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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목(黃漆木)의 원산지(原産地)와 백제(百濟)
百濟王朝! 누가 半島 西南 모퉁이 땅에 있었다고 하는가?
갑옷(鎧)을 저수지(貯水池) 한복판에 묻어?
왜…?
유치원(幼稚園)생들의 스무고개 낱말 맞추기보다 더 유치한 이야기다.
○ 코믹(comic)한, 스무고개 낱말 맞추기 시작(始作)과 같은 위의 이야기는, 21세기(世紀) 현재(現在)의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 땅의 저수지(貯水池)【출처(出處) / 본문기사(本文記事) 인용(引用) : 2011년 10월 중순 성안마을 내 저수지 발굴현장 : 그렇다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 상황에서 옻칠 갑옷 등을 저수지 한가운데 놓았다는 얘기인데 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다.】가 6∼7세기(世紀)때의 백제(百濟) 저수지(貯水池)였다.〉라는 전제(前提)가 깔려있다.
그 저수지(貯水池)는 : 백제왕조(百濟王朝) 시절(時節)에 만들었다는 금석문(金石文)이나, 안내표지(案內標識)라도 발굴(發掘)한 것일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저수지(貯水池) 한복판에서 나왔다는 갑옷은, 보통 ‘갑옷’이 아니라, 갑옷에 옻칠을 한 ‘옻칠 갑옷’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황금빛의 황칠(黃漆)이다.
우리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학자(史學者)들의 해설(解說)을 믿으려 하지만, 믿고 싶지만, 그 분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도무지 일반적(一般的)이지 못하고, 상식적(常識的)이지 못하고, 자연환경(自然環境)과도 부합(符合)되지 않는, UFO와 같은 이해(理解)되지 않는, 이해(理解)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역사해설(歷史解說)이라고 믿으라고 한다.
○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옛 봉건왕조(封建王朝) 백제왕국(百濟王國)이 반도(半島) 서남(西南)부에 자리 잡고 있었는가, 없었는가가 우선(于先)일 것이다.
가장 쉬운 이야기로, 백제(百濟)는 땅에 습기(濕氣)가 많고 더워, 백성(百姓)들은 산(山)속에 집을 짓고 산다고 하였다. 또 발굴(發掘)된 백제(百濟)인의 금석문(金石文)속에는 “백제(百濟)를 가리켜 택국(澤國)”이라고 하였다. 이는 ‘습기(濕氣)가 많고 더워, 백성(百姓)들은 산(山)속에 집을 짓고 산다.’는 말과 상통(相通)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반도(半島)의 서남(西南)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 땅의 백성들은 모두 산(山)속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더불어 이곳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땅에 강(江)과 호수(湖水)가 널려 있고, 못(澤)이 널려 있으며, 아열대성(亞熱帶性) 기후(氣候)를 갖추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별칭(別稱)으로 “택국(澤國)”이라고 불렸다면, 나라 안에 수많은 강(江)과 호수(湖水)와 늪지(澤)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 그 어느 곳에 수많은 강(江)과 하천(河川)과 못(澤)이 널려 있는가? 이건 아니다. 유치원(幼稚園) 어린아이들 머리보다도 더 낮은 지능지수(知能指數)를 가진 아이들에게도, 세뇌(洗腦)되지 않을 엉터리 이야기다. 아래의 기사(記事) 내용(內容)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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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내용(記事內容) 인용(引用) -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백제시대 최고급 옻칠 갑옷, 왜 저수지 한가운데 묻혔을까 <2017-06-07 03:00 수정 2017-06-07 09:04>
<34> 공주 공산성 발굴
발아래 금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백제 700년 역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꼭대기 정자(亭子)에 오르자, 공북루(拱北樓)로 뻗어 내린 성벽 옆으로 금강이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서기 660년 이곳에서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벌인 의자왕도 저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까…. 475년 한성(현 서울)에서 천도한 이후 64년 동안 백제 도읍이었던 웅진(공주)은 백제 부활과 멸망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공북루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최근 발굴을 마친 공터가 보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민가 7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성안마을’이다. 여기서 백제시대 건물 터를 비롯해 ‘옻칠 갑옷’ 등 각종 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발굴단은 당초 견해를 바꿔 백제 왕궁 정전(正殿) 터가 성안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故) 이남석 공주대 교수(발굴단장)와 함께 오랫동안 공산성 발굴에 참여한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스승을 회고했다. “사람이 세상 떠날 때를 택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30년 넘게 공산성 발굴에 매달린 분답게 마지막 9차 발굴까지 모두 마친 직후에 돌아가셨어요.”
