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1. 8.22) 말씀 / 요한복음 5:1-9, 스스로 일어나 걸어가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한복음 5장에 한번은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습니다.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병으로 누운지 38년이라면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없겠고 거의 체념적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이런 그에게 관심이나 가져줄 사람도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병자는 대답했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야 싶지만 자신은 누워있고 더 건강한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니 소원 자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오래 흘러 자신도 절망하고 다른 사람도 포기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 혼자 아무 것도 못할 때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먹는 것, 입는 것, 배설하는 것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것이 절망입니다. 자기도 힘들 뿐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힘들게 하는 의존적 인생은 이미 죽은 인생입니다. 이런 그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관심자져주셨다는 것은 38년만에 임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 다음 9절 보면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기가막히고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겠습니까? 자기 발로 걸어가고, 자기 손으로 자리를 개고, 자기 손으로 목욕도하고, 음식도 먹고, 더 나아가서는 어려운 사람의 손을 잡아도 주고 일으켜줄 수도 있다는 것 .... 그는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걷는 자립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한 중풍병자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셨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주적 마인들을 가지고 정복하고 다스리며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삶, 타인을 위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건강하고 건전한 자립적인 존재의 삶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런데 자립적인 삶이 수운가요?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타인를 그렇게 돕기도 쉽지 않습니다. 미움 받을 용기에 보면 청년이 철학자에게 사실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이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일어서 자립한다는 것은 어렵다, 구체적인 답이 필요하다고 하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교육 지도 지원이 자립이라는 목표를 내세울 때 그 입구는 어디에 있을까? 분명 고민이 있지만 여기에는 명확한 지침이 있네. 답은 하나 존중일세” 자립적인 존재로 교육시키려면 존중하는 마음, 인격의 존중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이며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 에 대한 가치를 두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과 구별이 아니라 '너'(you)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보아주는 것, 그것이 존중이고 이러한 생각이 전달되면 아이든 어른이든 사람들은 잃어버린 용기를 되찾고 자립의 단계에 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38년 병자뿐 아니라 자아를 잃어버리고, 자기 가치를 상실하고, 깊이 절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두 발로 일어서서 걷도록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역시 한가지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의 자녀들입니다. 무가치하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들러는 인간은 누구나 다 유일무일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인격이 존중되면 얼마던지 일어서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도 이런 말을 해왔습니다.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라는 존재 하나뿐이다. 그러니.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다정하고 훌륭하고(우아하고), 멋진 사람으로 가꾸어라. 그럼 언제나 살아 숨 쉴 수 있다" 더 분명한 것은 성경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천하보다 존귀한 자들임을 분명히 말 합니다. 스바냐 3: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렇게 존귀한 존재인데 스스로 걷지 못할 이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존중하면 아이들도 바뀌고, 남편 아내도 바뀌고, 성도들도 달라지고, 세상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사야도 이렇게 말 합니다. "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이사야 49:5)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살아 숨쉬는 존재, 옇와 보시기에 사람들 보기에 고귀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자립적인 존재가 되어 스스로 일어설 때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 인간 교육의 최종 목적지를 ‘자립’으로 보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타의 힘에 의해서 사람을 그 수준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미음 받을 용기 2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던 한 청년이 철학자와 대화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교사로서 자신이 맡은 학생들을 교육할 때 권면하고, 때론 책망도 하고, 어떤 때는 벌도 주고, 또 상도 주면서 최선을 다해서 교육을 해 왔다고 합니다. 철학자는 그것은 아주 잘못된 방법이라고 합니다. 책망도 하지 말고, 때리지도 말고, 상도 주지 말라고 합니다. 참 교육이란 관여, 간섭, 강요가 아니라 자립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고 지원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교육도 그럴까요?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자립’이라는 말에 꽝 때리는 공감을 했습니다. 