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러지 못할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 졸립다고. 잘꺼야. 어서 나가. 제발 나가."
"뭐하고 놀까? 농구? 그래, 간만에 슛내기하자. 지는 사람이 아이스크림 사는걸로. 넌 2점슛 쏘는 곳에서 하고 난 3점슛 하는 곳에서 하고. 어때?"
"잔다고."
"가자~가자~얼른 일어나."
"잘거라고."
"옷갈아입고 나와~."
"잔다니까."
"내가 갈아입혀주리?"
"......으아아아악!!으어아아아그어거으억!!!"
이어지는 혜령의 하이킥은 안타깝게도 표적을 놓치고 말았다. 웬수같은 오빠는 혜령의 일격을 피한뒤 재빨리 거실로 도망쳐 버린것이다. 이미 약이 오를때로 오른 혜령은 잠이고 뭐고 이미 다 사라져버린 욕구에 미련을 버린 채, 독오른 표정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늘 그렇듯이 한참 동안이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여졌고 오늘도 역시나 먼저 지친 혜령이 패배를 시인하여 망할 오빠에게 질질 끌려나가고 말았다.
오빠는 휘파람을, 혜령은 길다란 함숨을 쉬며 공원을 향해 걸었다. 바람이 꽤 부는 것이 제대로 공이 날아갈거 같지 않다.
"갑자기 바람이 부냐."
"오빠가 재앙덩어리라서 그래."
"우리 동생이 요즘 안맞었어. 그치?"
"그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어."
남매의 우애를 한껏 뽑내며 서로간에 시선을 나눈다. 그들의 두 눈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잠시,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휭휭 거리는 소리와 함께 곧 숨쉬기가 힘들것 같은 세기로 바뀌었다.
바닥을 어지럽혔던 각종 쓰레기들이 소용돌이치듯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혜령은 눈안에 먼지가 들어간듯 눈물이 고여옴에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야, 안되겠다. 집에 가자."
그녀의 오빠역시 두 눈을 제대로 뜰수 없는지 한손으로 시야를 반쯤 가리며 혜령을 재촉했다. 하지만 바람은 그들이 그대로 자리를 뜨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더크게 불어대며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휭휭-!!!
귓가를 울리는 바람소리 때문에 오빠가 뭐라뭐라 외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로 그대로 주저앉았다. 계속 서있다간 몸이 날아가버릴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학교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금 혜령의 머릿속에 울렸다.
'찾았다!!'
혜령의 몸이 무너졌다. 가위에 눌린것 마냥 푹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깜깜했고 속이 울렁거린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이 이대로 죽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밑으로 툭 떨어지는 놀이기구를 탄 듯 아찔한 느낌과 함께 무언가에 끌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시야도 트였다.
'헉!'
분명 입으로 내뱉은 소리는 마음으로 울리는 듯한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쓸 틈이 없었다. 자신은 여기 있는데 자신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눈앞에 쭈그려 앉아있는게 아닌가! 쭈그려 있는 자신의 옆에서 연신 오빠가 뭐라뭐라 소리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뭐, 뭐야? 이게 말로만 듣던 유체이탈?
혼란스러움에 혜령은 정신이 없었다.
그와중에 무언가가 그녀의 몸...이라 할지 정신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애매한 상태의 그녀를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어어?
하는 사이에 자신으로 보이는, 아니 자신의 몸이 확실한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 발버둥을 쳐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죽는거야? 망할 오빠 때문에 농구하러 가다 죽는거냐고!!’
아직 그녀의 나이, 앞날이 창창한 17세. 그런데 죽다니…그것도 원인불명의 의문사로 죽다니!! 인정할수 없었다. 혜령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육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무진애를 썼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안쓰럽게도 실상은 점점 멀어져가기만 할뿐 이었다.
‘이게 뭐냐고!! 놔! 날 보내줘-!!!’
누구에게 외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외쳤다. 여전히 소리가 아닌 울림으로 들리는 외침이었지만 계속해서 외쳤다. 그러던 그녀의 시야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잡혔다. 그것은 멀어져가는 자신과는 다르게 혜령의 육체에 춤추듯 일렁이며 다가가고 있었다.
이건 또 뭐란 말인가!
혜령은 다시금 있는 힘껏 소리쳤다. 저 희끄무레한 것이 자신의 육체로 향하는 것이 영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소리를 들었을까? 그것이 뒤를 돌아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혜령은 다시금 놀랐다.
희끄무레한 것에 형태가 잡히고 보여진 것은-...
자신과 똑닮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다만 머리길이라던가 분위기가 묘하게 틀렸다. 그 알수없는 존재는 슬픈 눈으로 혜령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듣는 것 만으로도 눈물이 고일듯이 슬픈 울림이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이런 의미가 담긴 울림이었으리라.
'미안해요-.'
그와 함께 혜령의 의식은 끊어져 버렸다.
대한민국의 어느 7월 오후.
급작스러운 기상이변을 사람들은 떠들어댔지만 사건은 금새 잊혀졌다. 누구 하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며...이날은 그저 갑작스럽게 바람이 거세진 날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저 그렇게...
첫댓글 와!!재미있어료!!!
얼레...댓글을 달아주실 줄이야(감동) 기분 좋아서 오늘 한편 더 쏘고(!) 갈께요^^감사합니다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나는 추천이다!!!!하하하하핳하하하하하
헐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