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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잠자리에 그냥 누워있자니 어려서 부흥회 따라다니며 부르던 ‘허사가’가 흥얼거려진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장수야 무엇 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에 춘몽…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 …노래 가사가 슬그머니 바뀐다, ―삼십삼 년 동안을 세상에 계셔 벙어리와 소경과 빈천한 사람 불쌍히 여기시던 주가 오늘날 이 고난을 당함은 무슨 연고뇨, 두 손과 양발에 쇠못을 박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셨네, …사정을 알지 못한 로마 병정들 주님을 형틀 위에 못 박을 적에 비웃고 흉보면서 욕하는 중에 제비로 의복까지 나눠 가졌네. 그러나 우리 주님 모든 원수 된 죄인을 위하여 기도하신 말, 아버지여 저들을 불쌍히 보사 저희들의 모든 죄 용서하소서.… 어느새 노래를 혼자서 흥얼거리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합창하고 있는데 문득 샤갈의 천사 같은 여인이 나타나더니 새 노래로 옛 노래를 평정한다. ―남자야, 여자야, 사랑뿐이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사랑뿐이다, 사람아, 사람아, 사랑뿐이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사랑뿐이다. …그렇다, 저 여인이 부르는 건 노래 뿐 아니라 여태 존재해온 모든 것의 매듭이고 새로운 시작이다. 온 세상이 따라서 힘차게 부른다. ―여자야, 남자야, 사랑뿐이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사랑뿐이다, 사람아, 사람아, 사랑뿐이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사랑뿐이다.
북산(北山)에게서 전화. 목소리가 밝아 고맙고 좋다. (2018. 3. 16)
⎈ ‘미투’ 물결이 갈수록 거세진다. 드디어 성차별이 무너지고 나아가 ‘여성’이 사회를 리드하는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모든 선한 일에 그렇듯이 여기서도 부작용을, 겁낼 건 없지만, 각오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동안 ‘남성’이 보여준, 상대를 향한 공격적이고 비판적이고 지배적인 행태가 ‘여전사’들에 의하여 되풀이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한풀이로 그치는 한풀이는 이쪽저쪽 모두에게 상처만 안겨준다. 성모 마리아처럼 자애롭고 넉넉한 어머니들이 일어나셔야 한다.
―우리 가톨릭에 마리아를 여신(goddess)으로 숭배하는 심리적 요소가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유산인지,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부장의 위장(僞裝)인지, 내적으로 부정된 여인의 사랑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냥 성령의 역사하심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논리와 이론을 이겨낸 본능의 압도적 모범이다. 가부장적 로마교회의 두 가지 오류 없는 교리가, 역설적이게도, 마리아가 육신의 몸으로 승천하셨다는 것과 하느님이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원죄 없는 잉태를 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그분이 “하늘과 땅의 여왕으로 즉위하셨음”을 기린다. …페미니즘은 새로운 것도, 진보적인 것도, 위험한 것도 아니다. 마리아와 여덟 가지 복만큼이나 보수적이고 전통 깊은 것이다. ―from Radical Grace, 'Is This 'Women-Stuff' Important?'
토요명상. 부모 배움에 온 어머니 아버지들 동참. 명상 마치고 둥글게 서서 어깨동무를 하는데 성스러운 기운이 결집된 자리라는 느낌이 든다. (2018. 3. 17)
⎈ 효선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대신 소현과 함께 꽃시장에 가서 묘목과 꽃들을 잔뜩 사왔다. 이게 오늘의 자기 예배란다. 제대로 보수주의 신자가 된 것 같다고 말해준다. 점심 먹고 나무를 심는데 곁에서 좀 도와줄까? 물으니, 이건 자기의 ‘기도’니까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두란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곱게 상기되어 있다. 남의 기도를 방해하는 건 죄일 테니 아무 말 않고 방으로 들어와 폴 틸리히를 옮긴다. 이 또한 누구의 기도다.
용화사 예배에 부산 식구 셋 동참.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만나는 대목. 처음엔 이성(理性)으로 천사를 대하다가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고 상식적이지도 않은 천사의 말에 승복하여 “말도 되지 않는 그 말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대답이 어떻게 나왔을까?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예배였다. (2018. 3. 18)
⎈ 리처드 로어, 노리치의 레이디 줄리안, 아브라함 헤셸, 폴 틸리히, 헨리 나우웬, 틱낫한. 여섯 선생의 글을 차례로 옮긴다. 지루하지 않고 힘들지 않고 늘 새롭게 조금씩 때로는 크게 감동하며 살아가는 괜찮은 방식이다. 고마울 뿐.
―1970년대, 프랑스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우리는 작은 차 한 대를 구입했다. 중고차 푸조였다. 파리 교외 낡은 농가에서 ‘고구마 공동체’를 시작할 때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뿐 아니라 모래, 벽돌, 연장, 도서, 음식 등 온갖 것을 실어 날랐다. 여러 해 동안 여러 용도로 그 차를 이용했다. 마침내 너무 늙어서 더 탈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과 헤어지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우리는 그 작은 푸조에 많은 애착이 있었다. 멀고 험한 길을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고장도 여러 번 나고 사고도 나고 수리비도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버텨낸 그 차를 포기해야 했던 날 밤, 친구들과 나는 몹시 슬펐다(Thich Nhat Hanh, At Home in the World).
효선이 비가 오시는데도 석류나무와 동백나무를 사다가 뜰에 심는다. 자기는 붉은 동백보다 흰 동백이 좋아서 몇 그루 안 남은 것들 가운데 한 그루 싸게 샀단다. (2018. 3. 19)
⎈ 새벽. 폴 틸리히는, 반세기도 전에, 비난과 책망이 어지러운 슬픈 계절이 우리에게 올 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면, 이것은 창세 때부터 내려온 인류의 숙명인가? 불편한 마음으로 슬픔과 아픔을 달래며 그의 글을 옮긴다.
