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낳으실 때 아무 흠 없이 동정성을 간직하신 그분께서
사후 당신의 육신을 아무 부패 없이 간직하셔야 마땅했다.
태중에 창조주를 모셨던 그분은 하느님의 집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성부의 정배가 되신 성모님께서는 하늘의 신방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성모 승천 교리를 믿을 교리가 되게 한 다마스쿠스의 요한의 이 선언은
흠 없이 주님을 낳으신 마리아가 부패 없이 승천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흠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패 됨 없이 하늘로 오르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며,
은총으로 시작하신 주님께서 은총으로 끝맺음도 해주실 것이라는 얘기지요.
사실 오늘 축일의 의미도 마리아가 당신의 능력이나 공로로 하늘에 오르셨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올리셨음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원죄 없이 잉태되어 나시고,
죽어 부패 없이 하늘에 오르실 때 마리아가 한 것은 없습니다.
적어도 주도적이고 능동적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까?
무염시태와 승천에 있어서 마리아의 몫은
위대한 믿음과 위대한 수동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고
하느님 명령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시려는 것을, 하실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가장 완전한 수동태가 되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신 다음,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는데 아버지 뜻이 땅에서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마리아에게서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바꿔 기도하곤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아무튼 마리아는 자신이 주님의 종이 되겠다고 함으로써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데,
종으로 낮추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를 주님의 어머니로 높여 주신 것이고,
주님의 어머니이기에 원죄 없이 잉태되기도 하셨지만
주님의 어머니이기에 부패 없이 승천하게도 하셨지요.
이 지점에서 다마스쿠스의 요한과 프란치스코의 같은 점과 차이점이 갈립니다.
같은 점은 두 분 모두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에 방점을 둔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너무 강조하면서
마리아를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데
다마스쿠스의 요한이나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어머니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마리아가 성부의 정배가 되셨다고 하였지만,
프란치스코는 성령의 정배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점이 차이점이고,
이보다 더 중요한 차이점은 동정을 간직함으로써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고 함으로써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데에 마리아의 공로가 있었음을 암시하지만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칸들은 은총으로 어머니가 되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굳이 마리아의 공로가 있다면
오늘 엘리사벳의 칭송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으신 것이고,
그럼으로써 천사의 말처럼 은총이 가득한 여인이요 어머니가 되신 점입니다.
은총으로 잉태되시고,
은총으로 어머니 되시고,
은총으로 승천하신 마리아를 기리며 본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