○ 당나라 연호 적힌 옻칠 갑옷 출토
… ‘○○行貞觀十九年四月卄一日’(○○행 정관 19년 4월 21일)이라는 명문이 적힌 백제시대 ‘옻칠 갑옷’. 공주 공산성 성안마을에서 발견됐다.
“아 행정관(行貞觀) 명문이다!”
2011년 10월 중순 성안마을 내 저수지 발굴현장. 지표로부터 6.5m 깊이 바닥에 깔린 풀을 대나무 칼로 조심스레 떼어내던 이현숙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행여나 유물을 밟을까 오랜 시간 쪼그린 자세로 까치발을 한 탓에 그의 탄성엔 고통이 배어 있었다. 햇볕에 노출된 직후 감청색 빛깔을 드러낸 옻칠 갑옷 조각 위로 빨간색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행정관’ 뒤로 ‘十九年四月卄一日’(19년 4월 21일) 글자도 있었다. 행정관이 무슨 뜻인가.
전화로 보고를 받은 이남석이 급하게 현장으로 뛰어왔다. 명문을 유심히 들여다본 스승이 제자를 슬쩍 나무랐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정관(貞觀)으로 읽어야지. 당나라 연호 아닌가.” 백제시대 유물에서 당나라 연호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정관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 태종의 연호로, 정관 19년은 서기 645년(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문헌 기록이 절대 부족한 고대사에서 연대가 적힌 명문은 역사 해석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핵심 자료다.
명문도 명문이지만 옻칠 갑옷 발굴도 대단한 성과였다. 가죽에 10여 차례 이상 옻을 덧바르는 갑옷은 삼국시대 최고 사치품으로 통한다. 더구나 옻칠 갑옷과 함께 쇠 갑옷, 마갑(馬甲), 대도(大刀), 장식칼 등 기마병의 화려한 말갖춤이 한 세트로 묻혀 있었다. 백제시대 공산성의 위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1급 유물들이다.
주변 발굴을 끝낸 직후 발굴단은 갑옷 발견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게 됐다. 이현숙의 기억. “성안마을 주민들이 저수지에만 우물 5개를 팠습니다. 그런데 이 중 관정(管井) 하나가 옻칠 갑옷과 불과 20cm 떨어진 곳에 설치됐더라고요. 조금만 옆쪽으로 뚫고 지나갔다면 갑옷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 누가 왜 최고급 갑옷을 저수지에 묻었나
…옻칠 갑옷과 함께 공산성 성안마을 안 저수지에서 발견된 ‘쇠 갑옷’. 공주대박물관 제공
고고 유물은 발굴 못지않게 해석이 중요하다. 관련 역사 기록과 연관성은 기본이고 때론 문헌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공산성 발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옻칠 갑옷 등이 불탄 기와와 화살촉이 가득한 지층 바로 아래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말 탄 기병을 연상시키듯 갑옷, 무기, 마갑 순으로 유물들이 층위를 이루며, 물건을 감추듯 1m 두께의 풀을 갑옷 위에 덮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 상황에서 옻칠 갑옷 등을 저수지 한가운데 놓았다는 얘기인데 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다.
이를 놓고 학계에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된다. 우선 “백제는 간지(干支)를 사용했다”는 중국 역사서 한원(翰苑) 기록을 토대로 당나라 연호가 적힌 옻칠 갑옷은 중국에서 만든 거라는 견해가 있다. 당 군이 웅진도독부에서 철수하면서 버린 갑옷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에 중국 연호가 새겨진 사실이 있으므로 백제가 외교용으로 갑옷을 만들었다는 반론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 “645년 5월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했을 때 백제가 금색 칠을 한 갑옷과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을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옻칠 갑옷에 적힌 645년 4월과 시기도 비슷하다. 발굴단의 해석을 이현숙이 정리했다.
