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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림의 소리 스크랩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고창 선운산 선운사
현림 추천 0 조회 61 18.08.06 07: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고창 선운산 선운사


선운산은 본래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있어 지금은 선운산이라 널리 불리게 되었다.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을 가리킨다.

주요 사찰로는 선운산 동쪽 사면의 말단부에 있는 선운사와

그 서쪽 1지점에 위치하는 참당암(懺堂庵)이 있고 그 위에 도솔암이 있다.


@선운사는 김제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유구한 역사와 함께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절의 이름은 구름 속에서 참선 수도하여 큰 뜻을 깨친다참선와운(參禪臥雲)’에서 유래되었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산 북쪽 기슭에 있는 선운사(禪雲寺)

 대한불교 조계종 24교구 본사로 상사화와 동백꽃으로도 유명하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위덕왕 24)에 고승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검단선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선사가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선사는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선사가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검단선사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 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577년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한 뒤 통일신라 때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1354(공민왕 3)에 승려 효정(孝正)이 퇴락한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이후 조선 시대에 절을 크게 중창한 이는 승려 행호극유(幸浩克乳)로 알려져 있다.

 

이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진흥왕이 꿈을 꾸고 감동하여 절을 세웠다는 설과

 557년에 백제의 고승 검단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들에는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말과 조선 초에 중수와 중창을 거쳐 경내의 건물이 189채나 되었으나 정유재란 때 거의 타버렸다.

 1613(광해군 5)에 원준대덕(元俊大德)이 화주(化主)가 되어

3년 동안 대웅전, 만세루, 영산전, 명부전 등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선운사 도솔암 근처의 마애불에는 동학 농민 혁명과 관련하여 비기탈취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성기의 선운사는 승려 3,000여 명에 거느린 대사찰이었으며 암자만도 89개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2016년 현재 대웅보전·영산전·관음전·명부전·만세루·팔상전·사물각·산신각·천왕문 등

 10여 동 건물과 참당암·도솔암·동운암·석상암 등 4개의 암자가 남아 있다.

2010년 말사는 내소사, 내장사, 개암사, 문수사를 포함하여 총 50개이다.

 

선운사의 보불로는 보물 제290호인 대웅전, 보물 제279호인 금동보살좌상,

보물제 280호 금동지장보살조상, 보물제 1200호 동불암마애불상이 있고,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는 만세루(유형문화제53), 영산전목조삼존불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

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 범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1)과 중종과

부도 및 탑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2)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 밖에 다수의 조상과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천왕문 입구에는 석씨원류경판 복원불사라는 안내판이 있다.

고창 선운사 석씨원류(高敞 禪雲寺 釋氏源流)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관음전에 있으며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기록한 판각이다. 1971122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있다


선운사 사천왕상

우리나라의 사찰의 천왕문을 보면 경주 불국사, 팔공산 은해사, 순천 송광사와 같이

서방 광목천왕은 탑과 창을, 남방 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동방 지국천왕은 칼을,

북방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는 데 반하여,

조계사, 하동 쌍계사, 김천 직지사나 중국 보타산 혜제사 등의 사천왕은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를, 남방 증장천왕은 칼을, 서방 광목천왕은 여의주와 용을,

 북방 다문천왕은 보탑과 당()을 들고 있다. 선운사의 천왕상은 조계사의 유형을 같이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사찰 사천왕의 손에는 각각 다른 지물을 잡고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사천왕상이 들고 있는 지물은

 주로 병장기로서 칼, 화살, , 금강저(金剛杵 : 악마를 깨뜨리는 무기) 등과 같은 것이며

북방 천왕의 경우 반드시 탑을 받들고 있지만,

이에 반해 조선 후기로 오면서 크게 변화하여 비파, , 용과 여의주, 당과 탑으로 정형화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원대 라마교 약사칠불의궤공양법(藥師七佛依軌供養法)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선운사 사천왕)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좌세는 특이한 편이다. 대체로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올려

어그러진 얼굴과 검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형태의 악귀가 받들고 있다.

 다른 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있거나 사람의 배 부분을 밟고 있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주로 동물을 밟고 있는 데 반해

조선 시대에는 민간인의 형태 또는 전형적인 악귀의 모습을 취한다.

양쪽 발밑에 모두 8구의 악귀를 밟고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밟지 않고 있는 예도 있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주의를 요하는 점은

사천왕상의 지물과 그에 따른 배치와 명칭의 문제라고 하겠다.

 천왕문 입구에서 보아 오른편의 대웅전을 향한 쪽에 비파를 든 사천왕상을,

입구 쪽에 칼을 든 사천왕상을 배치하며, 왼편의 대웅전 쪽에 당과 탑을 든 사천왕상을,

 입구 쪽에 용과 여의주를 든 사천왕상을 배치한다.

