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디서 와서 죽어 어디로 가는가
혜안 스님
옛 성현이 이르기를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이 세상에 태어난 뒤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한세상 살면서 사람노릇하는 것이 나라고 하더니
눈 감은 뒤에 나는 또한 누구인가.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 세상에 왔으며
또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가?
누가 이 모든 진리를 말하여 주겠는가!”
성현이라야 능히 성현을 알아본다고 하였습니다.
허공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분은
이 우주 법계를 다 내 집이라 여기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은 허공같이 마음이 넓고 크신 분입니다.
대롱으로 허공을 보면 대롱만큼만 보입니다
그것을 관경이라고 합니다.
같은 이치로 우물 안에서
허공을 보면 우물만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허공을 바라보면
광대무변한 본래의 허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커지고 작아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자리를 가지시겠습니까?
내 자신만 생각하는 야비한 욕심으로
처신한다면 미물이 될 것이고,
중생(衆生)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피는
대자대비의 광대무변한 생각으로 마음을 크게 쓰면
온 천하를 통치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입니다.
삼천 대천 세계를 손바닥에 구슬 굴리듯 하시는
석가세존과 같은 성현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사(우주만물)는 마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우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주를 담을 만한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법기(法器)라 하셨습니다.
삿됨과 욕심과 어리석음을 비워 버린
청정본래의 법기를 준비하고
잘 닦아(修道)놓아야 합니다.
중생들은 각자의 법기에 따라
그 이익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의 법기는
스스로 지은 업에 따라 달라집니다.
스스로 마음의 작용에 의해
어리석은 자가 되기도 하고
현명한 자가 되기도 합니다.
삼국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라 말 경순왕이 덕망 높은 고승을 청하여
국가에서 재를 올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국내의 유명한 사찰에
고승대덕을 추천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추천하는 고승이 없었습니다.
입제할 시간은 다 되어가고
법사는 없고 애타게 기다리는데
남루하고 형색이 초췌한 대풍창(나병)이 걸린
스님 한 분이 자원하여 들어왔습니다.
마침 재는 준비되어 있고,
스님은 없는지라 그에게 하는 수 없이
국가의 재를 주재(主宰)하게 허락하였습니다.
재는 끝나고 왕은 스님을 불러
“차후에 어디를 가시던지 스님께서
국재를 주재했었더란 말씀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마세요” 라고 당부하자
그 스님은 “대왕께서는 누가 묻더라도 문수보살이
국재를 주재했었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하고는
동자로 변하여 홀연히 가버렸습니다.
그제서야 대왕은 깜짝 놀라
행장도 갖출 새 없이 뒤따라갔지만
스님은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이처럼 잠시 잠깐이라도 어리석은 마음을 내면
부처님이 눈앞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합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의 수승한 위신력을
미처 깨닫지 못함에서 오는 중생심이 원인입니다.
작금의 우리는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만 앞세우는
우둔한 행동을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의 주인공인 우리들에게
“사람 몸 받기도 어렵고 사람 몸 받아도
올바른 법 만나기 어렵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널리 우주를 포용할만한
마음 씀씀이로 한 세상 살아갑시다
모셔온글
첫댓글 혜안스님의법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