“자기한테 스스로 실망한 사람에게 ‘다른 무엇이 되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자기한테서 벗어날 수 없는 바로 그것이 그가 괴로워하는 정확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파괴적인 영향을 극복하지 못해서 그래서 범죄를 저지르고 비참해진 사람에게 ‘좀 더 강했어야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힘을 주변 환경에 의해서 빼앗긴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들도 사람이고, 그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들 모두 제 운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들이 져야 하는 운명의 무거운 짐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는 게 우리가 할 일이 아닌 것처럼, 그들에게 자유가 있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심판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심판할 때도 그것이 마지막 심판일 수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최후의 심판대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불공평의 수수께끼가 영원한 답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답은 우리가 내리는 게 아니다. 왜 저들은 저토록 비참한가? 불편한 마음으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난처함이다. 왜 저들인가? 왜 우리가 아닌가?”
속으로 다짐한다. 누가 누구를 책망하고 비난하는 자리에는 결코 동석하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야 한다면, 이유 불문, 비난하는 쪽이 아니라 비난당하는 쪽에 서리라. 거기가 있어 마땅한 아무개의 자리겠기에. …왜 내가 아닌가? 왜 그 친구인가?
9학년 마음공부. 오늘의 본문은 “Do not dwell much on the defects of others, it's not helpful.”(남의 결점에 너무 많이 거하지 마라, 도움 되지 않는다.)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별로 좋지 않은 걸 오래 지니고 다녀서 좋을 까닭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남의 좋지 않은 점을 씹고 다니지 말라는 거다, 알겠냐?” 아이들이 웃는다. 말하는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괜찮단다. 바람 심하고 비도 내린다. (2018. 3. 20)
⎈ 새벽에 한 말씀 듣는다. “무엇을 해달라는 것과 무엇을 하자는 것은 많이 다르다. 전자는 경계하지 않아도 되지만 후자는 조심해야 한다. 그 속에 여전히 네가 일의 주체라는 생각의 덫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죽으려면 철저히 죽어라. 설죽은 죽음은 속임수일 뿐이다.”
효선이 음악연주회 보려고 서울 갔지만 함께 가기로 한 소리가 몸이 불편해서 티켓을 물렸단다. 본디 천식이 있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걱정이다. 그래도 뜰의 작약이 붉은 싹 힘차게 밀어 올리며 속삭인다, 괜찮다고, 그 또한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2018. 3. 21)
⎈ 7, 8학년 마음공부. 아이들이 고맙다. 지훈이 묻는다,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을 땐 어떻게 해요? 되묻는다, 너희 같으면 어쩌겠니? 민준이 답한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고. 빙고! 정답에 가까운 답이다! 정답은 뭐냐?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를 과거의 상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상대가 사과하든 말든 일방적으로 상대를 용서하는 거라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 돌려보내고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현실을 창조하는 거라고. (2018. 3. 22)
⎈ 새벽꿈. 신주(神酒)라는 술 빚는 과정을 구경한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술렁거리는데 뭐가 복잡하면서 되우 간단한 느낌이다. 이제 마지막 공정(工程)이 남았단다. 기가 막힌 술이 한 동작 뒤에 나온단다. 긴장하고 기다리는데 누가 저만큼에서 큰소리로 말한다. 마지막 공정을 마치고 신주 맛보는 기쁨도 기가 막히지만 신주를 빚다 말고 숨지는 기쁨도 그에 못지않게 기가 막히다. 네가 그것을 아느냐? 알 것 같다고 말하려는데 꿈에서 깨어났다.
번역하다가 텔레비전으로 뉴스를 본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이 어젯밤 구속되었단다. 이 나라 전직 대통령 둘이 함께 구속된 셈이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 속이 불편하다. 효선에게 바람 좀 쐬고 오자 하니, 마침 서면에 일이 있어 가는데 나선 김에 어디 다녀오잔다. 그쪽 방향에 선암사가 있어 그리 가기로 한다. 선암사 흰 매화는 먼저 피었고 붉은 매화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릴 듯 은근히 수줍다. 추사(秋史) 현판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오는 길에 효선이 치자묘목을 몇 그루 산다. 바람은 잘 쐬었다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사람들이 좀 야속하고 불쌍하고, 그렇다.
만보(卍甫)가 두툼한 책 세 권을 보내왔다. 평생 한국기독교역사를 공부한 학자로 교수직에서 물러나며 그동안 단행본에 발표되지 않은 글들을 모았단다. 참 많이도 썼구나. 누구 같았으면 손사래를 치며 도망쳤을 주제들인데… 어머니가 고마울 따름이다. (2018. 3. 23)
⎈ 눈 떠 시계를 보니 10시 3분. 그러니까 방금 꾼 꿈은 새벽꿈이 아니라 아침 꿈이다. 한 문장을 번역하는데 내용이 이렇다. “누가 마시고 남긴(누구를 먹이고 남은) 마지막 한 잔(그릇)을 마시게(먹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이 고질(痼疾)에서 놓여나겠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겠지만 꿈에서는 능동과 피동이 한 문장이고 음료와 음식이 한 단어다. 막연하게, 세상 찌꺼기를 먹게 해달라는 기도인가? 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삼십삼 년 동안을 세상에 계셔 벙어리와 소경과 빈천한 사람 불쌍히 여기시던 주가 오늘날 이 고난을 당함은 무슨 연고뇨? …그러나 우리 주님 모든 원수 된 죄인을 위하여 기도하신 말, 아버지여 저들을 불쌍히 보사 저들의 모든 죄 용서하소서.” 요 며칠 이 노래가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려지는 것과 아무래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도 없거니와 하고 싶지도 않다는 거다. 다만 비난하는 자들과 비난당하는 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 세상에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든지 저쪽 아닌 이쪽에 서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내가 나를 욕하고 저주하고 벌주는 이 고질에서 벗어나는 길이 세상의 온갖 찌꺼기를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인가? 왜 스승께서 때리는 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맞는 자에게 네가 이 문제를 풀라고, 열쇠가 너에게 있다고, 하셨는지 알겠다. 왜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고 하셨는지도 알겠다. 그 말씀은 첫째와 꼴찌가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라 첫째가 꼴찌 그러니까 가해자가 피해자라는 그런 말이다.
