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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水國)의 왕이 기거하는 해황궁(海黃宮).
금일 조례(朝禮:조정의 관리들이 아침에 궁궐에 모여 임금을 뵙던 일)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시작되었다.
회의용임을 뚜렷이 드러내듯 탁자는 길었으며 그 상석에는 미간에 깊은 도랑을 그어놓은 인물이 이마를 짚고 좌중을 둘러본다.
그는 이제 18세나 되어 보였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 아니 황송하옵게도 젊은 수나라의 왕, 수왕(水王) 현류(賢留)였다.
어깨 조금 밑까지 오는 검푸른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흩트려놓고 아침부터 연신 자신의 사생활을 참견하는 늙은이들의 잔소리는 들어 줄만한 것이 못됨에 그의 기분은 저조하기 그지없었다.
"전하, 성혼(成婚)이 이루어진지 어언 2년.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것은 어찌된 일이온지요."
"하루라도 빨리 후사를 보시어 나라의 안정을 꾀하여 주시옵소서!"
한 몇 일 잠잠하다 싶더니만 또 저 소리다. 마음에 없는 혼인도 저 늙은이들의 지긋지긋한 상소(上疏) 다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건데 이제는 후사라?
"지금 짐의 다스림이 부진하여 나라가 안정치 못 하다는 거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줄은 알지만 괜히 심통이 난 현류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곧 후회하는 마음이 물씬 밀려들었으니...저 노망난 늙은이들은 반응을 보이면 더 악착같아지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은 까닭이었다.
역시나, 반응이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자신들의 말을 듣고 있다고 판단을 내린 늙은이들의 잔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후사가 있어야 왕권이 안정되어 불순한 무리들이 감히 왕위를 넘보지 아니하며, 이것은 즉 백성의 마음속 불안 또한 해소를 해서 태평성대가 어쩌구저쩌구...
혈기왕성한 때에 어쩜 이럴수가 있느냐, 혹시 옥체에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니냐는 등의 불경한 소리까지 지껄이니 아무리 한귀로 흘리며 참으려 해도 더이상은 안되겠다.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본 현류는 탁자를 치며 좌중을 침묵케 한다.
"그만! 그 일에 대해서는 짐이 알아서 할터이니 그대들은 그대들의 업무에나 신경쓰시오!"
하지만 이정도 기싸움에 꼬리를 내려버릴 늙은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벌써 몇십대에 걸쳐 왕을 보필해온 만만치 않은 귀재였던 것이다.
그중 가장 오랜 시간동안 수왕들을 가까이에서 보필해온 효륜원로(元老)가 낮지만 위엄이 가득 서려있는 목소리로 짐짓 걱정을 드러내었다.
"전하, 혹 왕후마마께 들르신지가 얼마나 되신지요. 늙은이의 귀가 신통치 않아 헛으로 들은 것일지도 모르오나 성혼을 이룬지 벌써 2년여동안 한번도 걸음하지 않았다는 불경한 풍문이 돌고 있사옵니다."
현류는 말이 없었다. 그가 정신줄을 놓고 찾아간적이 있지 않는 한 그 말대로 성혼을 치룬 후 단 한번도 왕후의 처소에 들른 기억이 없다.
물론 그로서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당시 수왕으로 등극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상태였고 마음에도 없는 성혼이기도 했거니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왕후가 아닌 조정의 골치아픈 일거리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생각지도 못한 혼인이었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왕후가 마음에 들고 안들고를 떠나 얼굴도 기억안나는데 불쑥 찾아가서 뭘 어찌하라고?
분명 본인과 백년해로(百年偕老)할 여인이건만 자신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럴진대 아무리 혈기왕성한 나이에 욕정이 끓어올라도 왕후의 생각이 날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소문으로는 타국에서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한다더만 어찌 지아비인 자신에겐 꼭꼭 감추고 얼굴보이기를 그리 아까워하는지에 대한 자그마한 반발심도 없다고는 못하겠다. 바쁜 본인이 못가면 왕후라도 와야 하지 않겠냐는, 여인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추호도 없는 현류의 마음속 변명이었다.