“백제가 당나라에 외교용으로 갑옷을 보내면서 국가기록물 차원에서 추가로 제작한 게 출토품인 걸로 보입니다.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앞두고 갑옷을 저수지 아래 묻으며 승전을 기원한 의례를 올린 게 아닐까요.”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기사내용(記事內容) 인용(引用)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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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해(理解)할 수도 없고, 이해(理解)되지도 않는 내용(內容)들
코믹(comic)한, 스무고개 낱말 맞추기 시작(始作)과 같은 위의 이야기는, 21세기(世紀) 현재(現在)의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 땅의 저수지(貯水池)【출처(出處) / 본문기사(本文記事) 인용(引用) : 2011년 10월 중순 성안마을 내 저수지 발굴현장 : 그렇다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 상황에서 옻칠 갑옷 등을 저수지 한가운데 놓았다는 얘기인데 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다.】가 6∼7세기(世紀)때의 백제(百濟) 저수지(貯水池)였다.〉라는 전제(前提)가 깔려있다.
그 저수지(貯水池)는 : 백제왕조(百濟王朝) 시절(時節)에 만들었다는 금석문(金石文)이나, 안내표지(案內標識)라도 발굴(發掘)한 것일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➊〈지표로부터 6.5 m 이하(以下)에 묻혀있던 갑옷 조각위에 써진 빨간색 글씨가 선명(鮮明)하게 보였다?〉1,400여년 땅속에 묻혀있었던 갑옷(鎧)위에 새긴 것도 아니고, 써진 빨간 글씨가 선명(鮮明)하에 보였다면, 자연환경(自然環境)의 변화(變化)는 없었다는 것일까? 정말 선명(鮮明)하게 1,400년 동안 변(變)하지 않았을까?
그곳이 당시 저수지(貯水池)였다는 전제(前提)는 무엇으로부터 확신(確信)하는 것일까? 물속 깊은 곳에 묻으면서,【본문기사(本文記事) 인용(引用) : 공산성 발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옻칠 갑옷 등이 불탄 기와와 화살촉이 가득한 지층 바로 아래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말 탄 기병을 연상시키듯 갑옷, 무기, 마갑 순으로 유물들이 층위를 이루며, 물건을 감추듯 1m 두께의 풀을 갑옷 위에 덮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 상황에서 옻칠 갑옷 등을 저수지 한가운데 놓았다는 얘기인데 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다.】어떻게 1m 두께의 풀을 덮었을까? 또 불탄 기와와 화살촉이 가득한 지층(地層)아래에서 발굴(發掘)되었다는 이야는 또 뭔가?
➋ 도대체 무슨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理解)할 수가 없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란 말은 또 뭔가? 당군(唐軍)의 주력부대(主力部隊)속에 신라(新羅)의 김춘추(金春秋)는, 당황(唐皇) 고종(高宗)의 명령(命令)으로 일개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참여(參與)하였다.
정관(貞觀)은 당(唐) 태종(太宗)의 연호(年號 627∼649)이고, 19년이란 서력(西曆) 645년을 말하며,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5년(年)이다.
이후 15년이란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 백제(百濟)는 그의 아들 고종(高宗)의 명령(命令)을 받은 소정방(蘇定方)과 유백영(劉伯英)과 수륙군(水陸軍) 십여(十餘)만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적고 있다.
여기서 당(唐)나라의 수륙군(水陸軍) 십여만(十餘萬)과
북위(北魏)의 기마(騎馬) 수십 만기(數十萬騎)의 차이는 뭘까?
백제(百濟)가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있었다면 북위(北魏)때도 ‘수군(水軍)+기마부대(騎馬部隊)’로 편성(編成)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그저 기마(騎馬) 수십 만기(數十萬騎)로 백제(百濟)의 국경(國境)안으로 들어갔으나, 패(敗)하였다고 간략(簡略)하게 기술(記述)해 놓고 있을 뿐이다.
➌ 정말 당시(當時)에 쓴 ‘붉은 글자’일까? 1,400여 년 전(前)에 쓴 글자가 지금도 선명(鮮明)하게 살아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반도(半島) 공주(公州) 땅에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증거(證據)가 될 수 있을까? 그것들이 발견(發見)된 것과 백제(百濟) 땅과는 전혀 별개(別個)의 사안(事案)이다. 발견(發見)된 것들은 언제든지, 유민(遺民)들에 의해 묻혀 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➍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 역사기록(歷史記錄)인 원전(原典)사서(史書)에서 말하는 백제(百濟)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은, 반도(半島)와는 전혀 다른 환경(環境)을 가졌다는 것이다.