오랜만에 텔레비전에서 건강한 영화를 본다. 세상이 말하는 ‘실패’를 경험한 음악가가 시골 작은 학교에서 상처 입은 아이들과 합창을 통해 서로를 부추겨주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프랑스 영화다. 제목은 ‘코러스.’ 아이들이 노래를 잘해서 경연대회에 나가 상을 받는다는 번한 스토리가 아니라, 선생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학교 건물은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에 의하여 불에 탄다. 그래서 오히려 뒷맛이 개운하다. 기억에 남는 대사는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온갖 못된 짓을 서슴지 않고, 학생들을 사랑하는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교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주인공인 음악선생을 해고시키며 그가 말한다. “누구는 악역을 하고 싶은 줄 아는가? 나도 이 짓이 지겹다!” 요즘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렇다,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없으면 ‘코러스’도 없고 아름다운 인간회복도 없고 그에 대한 감동 또한 없는 것이다. 자신의 방화로 불타고 있는 학교를 멀리 뒷산 언덕에서 내려다보던 ‘문제아’의 뒷모습이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토요명상. 반디, 바람빛, 두더지, 신난다, 효선 함께… (2018. 3. 24)
⎈ 목포 한우리교회 종려주일 예배 설교. 귀가 많이 어두워졌다. 설교하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설교시간만 제외하고 계속 몸이 나른하다. 효선과 버스로 다녀옴. 저녁은 중국집에서 용화사 예배 식구들과 프랑스에 산다는 내외 함께 식사. (2018. 3. 25)
⎈ 비슷한 내용의 짧은 꿈 두 장을 연거푸 꾼다. 디아코니아 방 하나를 빌려 잠시 머물고 있는데 그 방을 쓸 사람이 들이닥친다. 밖에서 잠시 기다리게 하고 서둘러 방을 청소한다. 한 언님이 곁에서 돕는 것 같더니 보이지 않고 혼자서 방을 쓸고 있다. 방 안에 있는 기물이라곤 이불 한 장에 방석 두세 장이 전부다. 그런데 웬 머리카락과 과자부스러기 같은 티끌이 쓰레받기로 하나 가득이다. 게다가 아랫목 부근이 덜 마른 시멘트 바닥처럼 물에 젖어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물속에 잠겨있다. 물을 쓰레받기로 퍼내다 말고 잠에서 깨어난다. 이어서 비슷한 내용의 청소하는 꿈인데 이번에는 주인공이 옥(玉)이란 이름의 처녀다. 쓰레받기에 안 보이는 구멍이 있어서 물이 새는 바람에 계속 헛손질이다. 두어라, 어차피 무엇이든 남기며 살게 마련이다. 몸에서 떨어지는 털과 먼지를 어쩔 것인가? 할 수 있으면 뭐든지 덜 가지고 싶었다. 맘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욕심이다. 둬라, 그냥 둬라.
여류(如流) 거사가 송 교수한테 가는 길이라며 잠시 들러 함께 점심식사. (2018. 3. 26)
⎈ 9학년 마음공부. 오늘의 교훈, “Difficulty can be a blessing, if you know how to face it.”(네가 그것을 직면할 줄 알면, 어려움이 하나의 축복일 수 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외면하지 말고 눈을 감지도 말고 맞서 싸우지도 말고 두 눈 크게 떠서 똑바로 보아라. 어려움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작은 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을 발견하고 걸어간 사람들이 세상에 하나둘이 아니다.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낮잠 자는 사이에 효선이 꽃나무 시장을 또 다녀온 모양. 좁은 뜰이 온갖 꽃나무들로 만원사례다. 저러고 노는 것이 효선에게는 행복인 거다. 그러면 되는 거다. (2018. 3. 27)
⎈ 새벽, 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일벌은 일하지 않는다. 일할 줄 몰라서다. 아니, 일하지 않을 줄 몰라서다. 일벌은 다만 저 아닌 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다. 그래서 일벌은 죄를 짓지 않는다. 아니, 죄를 짓지 못한다. 사람은 일을 일삼아 한다. 일하지 않을 줄 알아서다. 사람은 제가 제 일을 하는 줄 안다. 그래서 죄를 짓는다. 너는 일벌이 아니다. 사람이다. 어쩔 수 없는 네 운명이다. 하지만 사람이기에 네가 지은 죄의 고치에서 해방되어 푸른 자유의 날개로 날 수 있다.
사람이 일하려고 태어난 게 아님은 분명하다. 일하면서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기에 사람의 길이 있다. 사람이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살면서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마침내 제가 참으로 누구인 줄을 깨치려고, 태어난 것이다.
