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이란 형태의 외교관계는 한 제국과 당시 한 제국 북방의 강력한 유목민 집단이었던 흉노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본래 중화의 제국이 주변 민족들, 이 중에서도 호전적이었던 유목민들을 달래기 위해 나온 것이죠. 조선과 명의 조공관계에 대한 기존의 해설(명이 조선을 달래기 위해 조공을 허용했다는 설, 말 그대로 조선이 명에게 갔다 바친 거라는 설)등은 역사의 가정이 충족 시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몇가지를 불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역사란 것도 결국은 인간의 학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먼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철학적 사고 위에서 그 바탕을 세웁니다. 그리고 현재 역사관들은 바로 홉스의 성악설에 그 철학적인 사유의 근거를 두고 있죠.
기존의 조공관계에 관한 사관들은 명과 조선의 전략적 거리, 인구나 영토면에서의 물리적 차이등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고 있으나 그렇다면 조선이 (기존의 사관에 의하면)왜 거의 가상적국이나 다름없는 중국의 사상(유학)을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지에 대한 물음에는 한결같이 조선의 유학이 사대관계를 고착시켰다는 전혀 앞뒤가 안 맞는 게다가 역사(이 중에서도 정치학)의 대전제인 '만인과 만인의 투쟁'이라는 대명제에도 전혀 맞지 않는(한 마디로 말하면 감상적인, 다름아니라 중국,일본등의 주변국은 정치 및 경제에 있어 매우 이기적인 존재(성악설에 맞는)라는 암시를 포함할 뿐 아니라, 그에 비해 조선은 매우 감상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므로 식민사관)것인 것입니다.
조선과 명의 조공관계는 쉽게 말하면 관무역이었습니다. 조선의 국왕이 조공이라는 이름으로 물건을 바치면 명의 황제가 하사품이란 이름으로 다시 조선왕에게 뭔가를 주는데 이 때 무엇을 줬나가 매우 중요하죠. 조선의 왕은 조선의 특산물을 명의 황제는 명의 특산물(특히 비단)을 줬습니다. 그런데 조선 전기를 보면 오로지 시전상인만이 상업할동을 할 수 있을 뿐더러 게다가 이 품목도 육의전의 품목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난전이라든가 사상같은 것은 있지도 않죠.게다가 명,조선 모두 이른바 관리가 아니면 취급할 수 없은 물품등이 법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들 물품의 대부분의 최고급 공예품이었습니다. 기존의 학자들을 이를 조선전기 사회의 폐쇄성 정도로 해서 조선 후기에 문물이 발달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기존 학자들의 가설에 따른다면 조선후기 중 특히 영, 정조시기의 조선의 성장률은 다른 시기보다 월등한 것이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조선후기 왕권이 약해졌다고 해도 그에 상응한 정부의 세수증가==>국방력등의강화등 부국강병의 징후가 나타나야 되는데 비록 영,정조가 어느 정도는 군제를 개혁했다고는 하지만 조선 후기의 군사력이 조선 전기보다 강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한편 조선전기로 다시 돌아가서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의 삶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봅시다. 당시 중국사람의 조선산 인삼한뿌리를 구입할려면 어떻게 했어야 될까요? 좀 좋은 비단옷을 입고 싶은 조선 귀족은? 당연히 관영상인에게로 가야죠. 그럼 이 관영상인은 어디서 이걸 가져 오죠? 국경에서의 거래는 나라에서 엄격히 관리하는데... 정답은 황제의 조공품에서 입니다.여기서 바로 당시의 조공형태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즉 조선의 명의 황제는 모든 민간의 교역수단을 막아놓고 서로간에만 자국의 특산품을 주고 받음으로써 상대국의 특산품을 자국에서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챙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수입으로 그들은 왕권을 강화시켜 강력한 왕조를 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역시 기존 사관의 감상적 관점에서 보는 명의 해금령이 기실은 황권이 상품을 독점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 조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조선의 신료들에 대한 지급형태가 과전(땅을 빌려주는 것)에서 관수관급제(녹봉, 쉽게 말하면 월급)로 바뀌는 그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자연스럽게 되면서 명 몰락 후(조선 중기 이후)에 왜 그리 조선이 신권중심의 국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임란때 왜 명이 자기나라 밑천이 다 드러날 정도로 조선을 도와줬는지에 대한 것이 이기적 동기에 의한(홉스식의) 것으로 설명가능해집니다.
