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89) - 현충일에 즈음하여 찾은 곳들
6월 6일은 제59회 현충일이다. 전국에는 8개의 현충시설이 있는데 해마다 서울 동작동의 국립 현충원을 비롯하여 대전현충원, 서울 수유리의 4.19민주묘지, 광주 망월동의 5.18민주묘지. 마산의 3.15민주묘지, 임실호국원, 영천호국원, 이천호국원등이다. 나는 자주 동작동에 있는 현충원을 가는데 올해는 지난 1월에 이어 6월 4일 오후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
오후 3시 경, 그곳에 도착하니 현충문 앞 광장에서는 이틀 후에 있을 현충일 기념식에 대비하여 의자를 배치하고 텐트를 치는 등 식장을 준비하는 손길이 바쁘고 현충탑이 있는 무명용사묘역에는 단체로 참배하는 이들이 연이어 들어선다. 입구에 부착된 일정표를 보니 오전 9시에 참배하는 육사 21기 동기회 30명을 비롯하여 26단체, 1990명의 참배 일정이 시간별로 잡혀있다.
방명록에 '나라와 겨레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용사들이여, 하늘의 복을 누리소서.'라고 쓴 다음 제단에 분향을 하고 묵념을 올렸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제단 위의 이 헌시는 노산 이은상이 짓고,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현충탑 안은 영현이 가장 많이 모셔진 곳으로 사망 사실은 확인됐지만 유해를 찾지 못한 10만4000여 전사자의 위패가 빼곡하다. 위패실의 중심에는 귀환하지 못한 이들이 하늘나라로 편안히 가기를 염원하며 만든 영현승천상(英顯昇天像)이 성스러운 형상으로 놓여 있다. 승천상 아래 지하공간에는 유해는 수습됐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69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돼 있다.
위패실에는 아들·아버지·형제를 조국에 바친 가족들의 한(恨)과 사랑이 가득한데 어느 위패 앞에서 중년 남성이 훈장증과 훈장, 소박한 음식을 차려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고인을 기리는 모습이 숙연하다. 위패마다 여러 색깔의 꽃들이 가득 놓여 있어 어둑한 지하 공간이 화려한 꽃밭처럼 눈부시다.
무명용사 묘역을 나와 위쪽으로 올라가니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산화한 재일본학도의용군 묘역이 보인다. 1962년에 안장하고 1973년에 세운 비석에는 '내 나라 구하려고 피를 뿌리신 젊은이들 역사의 책장위에 꽃수레를 놓으셨네 조국의 포근한 흙속에 웃으며 잠드옵소서'라고 쓴 이은상 시인의 글이 새겨져 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묘지마다 작은 태극기와 단출한 꽃들의 행렬이 묘역 전체를 물들인다. 어느 묘지인들 애틋한 사연이 없으리오.
묘역에서는 유해감식을 위한 DNA확인 신청을 권유하는 캠페인도 펼치고 있는데 신청대상은 친가와 외가의 8촌 이내 혈연자로 적혀 있다. 유가족들이 집중적으로 이곳을 찾는 5월 말부터 6월 한 달 내내 국방부 유해발굴단원들이 상주하면서 구강세포 등 유전자(DNA) 감식을 위한 시료를 채취한다고 한다.
현충원은 경건한 묘역이자 푸름 가득한 호국 공원이기도 하다. 한강을 가슴에 품고 관악산 기슭 공작봉(孔雀峰)의 긴 팔에 포근히 안겨 있는 공원에는 16만9000여 위(位)의 호국 영령이 잠들고 있는데 현충일을 이틀 앞두고 찾아본 나라의 성지(聖地) 현충원은 경건하면서도 아늑하다.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을 품어 안는 싱그러운 쉼의 공간. 현충원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곳의 어느 땅에는 1974년 3월, 결혼 때에 심은 두 그루 개량향나무도 잘 자라고 있으리라.(* 묘역 안의 수목들을 자주 옮겨 심어서 우리가 심은 나무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몇 년 전 현충일 무렵 아내와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다. 그때 경찰로 있다 돌아간 남편의 묘소를 찾아 마산에서 밤새워 올라왔다는 6순의 아낙이 우리더러 재미있게 잘 살라고 간곡히 당부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현충일 새벽, 일찍 일어나 조기를 단 후에 아침 운동을 다녀오니 아내가 태극기를 걸어놓고 나가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라고 방송하여 걸려고 하였더니 벌써 나부끼더라며.
