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법륜 스님, 막사이사이상 평화부문 선정
2002년 오늘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상의 수상자로 우리 나라의 법륜스님이 선정됐다. 법륜스님은 정파에 개의치 않고 탈북자 지원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평화와 국제이해 부문의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막사이사이상은 1957년 항공기 사고로 사망한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법륜스님은 '쓰레기 없는 국토'를 만들겠다며 1988년 '정토회'라는 실천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했다. 1999년부터 북한 어린이 만1000명에게 옥수수, 설탕, 분유 등을 보냈다.
또 종이 아껴쓰기, 과포장제품 구입하지 않기, 용변 뒤 뒷물하기 등 환경친화적 생활방식을 전파했다
[1983년] 영국 영화배우 데이비드 니븐(Niven, David) 사망
← 니븐
1910. 3. 1 ~ 1983. 7. 29
영국 배우. 스코틀랜드 출생. 윌리엄 니븐 장군의 아들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군에서 복무하는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다가 1935년 할리우드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단역으로 출발하였으나 분명하고 신뢰감을 주는 배우로 빠르게 알려졌으며, 특히 가벼운 희극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플렌더(1935)》 《도즈워스(1936)》에서 처음 단역을 맡았으며, 《새벽 순찰(1938)》 《폭풍의 언덕(1939)》에서 비로소 주연을 맡았다. 그 밖에 《광채(1935)》 《80일간의 세계 일주(1956)》 《분리된 식탁(1958)》 《나바론 요새(1961)》 《나일 강의 살인사건(1978)》 《핑크 팬더의 저주(1983)》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yahoo
[1981년] 찰스 왕세자, 다이애나와 결혼
1981년 7월 29일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가 결혼했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의 맏아들인 찰스 왕세자는 영국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다녔으며, 1971~76년 해군소속으로 여러 곳에서 근무했다. 이후 '영잉글랜드 스쿨'의 유치원 교사로 있던 다이애나를 만나 1981년 약혼을 발표했다. 결혼식은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1982년 첫 아기인 웨일스 공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스 왕자가, 1984년 둘째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 왕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활발한 자선활동으로 언론의 초점이 된 다이애나는 찰스와 불화가 깊어지면서 결국 1992년 공식 별거에 들어갔고, 1996년 합의이혼했다. 1997년 다이애나는 연인이었던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브리태니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참의원) 선거
← 제5대 민의원, 참의원 선거 입후보자 정견 및 인사장
해방과 더불어 미 군정하에서 치러진 남한만의 선거로 탄생한 제1공화국은 1960년까지 부정과 부패에 찌들어 있었다. 국민의 대표를 뽑는 국회의원 선거는 물론 전반적인 정치 분야의 혼탁 양상은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십 수 년간 장기 집권해온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새로운 정치제도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요구에 따라 그간의 모순점을 보완한 의원내각제에 입각한 개정헌법이 1960년 6월 15일 공포 되었고 민의원, 참의원의 양원 제도로 국회의원 선거법이 개정됨에 따라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개정된 선거법은 그간의 모순과 병폐를 수정하여 의원 후보자 추천장제도를 폐지하고 등록신고제를 채택하였으며, 부재자투표를 인정하였고 부정투표를 방지하기위한 투표참관인제도의 강화와 투표용지 일련번호삽입제도를 신설하였다.