사람은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언제까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러의 교육의 역할은 아직 어리고 약한 존재가 스스로 자기의 역할을 깨닫고 자각하여 자기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처음 독서모임에서 읽은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책을 보면 처음 부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가르친다는 것의 효용성마저 의심한다. 내가 아는 사실은 단 한 가지 배우려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란 온갖 지식들을 죽 늘어놓고 그게 얼마나 재미있고, 좋은 것인지 설명한 다음에 한번 맛을 보라고 권하는 도우미에 불과할지 모른다. 누구에게 맛을 보라고 강요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뭔가를 가르쳤던 교사는 없다. 인간은 스스로 배우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립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간섭하지 말고 자립심을 일깨워야한다는 것 입니다. 이런 자립심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의존적이 되고, 독립성을 잃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장은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 잘 하고 벌을 주고 상을 줘서 잘 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통제가 그칠 때 아무 것도 못하게 됩니다. 한 순강에 거대 조직은 무너지게 됩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후안끼르로스 의 제자입니까 책이야기를 했지만 한 교회에 부임한 목사가 184명 이었던 교회를 2년 동안 열심히 해서 600명 3배가 부흥 역사르 이루고 외적으로는 어디 내 놓아도 손색이 없었지만 자신의 내면은 하루 16시간 일에 몰두하면서 무엇인가 잘 되는 것 같은데 긴장을 풀면 모든 것이 와를 무너지는 느낌 이었다고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자립심 없는 신앙은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적인 한국인들의 특성을 자랑스럽게 이야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자식들이 커서까지도 간섭하는 부모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이의 장래 진학 전공문제, 장래 진로 결혼까지도 부모 말을 들으라고 간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야 잘 될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자립적인 삶을 못 살기 때문에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 다시 부메랑이 되어 부모를 힘들게 하고, 아내를 자식들 마져 힘들게 합니다.
이번 설에 사모와 누가가 내려와서 이야기 중에 엘리와 사위 이야기를 했습니다. 엘리가 엄마에게 나를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사모가 그랬답니다. “방목했는데” “그게 잘 한 거에에요” 그러면서 사위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위가 딸 주아를 얼마나 오냐 오냐하는지.” 본인이 그렇게 엄마 아빠에게 외동아들로 사랑받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는데. 지금 어떤가? 부모가 질릴 정도로 이기적 이랍니다.”, 엄마와 통화하면서도 자기 생각에 안 맞으면 전화를 탁 끊어버리면 “그러면 그만 두세요“ 이런 답니다. 저도 루디아도 그랬습니다. 내가 하나님 교회 섬기느라고 너희들 제대로 잘 돌보지 못했다 미안하다 하니까? 아니랍니다. 다른 이아들과 비교해보면 잘 키우셨답니다. 원치 않게 자립적이 되다보니 결과는 긍정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립이 안 된 사람은 아무리 과거에 잘 해줬어도 여전히 불평이고, 웜망이 많습니다. 사모하고 음식 이야기하다가 냉장고를 보면서 그래도 잘 챙겨두시니 감사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는지 알아야요? 주부 구단이라고해요. 모든 것이 당신덕 분이야. 나를 내 팽기친 덕에 내가 구단이 되었어, 당신한데 나 원망 하나도 없어요.“ ”아이쿠 함력해서 선을 이루시네.“ 크크 이렇게 2박3일 지낸 후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장의 문제의식으 갖는다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2장 14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14) ‘부모를 떠나’ 이 말 뜻 역시 자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부모를 의존하면서 살았는데 앞으로는 궁극적으로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스스로 자립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립은 스스로 책임지고 방향도 잡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좀 힘들기도 합니다. 보고싶고 외롭기도 하고, 그래서 커서도 부모를 떠나지 못하면 자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삶에서는 주관적 가치관도,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삶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남이 돕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의타적인 존재가 됩니다. 대한민국 학생들이 산수 과학 경시대회에서 일등을 쓸어담습니다. 주입식 교육의 효과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모가 학교에서 무얼 배웠냐고 묻는데 유대인들은 학교에서 선생님께 무엇을 질문했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교육 방법의 차이입니다.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대학에 들어가 스스로 연구하는 학문의 세계에 들어가면 노벨상에는 거의 전무합니다. 부모들의 일방적인 교육열의 결과입니다. 반대로 이런 인간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당연 종속되고 정복당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의존적인 존재로 짓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생육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얼마나 도전적입니까! 부모를 떠나 세상에 두 발로 우뚝 서서 정복하고 다스리는 존재! 이것이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아주 멋진 모습입니다. 당당히 세상의 주인이 되어 앞서 나가는 존재, 주체적 존재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자립’이란 세상 교육의 목표만이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당장 편하다고 율법적인 요구를 하고, 일일이 지시를 하는 신앙이 몸에 배이면 그냥 따라서 하는 기계적 신앙인이 되고, 규칙적 종교인 양산밖에 되지 않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순종하고 말 잘 듣는 신앙생활을 하면 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군대체제처럼 역사가 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생활은 과거나 미래나 똑같습니다. 성장 발전이 없습니다. 시키면 하고 안 시키면 안 합니다. 