"효원로가 이제 죽을때가 다 되었나보오. 그런 헛소문에 귀를 기울이는걸 보면 말이야. 쓸데없는 소문에 그렇지 않아도 없는 기력 낭비하지 말고 좀 더 생산적인 업무에 붓는게 어떻겠소?
자자.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도록 하지...더이상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오늘 조례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소."
변명이라도 할까 하던 현류가 내뱉은 말은 심사가 제대로 꼬였음을 과시한 삐뚤어진 언사였다. 어찌되었거나 자신은 이 나라의 왕인 몸. 신하에게 변명거릴 지껄이는 짓은 흠이 될지도 모른다.
더이상 반론은 듣기도 싫다는 양 옷자락을 거칠게 펄럭이며 밖으로 나가버리는 현류였다. 안에서야 늙은이들이 뭐라 떠들던 형식을 갖춘 상소만 올리지 않으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후우."
과연 초가을이라 그런지 아침공기가 상쾌하니 맑았다. 조례나 각종 회의를 진행하는 수례전(水例殿)을 궁궐내에 짓지 않고 한적한 곳에 독채로 짓도록 명한 조부님의 혜안(慧眼)이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골치아픈일을 당하고 나서 그 갑갑하기만 한 궁안을 거슬러 나가는 것보다 이렇듯 바로 하늘을 바라볼수 있게 하니, 도진 두통이 싹 가시는듯 하다. 그 하늘이 이렇듯 청명하면 더이상 말해서 뭣하랴.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금일중으로 처리해야 할 사안들을 처리하기 위해 집무실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이미 저 앞쪽에 자신을 보필할 시비들이 고개를 숙인채 대기중이었다.
한두발 떼었을까-. 현류는 귓속을 파고드는 낯익은 목소리에 다시금 인상을 구겼다.
"오오, 우리 수왕폐하께선 어찌나 강직하신지~. 계집에 눈이 멀어 나라를 말아먹을 위인은 절대 아님이야. 암~그렇고 말고! 대신 고귀하신 혈통이 끊기는 불상사가 생기겠지만 말이야."
돌아본 현류의 눈동자에 그려진 이는 그로 하여금 반갑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 존재였다.
인사권을 담당하는 충부(忠部)의 장을 맡고 있는 충부경 류비안(流比安).
문관답지 않게 잘 다듬어진 육체하며 한량처럼 제멋데로 입은 복장하며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가벼운 말투하며...
오랜 친우가 아니었으면 결코 상종하기도 싫을 천하의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쯧. 네놈은 여기서 뭘 기웃대고 있는거야?"
"간만에 일찍 눈이 떠져서 아침공기나 마셔볼까 하고 산책중이었는데 낯익은 투닥거림이 들려오잖아? 원로원의 늙은이들도 늙은이지만 너도 참 인정머리 없다."
불경스럽게도 감히 수왕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류비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떻게 왕후마마께 한번도 가질 않냐-. 말이야, 여인을 기다리게 하는 건 사내의 도리가 아니라고. 더욱이 왕후마마께서는 근래에 보기 드문 미모의 여인!! 너 미녀를 기다리게 하는 건 가중처벌 이라는거 몰라?"
"그딴 건 네놈한테나 적용되는 논리겠지."
"하-,답~답~하다! 현 왕후마마의 미모를 모르는건 너밖에 없어. 타국에서도 소문이 자자 하건만 이놈은 바로 언저리에 두고 뭐하는건지 몰라? 아아-, 왕후마마만 생각하면 내 가슴이 저리다 못해 시리누나!!"
그대는 어찌하여 왕후이옵니까-, 이 잔인한 운명은 그대와 나를 갈라놓기 위한 하늘의 농간이오-,하고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며 온몸을 비트는 류비안의 자태가 참으로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수왕은 애써 외면하며 대화의 주제를 바꿔보고자 한다.
"인부(仁部-재정부)에 새로이 인원을 충원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되가고 있어?"
"아아. 뭐 나야 시험에 합격한 인재에게 관리패와 등용문만 써주면 되니까 그다지 자세히는 몰라. 듣기로는 약 오일 후에 시험이 치루어진더라 어쩐다나."
"인부경이 들으면 네놈 안면에 주먹을 꽂을지도 모를 소릴 잘도 지껄이는군."