또한 선거관리위원회의 헌법상 독립성을 부여하여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하였으며 선거연령을 낮춰 보다 많은 국민이 참여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소선거구제에 의한 민의원 선거와 중대선거구제를 채택하여 치러진 참의원 선거는 가각 민의원 84.3%, 참의원 84.1%의 투표율을 보였고 과거 실정을 하였던 자유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민주당이 새로운 다수당으로 급부상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1958년] 미 항공우주국(NASA) 설립
[책갈피 속의 오늘]1958년 NASA 설립법 통과
1957년 10월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지름 58cm, 무게 83.6kg에 불과한 이 인공위성으로 ‘우리가 과학기술 분야의 선두’라는 미국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다. 놀라움에 동그래진 눈 뒤에는 핵무기를 실은 미사일이 미국으로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었다. 소련의 우주개발 행보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항공우주 투자를 대대적으로 늘리기로 했다. 오늘은(2008년) 미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 50주년을 맞는 날이다. 1958년 7월 29일 의회는 NASA 설립을 명시한 ‘국가 항공우주법’을 통과시켰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간 국가 자존심을 건 ‘우주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60년대 달성 목표는 유인 우주비행. 소련이 먼저 성공했다. 1961년 4월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가 108분간 지구를 일주하고 돌아왔다. 미국은 이에 질세라 같은 해 5월 첫 유인 우주선 프리덤 7호를 올려 보냈다.
1961년 5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달에 인간을 보내고 이들을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어느 나라가 먼저 달에 발을 딛는가가 다음 관문이 됐다. 소련은 1966년 무인 탐사선 루나 9호를 세계 최초로 달에 착륙시켰다. 미국은 맹렬히 뒤쫓아 갔다. 그리고 1969년 7월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려 인류 최초로 달에 닐 암스트롱을 내려놓았다. 이후 미국이 우주 활동에서 주도권을 잡았다는 평가다.
NASA가 우주 탐사를 시작한 뒤 태양계와 우주의 생생한 정보를 숱하게 생산해냈다. 달의 정체도 비교적 상세히 밝혀졌고 화성과 토성도 숨겨진 모습을 드러냈다.
우주 기술은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국한되지 않았다. NASA는 우주비행사들의 식수와 음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수기와 전자레인지를 개발했다. 연기 감지 화재경보장치는 미국의 우주정거장인 ‘스카이 랩’을 위해 만들어졌다.
아폴로 계획을 진행하면서 개발한 디지털 신호 처리나 화상 기술은 컴퓨터단층촬영(CT)과 자기공명영상(MRI) 탄생에 기여했다. 인공위성 덕분에 텔레비전 방송,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 우리 생활 속에 우주 기술은 이미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동아닷컴 2008-07-29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발족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1953년 제8회 국제연합 총회에서 제창해 1956년 70개국의 서명을 받아 원자력의 평화이용을 촉진하기 위한 국제기구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957년 7월 29일 발족됐다.
주요기관으로는 총회와 이사회를 설치했다. 주요임무는 1.원자력의 평화이용을 위한 연구개발과 실용화를 장려 원조하고, 물자-설비시설의 공급에 있어서는 가맹국 상호간의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나아가서는 필요한 독자적인 활동업무를 한다. 2.물질 업무 설비 시설을 제공한다. 3.과학 기술에 관한 정보교환을 촉진한다. 4.과학자 전문가의 교환이나 훈련을 장려한다. 5.제공한 원조가 군사적 목적에 이용되지 않도록 보장조치를 설정하고, 요청이 있으면 국가간의 약속 또는 1국의 활동에 대해서도 적용한다. 6.보건 안전상의 기준을 설정하고, 요청이 있으면 이것을 국가간의 약속 또는 1국의 활동에 있어서도 적용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조선
[1948년] 한국, 첫 하계올림픽 출전
← 한국 축구팀은 예선 2차전에서 스웨덴에 0대12란 치욕의 패배를 맛보았다. 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은 GK 홍덕영씨
1948년 7월29일, 제14회 올림픽이 런던에서 개막됐다. 2차대전으로 12년 만에 치러진 올림픽이었다. 한국을 비롯, 15개 신생국이 처음 참가한 것과 달리 전범국 일본ㆍ독일ㆍ이탈리아는 초청받지 못했다.