그런데 학자들 간에는 사천왕상의 명칭을 지물에 따라 각각 달리 부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비파를 든 사천왕상을 동방 지국천왕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북방 다문천왕이라고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사찰의 천왕문을 살펴보면

조선 후기 사천왕 조각상과 중국 원, , 청대의 사천왕 조각상들에서는

비파를 든 사천왕상을 동방 지국천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조선 후기 사천왕 탱화에서는 칼을 든 사천왕상에 동방 지국천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천왕상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서까지도

사천왕상의 지칭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이 보탑을 받든다는

원칙에서 보자면 비파를 든 사천왕을 동방 지국천왕으로 보는

사천왕 조각상의 명칭 방법이 옳다고 판단된다.

 


만세루

@선운사만세루(禪雲寺萬歲樓)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는 앞면 9·옆면 2칸 규모의 강당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 집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만세루는 뒷면의 대웅전과 마주 보며 개방되어 있어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기둥들은 모두 자연 그대로의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모서리 기둥은 큰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였다.

넓은 평면에 비교해 높이가 낮은 누 형식이며 불규칙한 형태의 부재료들을 사용한 것은

당시 목재가 부족하여 남은 재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원목을 다듬지 않은 채 사용하여 단순한 구조와 장엄한 형태를 보이나,

 내부공간의 처리는 조형적으로 잘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현지 안내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만세루는 불법을 배우는 승려들의 강의실이다. 백제 위덕왕 24(577)에 검단 선사가

 선운사를 짓고 남은 목재를 사용하여 지었다는 설도 있고

또 고려 시대의 건물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건물은 19세기 말에 보수된 것이다.

이 건물은 비대한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여 소박함과 함께 넉넉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명부전


지장보살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비롯하여 권속들이 나열되어 있다.




조사전



팔상전




산신각



산신각 뒤편은 온통 동백나무다. 제철이면 멋질텐데...


영산전







석가모니불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대웅전




보물 제290호로 지정된 선운사 대웅전은 정면 5,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단층 맞배집으로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좌우 협시불로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선운사는 1318(충숙왕 5)1354(공민왕 3)에 중수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사(廢寺)되었다.

1472(성종 3) 행호선사(幸浩禪師)는 탑만 남아 있던 자리에 덕원군(德原君 : 성종의 숙부)의 후원을 받아

 10여 년 동안 대규모 가람으로 중창하였다. 이때 선운사는 왕실 원당(願堂)의 기능을 갖게 되었으며

 천불대광명전·관음전·금당·능인전·지장전·나한전·대장전·보현전·설법전·시왕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과 문, 요사 등의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덕원군별원당선운산선운사중창산세사적형지안(德源君別願堂禪雲山禪雲寺重創山勢事蹟形止案)

(1483)에는 당시 선운사 건물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종열위영가(祖宗列位靈駕: 역대 왕실 조상들의 넋),

 시주자 명단, 축원문(祝願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선운사는

정유재란 때 초토화되면서 성종의 어실(御室: 성종의 선왕·선후의 영가를 모신 곳)만 남게 되었고

16081609년 사이에 승려 수십 명이 모여 법당 3칸을 세웠다고 한다.



 


1614(광해군 6)에는 무장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재건 불사를 주도하여 법당을 5칸으로 증축하고,

건물의 방향도 지금과 같이 바꾸었다. 이때 증축된 건물이 지금의 선운사 대웅전이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상은 1633년에는 조성을 시작하여 이듬해 봉안된 것이다.

그러나 대웅전은 1839년 장마로 인해 오른쪽 2칸이 붕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이듬해 보수되었다.

 1973년에는 부식된 부재를 교체하면서 단청을 다시 칠하고 기와도 교체하였으며 1992년에는 지붕을 수리하였다.

 

선운사는 계곡을 따라 동서로 긴 평탄한 대지 위에 여러 동의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중심부에는 천왕문과 만세루, 대웅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과 만세루의 서쪽에는 영산전·팔상전·명부전 등이 자리하며,

동쪽에는 동상실·능인각·유물전시관 등이 있다.


  (법당 앞 괘불대)  

대웅전은 비교적 높은 석축 위에 야트막한 기단을 놓고 건물을 세웠다.

초석은 자연석인데, 측면 고주(高柱: 높은 기둥)와 활주(추녀를 받치는 기둥)를 받치는 초석은

원형의 높은 초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기둥이며 일부는 휘어진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미가 느껴진다.