백제(百濟) 땅은, 경기도(京畿道) 남부(南部)지방과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땅으로, 가장 풍요(豐饒)롭고, 자연환경(自然環境)이 좋은 곳에 속하는 4계절(季節)이 뚜렷한 곳이다.
그러나 원전(原典)사서(史書)에서는 : 백제(百濟) 땅은 덥고, 습하여 백성(百姓)들은 모두 산(山)에서 산다고 하였다, 또한 백제(百濟)의 별칭(別稱)은 택국(澤國)이다. 이 말은 백제(百濟) 땅에는 호수와 늪 등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반도(半島)의 경기도(京畿道) 남부(南部)지방과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지방등에 이러한 자연환경(自然環境)속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반도(半島)백제(百濟)라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태어난 창작소설(創作小說)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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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해(理解)할 수도 없고, 이해(理解)되지도 않는 내용(內容)들
➊ 위 본문(本文) 중에서 :〈백제시대 유물에서 당나라 연호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정관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 태종의 연호로, 정관 19년은 서기 645년(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고 위의 기사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백제(百濟) 서력(西曆) 660년【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20년 / 부여풍 (扶餘豊) 원년 : 31대 678년】 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고종(高宗) 11년 /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 /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19년】8월 29일(음력 7월 9일) 항복(降服), 망(亡)했다고 전해진다.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다른 사건사고(事件事故)와 달리 신중(愼重)에 신중(愼重)을 기해야 하는 분야(分野)다. ‘혼(魂)과 얼’이 담겨 있는 분야(分野)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소개한 원전(原典)의 원문(原文)은, 이미 우리 카페에 번역(飜譯)과 해설(解說)을 모두 게재(揭載)한 것들이다. 그저 참고로 보면 될 것 같다.
㉠ 신당서(新唐書) 本紀 第 三 / 高宗 : 《五 年. 辛 亥, 左 武 衛 大 將 軍 蘇 定 方 為 神 兵 道 行 軍 大 總 管 , 新 羅 王 金 春 秋 為 嵎 夷 道 行 軍 總 管 , 率 三 將 軍 及 新 羅 兵 以 伐 百 濟 。》
㉡ 舊唐書 百濟 / 舊 唐 書 卷 四. 本紀 第 四. 高宗. 上 : 《五 年, 八 月 庚 辰 , 蘇 定 方 等 討 平 百 濟 , 面 縛 其 王 扶 餘 義 慈 。 國 分 為 五 部 , 郡 三 十 七 , 城 二 百 , 戶 七 十 六 萬 , 以 其 地 分 置 熊 津 等 五 都 督 府 。 曲 赦 神 丘 、 禺 夷 道 總 管 已 下, 賜 天 下 大 酺 三 日》
㉢ 資治通鑑 卷200 唐紀十六/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上之下 /《顯慶五年(庚申 六六0) : 百濟恃高麗之援,數侵新羅;新羅王春秋上表求救.辛亥,以左武衛大將軍蘇定方為神丘道行軍大總管,新書作神兵道.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帥,水陸十萬以伐百濟.考異曰:舊書定方傳,新羅傳皆云定方為熊津道大總管.實錄定方傳亦同.今從此年實錄、新唐書本紀.又舊本紀,唐曆皆云,四年十二月癸亥,以定方為神丘道大總管,劉伯英為嵎夷道行軍總管.按定方時討都曼,未為神丘道總管,舊書,唐曆皆誤.今從實錄.以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因堯典,宅嵎夷曰暘谷,而命之.將新羅之衆,與之合勢.》
위 내용(內容)의 해설(解說) : 百濟恃高麗之援,數侵新羅;新羅王春秋上表求救.辛亥,以左武衛大將軍蘇定方為神丘道行軍大總管,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帥,水陸十萬以伐百濟.以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將新羅之衆,與之合勢. : 백제가 고려(高句麗)를 믿고 지원으로, 수차례에 걸쳐 신라(新羅)를 침략하자, 신라왕(新羅王) 김춘추는 글을 올려 나라를 구원해달라고 청하였다. 신해 ;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神丘道)행군 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등을 장수로 수군과 육군 십만이 백제를 범하였다.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嵎夷道)행군총관”으로 하여, 신라의 장수들과 함께 합세하도록 하였다.