한국은 광복 후 처음 출전한 하계올림픽에 축구ㆍ복싱ㆍ역도 등 7개 종목에 50명의 선수와 17명의 임원을 출전시켰다. 그 해 1월, 단 3명 뿐인 초미니 선수단이 파견된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이 광복 후 출전한 첫 올림픽이었다.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아 참가비용은 액면가 100원인 올림픽 후원권을 발행해 조달했다.
6월21일 서울역을 출발해 열차로 부산에 닿은 선수단은 다시 배를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7월2일에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탔으나 인도ㆍ이집트ㆍ로마를 경유하는 장거리 비행이었다. 결국 20일이 지난 7월8일이 돼서야 파김치 상태로 런던에 도착할 수 있었다.
8월11일 김성집이 역도에서 첫 동메달을 따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되는 감격을 맛본데 이어 한수안도 복싱에서 동메달을 획득, 한국은 참가국 58개국 가운데 24위를 차지했다. 한국계 미국인 새미리(李)가 하이다이빙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도 런던 올림픽이었다./조선
[1946년] 전승(戰勝) 연합국대표 21개국 파리서 국제평화회의 개최
제2차세계대전 뒤 1946년 7월 29일부터 10월 15일에 걸쳐 연합국 21개국과 독일군 진영에 소속되었던 이탈리아·헝가리·불가리아·핀란드·루마니아 사이의 강화회의. 1946년 7월 31일 강화조약 초안을 발표하였는데, 관련국들의 정치불안으로 조인이 늦어져 1947년 2월 10일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식민지를 포기하고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인정하며 옛 유고슬라비아·프랑스·그리스에 영토를 할양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국경지대인 트리에스테를 자유지역으로 하여 1948년 국제연합(UN)의 통치 아래 두도록 하였다.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에, 다뉴브 강 서쪽 연안의 일부 토지를 체코슬로바키아에 반환하였다. 루마니아는 헝가리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얻었으나 남(南)도브루자를 헝가리에 양도하고 베사라비아와 북(北)부코비나를 옛 소련에 양도하였다. 핀란드도 옛 소련에게 국경지대 일부를 양도하고 핀란드만 해군기지 조차권(祖借權)을 인정하였다.
[1946년] 비키니 수영복, 파리의 패션 쇼에 처음으로 등장
태평양 상의 작은 섬 비키니에서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이 있은지 4일 후인 1946.7.29에 파리의 한 패션 쇼에서 비키니 수영복이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 디자이너 쟈크 앵은 비행사를 고용하여 자기가 만든 수영복을 공중에다 광고했다.
비행기는 연막탄으로 이런 글자를 만들며 날았다.
"비키니-세계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보다 더 작은 수영복"
어떤 사람들은 비키니라는 명칭의 의미를 폭탄이 터진 뒤 식물들이 자취를 감춘 비키니 환초와 마찬가지로 그 수영복이 여성들을 벌거벗겨 놓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무명 천에 신문지를 도안해서 프린트한 비키니 수영복을 처음 입고 무대에 섰던 모델은 당시 각 곳에서 10만여통의 팬레터를 받았다고 한다.
[1942년] 문학평론가·불문학자 김현 출생
1942. 7. 29 전남 진도~1990. 6. 27 서울.
본명은 김광남(金光南). 김현은 필명이다. 평론과 논문을 통해 우리 문학의 질을 높이고 동인활동으로 1960~70년대 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불문학자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1960년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마치고 1967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1971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전임강사가 된 뒤 1990년까지 불문과 교수로 있다가 간암으로 죽었다.