오늘 옮긴 틱낫한 스님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반갑다. “…베트남에는 노란 꽃이 피는 자두나무가 있다. 수명이 무척 길다. 때로는 기둥이 뒤틀리기도 한다. 음력 설날이면 꽃이 잔가지들에서만 피는 게 아니라 몸통에서도 핀다. 내가 그 나무 같다는 느낌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 저 깊은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돋아난다. 일부러 힘들여 수련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데 저절로 생겨난다. 씨를 심고 물을 주면 싹이 돋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 늙은 나무가 꽃을 피우는 게 아니다. 그 몸에서 꽃이 피어나는 거다.
저녁나절, 가로등이 눈을 껌벅거릴 시간에 동천을 걷는다. 조선의 선비 김굉필이 이곳으로 유배당해서 머물던 자리에 쌓았다는 임청대(臨淸臺). 오백 살 늙은 느티나무는 우람한 몸통으로 잔가지마다 바늘 같은 잎을 내고 그 곁의 벚나무도 겁 없이 화사한 꽃을 뿜어내는데 그 아래 초라한 나그네는 까닭 없이 마냥 슬프다. (2018. 3. 28)
⎈ [새벽 생각] ‘지금 여기’는 네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네가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는 아무데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는,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무엇의 이름이다. 지금 여기에 다른 이름이 있다. 허공이다. 무한(無限) 영원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를 사는 게 영원한 삶 곧 영생(永生)이다. 그에 대하여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미 품에 안긴 자식이 어미를 부르듯이, 그를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러므로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깨끗이 승복하는 것이다.
7, 8학년 마음공부 마치고 두더지 안내로 구례 우천(愚天) 와가(瓦家) 방문. 경일 신부 동행. 함께 식사하고 차도 대접받고 돌아옴. (2018. 3. 29)
⎈ 목욕탕에 다녀와서 손톱발톱을 깎는데 어렸을 때 커다란 가위로 손톱을 잘라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 손가락에 길고 검은 털이 몇 가닥 나 있었지.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면 한 번 무섭게 책망하고 두 번 다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던 우리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실감이 번갯불처럼 몸을 후린다. 그렇다! 무조건 나를 받아주시는 어떤 이가 내 안에 계신다. 무엇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나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분이 바로 나인 ‘나’다! 나는 그 ‘나’를 등지거나 떠날 수 없다. 그 ‘나’의 다른 이름이 허공, 사랑, 아름다움, 어머니, 아버지…한님이다. 그러니 괜찮다, 아이야, 모든 것이 괜찮다!
국민북스 사장과 직원 그리고 국민일보 기자가 책 몇 권 들고 내려옴. 효선이 아침부터 장만한 점심 밥상에서 함께 환담 나누며 점심식사.
저녁나절, 보성 불이학당 다녀옴. 지난번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노자의 가르침이 왜 쉬운 건지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게 왜 어려운 건지 뭐 이런 얘기 좀 나누고 밥과 집에서 담근 막걸리를 같이 나눈다. 원주 류하와 두더지 동행. (2018. 3. 30)
⎈ [새벽 생각] 침대에 발의 길이를 맞추는 신화의 주인공이 있다. 침대 길이에 발을 맞추어라. 그게 원칙이다. 물건의 좋고 나쁨을 물건에 두지 말고 네 마음에 두어라. 그게 맞다. 물건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네 마음이다. 네 마음에 좋게 보이면 좋은 것이고 나쁘게 보이면 나쁜 것이다. 좋은 세상에 사느냐 나쁜 세상에 사느냐, 그걸 결정하는 것도 세상이 아니라 너다. 그러니 알아서 해라. 질문, 무엇을 좋게 보고 싶은데 그게 되지 않고 나쁘게만 보인다. 어쩔 것인가? 답, 그래서 네 마음을 다스리라는 거다. 마음이 마음대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어쩔 것인가? 마음이 어떤지는 마음이 아니라 눈에서 오는 것이다. 네 눈을 비우고 그 자리에 한님의 눈을 심어라.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수술을 하는 건 환자가 아니라 의사다. 하지만 의사한테 자기 눈을 맡기지 않는 환자에게는 한님이 자기 눈을 이식해줄 수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실히 한님께 눈을 맡기는, 그게 전부다.
서울에서 성일 내외와 하균 내외가 내려왔다. 반갑다. 함께 토요명상 마치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보니 자정이다. 만날수록 고마운 벗들 덕분에 결혼 5주년 기념일을 잘 보낸다. 세월 참 빠르다. (2018. 3. 31)
⎈ 서울 팀과 함께 여수 돌산 ‘차(茶) 가든’이라는 다원(茶園) 방문. 넓은 차밭과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어놓았다. 구석구석 착하게 쌓여진 돌담들이 지난 15년(?) 세월의 인고와 정성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이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말소리 중간마다에 나무와 돌탑과 피는 꽃과 지는 꽃들을 보듬은 묵직한 침묵의 소리가 선명히 들린다. 바비큐 파티에 노래까지 하면서 놀다보니 시간이 벌써 3시다. 서둘러 용화사로… 소현과 보리밥 둘이 기다리고 있다. 고단하다. 보리밥이 우려 주는 차 마시며 잠시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기도하고 마친다. 오늘이 부활절, 오가는 길에 화사한 벚꽃이 만발이다. 내일모레쯤이면 엄정 집 뒤란 벚꽃도 피어나겠지. (2018. 4. 1)
⎈ 성일 내외가 하룻밤 더 자고 돌아간다. 둘의 앞길에 주님의 가호가 있기를, 아니, 그것을 그들이 순간마다 실감하며 살기를 기도드린다.
삼인의 승권 가족이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소식이다. 잘했다고, 축하한다고 말해준다.