한편 당시 조공무역에 대해 설명을 조금 더 덧붙이자면 당시 명은 조선뿐만 아니라 베트남, 유구(오끼나와) 및 동남아시아 들과의 여러국가도 이런 관계를 맺었습니다. 특히 비단과 향료(제사지내는 데 필수, 조선의 귀족들이 이씨 가문보다 우리 가문 좀 잘되게 해달라고 조상님한테 향 태울때마다 그 이씨 가문 배 채워주는 꼴이었으니 조선전기 왕권이 약할래야 약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가 주 교역품이었습니다만 이 두 특산품에 대해 약간 설명을 덧붙이자면 비단의 경우는 생필품으로써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요가 있는 상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죠. 헌데 명대의 황제는 그전의 송,원대(자유무역)의 황제들과는 달리 이 것을 오로지 자신에게 조공해주는 국가(동맹국)에게만 팔도록 함으로써 동맹국이 막대한 교역이익을 누리게 해줍니다. 이 것이 조공무역(관무역)체제의 시작이죠. 조선을 예로 들자면 조선은 일년양공인데 반해 왜는 10년1공 즉 10년에 한번 조공을 해서 비단을 받아올 수 있으니 해금법의 국제체제에서 명으로의 직수입은 불가능하고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받은 것을 되살 수 밖에 없었던거죠.(이게 바로 풍신수길이 육로개방하라고 한 진위입니다. 수길이가 또라이라서가 아니라. 전쟁을 하는데 먹을게 없으면 안되죠. 가신들 제압할라고 세금 꼬박 잘내는 농민들 죽을 때로 보냅니까? 세금 받으면 신하들 돈으로 사도 되는데). 또 이렇게 폭리로 받아챙긴걸(일본 특산물) 조선왕이 명황제(10년에 한번은 부족하죠)에게 보내 또 폭리 취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중화-소중화-그리고 주변국들로 된 당시의 국제 정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것은 향료의 경우는 본래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인데(지금은 잘 소비되지 않음.조선시대와 지금의 경제력을 비교해서 그만큼 소비가 늘지 않았음.) 이 것은 당시 유학(성리학)의 보급과 힘입어 크게 수요가 증가합니다. 위의 댓글 중하나에도 약간 암시를 했지만 이 향료라는 것 때문에라도 조선정부가 성리학을 널리 보급시킨 이유는 너무나도 자명했던 것입니다.
