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주와 아버지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시군요!
저는 현재 부성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부산노인교육연합회 사무차장 여지백입니다.
부성고등학교 설립자 한효섭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으로서 자신을 중상모략하고 돌팔매를 하는데도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어 안타까운 심정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1. 설립자 한효섭은 1993년 공금횡령과 개인적인 선거운동에 교사를 동원한 혐의로 구속기소 운운하는데…….
1993년경 공금횡령이 아니라 이사장과 학교장과 서무과정이 학교비를 부산교육청 승인없이 신입생 모집 경비와 시설비에 사용하였던 것이 공금유용이며 정확히 말해서 학교비전용입니다. 그것도 직접 관계가 없는 설립자는 아내가 이사장이기 때문에 자신이 아내와 학교장을 대신하여 책임진 것입니다. 그 당시는 공금유용도 법률적 용어로 공금횡령이라고 하니 요즘은 CJ그룹의 변호사는 수천억을 유용하고도 회사를 위하여 사용하였다고 하여 횡령이 아니니 죄가 안된다고 검찰과 법리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1993년경에는 부성고 이사장은 윤정빈이고 교장은 송병한이며, 서무과장은 신인범이고 경리주임은 한국위였으며, 1990년경에 교사들이 신입생모집을 위해 사용한 경비 충당을 위해 서무실에서 1억 60만원을 학교비에서 지출한 것을 알고 1991년 설립자(한효섭)가 1억 2천만 원을 입금하였으나 2년 후인 문현여상 전교조가 자신들이 학생모집에 직접 사용하고도 재단비리 운운하면서 약 7개월 동안 학생들을 선동하고 농성하여 언론을 통해 왜곡, 과잉, 허위 보도케 하고 부산교육청과 부산지방검찰청에 진정하여 양OO검사가 교육청 승인 없이 유용하였다고 처벌한 사건이 소위 전교조가 말하는 부성고 재단비리 핵심내용입니다.
그 당시 여론이 악화되자 여론재판을 받은 것이며, 담당검사가 말하기를 “학교비 1억 60만원을 변제해도 유용이며, 이사장이나 교장이나 서무과장이 책임져야 하지만 전교조의 농성과 언론보도로 인해 시민여론이 너무 안 좋으니 윗선에서 이사장이나 설립자 중 한 사람을 구속시켜라고 하는데 누가 책임을 지겠느냐?”고 묻기에 “이사장인 아내를 구속시킬 수 없으니 설립자인 내가 대신 책임을 지겠다.”고 하자 양OO검사는 양검사 자신이 직접 조사한 진술서를 버리고 수사관에게 다시 진술조사를 받게 하여 모든 것이 설립자가 시켜서 했다고 허위 진술하여 이사장인 아내와 송교장 대신 설립자가 구속된 사건입니다.(그 당시 유일하게 1억 60만원이나 보도한 신문은 동아일보 뿐임)
2. 개인적으로 선거운동에 교사를 동원한 혐의를 운운하는데…….


설립자 한효섭은 1988년은 제13대 총선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으로서, 12.12주역 허OO를 낙선시키고 문민정부의 탄생을 바라는 국민의 여망과 김영삼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으로 4대째 살아온 자신의 지역구 부산 동구를 노무현에게 후보를 양보하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켜 국회에 입문하게 하고 문민정부 탄생과 더불어 사실상 정계에 은퇴하였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선거운동에 교사동원을 운운하며 구속되었다고 너무나 유치한 중상모략입니다.
3. 무자격교장을 운운하는데…….
한효섭은 2009년 불순세력과 교육감의 압력으로 교장직무정지명령을 받았으나 ‘직무정지명령 무효소송’을 제기하여 부산지방법원동부지원(판결서 2010가합1240), 부산고등법원(판결서 2010나9696), 대법원(판결서 2011다55030)에서 한효섭이 모두 승소하였습니다.
4. 전교조 교사 4명 해임, 비전교조 교사 2명 해임 운운하는데…….
전교조 교사 7명이 최부야교장에 의해 대법원 판결에 의해 해임 확정되었으며, 비전교조 교사가 해임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2009년에 한효섭설립자가 학교장으로 취임하여 대법원에서 해임 확정된 교사를 제외하고는 재판계류중인 교사는 한효섭교장이 재단이사들을 설득시켜 모두 복직시켰고 일부는 명예퇴직하고 현재에도 배창락, 고창완, 최홍제 선생님들은 잘 근무하고 있으며, 특히 해임되어 복직된 배창락교사를 생활지도부장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5. 1993년 부성고 비리사건의 원인은?
경제성장과 산업발달로 인하여 81학급 대규모 문현여자상업전수학교에 지방학생이 응시하는 신입생이 없어 부득이 24학급으로 감소되는 폐교 위기에 처하자 문현여자상업고등학교인 정규학교로 변경인가를 받는 과정에서 교직원 130여명이 과잉교원으로 60여명의 교직원이 감원의 위기에 봉착하자 자신의 신분을 보장 받기 위해 교협이라는 불법단체를 만들어 학생을 선동해 약 7개월간 농성을 하면서 설립자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는 점을 악용하여 설립자 한효섭을 타깃으로 재단을 매도하고 비교협교직원 27여명을 쫓아내는, 교사가 교사를 쫓아내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6. 설립자 한효섭 친일파 운운하는데…….