미류와 하얀이 효선과 앙상블을 이루어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는데 참 좋다. (2018. 4. 2)
⎈ 새벽에 틱낫한의 유명한 글을 옮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따뜻한 글을 옮기면서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은 것일까?
“하루는 벽에 그림을 걸고 있었다. 왼손으로 못을 잡고 오른손으로 망치를 들었다. 그날 나는 마음을 잘 챙기지 못했고, 그래서 못 대신 손가락을 망치로 쳤다. 왼손이 망치를 맞고서 아팠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오른손이 망치를 놓고는, 마치 저 자신을 돌보듯이, 부드러움과 자비로 왼손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지 않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내 오른손은 저한테 하듯이 왼손한테 한다. 내 오른손은 왼손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받아들인다. 그녀가 왼손을 돌보기 위하여 어떤 일도 마다지 않는 건 그래서다. 내 왼손은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오른손한테, ‘오른손아, 왜 나를 때리는 거냐? 네가 나한테 잘못했다. 망치를 이리 다오. 내가 정의를 실천해야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왼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왼손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지혜가 있다. 비(非)분별의 지혜다. 우리에게 이런 지혜가 있으면 우리는 고통당하지 않는다. 내 왼손은 내 오른손과 싸우지 않는다. 두 손이 어울림과 이해를 함께 즐긴다. 한 손이 아플 때 두 손이 아프다. 한 손이 행복할 때 두 손이 행복하다.”
오른손을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저의 의지도 노력도 아니다. 왼손이 타자가 아니라 자기라는 진실을 제가 아는지도 모르면서 아는 그 ‘앎’이다. 하지만 저쪽과 이쪽의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라, 저쪽에서 응해주지 않으면 이쪽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끓는 물에 돌과 달걀을 넣었을 때 달걀은 익어도 돌은 익지 않듯이. 그래도 이쪽은 저쪽을 탓하지 않는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마음이 아파도 기다린다. 사람은 돌이 아니니까.
9학년 마음공부. 오늘의 문장, Keep your heart carefully, for the springs of life flow from it. (마음을 잘 지켜라. 삶의 샘물들이 거기에서 흘러나온다.) 구약 잠언에 있는 말씀이다. 어젯밤 몰래 외출한 사건을 두고 이야기 나눔.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말해봤자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단다. 그건 어디까지나 너희 추측이라고, 허락할지 안 할지 알아보지 않고서 어떻게 아느냐고, 다음엔 그러지 말라고, 차라리 정직하게 당당하게 규칙을 어기는 것이 자기와 남을 속이는 것보다 잘하는 짓이라고… (2018. 4. 3)
⎈ 낮에 인도 영화 한 편을 중간부터 본다. 이런 대사가 있다. “그림자는 실물을 떠나지 않는다. 영원히 함께 있다, 말없이…” 그림자에 말이 없다는 말이 가슴을 슬쩍 건드린다. 그렇다, 그림자는 말이 없다. 보이는 나는 분명 보이지 않는 나의 그림자일 터인데 이토록 말이 많은 이 물건은 대체 무엇인가? 세월과 함께 말이 사라져가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틱낫한 번역 계속. 이제 거의 끝나간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한 호흡 또 한 호흡 숨 쉬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더 오를 데가 없더라는, 포터 없이 산소마스크 없이 히말라야 무슨 봉(峰)에 올랐다는 한국인 노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2018. 4. 4)
⎈ 7, 8학년 마음공부. 주미가 할아버지 모시러 왔다면서 가자고 한다. 물어본다, 할아버지가 안 간다고 하면 어쩔래?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아이들한테 가서 할아버지 안 오신다고 말해요. 그래. 그게 네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네 힘으로 할아버지를 끌고 갈 수도 없지만 네가 할아버지보다 힘이 세어서 그런다고 해도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어쨌든 지금 네가 할아버지를 교실로 가게 할 수는 없다. 맞지? 예. 그러니 네 힘으로 안 되는 일에 괜히 힘쓰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란 말이다. 앞으로도 살다보면 난처한 일이 생길 텐데 그럴 때 정신 차려서 네가 할 수 없는 일은 깨끗이 포기하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렴. 반드시 있다. 알겠니? 주미가 고개 끄덕이며 환히 웃는다.
석류나무 묘목이 자란다. 스케치하고 제목을 석류미인(石榴美人)이라 붙인다.
흑판에 날아가는 새 한 마리 그려놓고서, 자기는 새를 그린 게 아니라 허공을 그린 거라고 말했다는 최걈 트룽파의 일화가 생각난다.
아민이가 제 어미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떨어져 병원 가는 길이란다. 어미가 새끼보다 더 놀라서 전화 목소리가 떨린다. 괜찮을 거라고, 천사가 지켜주니 괜찮을 거라고 말해준다. 밤늦게 연락이 왔다. 병원에서 사진 찍었는데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이젠 울지도 않고 잠도 잘 잔단다. 그저 모든 것이 고마울 따름. (2018. 4. 5)
⎈ 틱낫한 번역 마침. 덕분에 두어 달 행복했다. 그의 걷기 명상만큼 더디고 착실하진 못했겠지만, 서두르지 않고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걷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다.