"일의 경계는 확실히 해야지. 그럼~그럼! 그리고 웬만하면 유랑, 그놈하곤 별로 부대끼기 싫걸랑."
말하면서도 치를 떠는 류비안이었다. 충부의 장, 충부경-류비안과 인부의 인부경-임유랑(林柳郞), 이 둘은 사이가 그닥 좋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닥 좋지 않은게 뭐야? 서로 보기만 하면 못잡아 먹어 안달이니. 쯔쯔쯧. 이놈이나 그놈이나 늙은이들이나...'
혀를 차며 집무실을 향해 멈춰져던 발걸음을 재촉하는 현류였다.
뒤에서 류비안이 다시금 왕후마마를 찬양하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말이다.
그리고 같은 시각, 오만상을 찌푸린 인물이 여기 하나 더 있었다.
현 수왕의 아내이자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엄청난 미모를 갖추고 마음씨 또한 비단결 같으며 품행에 한치의 삐끗함도 없는 소녀.
-의 껍데기만을 뒤집어 쓴 전혀 다른 인격의 존재, 이혜령이었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두들겨 깨운 머저리 같은 오빠...가 아니라 오빠를 닮은 또 다른 세계의 오라비가 된, 어쨌거나 혜령으로서는 눈 뜨자마자 조우하고 싶지 않다는 건 똑같은 존재가 골치아픈 것을 들고 찾아왔다.
얼마나 두툼한지 터-억 소리가 날 정도의 종이문서들을 고풍스러워 보이는 탁자위에 올려놓는다.
혜령은 종이문서들을 잘 정돈한 후 이마의 땀을 훔치는 소유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다가 한마디 툭 내던진다.
"그건 뭔데?"
한창 달콤하게 잠들어 있던 자신을 깨운 것에 대한 탐탁치 않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말투였다. 더욱이 이 말도 안되는 현실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순간이었기에 혜령의 상태는 몹시 저조한 것이었다.
혜령으로서는 그가 아무리 다른 세계의 다른 존재라지만 얼굴이 같아서였을까? 대하기에 껄끄럼따위가 없었다. 해서 평소 오빠에게 하던데로 내뱉은 평범한 말이었으나 소유입장에서는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었다.
우아하고 품위있던 자신의 동생, 초령이의 입에서 저런 버릇없는 말투라니. 하늘이 울고 은씨 가문이 울고 자신은 대성 통곡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소유는 다시금 혜령의 존재를 각인해 내고는 한숨을 푹-내쉬었다.
"후...내 어제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이제는 은초령, 즉 이 나라의 왕후로써 살아야 함을.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여야 하느니-."
"됐고. 그게 뭐냐고."
버릇이 없어도 저렇게나 없을 수가! 소유는 갑작스레 가슴팍이 답답해져 옴을 느끼며 앓는 소릴 내었다.
‘끄응. 그래. 조금씩 고쳐나가면 될거야...조금씩…’
어쩐지 혜령을 만난 이후로 한숨과 인내심만 늘어 가고 있는 듯하다.
마음을 다잡은 소유는 탁자위의 종이 몇장을 들고는 아직도 침대위에서 뒹굴고 있는 혜령에게로 다가가 건네주었다.
이불을 둘둘 말아 뒹굴대던 혜령이 소유를 한번 힐끗 바라보다 몸을 일으킨다. 그녀의 미간은 여전히 살짝 구겨져 있다.
침대 위에 앉은 상태로 한 쪽 손으로는 뒷머릴 긁적이며 종이를 건네받은 혜령의 표정에 변화가 온 것은 종이문서들을 격하게 뒤적이고 난 뒤였다.
짜증가득한 표정에서 이윽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혜령은 소리친다.
"이...이게 뭐야?!"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산더미 같지만 일단은 가장 중요한 것부터 익히거라. 보면 알겠지만 지금 준 것은 초령이의 내력과 현 수왕폐하의 내력, 그리고 중요측근들이다. 저쪽에 초상화도 있으니 함께 보면 외우기 더 쉬울 것 이니라."
"그게 아니라...이 글자가 대체 뭐냐고? 읽을 수가 없잖아."
"...뭐, 뭣?!"