세월이 가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창의 성이 없습니다. 스스로 영적 판단 분별력을 갖지 못하게 되니 성장이란 방향성도 없습니다. 지도자가 한마디 방향이 필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순종을 잘하고 착한 성도들 같은데 옳고 그름의 사리분별이 없이 행동함으로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학교 교육도 그렇고 종교교육도 그렇고 몽학선생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초보지식과 틀에 더이상 갇혀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 곧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서 덕을 끼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려면 자립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안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 지체들 모두 독서 모임을 하면서 책을 읽고 은혜를 받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인문철학이 좋은 것은 우리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삶 자립적인 삶을 살라고 늘 메시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제 곁에 두고 읽는 니체도 다 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대는 새로운 힘인가? 새로운 권리인가 시초의 운동인가? 자신의 힘으로 도는 바퀴인가? 그대는 별들에게도 지배의 힘을 미쳐 그 대 주위를 돌게 할 수 있는가?” 니체는 우리에게 타력에 의해서 억지로 돌아가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힘차게 돌아가는 바퀴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런 고전 인문학의 목적 역시 성경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자립적으로 일어서서 주체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달라지고 변화되어 세상에 영향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고독할까?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든든히 서 있으면 고독하지 않을텐데. 빈약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의존적인 사람은 분리에서 오는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립하여 자신을 든든히 세우는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서 어떤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모임이 딱 두 번입니다. 주일과 수요일 저녁입니다. 거의 대부분 밖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갈 시간들이 아주 많습니다. 긍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스스로 기도, 스스로 성경읽기, 독서, 스스로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교회는 도처에서 성도들이 우주적으로 섬길 수 있는 자립적인 교 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도 주님 말씀에 두 발로 일어섭시다. 삶며 사랑하며 배우며 나누며 한ㄹ의 별들마져 우리를 중심으로 돌게 합시다. 아멘1
주일 생명 말씀(2024.2. 25) 에베소서 2:8,9 모든 것이 선물 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 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아 니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 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지난 주 주일 예배실로 내려와서 인사를 나누는데 낯선 한 분이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일단 새로운 사람이 왔으니 너무나 반갑고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셨는가 했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을 한 30분 정도 전하고 내려와서 다시 인사를 하며 점심식사 하고 가시라고 권하는데 다자꼬짜 저를 바라보면서 설교에 인본주의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이가 없었습니다. 신천지 같은 이단이나, 아주 극단적 근본주의자 아니라면 한번 예배드리고 이렇게 무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인본주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본주의란 하나님보다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진 생각과 사고를 말합니다. 여기서 ’인본‘과 ’인본주의‘는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죄인의 형상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본주의 자인가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인본주의 인가요? 당시에 공인된 세리나 죄인들과 식사를 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리김 없이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인본주의인가요? 선한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비유를 들으실 때 믿음의 사람이 아닌 다시 멸시받는 이방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으셨습니다. 인본주의 인가요? 마태복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 가다가 다투는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인본주의 아닌가요? 이것은 인본입니다. 인본주이와 달리 인본은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 됨을 바로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신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시지 않고 하나님이심을 강조만 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으 것입니다. 형제와 다투며 미워하는 사람보고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하면 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식탐한다고 비판을 한다면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레위인 ... 