● 武 衛 大 將 軍 蘇 定 方 為 神 丘 道 行 軍 大 總 管 : 注 / 新 書 作 神 兵 道.
● 주(注) / 考異曰:舊書定方傳,新羅傳皆云定方為熊津道大總管.實錄定方傳亦同.今從此年實錄、新唐書本紀.又舊本紀,唐曆皆云,四年十二月癸亥,以定方為神丘道大總管,劉伯英為嵎夷道行軍總管.按定方時討都曼,未為神丘道總管,舊書,唐曆皆誤.今從實錄. : 주 / 고이(考異)에서 이르기를 : 신구(新舊)당서(唐書) 소정방(蘇定方)전 및 신라(新羅)전에서 말하기를, 소정방(蘇定方)은 “웅진(熊津)도 대 총관”이다. 실록(實錄) 소정방(蘇定方)전 역시 같다. 실록에 따른다. 신구(新舊)당서(唐書)본기(本紀), 또 구(舊)본기(本紀), 당력(唐曆) 모두에 따르면, 4 년 12월, 계해(癸亥), 소정방(蘇定方)이 신구도(神丘道)대 총관, 유 백 영이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다. 안(按) 소정방(蘇定方)은 이때 도만(都曼)을 토벌할 때이기 때문에, 신구도(神丘道)총관(總管)직을 아직 할 수 없다. 구서(舊書), 당력(唐曆) 모두 잘못이므로 이제 실록에 따른다.
新書 (新書 ; 新唐書?)엔 신병도(神兵道)총관
舊書 및 列傳, 新羅 전엔 熊津道大總管
新唐書本紀.又舊本紀,唐曆皆云,四年十二月癸亥,以定方為神丘道大總管
資治通鑑에서는 실록에 따라(今從實錄) 神丘道行軍大總管
按定方時討都曼,未為神丘道總管,舊書,唐曆皆誤.(今從實錄)..........<이때 곧 서기 659년(당 현경 4년, 12월)에 “소정방”은 서역(西域)지방에서 도만(都曼)을 토벌(討伐)하기 위해 현재의 신강성(新疆省) 서쪽지방에 있었으므로 당시(當時)에 신구도(神丘道) 총관(總管)을 할 수 없다.(未為神丘道總管). 舊書(구서). 당력(唐曆) 모두 착오이므로 이제 실록(實錄)에 따른다.>고 하였다.
㉣ 통전(通典) 백제(百濟) 말미구절(末尾句節)을 보자. : 《 國 西 南 海 中 有 三 島 , 出 黃 漆 樹 ,似 小 榎 樹 而 大 。 六 月 取 汁 , 漆 器 物 若 黃 金 , 其 光 奪 目 。中略. 土 著 地 多 下 濕 , 率 皆 山 居 。(中略). 後 魏 孝 文 遣 眾 征 破 之 。 中略. 顯 慶 五 年 , 遣 蘇 定 方 討 平 之 。 舊 有 五 部, 分 統 三 十 七 郡 、 二 百 城 、 七 十 六 萬 戶 , 至 是 以 其 地 分 置 熊 津 、 馬 韓 、 東 明 等 五 都 督 府 , 仍 以 其 酋 渠 為 都 督 府 刺 史 。 其 舊 地 沒 於 新 羅 , 城 傍 餘 眾 後 漸 寡 弱 , 散 投 突 厥 及 靺 鞨 。 其 主 夫 餘 崇 竟 不 敢 還 舊 國 , 土 地 盡 沒 於 新 羅 、靺 鞨 , 夫 餘 氏 君 長 遂 絕 。》
㉤ 唐 會 要 : 百濟 : 卷 095 : 《至顯慶五年八月十三日。左衛大將軍蘇定方討平之。虜其王義慈。及太子崇。將校五十八人。送于京師。其國分為五部。統郡三十七。城二百。戶七十六萬。至是以其地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各統州縣。立其酋長為都督。刺史縣令。命左衛郎將王文度為都統。總兵以鎮之。義慈事親以孝行聞。友于兄弟。時人號為海東曾閔。及至京。數日病卒。葬于孫皓陳叔寶墓側。至麟德三年已後。其地為新羅靺鞨所分。百濟之種遂絕。》
㉥ 太平寰宇記 / 卷一百七十二 / 四夷一 東夷一 / 《百濟國 : 時, 句麗旣畧有遼東,而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今營·平二州之間也. 中略. 地多下濕, 率皆山居. 後魏 孝文帝遣衆征破之, 中略. 顯慶五年(660), 蘇定方討平之, 因虜其王義慈以歸. 其地舊有五部, 分統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至是以其地分置熊津, 馬韓, 東明, 金漣, 原本, 訛連據, 通攷改正. 德安等五府都督府, 以其酋渠爲都督府刺史. 命右衛郞將王文度爲都督, 總兵以鎭之. 至麟德三年(666), 其舊地沒於新羅,城旁餘衆, 後漸衰弱, 散投突厥及靺鞨.其王夫餘隆,竟不敢還舊國土, 地盡沒於新羅·靺鞨,扶餘氏君長, 因之遂絶. 義慈,事親以至孝, 聞友於兄弟, 時人號爲東海曾閔.中略. 西南海中有三島, 其上出黃漆樹, 似小棕樹, 而大六月, 輒取其汁, 漆器物, 如黃金, 其光奪目.》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百濟) 무왕(武王) :《二十七年, 遣使入唐,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不許來朝上國. : 27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明光鎧)라는 갑옷을 바치면서,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상국을 입조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호소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高句驪) : 《收靺鞨三千三百人, 悉坑之. 獲馬五萬匹․牛五萬頭․明光鎧萬領, 它器械稱是.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말 5만 필․소 5만 두.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이 정도 노획하였다.》