한효섭이 1970년도에 설립한 한얼노인대학 입학식과 졸업식은 물론 모든 행사에서 애국가 4절까지 부르게 하고 조국수호회를 창립하여 잃어버린 영토와 역사를 찾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국가관과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이며, 현재 본적은 경상북도 울등도 울릉읍 독도리 30번지로 되어있으며, 나아가 본적을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마도동 1번지로 옮기려고 노력한 사람이 설립자 한효섭입니다.
한효섭은 19세 때 군사독재정권 치하에 암울했던 시절인 1967년에 진보혁신계의 거두이며 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박사의 국회의원 지역구인 신민당 부산 동구 선전부장으로 정치에 입문했고, 그 당시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을 범일동, 서면, 남포동 등지에서 배포하다 경찰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민민학(민주민중학생연맹)과 민중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민중당가 등을 작사하였고 민추협(김영삼, 김대중 설립) 운영위원으로 민주화운동을 하였던 민중과 서민을 위해 헌신한 민중의 파수꾼입니다.
7. 부성고 건학이념은 한얼정신으로써 한민족정신과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으로 평생교육과 중등교육을 통하여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사랑과 열정으로 모두가 행복한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하는 창조적 리더십을 가진 세계인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지금 민주니, 종북이니, 친일파니 하는 사람들은 1960년대, 1970년대 그토록 어렵고 암울했던 시절에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8. 한효섭은 1965년 19세 때 한얼경로교실을 시작으로 1970년 24살 총각 때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과 자신의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바쳐 불우청소년 학교인 한얼재건학교(현, 부성고등학교)와 한국 최초의 노인대학인 한얼노인대학(현재 운영 중)을 설립, 운영하면서 청소년 교육과 노인공경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1974년 부터 학교장으로 재직했을 때 받은 봉급 전체를 학생장학금과 교직원 해외 연수비와 학교시설비를 위해 학교에 반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얼장학회를 설립하여 미애원 고아원과 초, 중, 고, 대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1977년에는 한국 최초로 무료골목유치원을 부산시내 13곳에서 운영하였으며, 그 졸업생 중 한 사람이 연예인 신봉선입니다.


9. 한효섭은 자녀결혼식 때에도 부조를 받지 않았고 받은 돈은 감사편지와 함께 정중히 되돌려 주었습니다.
10. 한효섭은 동의대학교 겸임교수와 경성대학교 박사과정 외래교수로 재직하면서 받은 봉급 전체를 학생장학금과 노인교육복지기금으로 기부하였습니다.
11. 한효섭은 자녀들이 회갑잔치를 한다는 것을 사양하고 대신 이웃노인 50여명을 초청하여 경주둔지로 관광시켜드리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그 후 계속하여 노인에게 사랑의 쌀 나누기 행사를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12. 한효섭은 국민연금전액과 국회의원연금전액을 학생장학금과 노인교육복지기금으로 기부하고 있습니다.
13. 한성주 역시 대학 1학년 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불행과 가정이 무너져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가정을 일으키겠다는 신념으로 94미스코리아에 참가하였고, 10여년을 소녀가정 역할을 하면서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감수하고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는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언젠가는 딸을 키우는 부모가 될 것인데 더이상 한성주와 가족들과 한성주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