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로운체 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지만 기득권만 쟁취하려하였지 약하고 병들과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늘 예수님을 책자고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에게 임하지 않고 오히려 들에 양치는 목동들에게, 그리고 어부요 세리요 열혈당 죄인들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보다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근본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긍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근본 인간이 안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흔히 말하기를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고,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고, 의사 판검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본이 안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교회에 처음 나온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성한 설교에 니체가 등장하고, 교육 심리학자 아들러 이야기를 하고, 레오버스가 글리오, 후안 까를로스 이런 인문고전 철학자들 이름과 글들이 인용되는가? 저 목사님 사도행전에 바울처럼 철학적 설교를 하네 했을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어서 바로 자리를 떴지만 예배 후 혹시라도 이 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어 다른 때보다 설교를 많이 보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 권사님을 통해서 피드백의 카톡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감동받은 이야기를 길게 소감으로 보내오셨습니다. ”와우 감사하네요,“ ”오늘도 실망없이 은혜가 됬나요“ ”실망이라니요. 그 무슨 겸손의 말씀을,, 은혜가 실로 큽니다.“ 30분이 넘어서 혹시 지루하지 않았을까 해서요“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짧다고 느껴졌습니다. 항상 보충 수업 받는 것처럼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지난 메시지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칼로저스라 사람이 한 말입니다. 내가 아는 아는 사실은 단 한 가지 배우려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우려는 사람은 어떤 모양이든지 배우는데 반대로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모양이든지 비판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좀 언짠고 한 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어떤 표지를 보고 서광호 목사님처럼 우주교회까지 들어오긴했는데 더는 못 나갔습니다. 신앙의 참 본질에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놓쳐버렸그나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인본과 인본주의와 인본을 구분할줄만 알았어도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말입니다. . 제가 인본 고전을 설교에 인용하여 니체 이야기, 연금술사 이야기, 아들러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보다 철학자들의 글들이 더 좋고 아름다워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고상하고 지적인 은유와 비유를 들어서 말씀의 깊은 의미를 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문고전 철학도 사실 은유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들어내시려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고, 씨뿌리는 농부의 이야기, 두 아들의 비유를 예로 드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 맏아들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의미를 알기 쉽게 들어내려고 비유를 들으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도 저렇게 사랑했는데 너희는 더욱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은 씨라도 받아들이는 밭의 종류에 따라서 저렇게 결과가 다른데 우리 듣는 마음도 얼마나 주요한지 아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니체를 본받으라고 니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 믿지만 세상이 인정하는 위대한 철학자도 우리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함을 말하는데 인간은 어느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성경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DNA를 가진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스스로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존귀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이며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알 수 있지만 인간이 자로 되어야 하나님에 대해서도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후 식사를 마치고 교제하는 가운데 서광호 목사님은 이 형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였습니다. 나중에 왜 그러습니까? 물어보니 어디를 가더라도 저 형제처럼 교만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맞습니다. 이왕에 선물에 대해서 생각해보죠. 사실 이 세상에 선물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빛도 선물 어둠도 선물입니다. 하루 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내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다 선물입니다. 산도, 바다도, 눈 앞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다 선물입니다. 아직 산을 타고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도 건강한 것도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선물을 많이 받고 어떤 사람이 적게 받는 것은 인식의 차이일 뿐 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다 선물이라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많은 선물을 받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무척아나 굴곡진 고난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레치암‘입니다. 삶에 대한 축복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부당하다 생각되어도 삶은 거룩한 것이며 그 자체가 축복돤 것이라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 건배를 하며 레치암하고 축복을 했습니다. 삶을 위하여라는 듯입니다. 행복한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생명을 비롯하여 이미 많은 것을 선물로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순간순간 감사하며 서로 축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것도 미래가 아니라 지금 내가 행복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깨닫기 때문에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하늘, 바다, 땅 ,바람. 