혜령의 손에 쥐인 종이에는 분명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이련만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모양새는 한자와 비슷한 상형문자이긴 한데 단 한 글자도 혜령이 알고 있는 한자 모양이 없었다. 더욱이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한자와도 그 모양이 사뭇 달라 보인 것이다.
마치 '한자'라는 글자가 만들어 지기 전의 다듬어지지 않은 형태랄까? 혜령이 가진 지식으로 비유하자면 언젠가 책에서 읽은 갑골문자와 흡사해 보였다.
어찌되었건 혜령으로서는 도통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소유는 뒷통수를 후갈겨 맞은 기분이었다.
말이 통해서 당연히 글도 알거라 생각했거늘. 소유로서는 여간 낭패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이...이를 어찌할꼬..."
천장을 바라보며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소유였다. 답답하기는 혜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서 당.분.간.살려면 말이 통해야 한다. 물론 대화는 통하지만 글자를 읽을 수 없을 줄이야.
그렇게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유는 천장을 응시한 채로 혜령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본 채로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혜령은 종이를 침대 옆에 던지고선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리고선 아직까지 멍하니 서있는 소유를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부른다.
"오라방!"
혜령의 부름에 얼떨결에 대답한 소유는 이윽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다.
"으,응? 오라방??"
"오빠라 부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오라버님이라 부르자니 입안에 가시가 돋을 거 같고.. 그러니까 앞으로 오라방이라 부르겠어. 괜찮지?"
"당연히 안 괜찮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날 소릴 하는구나. 너는 왕후마마님이시고 나는 한낱 무관일뿐. 내게 하대를 함이 옳다. 앞으로 나를 응양군(鷹揚軍) 중랑장(中郞將)이라 부르며 하대하거라."
응양군(鷹揚軍)은 수국 왕실의 두 개의 친위군(親衛軍) 중 하나인데 최고 지휘관으로는 상장군이 있고 부지휘관으로는 대장군이 있다. 그 밑으로 장군이 있었는데 중랑장은 그 장군을 보좌하였다. 은소유의 겉모습은 보통 무관답지 않게 호리호리하고 근육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전형적인 문관의 체형이었지만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 즉 풍술법은 능히 장정 50명을 당해낼 수 있었기에 무관의 위치에 반감을 지닌 이는 전무하였다.
"호…나보다 낮은 지위라고? 으흐응~.”
당연한 혜령의 말에 소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래, 중랑자~앙?”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혜령의 입에서 나오니 욕을 들어 먹은 것만 같은 느낌이다. 소유는 인상을 지은 채로 한 손을 휘저었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만 그리 불러다오. 둘만 있을 때는...그래 오라방인지 뭔지 네가 부르고자 했던 것으로 부르거라. 후우..."
왜 갑자기 긴 한숨이 뿜어져 나올까...소유는 기운이 쫙 빠짐을 느끼며 혜령을 쳐다보았다. 혜령은 여전히 웃음기가 넘쳤다. 그래, 아까 전의 오만상 찌푸린 표정보다야 지금의 표정이 훨씬 보기는 좋다. 마치 왕궁으로 불려오기 전 어린 초령의 밝은 모습 같지 않은가.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자신에게 달려오던 그때의...
"...내말 듣고 있는 거야?!"
"으응?"
살며시 과거 초령의 밝은 모습을 회상하던 소유는 곧 따가운 소음이 자신의 귀를 괴롭힘에 애잔한 감정을 갈무리 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방금까지 밝은 표정의 초령이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또다시 미간에 주름이 잡힐데로 잡힌 표정이다.
혜령은 기껏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문자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더니만 이 멍청한 오라방은 멍때리며 입을 헤-벌리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리 만무하다.
혜령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곱디고운 머리칼을 헝클며 탐탁치 않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단! 진~짜 중요한 것만 말해줘. 나머지는...천천히 알아갈께. 글은..으윽. 어쩔수 없지. 기초적인 것만 공부할테니 어떻게 좀 해봐! 에잇!"
답답한 마음에 혜령은 버럭 신경질을 내버렸다. 이 모든 게 은소유, 저 오라방 탓이니 될대로 되라지!
