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랑 가을 들녘을
요즘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고 높고 푸르다. 그 가을 햇살 화창한 옛 고향 집에서 어릴 적 누나랑 함께하던 아름다운 추억이 건넌방 책장 한구석의 낡은 사진첩 갈피에 고스란히 남아 내 입가에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50년도 훨씬 더 넘겼을 빛바랜 흑백 사진, 그 속엔 환갑을 훌쩍 넘긴 내가 세월을 역류한 듯 눈망울 초롱초롱한 여섯 살 어린아이가 되어 댕기 머리 예쁜 누나 어깨 위에 정답게 손을 얹고 서 있다. 사진 속 누나랑 나 다정한 남매의 옛 모습이 가슴 아리도록 정겹다.
56년 전 여섯 살 난 내가 열여덟 살 댕기머리 누나랑 추석에 읍내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으로 날씨가 추웠던지 옷을 두껍게 끼워 입은 나와 달리 누나는 얇아 보이는 한복으로 한껏 멋을 냈군요. 그 당시엔 이런 사진 찍는 일도 사치에 가까운 행사였지요.
3년전 누님 내외와 저희 부부가 타이완 여행을 하였습니다. 위 사진의 누나랑 제모습이 아래 사진에 남아있나요?
민족상잔의 6.25. 전란이 치열하던 참혹한 전장의 피난길에서 태어난 나는 엄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열두 살 터거리 띠 동갑 누나와 참으로 살가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대여섯 살 개구쟁이가 되었을 무렵 아버지로부터 자주 꾸지람을 듣고 뒷마당 처마 밑 땔감 나무에서 빼 온 싸릿가지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날이면 누나는 아버지로부터 나를 떼어 내 눈물범벅 콧물 범벅인 내 얼굴을 씻겨주고 안아주며 토닥토닥 달래서 재워주곤 했다. 그땐 그토록 근엄했던 아버님도 그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셨으리라.
봄이면 활짝 핀 진달래 언덕을 내 손잡고 함께 뛰어놀던 누나, 여름이면 집 앞 냇가에서 벌거벗고 물장구치는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던 누나, 가을엔 뒷동산 산머루 따고 논두렁 메뚜기 잡아주며 마냥 즐거워했던 누나, 눈 쌓인 한겨울엔 쌀 포대자루에 나를 태워서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썰매를 끌어주던 댕기머리 청초하고 예뻤던 누나, 그임은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어 내가 사는 이곳 세종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충북 진천군 백곡면 청학동 산골 마을에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연세를 들어가면서 허리 수술에 여기저기 병치레를 하시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당당하셨던 누나는 20여 년 전 내가 사십대 초반에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또 항암 치료에 고통스러워 할 때 나보다 더 아파하시며 내 손을 잡고 병상을 떠나지 않으셨다. 오전 여덟시에 시작한 수술이 저녁 어두울 때가 돼서야 끝나고 회복실로 가는 이동식 침대 위에서 아직 마취가 덜 깨어 정신이 몽롱한 내가 제일 먼저 찾아 불렀던 이도 누나였다. 그 때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딸 자식들보다 누나를 더 찾고 의지하는 그 빛바랜 흑백 사진 속 여섯 살 어린 아이로 돌아가 주위 사람들의 장난기 섞인 놀림과 한편 부러움을 사곤 했었다. 수술을 받고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면서 수없이 좌절하고 힘들어 했던 순간순간마다 작고 따스한 누나의 두 손을 잡고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며 어머니 품안처럼 평안하고 행복하였던 그 때 그 기억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계절 따라 봄이면 갖가지 봄나물을, 가을걷이 때면 알알이 오곡 실과를, 철철이 잘 익혀 맛깔스러운 청국장 간장 된장 고추장까지 수십 년을 거르지 않고 보내주시는 누나, 친정 올케인 아내를 친어머니처럼 늘 챙겨주시던 누나, 언제일지 몰라도 그 누나가 이 세상에 안 계실 훗날은 상상만 해도 가슴 저리고 아프다. 그러면서도 올해 환갑을 넘긴 아내에게 가끔 진담 섞인 농을 건넨다. “여보, 올 가을엔 누님에게 된장 간장 고추장 담그는 방법 좀 가르쳐 달라고 합시다.” 아내의 입가에 번지는 선한 미소에서 시누이 올케간의 짙은 정감이 읽혀져 가슴에 와 닿아 찡하다.