※ 위의 기사(記事) 내용(內容) 중 〈정관(貞觀)은 백제(百濟)를 멸망(滅亡)시킨 당 태종(太宗)의 연호(年號)로, 정관(貞觀) 19년은 서기 645년(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는 내용(內容)은, 커다란, 심각(深刻)한 오류(誤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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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옻칠갑옷 명광개(明光鎧)」의 자세(仔細)한 것들을 보면,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의 허구(虛構)를 파악(把握)할 수 있다.
➊ 갑옷에 황칠(黃漆)을 한 명광개(明光鎧)! 황칠(黃漆)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황칠(黃漆)이란 황칠(黃漆)나무의 수액(樹液)으로 칠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 황칠(黃漆)나무의 원산지(原産地)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대부분(大部分)의 설명(說明)을 보면 : 황칠(黃漆)나무는, 반도(半島)서남(西南)의 도서(島嶼)지방의 특산물(特産物)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아열대(亞熱帶)지방의 특산(特産)이며, 열도(列島) 땅에도 있다고 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황칠[黃漆] : 두릅나무과(科)에 속하는 난대성 상록교목(常綠喬木)인 황칠나무에서 채취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수지도료(樹脂塗料)로써, 「황칠나무는 아열대성 식물로 그 분포지는 제주도·완도·보길도·어청도·진도·홍도·거문도와 보령(保寧)의 연열도 등 주로 남부지방 해안이나 섬지방에서만 자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계림지(鷄林志)에는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난다. 6월에 수액을 채취하는데 빛깔이 금과 같으며, 볕에 쪼여 건조시킨다. 본시 백제에서 나던 것인데, 지금 절강(浙江)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신라칠(新羅漆)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541년(중종 36)에 간행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언해(牛馬羊渚染疫病治療方諺解)에는, “제주에서는 나나니란 이름을 황칠이라 하고, 북나무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두산백과 / 황칠나무 [Ivytree, 黃漆木 ] : 쌍떡잎식물 산형화목 두릅나무과의 상록교목으로(중략). 한국 특산종으로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및 제주도에 분포하며, 일본에는 혼슈 남부, 오키나와까지 분포한다.
과거에는 독립종으로 보았으나, 일본종인 Dendropanaxmorbiferus H. Lev.와 수액의 색 이외에는 형태적 차이점을 확인하기 어렵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황칠나무 : 중남미, 동부 아시아와 말레이 반도가 원산지이다.
㉤ 국립수목원국가생물종지식 / 황칠나무 : 분포지역 : 남부 지방의 해변과 도서지방의 숲 속에서 자생하며, 제주도에서는 표고 700m까지 분포하고 완도, 거문도, 대흑산도, 어청도에 생육한다. 크기 : 수고(樹高) 15m에 달한다.