대학시절부터 김치수·김병익·김주연·김승옥 등과 〈산문시대〉를 비롯해 〈사계〉·〈68문학〉·〈문학과 지성〉 등의 동인활동을 했고, 대학 때 평론 〈나르시스 시론〉(자유문학, 1962. 3)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바슐라르·사르트르·푸코·프로이트 등의 문학론을 소개하고 〈프랑스 비평사〉(1982)·〈제네바학파 연구〉(1986) 등을 통해 프랑스 문학이론을 정리했다. 한국문학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김윤식과 함께 〈한국문학사〉(1973)를 펴내기도 했다.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경향들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존재와 언어〉(1964)·〈한국문학의 위상〉(1977)·〈문학사회학〉(1982)·〈분석과 해석〉(1988) 등의 책을 펴냈다. 1988년 〈외국문학〉 논문상을 받았고 1989년 제1회 팔봉비평문학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21년] 히틀러, 나치스당 당수 선출
1921년 7월 29일 뮌헨에서 열린 나치스(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특별 당대회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543표대 1표차로 당 제1위원 당수에 선출됐다. 대회전에 히틀러는 다수파방식과 의회적인 절차를 모두 폐지하고 당수를 정점으로 한 엄격한 명령-복종의 원칙 '지도자 원리'를 확립하고 당의 구성을 바꿨다. 이로써 히틀러는 나치스의 독재자가 됐고 이후 그의 결정은 모두 실행에 옮겨졌다. 1932년 7월 31일 총선거에서는 나치스당이 제1당으로 부상했고 1933년 1월 30일에는 마침내 독일 수상에 취임해 전세계가 전쟁과 학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 루스벨트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졌다. 이 밀약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 H. 태프트 사이에 맺어진 비밀협약이다. 이 밀약을 통해 미국의 대 필리핀 권익과 일본의 대 조선 권익을 상호 교환조건으로 승인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는 대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으며, 러일전쟁 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같은 해 제2차 영일동맹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극동 지역에서 일본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이후 일본은 을사조약 강요와 함께 조선 지배를 기정사실화했다./브리태니커
[1905년] 국제연합 제2대 사무총장을 지낸 다그 함마셸드 출생
← 함마르시욀드(1954)
웁살라대학과 스톡홀름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한 함마르셀드(Dag Hjalmar Agne Carl Hammarskjold, 1905.7.29 ~ 1961.9.18)는 재무부 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재무부 차관, 스웨덴 은행 총재를 거쳐 1945년, 내각의 재정·경제문제 담당 고문으로 취임하여 대전 후의 경제문제에 대한 정부안에 관계되어 조정을 실시했다. 1947년 마셜플랜 수락을 결정한 파리회의에 스웨덴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면서 외교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하였으며 1952년, 국제연합총회의 스웨덴 대표단 단장을 지냈다. 1953년 압도적인 지지로 2대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그는 유엔 사무국을 설립하였고 국제적인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국제사회에서의 UN의 역할과 권한 강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관계개선, 한국전쟁의 조기종식, 이라크 군사구테타 해결에 진력하였으며 1956년에 일어난 수에즈 운하 위기를 48시간 의 시한 중에 유엔 긴급군(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현재의 PKF, PKO)을 조직 해 사태를 해결 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1960년 벨기에령 콩고의 독립과 관련한 내란사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으나 1961년 9월 평화사절로 콩고를 방문하는 도중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였다. 1961년 그의 사망 후 노벨평화상이 추증되었다.
[1890년] 빈센트 반 고흐 사망
← 귀에 붕대를 감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1889), 런던 커톨드 미술관 소장
‘불꽃의 화가’ ‘태양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1890년 7월 29일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비참함과 고뇌에 찬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37세였다. 빨강, 파랑, 노랑색이 주조를 이룬 그의 그림은 언제나 강렬했고, 자연이나 인물들은 한결같이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고흐는 색깔 그 자체로 정신세계를 표현했고, 색채의 움직이는 듯한 신비감은 그의 그림의 전부였다.