구름 ,맑은 공기, 아름다운 꽃들과 푸른 잎사귀들 다 세어보면 부자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영국 시인 올리버 골드 스미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행복을 스스로 만들고 찾아야 한다. 이미 주어진 것을 찾고 발견하고 창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모님도 선물이었고, 피덩이 아가로 태어나서 처음 입은 배내 저고리도 선물 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서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준 부보님, 나를 곁에서 도와준 가족 친지들, 이웃, 친구들, 선생님 모든 주변의 사람들 알고 보면 다 당연한 것이 아닌 선물 이었습니다. 우리 독서모임이 다음 주부터 장자를 합니다. 장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정말 대단한 선물입니다. 그의 대표적 사상으로 소요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人生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그 자체로서 중(重)히 여기고 감사(感謝)하며 살아야지,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目的)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手段)인 것처럼 소모적(消耗的)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자(莊子)는 우리에게 人生에 있어서 '일'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소풍(逍風)"을 권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일' 하러 世上에 온 것이 아니고, 成功하려고 世上에 온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다 부차적(副次的)이고 수단적(手段的)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 생(生)에 무엇을 잘 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 삶을 하늘로부터 선물(膳物)로 받아 이렇게 지구에 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 장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을까요? .삶을 '수단(手段)'시 하지 마라. '삶' 자체가 '목적'임을 알라.이 '삶'이라는 여행(旅行)은 무슨 목적지(目的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이 여행(旅行) 자체를 즐겨라고 합니다.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逍遼遊)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인생이란 소풍(消風)이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소풍(消風)을 보내면서 단지 열흘짜리 휴가증을 끊어주셨다. 그러나 조물주가 계시는 중심 우주와 우리가 사는 외각 우주가 서로 흐르는 시간대가 달라 그것이 백 년이 된 것 뿐이다.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에는 글자 어디를 뜯어봐도 바쁘고 조급한 흔적(痕迹)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소요유의 "소(逍) 자는 소풍 간다는 뜻이고 "요(遼) 자는 멀리 간다는 뜻이며 "유(遊) 자는 노닌다는 뜻입니다. 즉 "멀리 소풍 가서 노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소요유'를 제대로 하려면 세 번을 쉬어야 한다. -갈 때 쉬고! -올 때 쉬고! -또 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고...우리 여생(餘生)의 종착역이 점차 가까와지고 있다. 우리의 人生은 매우 짧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짐 진 자는 모두를 내려놓고, 동심(童心)으로 (어린아이) 돌아가야 한다. 소풍온듯 쉬엄쉬엄 희희낙락(喜喜樂樂) 항상 기뻐하면서 후회(後悔) 없이 즐겁게 살아야 한다. 한 박자 쉬면 삶의 여유(餘裕)는 두 배가 된다. 소풍을 즐기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반드시 소풍이 끝났음을 알려주신다. 이 때, 소풍이 끝났다는 것은 단지 귀가를 의미한다.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반기고 가족과 함께 더욱 기쁘고 행복한 시간으로 이어진다. 환상적인 시간과 아름다운 세상이 준비되어 있다... 장자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장자도 어떻게 보면 비유입니다. 짧은 인생 살이가 소풍이라는 것, 끝나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것인데 어떻게 살 것인가? 모두가 성경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삶이니 즐겁게 행복하게 소풍처럼 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소풍 왔다 가는데 싸우지 말고 사랑하며 즐겁게 살다가 아버지께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조정민 목사님 책 두 권을 읽었는데 거기서 이 분은 두가지 선물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선물’ 또 하나는 ‘인생이 선물“ ’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선물입니다. 인생의 출발점이 내가 아닙니다. 인생은 누군가의 선물로 시작된 것입니다. 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나 주위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 나와 평생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소중한 선물이고 인생 전체가 내가 받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처음에는 삶들이, 아름다운 세상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알고보니 저에게 보내주신 가까이 사람들이 가장 크고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푸른 초장 식구들은 정말 내 인생에 소중한 선물입니다. 재중, 명남 정미. 지홍, 서광호, 현옥, 경숙, 효주 영미, 선교사님, 최광휴 선교사님, 근호 형제님 천권사님. 모두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너무나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한 분 한 분 내 인생에 베스트의 선물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그리고 행복을 나누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주어진 인생의 선물을 누리며 살려고 합니까? 남편 아내 자식들 얼마나 소중한 선물 입니까?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선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선물이 오고가는 곳에는 요구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행복과 감사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구하지 없으니 대신 자유입니다. 서로 베풀고 주기만 합니다. 이런 삶에는 비록 살아가면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할 때가 있어도 그 역시 자유 선택이지 매임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다시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목자로 세웠고, 너에게 교회를 주었는데 할당량 얼마 몇 명 부흥을 해야하지 않는냐 하신다면 제가 목회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잘 하나 못하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선물을 줬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선물도 주시고 요구하신 것은 믿음 하나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라는 것뿐입니다. 