㉥ 우리 나무의 세계 1 / 황칠나무 : Korean Dendropanax , 黃漆 , チョウセンカクレミノ朝鮮隠れ蓑 : (중략). 지금은 없어져 버린 칠공예의 한 기법으로 황금빛이 나는 황칠이 있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황금빛을 낼 수 있는 황칠은 바로 황칠나무에서 얻어진다. 일부에서는 황금으로 도금한 것 같다 하여 아예 금칠(金漆)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의 황칠(黃漆)을 직접 구하기 어려웠던 발해(渤海)는, 서기 777년에 사신 사도몽을 보내 일본 황칠을 수입하기도 했다. 고려에 들어서는 원나라에서 황칠을 보내달라는 요구가 여러 번 있었다.
불과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장 품질 좋은 황칠 생산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안타깝게도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백성들이 심기를 꺼려하여 아예 맥이 끊겨 버렸다. 최근에 들어서야 전통 황칠을 다시 살리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황칠나무는 남부 해안 및 섬 지방에서 자라는 늘푸른 넓은 잎 큰 나무로 키가 15미터에 이른다. (백과사전 등 다음백과에서 인용함)/끝.
➋ 황칠목(黃漆木)의 원산지에 대해서 :
<사진출처 :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 : 식물>
㉠ 반도(半島) 남해안(南海岸)의 도서지방(島嶼地方)
㉡ 중남미, 동부 아시아와 말레이 반도가 원산지이다.
㉢ 한국(韓國) 특산(特産)종으로 전라남북도, 경상남도(慶尙南道) 및 제주도(濟州島)에 분포하며, 일본(日本)에는 혼슈 남부, 오키나와까지 분포한다. 과거에는 독립종으로 보았으나, 일본종인 Dendropanaxmorbiferus H. Lev.와 수액의 색 이외에는 형태적 차이점을 확인하기 어렵다.
㉣ 아열대성 식물로 그 분포지는, 제주도·완도·보길도·어청도·진도·홍도·거문도와 보령(保寧)의 연열도 등 주로 남부지방 해안이나 섬지방에서만 자생하고 있다. 1541년(중종 36)에 간행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언해 牛馬羊渚染疫病治療方諺解≫에는, “제주에서는 나나니란 이름을 황칠이라 하고, 북나무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필자(筆者) 주(注) : “제주에서는 나나니란 이름을 황칠이라 하고, 북나무진이다.” 라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안식향(安息香)이 북나무진이라고 하였는데, 안식향(安息香)은 여러 도(道)에서 자생(自生)하였다.
➌ 여러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황칠목(黃漆木)은, 현재(現在)의 반도(半島)가 원산지(原産地)가 아니다. 19세기 이후(以後) 황칠(黃漆)과 관련(關聯)된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이해(理解)할 수 없는, 이해(理解)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황칠목(黃漆木) : 황칠목(黃漆木)은 아열대성(亞熱帶性) 식물(植物)로, 남미(南美)와 말레이(Malay)반도(半島), 열도(列島) 남부(南部)지방, 반도(半島) 남부(南部) 일부(一部)도서지방(島嶼地方)이 원산지(原産地)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대부분(大部分)의 사람들은 황칠목(黃漆木)은 반도(半島)가 원산지(原産地)라고 알고 있을까? 이건 공교육(公敎育)의 세뇌(洗腦)로 인한 것이라고 자신(自信)있게 말할 수 있다.
➍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 역사기록(歷史記錄)인 원전(原典)사서(史書)에서 말하는 백제(百濟)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은, 반도(半島)와는 전혀 다른 환경(環境)을 가졌다는 것이다.
백제(百濟) 땅은, 경기도(京畿道) 남부(南部)지방과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땅으로, 가장 풍요(豐饒)롭고, 자연환경(自然環境)이 좋은 곳에 속하는 4계절(季節)이 뚜렸한 곳이다.
그러나 원전(原典)사서(史書)에서는 : 백제(百濟) 땅은 덥고, 습하여 백성(百姓)들은 모두 산(山)에서 산다고 하였다, 또한 백제(百濟)의 별칭(別稱)은 택국(澤國)이다. 이 말은 백제(百濟) 땅에는 호수와 늪 등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반도(半島)의 경기도(京畿道) 남부(南部)지방과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지방등에 이러한 자연환경(自然環境)속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➎ 또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驪)가 요동(遼東)을 경략(經略)할 때, 백제(百濟) 역시(亦是), 요서(遼西)의 진평(晉平) 2군을 경략(經略)했다고 대부분(大部分)의 원전(原典)사서(史書)는 전한다. 도대체 요동요서(遼東遼西)가 어디냐?
