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빴던 지옥의 3주일, 시계를 되돌려보다
"400억 달러면 살립니다" 하룻밤 지난 후 "아니, 700억 달러…" 월스트리트 '재앙의 재구성'
지난 3주 동안 월가는 뿌리째 흔들렸다. 100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한 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위기는 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위기가 닥치면 모든 문제의 본질, 그리고 모든 숨은 이해관계가 짧은 시간에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인간 드라마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미국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긴박했던 재앙의 3주. 그동안 미 월가와 정부의 거물(巨物)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 FT, 포천(Fortune) 등 해외 유력지의 보도를 종합해 구성해 본다. 이들 외신은 많은 핵심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헨리 폴슨(Paulson·62) 미 재무장관:
최악의 결혼 기념일… 오믈렛을 삼키다
지난 9월 6일 워싱턴. 139년 역사의 미 재무부 빌딩 채광창 위로 태풍 한나가 폭우를 쏟아붓고 있었다.
폴슨 장관은 토요일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전 7시에 출근했다.
그는 이날 하루종일 전화를 돌렸다. 거대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구제대책을 가다듬고 있던 그는 마지막으로 정치인들에게 협조를 당부하고 있었다. 그는 존 매케인(Mccain) 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세라 페일린(Palin) 부통령 후보, 낸시 펠로시(Pelosi) 하원의장과 오래도록 통화했으며, 부시(Bush) 대통령과는 두 차례 통화했다고 포천은 전했다. 전날 저녁에도 그는 버락 오바마(Obama)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전화에 잠을 깼다. 두 사람은 저녁 10시30분부터 1시간 동안 통화했다. 그는 당파를 뛰어넘어 정치인들을 설득하는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날 저녁 그는 39회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부인과 외식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너무 지쳤던 그는 집에서 식사하기로 했고, 부인은 그에게 오믈렛을 만들어줬다.
다음 날 그는 정부가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그가 금융위기의 해결사로 본격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국익(國益) 앞에서는 미국도 시장주의를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역대 어느 재무장관과도 비교되지 않는 막강한 권한, 즉 금융기관의 생사(生死) 여탈권을 쥐게 된다.
그는 한때 월가 최고의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의 수장이었고, 자유시장경제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그가 구제금융을 퍼붓는 소방수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운명의 장난 같다. 그는 1990년대 일본이 금융위기를 겪고 있을 때 일본 친구들에게 "부실 금융기관을 망하게 두지 않는다면 일본 시장과 사회에 거대한 세금을 지우는 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포천이 보도했다.
그는 지금 스스로를 어떻게 동기 부여할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중차대한 일이 일어났는데, 무작정 그들(금융시스템)을 포토맥 강(江)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그는 "나는 시장을 믿는다. 하지만 나는 정부의 역할이 있다는 것도 믿는다"고도 했다.
대학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던 그는 저돌적으로 상대 선수를 밀어붙이는 스타일 때문에 '망치(hammer)'라는 별명을 얻었다. 망치의 영향력은 9월12일 오후 6시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호출에 수백억원대의 연봉을 자랑하는 월가의 자존심 높은 CEO들이 뉴욕시 맨해튼 남단에 있는 뉴욕 연방준비은행 건물 1층 회의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리먼브러더스의 위기를 해결하려고 그가 소집한 긴급대책회의였다. 1999년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사태 이후 1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미국식 관치(官治)의 순간이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이 회의에서 158년 역사를 자랑하는 리먼브러더스의 몰락이 사실상 결정됐다. 폴슨은 "리먼브러더스 문제에 업계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일갈한 뒤 자리를 떴다. 리먼브러더스를 누가 인수하든 정부 보증은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니 알아서 하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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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폴슨 美재무장관 |
정부가 손을 뗀 금융기관을 누가 인수할까? 이 난장판 속에 말이다. 폴슨은 이미 리먼브러더스 청산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다른 금융기관들도 리먼브러더스 꼴이 안되려면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의 신호는 효과를 발휘했다. 제2의 리먼브러더스로 지목되던 메릴린치의 존 테인(Thain) 회장은 다음 날 뱅크오브아메리카와 매각 협상을 벌이게 된다.
9월16일. 미 연준이 금리를 결정하는 FOMC 회의를 개최했고, 금리 동결을 결정했다. 티모시 게이스너(Geistner) 뉴욕 연준 총재는 이 회의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열성 참여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 그는 불참했다.
