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3월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매우 뜻깊은 달이다. 51년간 치열하게 전개된 독립운동 역사의 중간 분기점이자, 국내외의 한인이 있는 곳 전 지역에서 항일의지를 표명하고 일어난 ‘3.1운동’이 꼭 100주년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몇주년’이라고 하는 계기(屆期)성 수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날을 맞이하여, 그 때의 정신을 기리고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契機)가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현재는 안동댐 건설로 대부분의 지역이 잠겨버린, 안동시 예안면의 부포마을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백농(白農) 이동하(李東廈, 1875~1959) 선생은 유서 끝에 이런 말을 남겼다.
마지막 한 마디 말을 남겨 국민 여러분들께 고합니다.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는 우리 국민들은 절대 사대주의의 근성을 버리고, 미국이나 소련같은 강대국에게 모두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념들도 다 버리고, 3.1정신으로 움직였던 유일무이한 우리의 민족주의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민족끼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다시없도록 평화의 무대 위에 조국을 세우고, 세계열강들과 함께 공존·공영 할 수 있기를 바라고 기원합니다.
이렇듯 ‘3.1운동’은 어떠한 방략이나 이념을 뛰어넘어 우리 겨레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소통과 통합의 민족주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백농 이동하 유서(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7 『백농 이동하』에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앞서 1910년 경술국치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국권수호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났던 의병항쟁의 역사가 긴 시기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은 이전에 소개한 「안동의소파록」에서도 언급하였다. 여기에서는 안동 지역의 명문인 진성이씨 주촌(周村, 두루)종가 출신 송라(松羅) 이긍연(李兢淵, 1847~1925) 선생이 갑진년(1904)에 발급한 편지 한 통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그는 안동 전기의병(을미의병) 시기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대장으로 한 2차 안동의병진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데, 이때 그가 직접 남긴 의병 기록이 바로 『을미의병일기(乙未義兵日記)』로 이 지역 전기의병을 연구하는 중요자료로써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는 본관은 진성, 자는 희증(希曾), 호는 류수각(流水閣)·송라(松羅), 다른 이름으로 이목연(李穆淵)이 있다. 의병항쟁에 참가한 공로로 2002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그는 진성이씨 주촌종가 대종손이자 퇴계 학맥의 적전을 이었다고 평가되는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제자로 당시 지역사회에서 확고한 위상을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긍연과 손자 이용순(김희곤/권대웅, 『한말의병일기』, 국가보훈처, 2003에서)

진성이씨 주촌(두루)종가의 모습(김희곤/권대웅, 『한말의병일기』, 국가보훈처, 2003에서)
그가 남긴 『을미의병일기』가 을미년(1895) 말에서 병신년(1896) 8,9월(이하 음력) 정도까지의 기록인 점을 통해 안동 전기의병 전반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의병소(義兵所)에서 발급된 전령(傳令, 차정첩) 등 문서 자료를 통해 권세연(權世淵)을 대장으로 한 1차 안동의병에서 의병소 도청(都廳)의 일원으로 참여하였고, 2차 안동의병에서는 종사관에 임명(차정)되어 활동하였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1894년 갑오의병 당시에도 시대 변화와 문제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니, 사실상 안동의 전기의병 시기를 통틀어 당시 격변하던 시대상황을 몸소 겪었던 안동 지방의 한 지식인 양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동 전기의병이 해산된 1896년 8,9월 이후 그에 대한 행적은 특별한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자세하지 않다. 현재 공개된 1900년대 초반에 발급된 그와 관련한 편지자료에는 주로 향사(享祀) 거행, 묘역 정비, 문집 간행 등 문중의 대소사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모계(某溪) 김홍락(金鴻洛)의 문집에 실린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묘갈명(墓碣銘)」에도 그에 대해 ‘효성이 지극하고 집안 사업을 잘 이끌어 나간’ 인물로 묘사되어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는 2009년 의성 김씨 문중에서 기증된 자료 가운데 1904년 이긍연 선생이 발급한 편지 1통이 있다. 편지의 전반적인 내용은 물론 여느 편지에서처럼 안부와 일상을 묻고, 집안에서 발생한 이야깃거리들을 전달하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지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갑진년(1904) 이긍연 서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소장자료)
그대와의 소식이 오랫동안 막히니 그리운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늦더위가 매우 혹독한 이때에 그대 모친께서의 건강은 계절에 맞게 잘 계십니까? 그대와 형제분들도 화목하고 건강하게 지내시면서, 형제끼리 서로 왕래하며 이 더위를 보내는 생활의 맛이 있으신지요? 아드님은 차례대로 효도하며 지내고, 제 딸아이는 잘 지내면서 존장(尊章, 시부모)께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으며, 지촌(芝村)‧국리(菊里) 측 친지들도 아울러 평안합니까? 두루 그리운 마음 간절합니다.