그곳이 한강(漢江)주변에 있느냐? 대동강(大同江)주변에 있느냐? 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植民史學)들이 말하는 곳은,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을 흐르는 요수(遼水)를 기준(基準), 그 동서(東西)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더냐!
그렇다면 백제(百濟)가 무슨 재주로 고구려(高句驪) 땅을 넘어, 발해(渤海) 북(北)쪽 요서(遼西)지방을 다스릴 수 있었을까? 누구처럼 그곳에 백제(百濟)의 분국(分國)을 두었다고 말할 텐가?
➏ 더불어 북노(北虜)라고 불렸던 북위(北魏)는, 백제(百濟) 땅을 갖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 드디어 수십만(數十萬)의 대기병군단(大騎兵軍團)을 출동시켜, 백제(百濟) 국경(國境)을 넘어 쳐들어갔다가, 이를 사전(事前)에 정탐(偵探)한 백제(百濟)왕(王)은 군대(軍隊)를 은밀(隱密)하게 매복(埋伏)시켰다가, 일시(一時)에 쳐, 대기병군단(大騎兵軍團)을 궤멸(潰滅)시켰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북위(北魏)가 고구려(高句驪)냐? 백제(百濟)가 얼마나 강성(强盛)한 나라였기에 기마(騎馬) 수십만(數十萬)을 보내 공격(攻擊)하고도 궤멸(潰滅)당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 백제(百濟)는 반도왕조(半島王朝)가 아니다.
또한 수십만(數十萬) 기병(騎兵)군단(群團)을 바다건너로 보내려한다면, 얼마나 많은 함선(艦船)이 필요(必要)했을까? 그런 것은 계산(計算)이라도 해 본 것이냐? 아니면 말(馬)이 열심히 앞다리와 뒷다리를 움직여 바다를 건너가는데, 기마병(騎馬兵)들은 말(馬) 등에서 채찍질이나 하고 있었느냐?
〈이러한 기록(記錄)은 오류(誤謬)다〉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일천(一千) 몇 백 년(百年) 전(前)의 그 시대(時代)를 살았던 사대부(士大夫)들이 할 일이 없어, 농담 따먹기를 했을까? 그대들의 인생(人生)은, 겨우 80년이면 종치지 않는가?
수백(數百), 수천(數千) 년을 산 인간(人間)은 없다. 기록(記錄)과 유물유적(遺物遺蹟)이 대신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악용(惡用)하지 말라.
➐ 반도(半島) 땅에 백제(百濟)라는 봉건왕조(封建王朝)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 〈다만 백제(百濟)가 망(亡)하고 난 뒤, 많은 백성(百姓)들이 돌궐(突厥)·말갈(靺鞨)·발해(渤海)등지로 투항(投降)하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는 기록(記錄)으로 보면, 〈일부 왕손(王孫)이나 이들을 따르던 추종자들이 반도(半島) 땅으로 스며들어 살았다.〉라고 추정(推定)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2017년 08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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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약 200년 전에 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
200년 전이라면 1800년대 초.......이때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반도조선사는 조금만 깊숙히 들어가 보면 :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 이야기들만 나열되어 있다. 이것은 국가의 역사교육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서구열강들의 지침서에 따라, 식민사학이 선두에 서서 이끌어가고, 그들에게 명예와 부를 쥐어준 대한민국 정부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모든 반도조선사는 이들 식민사학자들의 전유물이었잖은가!
교수도 되고, 박사학위도 받고......조선사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되어 모두 망가져 버렸다.
참 안타깝습니다
안녕하세요. '러브 선'님!
안타깝고, 또 안타까워 분노할 일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유학자들이 남겨 놓은 많은 기록속에서 말하는 제주도의 금귤. 청귤. 동정귤등도 모두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고 하면서, 수백년 묵은 귤나무가 자생하고 있다고 선전합니다. 수백년 자라온 그 귤나무가 굼귤나무일까요? 청귤나무일까요. 아니면 동정귤 나무일까요?
반도 식민사학은 모든 것이 이런 식이죠.
식민사학을 깨지 않는 한, 조선사는 서구열강들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특히 논거가 없는 조선사 주장은 그들 식민사학의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선사의 진실을 위해 애쓰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