혜령의 기에 눌려버린 소유는 황송해하며 얼른 입을 연다. 그 역시 글자를 가르칠 생각이 있긴 했지만 혜령이 따라올지와 어떤식으로 가르쳐야할지 막막하던차에 혜령이 통쾌하게도 마음에 쏙 드는 제안을 한 것이니 마음이 바뀌기 전에 최대한 이 기회를 살려야만 했다. 그로서도 차분히 혜령과 마주할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곳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마. 이 세계는 5개의 대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를 오행국이라 부르지. 물론 오행국이외에 소국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태초에는 우리 오행국에 속해있던 민족이니라.
오행국중에서도 물의 기운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인 우리 수국은 북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나라란다. 수도의 이름은 해혜이며 지금 있는 이곳이 수도의 가장 중심에 있는 왕궁 해황궁이란다. 네가 바로 이 나라의 왕후인게야."
왕후라는 단어에 고운 아미를 살풋 찡그리는 혜령이었다.
"진짜 무를 수는 없는거지?"
"불가!"
"쳇."
입을 삐쭉이는 혜령에게 살며시 미소를 보낸다. 소유는 곧 헛기침과 함께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가문은 원래 풍술사를 자주 배출하는 특이가문이다. 다행히도 우리나라가 술사를 귀히여겨 신분이 꽤 높은 편이지만 금국(金國)에서였다면 가문의 씨가 마름을 면치 못했을게야. 금국은 술사를 아주 사이한 존재로 여겨 노비보다 못한 존재로 대하거든..."
"그럼 금국에 가면 안되겠네?"
"음...자국 술사에게만 그렇다는거지 타국의 신분 있는 술사에게까지 막대하진 않으니까...그래도 아래로 대하는 경향은 있지. 내 입장으로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아...그래...음! 너는 우리 수국의 왕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감히 금국 따위가 우리 수국의 왕후에게 막대함이 있어선 아니될 터!!"
금국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있는지 소유는 '감히 금국 따위가...'를 연달아 중얼대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그 뒤로도 소유는 수나라에 대한 자랑을 연신 해대며 간간이 혜령의 지금 신분인 왕후의 몸가짐 등을 강조했다.
그치만 지금 꼭 알아야 할 내용 중에 대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강이며 사찰이며가 왜 나오는걸까.
‘아름답다 어쩐다 하면서 날 데려가 줄것도 아니잖아?’
혜령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이 애국심 강한 청년을 어찌 구슬려야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결국 둘은 한 곳에 있되 다른 세상을 말하고 생각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쓸데없는 대화는 점심때가 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소유는 자그마한 탄성소리와 함께 허둥지둥 몸을 추스린다.
"아앗!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어, 어쨌든 령아. 오늘 말한거 잘 기억해두고 저기, 저. 저저. 초상화도 있으니까 일단은 누군지 몰라도 눈에 익혀두기라도 해. 그럼 이따 다시 오마."
혜령이 대답도 하기 전에 횡소리가 나도록 방밖으로 뛰쳐나간다. 졸지에 같이 정신이 없어진 혜령은 '뭐,뭐,뭐?'하고 뒤늦은 물음을 던졌지만 소유의 멀어지는 발소리만 들릴뿐이었다.
"잘기억해두라니 대체 뭘? 오색강 근처에서 발 담그고 먹는 심해화주의 맛이 각별하다는거? 해연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황홀하다는거? 나참..."
겉모습은 깔끔하고 말 잘하는 서생같이 생겼는데 행동은 산만하고 분주한 것이 확실히 지능파 보단 육체파가 딱이었다.
혜령은 고개를 살풋 흔들며 머리를 한차례 쓸어올린다. 뻣뻣하고 까칠한 촉감이 아닌 부드러운 머리칼의 촉감이 기분을 오묘하게 만든다.
한동안 머리칼을 쓸어내리다가 이내 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잠도 다 깨버렸고...아 배가 고픈데? 제일 중요한 밥은 어떻게 챙겨먹는지는 안 말해주고 쓸데없는 것만 알려주고 있어. 씨잉..."
가만히 있으면 시녀가 알아서 챙겨준다는 사실을 모르는 혜령은 주섬주섬 일어나 화장대가 분명한 곳으로 다가간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분명 자신이지만 이유를 알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윽. 세상에. 내눈에 내가 이렇게 이뻐보이다니...어휴. 이거 병 생긴거 아냐? 애들이 들었음 당장 입원수속 밟자고 난리칠만한 발언이었어. 그래도 이쁘긴 이쁘네. 흐헤헷."