이날 오전에 친지가 상무대에서 훈련 중인 아들을 면회하러 서울에서 내려온다기에 장성에 있는 상무대를 함께 찾았다. 1980년 5.18 직후 교육사령부가 광주 상무지구에 있을 때 처남이 복무하고 있어서 상무대를 찾은 적이 있는데 장성으로 옮긴 후에는 정확한 위치도 잘 모르고 지내온 터.
상무대에 도착하여 면회실에서 친지의 아들을 만났다. 해병으로 입대하여 포항에서 1차 훈련을 받고 이곳의 2차 훈련이 끝나면 백령도에서 복무한다는 신병의 모습이 씩씩하고 준수하다. 마침 나라와 겨레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용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제정한 날에 늠름한 호국의 용사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격려하며 건강하고 무사히 복무를 마치도록 기도하였다.
당일 신청한 면회라서 외출이 허락되지 않고 영내의 면회소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점심을 함께 들고 면회소 안쪽에 있는 광장으로 다가서니 전면에 두 개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가까이 가서 살피니 하나는 강감찬 장군상이고 다른 하나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다. 1973년에 세운 동상은 광주 상무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을 터,
참 군인과 민족의 위대한 표상으로 두 분을 택한 교육사령부의 속뜻을 담은 비문을 살폈다. 강감찬 장군의 동상에는 948년에 시흥의 한미한 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며 72세에 거란 군을 물리쳐 왕으로부터 꺼져가는 나라를 지킨 공을 치하하여 백발 위에 금꽃 여덟 가지를 받은 사연을 담았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안중근 의사 동상에는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행적과 함께 '조국이 기울어 갈 제 정기를 세우신 이여 역사의 파도 위에 산같이 우뚝한 이여 해와 달도 길을 멈추고 다시 굽어보도다'는 이은상 시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동상들이 2006년 11월 9일에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고 하는 안내문에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휘호를 남긴 안 의사의 글귀도 소개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현충일에 어울리는 상무대 방문이 되었다.
호국보훈의 달에 즈음하여 김황식 국무총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담화문을 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나라를 위해 고귀한 넋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몸과 마음을 다잡아 추모하는 달입니다. 우리는 숱한 외침 속에서도 반만년동안 겨레의 자존을 지켜왔습니다. 지난 세기만 해도 일제의 강점과 동존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국토는 폐허가 된 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60여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고 민주주의 또한 아시아 최고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는 순국선열과 호국용사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풍요이고 민주유공자들의 피와 눈물이 아니었다면 피어날 수 없었던 자유입니다. 모든 희생이 값진 것이지만 나라를 위한 희생보다 고귀한 것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겨진 도리는 선열과 호국영령, 그리고 국가유공자의 헌신을 참된 마음으로 추모하고, 또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 분들의 희생 위에 오늘 우리가 자유와 평화, 번영을 누리듯이 우리도 우리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조국을 물려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7일에는 젊은 학생들에게 현충일을 전후하여 찾은 곳들의 정황을 일러주었다. 현충일에 즈음하여 옷깃 여미며 각자의 몫을 잘 감당하리라 다짐하는 마음이다.
추신,
현충일 다음날 광주영상복합문화관에서 1960년대에 만든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감상하였다. 오래된 필름이어서 화면이 선명하지 않지만 피아간에 목숨을 건 장병들의 처절한 사투가 리얼하고 신영균, 최무룡 등 당대 유명배우들의 젊은 모습이 반갑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며 애처롭게 산화한 넋들의 사연이 안타깝고 임무를 완수한 후 총탄을 맞아 귀환하는 보트에서 숨진 아들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대대장의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