선물 준 것 믿고 받으라는 것 뿐입니다. 에베소서 2:8,9에서 부과 설명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 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아 니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 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왜 예쁠 것도 없고, 잘 한 것도 하나도 없는, 죄악 된 세상,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물을 주십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에베소서 2:4-5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결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선물로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알고보면 우리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입니다. 자유 자이고, 행복 자입니다. 기가 죽을 필요 없습니다. 부자의 여유로움을 갖고 삽시다. 하늘 땅 바다 맑은 공기 아름다운 자연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ㄱ만으로도 부자입니다. 주신 하나님 안에서 받은 선물들 퍼서 나누며 삽시다. 구원의 은혜 노래하며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아멘!.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지난 주 주일 예배실로 내려와서 인사를 나누는데 낯선 한 분이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일단 새로운 사람이 왔으니 너무나 반갑고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셨는가 했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을 한 30분 정도 전하고 내려와서 다시 인사를 하며 점심식사 하고 가시라고 권하는데 다자꼬짜 저를 바라보면서 설교에 인본주의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이가 없었습니다. 신천지 같은 이단이나, 아주 극단적 근본주의자 아니라면 한번 예배드리고 이렇게 무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인본주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본주의란 하나님보다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진 생각과 사고를 말합니다. 여기서 ’인본‘과 ’인본주의‘는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죄인의 형상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본주의 자인가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인본주의 인가요? 당시에 공인된 세리나 죄인들과 식사를 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리김 없이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인본주의인가요? 선한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비유를 들으실 때 믿음의 사람이 아닌 다시 멸시받는 이방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으셨습니다. 인본주의 인가요? 마태복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 가다가 다투는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인본주의 아닌가요? 이것은 인본입니다. 인본주이와 달리 인본은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 됨을 바로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신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시지 않고 하나님이심을 강조만 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으 것입니다. 형제와 다투며 미워하는 사람보고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하면 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식탐한다고 비판을 한다면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레위인 ... 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로운체 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지만 기득권만 쟁취하려하였지 약하고 병들과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늘 예수님을 책자고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에게 임하지 않고 오히려 들에 양치는 목동들에게, 그리고 어부요 세리요 열혈당 죄인들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보다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근본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긍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근본 인간이 안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흔히 말하기를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고,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고, 의사 판검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본이 안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교회에 처음 나온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성한 설교에 니체가 등장하고, 교육 심리학자 아들러 이야기를 하고, 레오버스가 글리오, 후안 까를로스 이런 인문고전 철학자들 이름과 글들이 인용되는가? 저 목사님 사도행전에 바울처럼 철학적 설교를 하네 했을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어서 바로 자리를 떴지만 예배 후 혹시라도 이 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어 다른 때보다 설교를 많이 보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 권사님을 통해서 피드백의 카톡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감동받은 이야기를 길게 소감으로 보내오셨습니다. ”와우 감사하네요,“ ”오늘도 실망없이 은혜가 됬나요“ ”실망이라니요. 그 무슨 겸손의 말씀을,, 은혜가 실로 큽니다.“ 30분이 넘어서 혹시 지루하지 않았을까 해서요“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짧다고 느껴졌습니다. 항상 보충 수업 받는 것처럼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지난 메시지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칼로저스라 사람이 한 말입니다. 