‘빨간 포도밭’이 생존해 있는 동안 팔린 유일한 그림일 정도로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집념과 정열만으로 답답한 현실을 이겨냈다.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집안사정으로 어려서부터 직업전선을 전전해야 했다. 1880년 브뤼셀의 왕립미술관에서 혼자 그림공부를 시작했고 1881년 화가 모브에게서 유화를 배웠다. 마침내 1885년 최초의 작품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렸으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한때는 고갱과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으나 곧 헤어졌고, 자신을 억제하지 못해 자신의 귀를 자르기도 했다. /조선
[1883년] 무솔리니 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 출생
← 베니토 무솔리니
"역사의 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피뿐이다." - 베니토 무솔리니
1883년 7월 29일 태어남 / 1945년 4월 28일 죽음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창시한 독재자이다. 하층계급 출신으로 교직을 거쳐 저널리스트, 대중연설가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0년경부터 사회주의의 청년기수로 부각되기 시작해, 1912년에는 사회당 기관지인 <전진! Avanti!>의 편집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반전주의자에서 전쟁지지자로 돌연 입장을 바꾸면서 사회당에서 탈당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한 출판업자의 재정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인민 Il Popolo d'Italia>의 편집을 담당했고, 전후에는 민족주의를 내세운 반자유주의적·반사회주의적 정치 세력을 결성했다. 1922년 사회당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이들 파시스트들은 로마 진군을 감행해 국왕으로부터 조각위촉을 얻어냈다. 총리로 취임한 무솔리니는 짧은 기간에 질서안정과 경제회복을 달성해 큰 지지를 얻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 제국주의 노선을 취함으로써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1936년 독일의 히틀러와 동맹을 맺었고, 1940년에는 연합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탈리아에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1943년 실각한 무솔리니는 독일의 힘을 빌려 이탈리아 북부에 괴뢰정권을 세우기도 했으나 파르티잔에게 사살당했다./브리태니커
[1883년] 독립운동가 백기환(白基煥) 출생
1883. 7. 29 평남 평양 ~ ?
호는 진천(振天). 일명 정진천(鄭振天)·김중성(金重星). 1900년 평양 숭실학교 2학년을 수료하고, 이듬해 평양 군영(軍營)에서 하사관 교육을 받았다. 1904년 캐나다 크리스트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하여 3년을 마치고 귀국해 함경도 일대에서 선교사 및 건축기술자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1월 정찬조(鄭燦朝)·고창희(高昌熙)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평양에 들어와 김승호(金承鎬)·오원선(吳元善) 등에게 독립운동자금 1,000원씩을 요구했다. 이때 서로군정서의 이근수(李根洙)·강성리(康聖利) 등과 평안남도도청과 평양경찰서의 폭파 및 시위운동 계획을 세우고, 비밀결사 조직인 모험단(冒險團)을 조직했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동지들과 더불어 〈독립신문〉과 선전문서를 각 지역에 배포하여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했다. 1920년 5월 10일 고창희의 집에서 동지들과 함계 앞서 계획한 평안남도도청과 경찰서 폭파방법을 상의하던 중 일경의 기습으로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27년 6월 9일 가출옥했다. 1944년 대동군 남곳면 두단리 사건(평양신사 방화사건)에 가담했으며, 1945년 2월에는 평양의 군사시설 파괴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었으나 피신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00년] 스웨덴의 소설가 욘손(Johnson, Eyvind) 출생
← 욘손
1900. 7. 29 ~ 1976. 8. 25
스웨덴의 소설가. 보덴 근교 스바르비외른스뷘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목재 벌채 등의 일을 하다가 19세에 스톡홀름에 나왔다. 얼마 후 베를린으로, 다시 파리로 건너갔다. 그 동안 아사 직전의 지경에 이를 정도의 혹독한 고난을 경험했다. 1923년에 일단 귀국하였다가 다시 파리에 가서 5년간 머물며 S.프로이트, A.지드, M.프루스트 등을 배워 익혔다. 그리하여 유럽에서의 생활경험과 스스로 깨우친 문학적 소양이 작풍의 기초가 되어 작가로서 일어서게 되었다.