도대체 이보다 중요한 무슨 일이 있었기에? AIG를 살리는 일이 그것이었다. 거대 보험사인 AIG의 사정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전날 저녁 이 회사의 로버트 윌럼스터드(Willumstud) CEO는 게이스너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400억 달러의 긴급 자금지원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날 새벽 무렵엔 필요한 돈이 700억 달러로 불어나 있었다. 밤새 AIG의 신용등급이 강등돼 여기저기서 자금 상환 요구가 쇄도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해약을 요구하는 보험 가입자들의 전화가 쇄도할 것이 뻔했다.
결국 리먼브러더스에 대해서는 파산을 방치한 폴슨과 게이스너가 그로부터 48시간도 안돼 AIG 문제에 대해선 개입이라는 극적인 'U턴'을 하게 된다. 미 정부는 그날 저녁 8시 AIG에 850억 달러를 지원하는 대신, 주식의 80%를 인수해 사실상 국유화하기로 한다.
AIG는 리먼브러더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괴물'이었다. 무엇보다 이 회사는 CDS(Credit Default Swap·신용파산스와프·용어설명)라는 신종 금융상품을 엄청나게 많이 팔아놓고 있었다. 기업이 파산할 경우 그 위험을 AIG가 대신 떠안아주는 일종의 보험이다. 만일 AIG가 무너질 경우 이 회사가 부도 위험을 떠안아준다는 것을 전제로 형성된 온갖 파생금융상품 시장이 일거에 붕괴될 것이고, 세계 금융시장은 수습 불능에 빠질 수 있다.
자신이 없었던 폴슨은 부하 직원들과 컴퓨터 모델을 놓고 시뮬레이션을 거듭했다. 그는 결국 AIG가 무너지면 리먼브러더스보다 몇 배의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AIG를 살리기로 결정한다. 그의 기준은 결국 '대마불사(大馬不死)'였던 것이다.
그는 애당초 금융기관의 부실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임기 말이고, 야당이 다수당인 의회 상황을 감안해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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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펄드 리먼 회장 |
그러나 AIG 구제 등 잇따른 조치에도 금융시장 불안이 가라앉지 않자 그는 다시 이 카드를 꺼내 들었다. 9월18일. 그는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그는 시장의 불안이 극에 달해 정치인들도 겁을 먹고 있고, 이제 행동을 취하기에 적기(適期)라고 판단했다.
다음날 부시 대통령은 폴슨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을 맞아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겠다"면서 구제금융 법안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배턴을 미국 의회로 넘겼다.
■리처드 펄드(Fuld·62) 리먼브러더스 회장: 장기 집권한 CEO의 전형적 자만에 빠지다
지난 1월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 은행에 희대의 사기사건이 터졌을 때 리처드 펄드(Fuld) 리먼브러더스 회장은 "모든 사람들에게 최악의 악몽"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몇 달 뒤 본인이 그보다 더한 악몽을 겪을 줄은 몰랐다.
그는 1993년 CEO가 됐다. 월가 최장수 CEO 중 한사람인 그는 카리스마형 경영인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이름 대신 '회장님(The chairman)'으로 불렸다. 그의 재임 기간 중 리먼브러더스엔 캐주얼 차림으로 근무하는 금요일(Casual Friday) 같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9월15일 월요일,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보호 신청을 한 뒤 직원들은 반바지 차림으로 출근해 짐을 챙긴 뒤 종종걸음으로 회사를 빠져나갔다.
9월13일 오전 7시. 그는 푸른 정장에 푸른 넥타이 차림으로 맨해튼 중심가가 내려다 보이는 31층 회장실로 출근했다. 날로 악화되는 회사의 운명에 밤잠을 설치던 그는 오전 10시쯤 짧은 낮잠을 잤는데, 폴슨 장관의 전화가 잠을 깨웠다. 회사 상황이 어떤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전 한국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 인수에서 손을 뗀 이후 주가는 급전직하로 떨어지고 있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마저도 손을 뗀다는 소식에 그는 이날 오후 케네스 루이스(Lewis) BOA 회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응답하지 않았다. 펄드는 이때 루이스가 메릴린치와 깊숙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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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테인 메릴린치 회장 |
다음날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건스탠리의 존 맥(Mack) CEO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인수 의향이 있는지 타진했다. 대답은 "노(No)"였다. 이 말과 함께 158년 리먼브러더스의 역사는 사실상 끝이 났다.