 평면은 정면이 측면보다 2배 이상 되는 긴 장방형이지만

어칸을 협칸보다 3자 이상 길게 하고 기둥 높이도 적당하여 전체적으로 장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창호는 정면 어칸에 4 분합문을 설치하고 협칸에는 2짝 빗살문을 달았다.

측면에는 서쪽의 전면 협칸에만 출입문을 냈다. 동선을 고려하여

서쪽에 있는 요사와 연결하기 위한 것이지만 한쪽에만 문이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공포는 내외 3출목 형식이다. 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인데

귀공포에 사용된 첨차와 3출목 첨차 일부만 초각(草刻)이 있다.

초제공은 끝부분이 하늘을 향해 뻗은 앙서형(仰舌形)이고,

2 제공과 3 제공은 끝부분이 아래로 뻗은 수서형(垂舌形)이다.

4 제공은 익공(翼工)이며 5 제공은 운공(雲工)을 사용하였다.

제공은 내부에서 일체형으로 초각 되어 보아지 역할을 한다.

  

선운사 대웅전은 정면과 측면의 비율이 약 2:1로 다른 불전에 비교해 정면이 측면보다 훨씬 넓다.

 정면은 화려하게 꾸몄지만 배면은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한 조형적 특징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면의 경우 제공을 길게 빼고 처마는 겹처마로 처리하였으나,

배면은 제공 쇠서를 거의 생략하여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처마도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정면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봉안하고 좌우에 협시불을 모신다.

그러나 선운사 대웅전은 중앙에 비로나자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불상과 전각의 명칭이 일치하지 않는다.

18세기 후반까지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대법당이라 불렀던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비로자나불)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高敞禪雲寺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조선 후기 작품으로 보물 제1752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상 높이 295, 약사여래상 높이 256.5, 아미타여래상 높이 266이며

재질은 소조(塑造)이며, 조성기에 따르면 1633년에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여래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16344월에 법당에 봉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는 삼불상이다.

3m에 가까운 장대한 규격의 소조불로서 당당한 어깨에 유난히 긴 허리

그리고 넓고 낮은 무릎에 긴 얼굴, 편평한 가슴 등이 특징이다.

장방형의 긴 얼굴에 이목구비가 중앙으로 몰렸는데 긴 눈에 유난히 작은 입이 특징적이다.

얼굴 표현, 신체 비례, 양감 없는 평면성 등은 삼불의 공통점이지만 손 모습이나 착의법 등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좌상은 지권인을 취하였고 좌우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는 한 손은

가슴 위로 올리고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두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는데

가슴 위로 올린 팔과 손은 다소 부자연스럽다.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은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펴고

 왼손 검지가 오른손 검지 끝을 살짝 누른 모습이며

 나머지 손가락은 구부린 채 왼손이 오른손을 감싼 형식으로 매우 독특하다.

착의법은 비로자나불은 편단우견식으로 대의를 걸쳤고

좌우협시여래는 변형통견식으로 양어깨 위에 대의를 입고 안에 편삼을 갖추었으며

 옷 주름은 간략하고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다. 이에 비교해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자락과

소맷자락은 부드럽게 표현되었다. 비로자나불이 착용한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반달형으로 덮어 팔꿈치까지 드리웠는데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이 뾰족하게 접혀져 독특하다.

같은 옷 주름이 왼쪽 소맷자락에도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조각승 법해만의 특징으로 생각된다.

약사와 아미타불은 같은 착의법이지만 세부 처리에서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오른쪽 어깨에서 접힌 반달형 옷 주름이라든가

왼쪽 무릎에 흘러내린 옷자락, 가슴에 입은 승각기의 표현에서 약간씩의 변화를 보인다.


아미타불 

비로자나를 중심으로 약사와 아미타를 배치한 삼불상은 조선 전기 16세기부터 유행한 형식으로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과 김제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등이 있다.

특히 김제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얼굴이라든지 긴 신체 비례와 수인 등에서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작품이다.

  

약사여래


선운사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은 3m에 가까운 대형 소조불상으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와 조형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다.

또한, 대좌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을 통해 불상 조성과 봉안 시기,

그리고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의 존명을 명시하여

17세기 삼불상 도상연구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1633년에 법해와 무염 그리고 10여 명의 조각승들이 함께 제작한 작품으로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법해는 이 불상에만 등장하는 조각승이며, 두 번째에 이름이 적혀 있는 무염은

선운사 불상 제작에 동참했던 차화승들과 1650년대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탑의 기단부




선운사 하면 생각나는 옛적 기억으로 이 나무 백일홍이었는데...


제철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보니 역시 멋진 나무다.


관음전










앞은 성보박물관 편액이 뒤 편 옆은 지장보궁 편액이 붙어 있다.




