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은행도 배달 같은 서비스업을 비롯해 유통업 등 비금융 사업에도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게 된다. 금융당국이 40년 만에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라는 대원칙을 손보기로 하면서다.
금융당국은 은행 등 금융회사가 소유할 수 있는 비금융 자회사 범위를 대폭 확대할 방침이다.
그간 업계가 요구해왔던 네거티브 방식(특정 업종을 제외한 나머지 업종 허용)도 검토 대상에 올랐다.
이밖에 금융당국은 대출, 보험 등 금융회사의 본질적 업무에 대해서도 핀테크 업체 등 제3자에 위탁할 수 있도록 '업무위탁 범위'를 확대할 예정이다.
금융위원회는 전날 제4차 금융규제혁신회의를 열고 '금산분리 및 업무위탁 제도개선 방향'을 논의했다고 15일 밝혔다.
금산분리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서로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금융규제의 대원칙'으로 지난 1982년 은행법 개정안을 통해 만들어진 법률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올해 취임과 동시에 "금산분리를 완화하겠다"고 밝히면서, 정부는 40여년 만에 금산분리 손질 절차에 돌입했다.
회의에선 금산분리의 핵심인 금융사 자회사 출자 범위·부수업무 확대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산업자본이 금융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금산분리'의 큰 틀은 유지하되, 금융사가 영위할 수 있는 비금융업무를 확대해 환경 변화에 대응하게 하려는 취지다.
금융위는 회의를 통해 마련된 3가지 안에서 금융사의 비금융업무 규정 방식을 택할 예정이다. △금융사가 할 수 있는 업종을 일일이 나열하는 '포지티브 방식'을 유지하면서 업종을 추가하는 방식 △금융사가 할 수 없는 업무를 나열하고 그밖의 다른 업무는 모두 가능하게 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의 전환 △금융사 본체가 직접 수행하는 부수업무는 '포지티브'를, 자회사의 출자는 '네거티브'로 하는 방식 등이다.
이중 '네거티브 방식'으로의 전환은 금융사가 비금융업으로 무한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 총량 한도를 두는 규제 방식을 함께 검토하기로 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라는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하지 않을 만큼 한도를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세 가지 방안 모두 장단점이 명확하다. 포지티브 방식의 경우 감독규정 개정을 통해 신속히 추진할 수 있고 금융회사의 비금융업종 진출에 따른 리스크를 제한할 수 있지만, 새로운 업종이 추가될 때마다 규정 개정이나 유권해석이 필요하다.
네거티브의 경우 새로운 업종이 출현하더라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고 금융회사가 다양한 비금융 자회사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다만 법률 개정이 필요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또 금융회사의 비금융업종 진출로 중소기업이나 영세사업자 등 이해관계자와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다만 어떤 방식을 택하더라도 금융회사가 진출할 수 있는 비금융 업종은 지금보다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신한은행은 배달 서비스인 '땡겨요', KB국민은행은 알뜰폰 서비스인 '리브엠'을 규제 특례 제도인 '혁신금융서비스'를 통해 제공하고 있는데, 금산분리 규제가 완화되면 별도의 연장 절차 없이 사업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신진창 금융산업국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현재 통신, 배달 등은 혁신금융사업자로 인정된 금융회사만 해당 업무를 할 수 있는데, 법 제도가 정비되면 모든 은행이 별도의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을 받지 않고도 해당 업무를 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만약 금융당국이 '네거티브' 방식을 택한다면 제조업이나 건설업 등 필수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 대해선 모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금융위는 업권에 따라 근거규정이 다른 금융사의 '업무 위탁' 제도도 개선할 방침이다.
현재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의 금융투자업은 '자본시장법'에, 은행·보험·카드사·저축은행 등의 타업권은 '금융기관 업무위탁규정' 등의 금융위 감독규정에 업무 위탁 근거규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자본시장법은 금융사들이 본질적 업무까지 외부에 위탁할 수 있게 한 반면, 업무위탁규정은 원칙적으로 본질적 업무를 외부로 위탁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 때문에 업무위탁규정의 규율을 받는 은행업권은 본질적 업무인 대출심사를 외부에 위탁할 수 없어, 주택담보대출 심사 과정에서 부동산 담보물의 가치 평가를 전문 핀테크에 위탁하는 것이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이에 금융위는 업권별로 상이한 근거규정을 정비하고, 금융사의 업무 위탁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논의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 역시 은행 등에 적용되는 업무위탁규정을 상위법에 규정하는 방법, 업권별로 다른 업무위탁 사항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법 등을 선택지로 두고 검토할 계획이다.
아울러 최근 '카카오 사태'처럼 업무 위탁을 맡은 외주기업의 문제로 금융사 서비스가 차질을 빚거나, 특정 외주 기업의 독점으로 금융사들이 종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탁자에 대한 검사권한 신설 여부도 검토할 예정이다.
금산분리 제도 개선 방안은 내년 초 금융규제혁신회의에서 확정될 예정이다. 금융당국은 앞으로 금융권뿐 아니라 산업부 등 관계부처, 핀테크 산업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여러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듣겠다는 계획이다.
신진창 금융위 금융산업국장은 "제도 개선안에 대해 관계부처와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연말까지 수렴하고 검토한 뒤 내년 초 금융위 차원의 개선 방안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