이렇게 상대방 가족과 친지들의 안부를 물으며 서두를 떼었다. 여기에서 딸아이의 안부를 묻는데, 자신의 딸이 상대의 며느리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저는 무더위 가운데 괴롭게 누워 지내며 애당초 전혀 맑은 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더위 때문에 더욱 병이 더치셨고, 나머지 여러 식구들도 가지가지 병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여 자신의 현재 상황을 알렸다. 여기까지가 전통사회에서 주고받던 편지의 가장 투식적인 서두부분으로, 주로 상대방의 안부를 묻거나 확인한 내용,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내용 등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적는다. 이후부터는 편지 보내는 이가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적고 있다.
아들이 지난 4월에 제 어미의 널을 무덤에서 받들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일이 오랜 시간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려 울면서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으니, 실로 온갖 근심되는 부분입니다. 이는 마음에서 격양된 점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지만, 사실 어리석지 않다면 허망한 일입니다.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은 하늘에 달려있으니 어찌 이것을 억지로 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정성이 아니면 어찌 좋은 땅을 쉽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고민되다가도 도리어 우습습니다. 중평(中坪, 중들)의 새 사위는 수개월 안으로 그곳에 안치하자고 이따금 말 할 뿐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보면, 아마도 이때 자신의 아들이 주관하여 아내의 묘소를 이장(移葬)하는 일이 있었던 듯하다. 어머니의 묘소를 이장하는 중대한 일을 주간한 아들이라면 맏이일 가능성이 크다. 그의 맏아들의 이름은 이승걸(李承杰)이다. 또한 아내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묘소를 주촌마을의 인근 산에서 녹전면으로 이장했다는 기록이 집안 『족보』에 남아있다. 복을 받기 위해 묘소를 이장하는 일을 다소 회의적으로 바라봤던 그의 생각이 인상적이다. 다음으로는 당시 세상소식을 듣고 걱정하는 내용이다.
서변(西邊, 서울) 소식은 요즘 매우 어수선하여 의려(義旅, 의병)가 다시 일어난다고 합니다. 올해 농사는 가을 내로 아예 가망이 없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한발(旱魃, 가뭄)이 이와 같으니 한 차례 놀랐던 나머지 어찌 걱정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904년은 한국사에 있어서 한 차례 큰 격변을 겪는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조정은 여러 방면의 제도개혁을 통한 국가면모의 쇄신을 도모하였지만,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혼란한 시대 상황 아래에서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조선 지배의 주도권을 잡고자 우리의 국외중립선언을 무시하였고,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외부대신서리 이지용(李址鎔) 사이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다. 이듬해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에 의해 다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다.