-바로 앞에 제 덧글을 보신 분들 중 몇몇은 이해하셧겠지만 유학 얼마나 좋습니까? 주자가례 보급하고 향약이 잘 돌아가게 만들면 가뜩이나 충효 강조하는 사상 조상님한테 제드린다고 향태워 국고채워주지 백성들 유식하게 만들어서 관영수공업 발달시켜 또 국고에 도움되는 상품 추가시키고 헌데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그 전까지 민초가 유식해지면 안 된다고 귀족끼리만 배우던 글과 학문을 이제 국가가 나서서 장려하니 백성들도 좋죠. 안 좋으면 유학, 나라에 안퍼지죠. -
글이 자꾸 길어지는데 요약하자면 조공이란 것은 말만 조공의 우호사절이라는 탈을 쓴 독과점의관무역이며 당시 중화(황권)-소중화(왕권)-그 외곽(떨거지, 이민족들)의 국제 정세의 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적 틀은 후에 이 중화와 그 동맹국들이 동아시아 세계를 완전 장악 한 후의 평화기의 자연적 쇠퇴(식민학자들이 자기 논거의 근거로 주장하는 명의 고관, 환관들이 공공연히 조선왕에세 조공(뇌물)을 바치라고 했다는 것, 그래서 조선왕이 떨거지였다는 것, 그렇다면 이러한 것이 왜 왕조초기(조선,명 둘다)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가? 왕조초기에는 그나마 성리학이 덜 수용되서 조선이 건전했다는 주장은 결국 감상론(어떠한 철학도 없는 역사학)으로 귀결될 뿐이다.이것은 말그대로의 뇌물)에 결정적으로 네덜란드라는 지구반대편에서 온 전혀 예측못한 세력이 왕실의 상품독점에 반드시 필요한 제해권을 치고 들어오면서 그와 함께 네덜란드의 세력근거지였던 일본의 부상과 함께 끝이 납니다.
그러나 조선대에 와서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 정체성의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 스스로 지나 중심의 유교적 질서관에 동참한 것이므로 고려 이전과는 다른 입장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려 시대 고려-송-거란의 외교적 관계와 광해군 때의 조선-명-청의 구도가 매우 흡사했으면서도 왜 조선에서는
그리고 지나 각국이 주변국에 행한 '책봉'의 실체는 '체제인정', '불가침협정'의 성격을 갖는 '외교적 양보'임을 말했습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 6자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불가침 확답, 체제 보장을 드는데 미국이 이를 거절하는 이유는 미국이 '힘'이 있으면서 '외교적 양보'를 행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따라서 지나 각국이 주변국에 행한 '책봉'은 겉으로는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가침협정, 체제 인정, 영토 인정의 '외교적 양보' 형태임을 말했습니다. 저는 조선이 성리학을 수용함으로써 약화되었다는 식의 글은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문약함이란 것을 어느 부분에서 유추
다크씨.. 나한테 쌓인게 많나보죠.. ㅋㅋㅋ.. 논쟁은 논쟁중에 풀어야쥐.. 논쟁에선 시덥잖은 근거 떠들고 할 말은 못하고 떠남서.. 다른 회원 분한테 욕하고 난리 법석 피웠다는 강희제 두둔하믄 되나요.. 님이 그런 꼴 당해도 그러겠습니까?
조선의 유학 수용으로 약체화라뇨? 전 그런 글 쓴 적 없네요. 지나 각국은 지나 중심의 유교적 질서관을 주변국들이 수용하도록 노력했고 조선 이전에는 우리가 적절히 들어갔다 빠졌다를 반복하면서 실리와 명분을 주고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대에 와서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 정체성의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 스스로 지나 중심의 유교적 질서관에 동참한 것이므로 고려 이전과는 다른 입장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려 시대 고려-송-거란의 외교적 관계와 광해군 때의 조선-명-청의 구도가 매우 흡사했으면서도 왜 조선에서는
인조반정으로 중립외교, 실리외교가 실패했는지를 말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조선의 경우 외교적 '명분'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적 명분'에 입각한 '사대'일 뿐이지 '속국'의 의미와는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지나 각국이 주변국에 행한 '책봉'의 실체는 '체제인정', '불가침협정'의 성격을 갖는 '외교적 양보'임을 말했습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 6자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불가침 확답, 체제 보장을 드는데 미국이 이를 거절하는 이유는 미국이 '힘'이 있으면서 '외교적 양보'를 행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따라서 지나 각국이 주변국에 행한 '책봉'은 겉으로는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가침협정, 체제 인정, 영토 인정의 '외교적 양보' 형태임을 말했습니다. 저는 조선이 성리학을 수용함으로써 약화되었다는 식의 글은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문약함이란 것을 어느 부분에서 유추
하셨는지 잘 모르겠군요.
제가 잘 못 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