내가 아는 아는 사실은 단 한 가지 배우려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우려는 사람은 어떤 모양이든지 배우는데 반대로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모양이든지 비판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좀 언짠고 한 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어떤 표지를 보고 서광호 목사님처럼 우주교회까지 들어오긴했는데 더는 못 나갔습니다. 신앙의 참 본질에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놓쳐버렸그나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인본과 인본주의와 인본을 구분할줄만 알았어도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말입니다. . 제가 인본 고전을 설교에 인용하여 니체 이야기, 연금술사 이야기, 아들러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보다 철학자들의 글들이 더 좋고 아름다워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고상하고 지적인 은유와 비유를 들어서 말씀의 깊은 의미를 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문고전 철학도 사실 은유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들어내시려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고, 씨뿌리는 농부의 이야기, 두 아들의 비유를 예로 드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 맏아들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의미를 알기 쉽게 들어내려고 비유를 들으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도 저렇게 사랑했는데 너희는 더욱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은 씨라도 받아들이는 밭의 종류에 따라서 저렇게 결과가 다른데 우리 듣는 마음도 얼마나 주요한지 아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니체를 본받으라고 니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 믿지만 세상이 인정하는 위대한 철학자도 우리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함을 말하는데 인간은 어느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성경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DNA를 가진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스스로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존귀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이며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알 수 있지만 인간이 자로 되어야 하나님에 대해서도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후 식사를 마치고 교제하는 가운데 서광호 목사님은 이 형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였습니다. 나중에 왜 그러습니까? 물어보니 어디를 가더라도 저 형제처럼 교만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맞습니다. 이왕에 선물에 대해서 생각해보죠. 사실 이 세상에 선물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빛도 선물 어둠도 선물입니다. 하루 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내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다 선물입니다. 산도, 바다도, 눈 앞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다 선물입니다. 아직 산을 타고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도 건강한 것도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선물을 많이 받고 어떤 사람이 적게 받는 것은 인식의 차이일 뿐 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다 선물이라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많은 선물을 받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무척아나 굴곡진 고난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레치암‘입니다. 삶에 대한 축복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부당하다 생각되어도 삶은 거룩한 것이며 그 자체가 축복돤 것이라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 건배를 하며 레치암하고 축복을 했습니다. 삶을 위하여라는 듯입니다. 행복한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생명을 비롯하여 이미 많은 것을 선물로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순간순간 감사하며 서로 축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것도 미래가 아니라 지금 내가 행복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깨닫기 때문에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하늘, 바다, 땅 ,바람. 구름 ,맑은 공기, 아름다운 꽃들과 푸른 잎사귀들 다 세어보면 부자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영국 시인 올리버 골드 스미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행복을 스스로 만들고 찾아야 한다. 이미 주어진 것을 찾고 발견하고 창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모님도 선물이었고, 피덩이 아가로 태어나서 처음 입은 배내 저고리도 선물 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서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준 부보님, 나를 곁에서 도와준 가족 친지들, 이웃, 친구들, 선생님 모든 주변의 사람들 알고 보면 다 당연한 것이 아닌 선물 이었습니다. 우리 독서모임이 다음 주부터 장자를 합니다. 장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정말 대단한 선물입니다. 그의 대표적 사상으로 소요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人生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그 자체로서 중(重)히 여기고 감사(感謝)하며 살아야지,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目的)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手段)인 것처럼 소모적(消耗的)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자(莊子)는 우리에게 人生에 있어서 '일'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소풍(逍風)"을 권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일' 하러 世上에 온 것이 아니고, 成功하려고 世上에 온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다 부차적(副次的)이고 수단적(手段的)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 생(生)에 무엇을 잘 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 삶을 하늘로부터 선물(膳物)로 받아 이렇게 지구에 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 장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을까요? .