…형벌이 범죄의 유일한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법을 어긴 이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훨씬 효과적이고 자비로운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한번은 미국 조지아 주 잭슨의 대니얼이라는 사형수에게 격려의 편지를 쓸 기회가 있었다. 그는 열아홉 살에 범죄를 저질렀고 그 뒤로 십삼 년째 감옥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대니얼에게 손으로 쓴 짧은 편지를 보냈다. “당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분노, 증오, 절망에 사로잡혀서 신선한 공기, 푸른 하늘, 향기로운 장미를 만나지 못하고 있지요. 그렇게 다른 종류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자비수련을 하면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볼 수 있고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무슨 일을 하면 그만큼 당신이 자유로워진 거예요. 자비로 보내는 하루가 자비 없이 보내는 백 일보다 값진 겁니다.” ―Thich Nhat Hanh, At Home in the World.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 형이 선고되었다. 가슴이 아리다. 눈먼 증오와 분노로 땅이 너무나 살벌해, 어디를 발 딛고 서야 할지 모르겠다. 레미제라블! (2018. 4. 6)
⎈ 오늘부터 내일까지 전주 고백교회 잔치에 초대받아 참석한다. 속으로 일깨운다. “너, 내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잊지 마라.” 예, 주인님. ‘한몸평화문화관’이 오늘 문을 연다. 많은 이들이 축하하러 왔다. 한 마디 하라고 해서, 우리 모두 하늘의 심부름꾼임을 잊지 말자고, 모자라지도 않게 넘치지도 않게 맡겨진 일 잘 해보자고… (2018. 4. 7)
⎈ ‘한몸평화문화관’ 숙소에서 자고 어느 집에 초대받아 아침 식사. 창밖으로 모악산이 병풍처럼 펼쳐 보이는데 장관이다. 단, 제일 높은 봉을 무슨 거창한 안테나 같은 것들이 창날처럼 덮고서 하늘을 찌르는 게 눈에 자꾸 거슬린다. 결국, 외면하고 만다.
예배 마치고, 점심 먹고, 아침에 한 목사와 동행 몇이 차로 올랐던 완산을 걷기 명상으로 다시 오른다. 여기저기 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을 기리는 비석들이 서 있다. 자세히 비문을 읽어본다. 한글로 적혀 있어서 끝까지 읽을 수 있다. 대개 무엇과 싸워서 이기거나 진 사람들이다. 아무하고도 싸우지 않으려다가 망한 인간들은 역사에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향아(向我)가 감방에서 어저께 나왔다며 새벽차로 내려왔다. 많이 잘 배웠단다.
오후 3시, 대전 광주 전주의 세 고백교회가 본회퍼 기일을 맞아 한 자리에 모여 잔치를 연다. 사람들이 한반도 통일을 이야기한다. 듣고 있는 데 누가 속에서 묻는다. 너도 한반도 통일을 소원하느냐? 아닙니다. 언제 한반도가 갈라졌나요? 갈라지지 않은 무엇이 하나 되기를 어떻게 원합니까? 소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 그러면 됐다. 그래도 전에 묘향산 한번 가보고 싶다지 않았느냐? 그랬지요. 지금도 가고 싶은 건 여전합니다. 그런데 분단의 철조망이 가로막아서 못가지 않느냐? 할 수 없지요. 제가 바람이 아니라 사람인 걸 어쩝니까? 감수해야지요. 괜찮습니다. 사람이 저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요? 꽁치가 그물을 원망하지 않는 그만큼 저도 철조망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함께 성경을 읽는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누가 속에서 묻는다. 그럼, 우리를 모욕하고 박해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하는 저들은 어찌 되는 겁니까? 왜 묻는 거냐? 그들이 딱하지 않습니까? 네 마음이 그들을 감싸는구나? 여기까지 네가 왔구나? 됐다. 물으니 답해주마.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끼리 하는 말이다. 그들에 대하여도 염려할 것 없다. 그들은 ……… 알아들었냐? 때가 되면 이 말이 참말인 줄을 모두 알게 되리라. 아멘. 지는 꽃잎이 바람에 휘날린다.
저녁 먹고 보성의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는 한 목사 차를 편승하여 귀가. (2018. 4. 8)
⎈ 오랜만에 난봉산성에 오른다. 천천히 걷는데도 워낙 길이 가파르니 숨이 차오른다. 문패 없는 무덤가에 누워 잔가지들 사이로 하늘을 본다. 눈물겹게 아름답고 슬프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린다. 모르긴 하거니와 지구상의 발 달린 동물들 가운데 아마도 인간만이 산 정수리에 발 딛고 올라서는 무례를 범할 것이다. 내려오는데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가 보인다. 무슨 산악동지회에서 만든 리본이다.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자연이 살아야 인간이 산다. …가져온 쓰레기는 반드시 가져갑시다.” 웃음이 뒷목을 친다. 아무개가 침묵에 대하여 책을 쓴 것도 이런 걸까? 매고 뒷산으로 내려오다가 중앙교회 정원 문이 열려있기에 들어간다. 영감 혼자서 높은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나무를 다듬고 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며칠 전 효선이 저 영감을 만났던 모양이다. 잘라놓은 목련 가지가 예뻐서 달라고 하니 아까워하면서 준다. 효선이 영감에게 정원의 꽃나무들 앞에서 연주해주겠다고 약속했다던데 가까운 날에 한번 같이 가야겠다. 가서 정원에 피어있는 온갖 꽃나무들과 함께 기도드려야겠다, 말없이… 모든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위하여. (2018. 4. 9)
⎈ 새벽꿈에서 부피는 옛날 잡지 ‘주부생활’만큼 두툼한데 내용은 한두 줄로 옮길 수 있는 논문을 읽었다. 하늘 성경이 땅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중대한 오류가 발생했다. 하늘 성경 원문에는 “나로 말하다”인데 그것이 “내가 말하다”로, 그러니까 주어에 붙는 토씨 ‘…로’가 ‘…이’ 또는 ‘…가’로 바뀌는 중대하고 불가피한 오역이 있었다. 지금 땅에서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여자가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고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지라, 여자가 열매를 따서 먹고 곁에 있는 남편에게 주니 그도 먹었다.”로 되어 있지만, 본디 하늘 성경은 “여자로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고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지라, 여자로 열매를 따서 먹고 곁에 있는 남편에게 주니 그로 먹었다.”이다. “네가 그를 쳐서 그가 다쳤다”는 땅의 문장을 하늘 문장으로 옮기면 “너로 그를 쳐서 그로 다쳤다”가 된다. 필자를 알 수 없는 논문이 길고 방대한 양의 예문(例文)들을 열거했지만 어디를 읽어도 내용은 같았다. 하늘에서는 “나로 너를 먹여 너로 배부르다”인데, 땅에서는 “내가 너를 먹여 네가 배부르다”이다. 논문의 결론인즉 우리가 쓰는 모든 말에서 주어 토씨 ‘…가’ 또는 ‘…이’를 ‘…로’로 환원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면 거기가 바로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언젠가 꿈에 하늘나라라는 데서 사람들이 쓰는 말에 능동태가 아예 없고 모든 동사가 수동태로만 되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오다.”가 아니라 “내가 와지다.” “그가 가다.”가 아니라 “그가 가지다.” 이런 식으로 동사가 수동태였다. 그런데 오늘은 동사는 그냥 두고 주어 토씨만 ‘…로’로 통일되었다.