의병항쟁사 가운데 ‘중기의병(中期義兵)’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산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여 을사늑약 이후 전국단위로 확산되는데, 이 편지에 이와 관련한 언급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편지 본문에서, “서울지역의 소식이 어수선하다”는 말은 당시 전운이 감돌던 분위기와 한일의정서 체결과 같은 암울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의려(義旅)가 다시 일어난다”고 한 말은 중기의병의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의려’는 ‘의병’의 다른 말이다. 전기의병 내내 안동과 인근에서 활약한 그가 의병 재기(再起) 소식에 반응하고 있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의병에 관한 소식 외에도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칠까 걱정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 차례 놀랐던 나머지”라고 한 말에서 과거 한 차례 가뭄에 의한 흉년을 겪어 본 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기록된 이 말의 원문은 “懲羹(징갱)”이다. 이 단어는 ‘징갱취해(懲羹吹薤)’라는 사자성어의 준말로, ‘뜨거운 국을 먹다가 입을 데면 냉채국을 먹을 때도 불어서 먹는다’는 뜻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과 비슷한 말이다.
사위에게는 병들고 게을러 편지를 쓰지 못했으니 혹 알려주십시오. 나머지는 다른 이를 대신 불러 쓰느라 편지의 예식을 갖추지 못합니다. 형께서는 잘 살펴 주십시오.
마지막 인사말이다. 상대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에게는 따로 편지를 쓰지 못했음을 “병들고 게으르다”는 말로 겸손하게 표현하였다. “다른 이를 대신 불러 이 편지를 쓴다”는 말은 주로 바쁘거나 병이 들어 글을 쓰기 힘들 때 글씨를 대신 써 줄 수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내용만 불러주고 쓰게 했다는 말이다. 편지의 말미에는 발급 연월일과 발신자의 이름을 적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는 이는 누구일까? 이 편지가 처음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기증될 당시 따로 편지봉투가 없었다. 보통 봉투에 편지를 받는 수취인 정보가 기입되는데, 애초에 이것이 없었으니 수취인은 편지 본문에 적힌 상대에 대한 호칭, 편지의 원소장처 등을 통해 유추해야만 한다. 이긍연 선생은 편지를 받는 상대방에 대해 자신을 “査弟(사제)”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사돈지간에 쓰는 용어로 “弟(제)”는 동년배 사이에서 자신을 낮추는 말로 쓰인다. 본문 내용에서도 자신의 딸이 상대의 며느리로 가 있는 상황, 상대의 아들을 사위로 표현한 점 등을 통해 결국 수취인은 이긍연의 ‘사돈’으로 볼 수 있다. 이 편지가 의성 김씨 문중 소장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진성이씨 주촌종가 족보』를 살펴보면 의성 김씨 출신의 사위로 ‘김병규(金秉規)’, ‘김명환(金明煥)’ 두 사람이 확인된다. 김명환은 지촌(芝村)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편지 본문에서 ‘지촌과 국리에 사는 친척들의 안부’를 별도로 물은 것으로 보면 상대가 지촌 출신의 의성 김씨가 아니라고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수취인은 김병규의 아버지 구산(九山) 김장락(金章洛, 1855~1923)으로 파악된다. 그의 자는 계형(啓亨)으로 『지양세고(芝陽世稿)』에 문집이 실려 있다.
편지는 타인과의 사적인 소통의 매개체이다. 여기에는 어느 한 개인의 일상과 생각, 소속된 사회 안에서 벌어진 각종 대소사의 쟁점 및 해소과정, 여러 개인과 집단끼리 연결되는 사회적 관계망 등 그 당시 사회·문화의 여러 단면들을 제시하고 있기에 세세하고도 실제적인 모습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한 이 얇은 편지 한 통에도, ‘1904년’이라고 하는 암울했던 시기와 ‘안동 주촌마을’이라고 하는 한 한정된 공간 안에서 수많은 정보를 공유하며 살았던 한 개인의 ‘일상과 걱정’이 마치 판화처럼 담겨있다.
이긍연 선생이 살았던 주촌종가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에 있다. 지도 또는 내비게이션에 “안동주하동경류정종택”이라는 검색어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두루종가의 현재 모습(2019년 3월 10일 촬영)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더더욱 의미 깊은 3월은, 매화가 한창 피어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다소 쌀쌀한 날씨에 미세먼지가 하루걸러 대기를 채우지만, 이른 꽃구경을 원한다면 이곳을 찾아 소생하는 봄기운을 흠뻑 맞아드려도 좋을 법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