참신한 실험적 작품인 《어둠 속의 도시》(1927) 《빛 속의 도시》(1928) 등으로 문학적 지위를 굳혔고, 《햄릿에의 결별》(1930) 《새벽의 비》(1933) 등에서 사회비평으로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취재한 《밤의 동원(動員)》(1938) 《병사의 귀향》(1940) 《크릴론 Krilon》(3부작, 1941∼1943)에서는 나치즘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1957년 문학상의 공적을 인정받아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7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 1934∼1937년에 간행된 4부작인 《올로프에 관한 이야기 Romanen om Olof》 등이 있다. /naver
[1856년] 독일 작곡가 슈만 사망
← 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 J. Hofelich가 제작한 석판화
작센의 츠비카우 출생. 피아노 음악, 가곡(리트), 관현악곡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적인 피아노곡들 중에는 1840년 아내가 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을 위해 작곡한 곡들이 많다. 아버지는 저술도 하는 서적상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심과 음악적 감성이 깊은 사람으로 슈만은 아버지의 문학적 취미와 어머니의 섬세한 감수성을 이어받았다. 11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16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음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버리고 1828년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서 당시의 명교사 F.비크를 알게 되어 그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또한 슈베르트의 영향이 많이 풍기는 가곡과 피아노곡 등의 작곡도 시작하였다. 1829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티보 교수에게 이끌려 잠시 그곳으로 옮겼으나 이듬해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그는 다시 비크에게 피아노를, 극장 지휘자인 도른에게 음악이론을 배우고, 독학으로 작곡 연구도 하였다.
1843년 L.F.멘델스존의 초청을 받아 신설 음악원의 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4개월에 걸친 아내의 러시아 연주여행에 동행하여 정신과 육체적 건강의 악화로 전지 요양을 권유받았다. 1844년 라이프치히를 떠나 드레스덴에서 ‘리더 타펠’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850년에는 힐러의 후임으로 뒤셀도르프의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라인교향곡》으로 알려진 제3교향곡, 첼로협주곡 ·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쓰여졌다. 평론으로는 마지막 것이 되지만, 1853년에 젊은 브람스를 소개한 《젊은 길》이 슈만의 명성을 남긴 논문이다. 그의 정신장애의 징후는 이미 1833년경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1844년경부터는 창작력이 왕성한 시기와 우울증에 빠진 시기가 서로 교차되어 나타났으며, 1854년 2월 심한 망상에 사로잡혀 라인강에 투신했으나 다행히 구조되어 그 후부터 본 교외의 엔데니히정신병원에 수용되고, 1856년 여름 2년간의 투병 끝에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의 작품은 고전파 작곡가처럼 모든 분야에 걸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질적으로 가장 뛰어나고 작품수가 많은 것은 피아노독주곡과 가곡이다. 이 가운데 3곡의 피아노소나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시적 서정성이 담긴 낭만주의 향기가 풍기는 표제적(標題的)인 음악이다. 특히 가곡은 슈베르트가 개척한 리트형식을 계승하고 거기에다 시와 음악을 밀착시켜 보다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주요작품 중 오페라에는 《Genovena》(1848), 교향곡으로는 《제1, 봄의 교향곡 Frühlingssymphonie》(1841) 《제3, 라인교향곡 Rheinishe Symphonie》(1850), 피아노곡으로는 《피아노협주곡》(1845) 《사육제》(1835) 《환상소곡집 Fantasiestücke》(1837) 《교향적 연습곡 Etudes symphonique》(1834, 개작 1852) 《어린이의 정경 Kinderszenen》(1838), 관현악이 딸린 대합창곡으로 《Paradies und die Peri》(1843), 가곡으로는 《유랑의 무리 Zigeunerleben》(1840) 《Myrthen》(1840) 등이 있으며, 주요저서로는 《음악평론집 Gesammelte Schriften über Musik und Musiker》(4권, 1854)과 서한집 《R.Schumanns Jugendbriefe》(1885) 등이 있다.
[1836년] 파리 개선문(Arc de Triomphe) 완공
← 개선문의 부조, 가운데가 나폴레옹이다.