움직임은 있는데 움직임의 주체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주체가 없는 건 아니다. 모든 움직임의 주체가 동일하다. 모든 움직임이 그 한 주체에서 나온다. 다만 그 한 주체가 말로 표현되지 않을 뿐이다. 땅 언어와 하늘 언어를 섞어서 억지로 말하면 이렇게 되겠다.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물으시기를 네가 너로 어디 숨었느냐고 하신다.” 이 문장에서 ‘하느님이’와 ‘네가’를 지우면 하늘 언어로 되고, ‘하느님으로’와 ‘너로’를 지우면 땅 언어로 된다. 하늘 언어로는 묻는 이와 답하는 이가 같다. 땅 언어로는 묻는 이와 답하는 이가 다르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땅이고, 나로 너를 사랑하니까 하늘이다. 내가 나로 너를 사랑하면 거기가 바로 지금 여기 우리들이 사는 하늘땅이다.
누가 나로 너를 사랑하느냐고? 묻지 마라. 답해줄 말이 없는 질문이다. 도가도(道可道)면 비상도(非常道)라, 말로 할 수 있으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라 하지 않던가?
지금 나로 이런 꿈을 꾸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건 누구인가? 지금 너로 이 글을 읽고 있는 건 누구인가? 묻지 마라. 답해줄 말이 없는 질문이다. …아니, 물어라. 끊임없이 물어라. 물음이 답이다. 사람아, 사람아, 사랑뿐이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사랑뿐이다.
소리샘이 심하게 다쳐 병원 신세를 지는 모양이다. 한님이 지켜주시기를 기도드린다.
9학년 마음공부. 오늘의 문장, To grow in spirit is the best help you can give others. (영으로 성장하는 것이 네가 남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다.) 사람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모두 영(정신)에서 나온다. 어떤 사람이 영으로 성장하는 것이 그가 남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다. 어떻게 하면 영으로 성장할 것인가? 몸이 성장하는 법과 동일하다. 영양가 있는 음식(건강한 독서, 영화 보기 등)을 섭취해라. 뭐 이런 얘기… (2018. 4. 10)
⎈ “정원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 존 신부가 말을 이었다. “나는 꽃 한 송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지금 이 순간을 껴안을 수 있다. 꽃이 아름답고 싱싱한 그만큼 꽃의 생명은 섬세하고 가냘프다. 아름다움은 본성이 여리다. 거칠게 만지면 부서지고 세게 움켜잡으면 꽃잎이 떨어진다. 가벼이 만지고 세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금세 가버린다. 들의 꽃을 경험코자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또는 그게 왜 거기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잡아 뜯거나 쪼개지 말아야 한다. 우리네 삶도 그와 같다. 누가 우리의 삶을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으며 그 다양한 모습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금 이 순간에 맛보고 느낄 수 있으며 꽃잎처럼 뜯어내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헨리 나우웬, ‘식별’)
무엇을 머리로 알려니까 잡아 뜯고 쪼개고 하는 거다. 그래서 뭘 좀 알는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그 무엇은 죽는다. 산 것을 죽여서 안다는 게 무슨 미친 에고이즘인가? 더는 그러지 않으리라. 좋다, 몰라도 좋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고 보리라. 함께 살자. (2018. 4. 11)
⎈ 효선이 새벽차로 서울 가는 길 배웅하고 다시 잠들어 꿈을 꾼다. 번잡한 장터에서, 누구한테 얻었는지 샀는지, 잘 신어지지 않는 구두를 겨우 신고서 이만큼 오는데, 누가 말하기를, 어서 장터로 가보라고, 거기 당신이 구두 신느라고 자기 물건을 건드려 화가 꼭지까지 오른 노인이 소리 지르고 있다고, 가서 사과하고 변상하라고, 그런다. 돌아가 보니 과연 한 늙은이가 잔뜩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런데 화를 내는 상대가 단발머리 계집아이다. 다가가서 사과하려고 하지만 늙은이가 계속 화를 내고 있어 도무지 사과할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 저 늙은이 좀 진정되면 사과하고 변상할 것 있으면 변상하리라 생각하다가 꿈에서 깨어나는데 등 뒤에서 한 마디 화살처럼 던진다. 가서 젊은것들한테, 제발 나처럼 추하게 늙지 말라고, 마지막이 비참하면 몽땅 비참한 거라고, 이 말 좀 전해라! 꿈에서 깨어나 생각한다. 글쎄, 젊은것들이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내 말을 들을까? 듣거나 말거나 말은 하자, 자네들도 장차 늙을 텐데 깨끗하게 늙으라고. 한 인간이 어떻게 늙는지,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사회의 문제라고. 세월은 유수(流水) 같아 금방이라고.
