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감독이 박재홍(현 SK·31)의 FA(프리에이전트) 자격 요건 때문에 핏발을 세웠던 때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박재홍의 FA자격요건 충족은 해줘야 할지 고민되지만 허준(34)의 1000경기 출장은 꼭 달성하도록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 감독은 잊지 않고 시즌 막판 허준을 1군으로 불러 들였다. 박재홍은 결국 FA자격을 얻지 못했지만 허준(34)은 자신의 목표인 1000경기 출장기록을 달성해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기념패를 받았다.
사실 1000경기 출장은 이제 흔한 일이다. 지난해까지 55명이 달성했고, 올해 10명이 추가됐다. 그러나 올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허준에게 1000경기 출장은 가장 귀한 기록이다. 지난 93년 빙그레(현 한화)에 입단했을 때의 목표가 ‘10년 1000경기 출장’이었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는 가장 큰 목표를 달성하고 유니폼을 반납했다. 지난 9월22일 기록을 달성하던 날 지난해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부친 허상무씨를 떠올리며 실컷 눈물을 쏟았다.
그는 기아의 코치직 제의를 뿌리치고 이젠 사업가로 변신했다. “선수시절 목표였던 1000경기 출장은 달성했고, 이젠 사업가로서 10년동안 돈을 많이 번 뒤 한가하게 야구를 관전하는게 목표”라고 말했다.
◇급한 볼 일 덕에 달성한 1000경기 출장
93년 빙그레에 입단했을 때다. 당시 타격에 제법 자신이 있었지만 프로에서는 그의 방망이가 잘 통하지 않았다. 당시 빙그레 내야진이 취약하다는 점을 알고 수비로 승부를 걸어볼 계획을 했고, ‘10년안에 1000경기에 출장하자’는 현실적인 목표를 세웠다. 안짱다리라는 핸디캡이 있었지만 자신이 있었다. 가능하면 친정팀 한화에서 기록을 세우고 싶었지만 2003년 시즌 중반 기아로 트레이드됐다. 2003년까지 990경기를 뛰었고 올해 10경기만 보태면 됐다.
1000경기를 달성한 9월22일 대구 삼성전에는 사실 출장할 기회를 잡지 못했는데 일이 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3-3으로 팽팽하던 9회초 공격 때 중전 안타를 치고 나간 유격수 홍세완이 갑자기 베이스에 서서 배를 움켜 잡고 교체 사인을 보냈다. 볼일이 급했던 것이다. 항상 허준의 1000경기를 머릿속에 담아뒀던 유 감독이 무릎을 탁 치며 허준을 호출했고, 그의 1000경기 기록은 그렇게 달성됐다. 허준은 “사실 잔여경기가 10게임 정도밖에 안남은 상태였기 때문에 매일 조마조마했는데 웃음이 나오더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1000경기 달성과 함께 사실상 은퇴를 결심했다.
◇코치-사업가
기아 정재공 단장은 시즌 중 “왜 한화에서 허준을 방출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은퇴하면 구단직원이나 코치로 계속 남아 있게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올시즌을 끝으로 허준이 은퇴의사를 밝히자 정단장은 “일단 구단 직원으로 몇년 일한 뒤 코치 계약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부인 김연희씨가 10월부터 부산에서 리베라호텔 연회사업을 시작해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큰형 허용씨는 “어렵게 시작한 운동인데 그만두면 안된다. 몇년이 됐든 계속 선수로 뛰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사업가로 제 2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의 공식직함은 ㈜리베라호텔 연회사업부 부장이다. 여기에 웨딩업체 ‘이화’를 운영하는 손위 처남 김성곤씨(39)의 일도 돕고 있다. 한참 사업확장중이라 내년에는 더 바빠질 모양이다. “선수시절에는 일반 직장인들이 이렇게 바쁘게 사는줄 몰랐다”는 그는 요즘 시간을 쪼개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있다.
◇허준이라는 이름
사실 이름 덕을 많이 봤다. 2000년 드라마‘ 허준’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 관중들이 상대팀 야수들에게 “줄을 서시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 팬은 그의 공식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조회수가 꽤나 많았다. 2000년에는 덕분에 야구도 잘됐다. 개인 통산 가장 많은 130경기에 출장했고 타율 0.231, 6홈런, 38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드라마 주제곡을 테마송으로 할 생각까지 했다”고 이 얘기를 하며 신을 냈다. 그의 이름이 그를 알리는데 일조했다면 인간적인 모습은 그를 더욱 빛내는데 기여했다. 그는 주위에 사람이 많은 이유에 대해 “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봤고, 어른들에게 예의를 잘 갖췄기 때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리못한 야구용품
은퇴를 결심한 뒤 집에 있는 야구 용품을 모두 버릴 생각이었다.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도 정리하지 못했다. 한화·기아 유니폼, 배트, 글러브 등에서 10여 년의 추억들이 묻어났다. 부인이 “그러지 말고 야구 좋아하는 사람에게 갖다 주라”고 했지만 그는 “나의 인생을 기억할 수 있게 하나씩은 남겨두고 싶다”고 생각을 바꿨다. 현역복귀를 묻자 “사업가로 굳혔지만 사실 아직도 미련이 있다. 앞일은 모르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가장 인상적인 경기를 묻자 2002년 두산전을 떠올렸다. 9월1일 대전 두산전에서 3-2로 뒤지던 9회 주자를 2루에 두고 진필중으로부터 동점 2루타를 뽑아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송구실책이 난 걸 모르고 2루에서 보호장비를 벗다 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것. 당시 포스트시즌 진출과 관련해 중요한 경기였기 때문에 구단에서 상금을 제법 많이 걸어놨던 터라 이날 역전패는 그에게 큰 상처를 줬다. “보호대를 벗고 고개를 들어보니 덕아웃에서 난리가 났더라. 그러나 당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신인이던 93년 자신의 타구에 맞아 골절상을 입었던 그는 그날 이후 발목보호대를 좀처럼 차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