1836년 7월 29일 파리의 에투알 광장(지금의 샤를 드골광장) 중앙에 개선문이 들어섰다. 1806년 나폴레옹 1세가 휘하 군대의 연전연승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기 시작한 개선문은 고전주의 건축가 샬그랭의 설계로 착공했으나, 설계자도 얼마 뒤 죽고, 나폴레옹도 실각해 공사가 중단됐었다. 이어 여러 건축가와 조각가의 손길을 거쳐 7월 혁명 이듬해가 돼서야 겨우 완성될 수 있었다. 다리 부분을 장식한 조각 장식 가운데 뤼드의 '라 마르세예즈'는 특히 유명하다. 높이 49 m, 너비 45 m, 앞뒤 길이 22m의 개선문은 대체로 고대 로마의 개선문의 양식을 따랐으나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아치의 중앙 밑에는 1920년 이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과 제1차 세계대전의 무명용사 묘비가 세워져 있다./조선
[1588년] 영국 해군,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1588년 7월 29일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대패함으로 힘의 중심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세말 이후 지방 분권적인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인 절대주의 국가가 수립된 스페인은 지리상의 발견으로 광대한 식민지로부터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귀금속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무적함대를 영국에 파견한 펠리페 2세 때, 레반토해전에서 투르크를 격파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포르투갈도 합병해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스페인의 세력확대를 위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행한 청혼과 스페인 상선을 습격한 영국의 해적 드레이크의 처형요구가 모두 거절당한데 앙심을 품은 펠리페 2세는 1588년 5월 28일 무적함대를 영국에 파견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한 무적함대는 약 130척의 배와 2,500문의 대포, 수병 8천명에 육군 1만9천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하워드경을 사령관으로 하고 호킨스, 드레이크 등의 명장을 배치하여 전함 80척, 병력 8천명으로 이에 맞서게 했다. 영국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기동력이 뛰어나고 선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태풍으로 이날에서야 영국 해안에 도착한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의 기습공격에 지리멸렬했다. 피신한 프랑스 칼레 연해에서 영국함대로부터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 타격을 입었으며 그라블리느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54척만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페인이 이 전투에서 70여척의 배와 약 1,800여명의 병사를 잃은데 비해 영국은 배 한척에 전사자도 겨우 100명 뿐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한 스페인은 이후 해상에서의 패권도 상실하게 되어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 자리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차지했다./조선
그 밖에
2004년 전쟁기념관, 6.25전쟁 당시 통영지구 전투에서 적이 던진 수류탄을 덮쳐 전우의 생명을 구한 고종석 해병대 일등병조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2002년 박희정, 미 LPGA투어 사이베이스 빅애플클래식에서 LPGA 진출 후 첫 우승
2000년 변종하 화백 별세
1990년 몽골 최초의 자유선거 실시, 인민혁명당(공산당) 승리
1985년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 5개월간 핵실험 중지 발표
1983년 공격형 헬기대대 창설 추진
1983년 인도 미그27기 생산
1981년 바니 사드르 이란 대통령 프랑스로 망명
1980년 바누아투, 영국-프랑스로부터 독립
1978년 베오그라드서 비동맹제국 외상회의 개막
1975년 미주기구(OAS) 대 쿠바봉쇄 해제 결의
1967년 미국 항공모함 포레스탈호 통킹만서 화재. 인명 261명-비행기 29대 손실
1966년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65년 김해서 군인 30여명 난동 경찰서 습격하고 기자 납치
1965년 서해안에 큰 해일(인천 개항이래 최대)
1964년 계엄령(6월3일) 해제
1961년 동독, 서독으로의 피난민 유출방지 조치를 강화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씨로 결론
1952년 국회 특별위, 중석불 사건 조사결과 발표
1942년 문학평론가 김현 출생
1894년 청일전쟁중 첫 육상교전이 성환-수원에서 전개됨
1835년 영국 정치가 미첼 토마스 새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