7, 8학년 마음공부 마치고 보리밥과 점심하고 무지개 ‘각별한 마음’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돌아오니 잠이 쏟아진다. 낮잠에도 꿈은 찾아온다. 어느 항구도시 신부들이 피신을 하는데 이유인즉 교회에 앙심이 있는 폭력배가 탈옥하여 사제들부터 무차별 공격한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 신부만 도망하지 않고 사제관에 태연히 앉아 있다. 그에게 묻는다. 자네는 왜 몸을 숨기지 않는가? 그가 답한다. 그럴 이유도 없지만 사람이 자존감이라는 게 있는데 어찌 한낱 깡패를 무서워한단 말이오? 내 평생 어디서나 살아남을 궁리 하지 않고 살았소. 그게 우리 스승 예수의 길 아니오? 박수치며 큰소리로 웃다가 잠에서 깨어난다. 통쾌한 꿈이다. 살고자 하는 자 죽고 죽는 자 산다는 말씀이 저 멀리 어디에서 후렴처럼 들려온다. ‘죽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죽는’ 자다. 달리 말하면 사랑이 전부인 사람이다.
밤 여덟시, 효선이 서울에서 볼일 마치고 돌아온다. 참 빠른 세상이다. (2018. 4. 12)
⎈ 아침부터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목이 답답하고 잔기침이 난다. 효선이 도라지청과 호두 기름을 주면서 먹어보란다. 목이 부드러워지고 기침도 좀 잦아드는 것 같다. 하루 푹 쉬어야겠다. 산책을 해볼까? 아서라, 황사(黃砂) 심한 날이란다.
부석부석 부은 얼굴로 온종일 잔기침하는 이 물건은 누구인가? 또는 무엇인가? 부석부석 부은 얼굴로 잔기침하는 이 물건은 아니다. 눈은 눈을 보지 못한다. 부석부석 부은 얼굴로 잔기침하는 이 물건으로 부석부석 부은 얼굴로 잔기침하는 이 물건을 바라보는 건 누구인가? 또는 무엇인가? 없는 건 아닌데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2018. 4. 13)
⎈ 새벽꿈에, 김일성 주석이 허름한 여관 이층에서 몇 사람과 대담하는 자리에 합석했다. 이십대 청년 아무개가 좌중의 최연소자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통일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가 아니라, 어째서 통일되지 않을 수 없는지, 무엇이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지에 대하여 아무개가 말한다. “현재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 그건 전쟁을 경험한 구세대의 가슴에 아직도 남아있는 두려움이오.” 김 주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적어도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안다는 점에서 요즘 정치배들에 견주어 한참 어른이다. 그의 귀에 대고, 사람 말을 경청해주어서 고맙다고,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고, 속삭여준다. 그가 쾌활하게 웃는다. 시골 장터에서 김 주석이 시루떡 한 덩이를 움켜잡는다. 놀란 얼굴의 떡 장사 아주머니에게 이분이 김일성 주석인데 떡이 먹고 싶은 모양이라고, 나중에 계산할 테니 한 덩이 달라고 눈을 껌벅이며 말하는 사이에 그가 저만큼 걸어간다. 그리고 장터 변두리에 서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떡을 던지다시피 내어준다. 그 뒷모습에서 강한 분노가 느껴진다. 어째서 저기 굶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 떡이 쌓여있느냐는, 뭐 이런 망할 놈의 세상이 다 있느냐는, 그런 분노였다. 대형마트에 갈 적마다 비슷한 느낌이었기에 동감되는 바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를 분노의 힘으로 한 편을 강탈하여 해결할 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그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뜬금없이 우락부락한 경호원들이 달려오며 김 주석이 죽었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가 죽었다는 건 이 땅에서 낡은 세대가 사라져간다는 희소식이다. 저 옛날 가나안에 들어간 이들도 이집트를 떠날 때의 구세대가 아니라 해방의 멀고 험한 여정에서 태어난 신세대였다. 이 땅의 통일도,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이 아니라, 그것을 가로막는 세력의 소멸로 말미암아, 막힌 둑이 터지면 다시 흐르는 강물처럼,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할 수 없다, 때를 기다릴밖에. 하지만 얼마나 큰 복음이자 위안인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이여! 더 이상 어른들 말에 무턱대고 따르지 않는 철부지 아이들아, 너희야말로 희망이다. 너희를 믿는다. 너희가 밝힌 가녀린 촛불의 꿈을 믿는다.
토요명상. 천지인 부모들과 함께. (2018. 4. 14)
⎈ 용화사 예배. 여수에서 온 노승(老僧)이 주석(主席)에 앉아 차를 돌리며 말하는데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겠다. 두더지, 반디, 소현, 보리밥, 신난다, 효선이 까르르 웃는 걸 보면 우스운 얘기를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개는 혼자서 완전 먹통이다. 그래도 재미는 있다. 궁금하지도 않다. 중간에 두더지가 은근슬쩍 이야기 마당 주석 자리를 탈환(?)하여 한 목소리로 성경을 읽는다. ‘성령에 이끌리는 삶’에 대하여… 바다의 배가 풍랑에 흔들리면서도 제 길을 가듯이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엔진을 꺼뜨리지 말고 우리 안에 있는 나침반을 지켜보면서 갈 수 있는 만큼, 오직 사랑으로, 겁내지 말고, 함께 가자고… (2018. 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