선운사 성보박물관 앞에 있는 조선 후기 미륵 석상은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과 관련 있는 자그마한 석불 상으로,

미륵불이라고 부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운사 미륵도 조선 후기 무장현 주민들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운사 인근 하천변에 있던 것을, 1998년 선운사 성보박물관이 건립되면서

도난 방지를 위해 선운사 내 박물관 앞으로 옮겨 놓았다.


입석형 미륵으로 얼굴상이 윗부분 전체를 표현할 정도로 크게 조각되어 있고,

몸체 부분은 얼굴상에 비교해 왜소한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불상이 갖추는 형태를 취했다기보다는 입석의 상단에 부처의 안상을 크게 조각하고,

하단은 몸체를 투박하게 장식한 모습이다. 소박하게 웃는 얼굴상을 한 미륵불로서,

크기는 높이가 약 120, 넓이 90, 21이다.

선운사 미륵은 지역 주민들이 조성한 미륵으로서 전체적인 형태가 투박한 데서도 알 수 있듯

마을 미륵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환한 미소를 짓는 얼굴상이 강조된 불상으로서,

화평한 미륵 세상의 도래와 미륵불 출현을 갈망하는 고창현 농민들의 염원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운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高敞禪雲寺金銅地藏菩薩坐像) 의 높이는 80, 무릎 넓이 62이다.

 재료는 청동이고, 표면에 도금하였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이마에 두른 두건에서 좁은 띠가 흘러내려 귀를 덮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다.

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뒤에는 근래에 조성한 십일면천수천안관음보살도가 안치돼 있다.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은 한때 도실 된 적이 있다.

 1957830일에 보물 제279호로 지정되었다.

선운사 관음전에 안치돼 있다가 19989월에 선운사 성보박물관이 개관되면서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풍성한 얼굴에 눈··입이 작고,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이중 턱을 이루는 등 후덕한 인상을 준다.

가슴은 당당한 모습이지만 두꺼운 옷에 싸여 몸의 굴곡은 나타나지 않는다.

간결한 치장과 가지런한 옷자락 등은 정중한 느낌이다.

 어깨까지 든 오른손의 엄지와 약지는 맞댈 듯 서로 굽혔고,

배에 붙은 왼손의 엄지와 중지는 약간 구부렸다.

 

옷은 무겁고 장식적이며, 어깨의 2단으로 된 주름과 그 아래의 띠 매듭, 팔의 세로줄 주름 등은 형식적이다.

다리의 평행적인 옷 주름이나 넓은 가슴의 수평적인 자락 등은

1467(세조 13)에 조성한 원각사지 십층석탑에 새겨진 불상의 모습과 유사하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는 옷으로 덮여 있다.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과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

목걸이 장식 및 밋밋한 표현 등은 서로 닮았다.


하지만 신체보다 불두가 유난히 큰 점, 목과 어깨가 움츠린 듯한 자세, 빈약한 하체,

간략화된 장식, 형식적인 옷 주름 등은 고려 시대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15세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학계 일부에서는 착의법 등을 들어서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인식하면서 제작 시기도 조선 후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유행하던 보살상의 시대적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함께 아름다운 보살상으로 알려져 있다.  


대좌와 광배는 남아 있지 않지만 15세기경 보살상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마치 모자 같은 두건(頭巾)을 쓰고 있으며, 이마에 두른 두건의 좁은 띠가 귀를 덮어 내리고 있다.

이러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의 모습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 불화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얼굴은 비만하면서도 평판 적이고, ··입 등이 얼굴 가운데로 몰려 있으며 생기가 없다.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된 목은 밭아서 움츠린 듯한 느낌을 준다.

무릎 높이가 낮아져 빈약해 보이는 하체는 상체에 비하여 다소 불안정하다.  

통견(通肩)의 가사와 같은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이 불상의 착의법은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어진 독특한 치레 장식이 특징적이다.

고승의 영정이나 불상·보살상에서도 쓰이는 것이지만, 지장보살상의 착의법으로 자주 나타나는 형식이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두꺼운 옷 주름 선은 규칙적으로 접혀 있어 부자연스럽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동여맨 단정한 띠 매듭이 표현되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가슴 아래에서 옆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다리는 옷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이 보살상은 도솔암에 봉안된 14세기의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

목걸이 장식, 밋밋한 가슴 표현 등에서 서로 닮았다.

하지만 신체 비례보다 머리가 유난히 큰 점이라든가 목이 밭아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빈약한 하체, 간략화된 장식, 형식적인 옷 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도솔암의 금동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 시대 지장 신앙의 한 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참당암의 동종

(설명은 본방 창당암 참조)









앞은 승보박물관이고 옆은 지장보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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