오늘은 매형의 팔순 기념으로 생질들이 주선해준 유럽 여행을 다녀오시느라 힘들어 몸살이 나셨다는 누나를 뵈러 가는 날이다. 얼굴엔 하나 둘 검버섯이 피어나고 귀밑머리까지 희끗희끗 한 내가 누나를 뵈러 가는 날이면 이렇게 소년처럼 가슴 설레는 것은 왜일까? 50여 년 전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난 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생동안 가없이 크고 귀한 사랑을 아낌없이 나눠주신 누나에 대한 겹겹이 쌓인 고마움, 절절하고 애잔한 그리움, 그리고 내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부터 샘물처럼 솟구쳐 오르는 눈물 젖은 그 무엇 때문이 아닐는지?
누나는 요즘도 다섯 살 난 내 손자를 종종 찾아오셔서 얼마나 즐거워하시며 귀여워 해주시는지 모른다. 손자의 모습에서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던 코흘리개 어릴 적 옛날의 이 동생을 회상하며 추억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그 손자를 닮은 눈망울 초롱초롱한 여섯 살 어린아이와 열여덟 어여쁜 댕기머리 아가씨는 앞으로도 세월을 망각한 채 그 빛바랜 사진 속에서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다. 다정한 남매! 예쁜 누나와 귀여운 동생의 모습으로....
누나, 물 좋고 공기 좋고 인심 좋다는 청학동 산골 마을에서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베풀며 매사에 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시는 자애로운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존경스럽습니다. 요즘은 백세 인생이 대세랍니다. 매형과 함께 손자 증손자 보시며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들 곁에 있어주세요. 누나가 그토록 아끼고 걱정해 주셨던 이 동생도 수술한지 십 수 년이 지나 이제 말끔히 완치되었고 지금은 성인병 하나 없이 건강하게 아들 딸 며느리들과 함께 손자 손녀 재롱 보며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나, 누나가 일평생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저와 저의 가정을 위해 하나님께 눈물로 드린 간절한 기도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젠 누나가 그토록 사랑했던 우리들이 누나를 위해 손 모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누나,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이 가을엔 누나랑 손잡고 그리운 고향 들녘 코스모스 흐드러진 길을 함께 거닐고 싶습니다.
2013년 가을에
첫댓글 남먜간의 깊은정에 마음마저 후더워 나네요.행복한 만년 되세요.
좋은 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누나와 고운추억을 담은 좋은 글에 머물면서 남매의 두터운 사랑을 느껴보네요.즐감했어요.
가슴 뭉클하게 하는 잊지못할 추억이네요.내내 행복하세요.
추억의 좋은글에 형제지간의 따스한정을 느껴보네요.좋은글 즐감하였어요.
부모같은 누나의 사랑에 감동이네요.누나가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래요.
좋은글에 지난추억에 함께 젖어봅니다.
동년의 정더운 추억동산에 함께 걸어보네요.좋은글 즐감하였습니다.
동년시절은 언제나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게 되죠.누나의 따스한 손길에서 느껴지는 형제지간의 깊은정에 읽는 마음마저 포근해지네요.누나의 만년이 늘 즐거움과 행복이 동반하시길 바랍니다.
동년의 추억을 돌아보는 좋은글 즐감하였습니다
추억의 좋은글 잘 보았어요.
누나랑 옛 추억을 함께 해주신 임들께 감사드립니다.
자매지간의 깊은 수족정, 어머이 깉은 누나를 추억하는 글 즐감하였습니다. 누나랑 님이랑 만년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추억의 좋은글 즐감하고 가요.
형제지간의 깊은정에 저도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네요.누나의 만년이 늘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래요.
옛추억의 좋은글 즐감하였어요.
감사! 감사합니다.
손에 잡히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게 세월이고 흐르면 흐를수록 깊어 지는 게 피를 나눈 형제자매의 정이 아닐가요? 시인님의 풋풋한 추억에서 우리의 어제가 시로 흘러서 가슴에 닫습니다.고맙습니다.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