삶을 '수단(手段)'시 하지 마라. '삶' 자체가 '목적'임을 알라.이 '삶'이라는 여행(旅行)은 무슨 목적지(目的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이 여행(旅行) 자체를 즐겨라고 합니다.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逍遼遊)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인생이란 소풍(消風)이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소풍(消風)을 보내면서 단지 열흘짜리 휴가증을 끊어주셨다. 그러나 조물주가 계시는 중심 우주와 우리가 사는 외각 우주가 서로 흐르는 시간대가 달라 그것이 백 년이 된 것 뿐이다.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에는 글자 어디를 뜯어봐도 바쁘고 조급한 흔적(痕迹)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소요유의 "소(逍) 자는 소풍 간다는 뜻이고 "요(遼) 자는 멀리 간다는 뜻이며 "유(遊) 자는 노닌다는 뜻입니다. 즉 "멀리 소풍 가서 노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소요유'를 제대로 하려면 세 번을 쉬어야 한다. -갈 때 쉬고! -올 때 쉬고! -또 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고...우리 여생(餘生)의 종착역이 점차 가까와지고 있다. 우리의 人生은 매우 짧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짐 진 자는 모두를 내려놓고, 동심(童心)으로 (어린아이) 돌아가야 한다. 소풍온듯 쉬엄쉬엄 희희낙락(喜喜樂樂) 항상 기뻐하면서 후회(後悔) 없이 즐겁게 살아야 한다. 한 박자 쉬면 삶의 여유(餘裕)는 두 배가 된다. 소풍을 즐기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반드시 소풍이 끝났음을 알려주신다. 이 때, 소풍이 끝났다는 것은 단지 귀가를 의미한다.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반기고 가족과 함께 더욱 기쁘고 행복한 시간으로 이어진다. 환상적인 시간과 아름다운 세상이 준비되어 있다... 장자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장자도 어떻게 보면 비유입니다. 짧은 인생 살이가 소풍이라는 것, 끝나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것인데 어떻게 살 것인가? 모두가 성경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삶이니 즐겁게 행복하게 소풍처럼 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소풍 왔다 가는데 싸우지 말고 사랑하며 즐겁게 살다가 아버지께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조정민 목사님 책 두 권을 읽었는데 거기서 이 분은 두가지 선물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선물’ 또 하나는 ‘인생이 선물“ ’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선물입니다. 인생의 출발점이 내가 아닙니다. 인생은 누군가의 선물로 시작된 것입니다. 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나 주위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 나와 평생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소중한 선물이고 인생 전체가 내가 받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처음에는 삶들이, 아름다운 세상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알고보니 저에게 보내주신 가까이 사람들이 가장 크고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푸른 초장 식구들은 정말 내 인생에 소중한 선물입니다. 재중, 명남 정미. 지홍, 서광호, 현옥, 경숙, 효주 영미, 선교사님, 최광휴 선교사님, 근호 형제님 천권사님. 모두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너무나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한 분 한 분 내 인생에 베스트의 선물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그리고 행복을 나누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주어진 인생의 선물을 누리며 살려고 합니까? 남편 아내 자식들 얼마나 소중한 선물 입니까?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선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선물이 오고가는 곳에는 요구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행복과 감사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구하지 없으니 대신 자유입니다. 서로 베풀고 주기만 합니다. 이런 삶에는 비록 살아가면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할 때가 있어도 그 역시 자유 선택이지 매임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다시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목자로 세웠고, 너에게 교회를 주었는데 할당량 얼마 몇 명 부흥을 해야하지 않는냐 하신다면 제가 목회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잘 하나 못하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선물을 줬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선물도 주시고 요구하신 것은 믿음 하나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라는 것뿐입니다. 선물 준 것 믿고 받으라는 것 뿐입니다. 에베소서 2:8,9에서 부과 설명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 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아 니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 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왜 예쁠 것도 없고, 잘 한 것도 하나도 없는, 죄악 된 세상,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물을 주십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에베소서 2:4-5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결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선물로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알고보면 우리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입니다. 자유 자이고, 행복 자입니다. 기가 죽을 필요 없습니다. 부자의 여유로움을 갖고 삽시다. 하늘 땅 바다 맑은 공기 아름다운 자연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ㄱ만으로도 부자입니다. 주신 하나님 안에서 받은 선물들 퍼서 나누며 삽시다. 구원의 은혜 노래하며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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