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진근 (郭鎭根, 1861~1940)】 "이완용이 이 집에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내 놓으라"
곽진근 (郭鎭根, 1861~1940) 애국지사는 강원도 철원에서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철원은 강원지역에서 맨 처음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곽진근 지사는 1919년 3월 10일 낮 3시, 농업학교에 모인 철원청년회, 농업학교, 보통학교 등 250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서울로부터 전해온 만세운동 소식은 철원지역 학생들의 젊은 피를 끓게 했다.
이들은 읍내 중심인 서문거리로 뛰쳐나가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헌병 분견소 쪽을 향했다. 곽진근 지사는 58살의 고령의 나이임에도 젊은 학생들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성결교회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곽진근 지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15년부터 철원장로교회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철원장로교회는 1905년 웰번(E.A.Welbon)선교사가 설립했는데 교회 안에 사립 배영학교를 세워 주민들에게 신문화교육, 육영사업, 군사훈련, 민족정신을 키워왔다. 여성들의 교육기회가 흔치 않던 시절에 곽진근 지사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았다.
1911년 3월 경성 무교정 복음전도관에서 출발한 경성성서학원은 전도사 양성기관이었지만 복음전도와 함께 조선인들이 국가의식에 눈뜰 수 있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당시 경성성서학원의 수업연한은 3년 과정으로 남녀공학이었으며 입학자격은 25살 이상 30살 이하였으나 곽진근 지사는 51살의 나이로 입학했다.
학교 규칙상으로는 입학 나이가 너무 많았지만 1921년 이전에는 곽진근 지사처럼 입학규정 외의 학생들도 입학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고령의 나이에 입학이 가능했던 것은 곽진근 지사의 독실한 신앙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경성성서학원을 나온 곽 지사는 강원도 철원에 내려가 전도사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의 교회가 본래의 목적인 전도사업 외에 조선인 교화에 힘을 쏟자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일제는 1910년 조선침략 이후 식민지 경영에 큰 장애물로 판단하여 1914년 철원교회와 배영학교를 폐쇄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이 자리에 철원감리교회가 들어섰고 학교 이름도 정의학교로 바꿔 교육을 이어갔다.
정의학교는 철원감리교회 전도회 소속이던 곽진근 지사와 함께 1919년 3·1만세운동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곽진근 지사는 철원읍 관전리 출신으로 58살 고령의 나이에 만세운동의 주도자가 되어 교회부설 정의학교 여교사인 김경순(金敬順, 1899~?)을 비롯하여 김경순의 개성 호수돈여학교 동창 이각경(李珏卿, 1897~?), 이소희(李昭姬, 1885~?) 등과 함께 시위대의 맨 앞에 섰다.
이때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학생, 일반인, 지역 청년 등을 포함하여 무려 5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철원군청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하며 독립만세를 목청껏 불러댔다.
곽진근 지사가 이끄는 시위대는 독립선언문 낭독 뒤에 매국노 이완용과 친밀한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을 처단하기 위해 읍내 월하리 집으로 몰려가서“이완용이 이 집에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내 놓으라.”고 소리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헌병대의 해산 명령에도 곽진근 지사를 비롯한 5~6명의 여성들은 새벽 2시까지 줄기차게 매국노 박의병을 위협했다.
이들의 시위를 뒷받침하던 시위대는 다음날 아침에는 700여명으로 늘어났다. 곽진근 지사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경원선이 지나는 철원역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농업학교, 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여 다시 읍내 서문거리에 이르렀을 때 헌병대가 총을 쏘며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곽진근 지사는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갔다.
곽진근 지사를 비롯한 만세시위 상황은 <독립신문> 1919년 10월 14일치‘철원 독립군의 판결’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기사는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만세 시위로 잡혀 재판을 받은 내용이 실린 것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는 철원지역 3·1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곽진근 지사를 포함한 김경순, 이각경, 이소희에게 각각 실형을 언도했다.
곽진근 지사는 징역 6개월, 김경순과 이각경은 징역 4개월과 벌금 20원, 이소희는 징역 3개월과 벌금 20원을 언도받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으로 철원교회 정의학교와 노동야학은 폐교되고 말았다. 곽진근 지사는 옥고를 치른 뒤 더 이상 철원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 경기도 안성, 아현, 평양, 신공덕, 만리현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940년 8월, 80살의 나이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1995년 대통령 표창으로 곽진근 지사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으나 지난 20여 년 동안‘훈장 미전수자 명단’에 남성으로 오인돼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곽진근 지사와 함께 철원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경순(2016, 대통령표창), 이소희(2016, 대통령표창) 지사도 2016년 3월 1일에 정부로부터 서훈을 추서 받았다.
특히 국가기록원에서는 3·1만세운동 97주년(2016)을 맞이하여 일제강점기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판결문」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의「수형기록카드」를 정리하여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3·1운동편)》을 펴냈다. 이 「판결문」에 있는 여성 54명 가운데 최고령 참여자는 곽진근 지사였는데 3·1만세운동 당시 58살의 나이로 철원 만세운동의 여전사로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