대강 머리를 빗고 나름대로 정돈을 한 후에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다. 바로 보인 복도는 조용했다.
과연 소유의 말대로 그의 여동생이 부적응아인게 확실한가 보다.
초령의 마음이 황폐해지면서 그녀는 점점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화려한 왕후의 처소가 음산하기 짝이 없어졌다며 안타까워 하던 소유였다.
어찌되었건 좌우를 둘러봐도 개미 한 마리 없어 보이자 혜령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뻗는다. 그 모습이 가히 도둑과 같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소유로 하여금 방 밖으로 나가지 말란 말을 들은 적은 없었으니까...
어디보자, 부엌이 어디있으려나...
검푸른 머리칼이 허공에 휘날린다. 18세에 준수한 외모를 갖춘 이는 분명 수나라의 왕, 현류였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까지 찾아와 잔소리를 늘여놓은 원로원들 때문에 만성두통이 생길것만 같았다.
"망할 노친네들!!"
거친 말투로 씹어내듯 내뱉는다.
"요즘 팔자가 아주 늘어지셨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지 않고서야 날 이렇게 들들 볶을 순 없어. 그것도 국정일이 아닌 내 사생활로! 나라에 반란이라도 일어나야 정신을 차릴런지."
연신 씩씩대는 통에 왕의 보필을 업으로 삼는 이들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있는듯 없는듯 조심스레 현류의 뒤를 따르는 시비와 호위무사들의 표정이 갈수록 불안해진다.
그러한 모습을 놓칠 현류가 아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왕은 자고로 백성들에게 근심을 지우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아로새겨지듯 들어왔기에 이내 곧 마음을 추스린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딱딱하지만 둥그리한 어조로 시비와 호위무사들에게 명한다.
"어흠...마음이 좋지 않아 홀로 산책길을 나서고자 하니 자네들은 각자 다른 업무를 보도록 하게."
"송구하옵니다만, 전하. 아무리 궁안이라 할지라도 행여 불경한 일이 있을지 모르옵니다. 부디 옥체를 귀히 여기시어 그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에잇, 이놈이고 저놈이고!
본왕의 말에 토를 다는 호위무사의 모습에 기고만장해 하던 원로원들이 생각나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참아낸다. 저들은 다 본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또한 현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저들의 업무이니 혼낼 이유 또한 없었다. 물론 이들은 그저 눈속임, 실제로 현류의 옥체를 지키는 무리들은 기척을 지우며 현류 주위에 포진해 있을지라도 말이다.
현류는 자그마하게 한숨을 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노라. 허나 조금은 떨어져서 따라오라. 홀로 걷고 싶은 기분이니."
"그리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시비들과 호위무사들은 현류 뒤로 서너발자국 떨어진 상태에서 조심스레 따라나섰다. 현류는 그런 그들을 곁눈질로 살짝 흘기고는 조금 빨라진 발걸음을 천천히 늦추어 걷는다.
'왕후라...'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며 시조나 한편 읊어볼까 했더만 뜬금없는 단어에 현류 자신조차 놀란다.
'이게 다 늙은이들 때문이라고...'
방금까지 괜찮았던 머리가 또다시 지끈거리는것 같다. 현류는 한손으로 입술을 쓸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춘다. 뒤따라오던 시비들 역시 흠칫 놀라며 황급히 멈추어 서니, 현류가 돌아보며 점잖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영궁(水榮宮)으로 가자."
그 한마디에 시비와 호위무사들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허락없이 고개를 들어 용안을 마주할 뻔했다. 하지만 그들이 놀란가슴을 진정시킬새도 없이 왕께서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게 아닌가.
시비들은 허둥지둥 뒤따르며 묻고싶은 말을 가슴속 깊숙이 묻어둔다.
'이 횅한 낮에 가셔서 대체 무얼 하시려고요?'라는 물음을-...
어찌되었건 수왕은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로 국혼을 치룬 후 처음으로 왕후의 처소로 향하게 되었다.
첫댓글 ........궁에서 일어나는 스토리인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