로이터통신은 한 애널리스트의 말을 인용, "펄드는 장기 집권한 CEO가 보이는 전형적인 자만, 즉 '내가 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이것은 시장이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회사를 너무 좋은 조건에 팔려다가 기회를 놓쳤다는 지적이다. 회사 회생 방안을 고민하던 그는 한 지인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는 다만 우리 직원들(my people)이 살아남길 바랄 뿐이에요."
■존 테인(Thain·53) 메릴린치 회장: 포커페이스
이 사람과는 포커를 함께 치지 마라. 그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기업 매각을 24시간 만에 성사시키고도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는 포커페이스를 가졌다.
그에게 9월13일은 일생에서 가장 극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이날 오전 뉴욕 연준 1층 회의실에 있었다. 전날에 이어 리먼브러더스 문제 해결을 위해 소집된 회의였다.
하지만, 존 테인의 생각은 딴 데 가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전날 폴슨 장관이 했던 경고의 말이 몇십 배로 증폭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때 리먼브러더스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허버트 맥데이드가 자사의 자산과 부채 현황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그는 결심했다.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다음주엔 우리 회사가 이 꼴이 될 수 있겠구나!"
그는 곧바로 회의장을 빠져나가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CEO인 케네스 루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릴린치 인수에 관심이 있느냐"고. 그날 오후 2시30분 두 사람은 뉴욕에서 만났다. 센트럴파크를 바라보는 BOA의 회사 소유 아파트에서였다. 두 사람은 1시간 동안 만났고, 그 뒤 36시간에 걸쳐 양사 실무자의 마라톤 협상이 시작됐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 골드만삭스 경영진도 메릴린치 지분 9.9%를 인수하겠다는 의향을 밝혀왔다. 그러나 다음날 오후 BOA는 메릴린치를 1주당 29달러에 인수하는 데 합의한다. 테인이 전화를 한 지 불과 24시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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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루이스 BOA 회장 |
그는 MIT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공학도 출신답게 꼼꼼하고 빈틈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작년 11월 메릴린치가 그를 CEO에 앉힌 것도 리스크 관리에 보다 신경을 쓰기 위한 신호로 풀이됐다. 하지만 그런 그도 월가 전체를 엄습한 금융위기의 파고를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케네스 루이스(Lewis·61) 뱅크오브아메리카(BOA) 회장: 끝없는 확장욕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본사가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Charlotte)은 월가로부터 1000㎞ 이상 떨어져 있다. 서울~부산 거리의 2.4배에 이른다.
루이스는 이 은행에서만 39년을 근무했다. 그는 1977년 뉴욕 지사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모기지 대출을 받으려고 뉴욕에 있는 다른 은행을 찾아갔는데 은행원이 모기지 대출을 거절했다. 그 은행원은 "샬럿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뉴욕에서 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 은행원은 30년 후 이 남자가 월가의 심장부를 접수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미국 최대 은행의 수장인 그는 올 들어 미국 최대 모기지 대출 업체인 컨트리와이드에 이어 미국 3대 투자은행인 메릴린치마저 인수, 끝없는 확장욕을 과시하고 있다. 미국의 개인투자자 사이트인 모틀리풀에는 "루이스의 다음 타깃은 미 재무부와의 합병"이라는 조크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중하류 가정 출신이라고 말한다. 그가 10살 무렵 부모가 이혼했는데 아버지는 하급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2교대 근무하는 간호사였다. 그는 12세부터 주유소와 제철소, 크리스마스 카드 판매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루이스가 이번 난리통에 처음 눈독을 들였던 것은 메릴린치가 아니라 리먼브러더스였다. 그러나 정부가 앞으로 발생할 부실에 대해 보증을 해주지 않겠다고 하자 9월12일 인수를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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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바클레이즈銀회장 |
다음날 그는 리먼브러더스 인수 작업에 진이 다 빠진 BOA의 M&A팀을 샬럿의 본사로 불러들였다. 그러던 중에 느닷없이 테인 메릴린치 CEO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는 M&A팀을 즉각 뉴욕으로 되돌려 보내 메릴린치 인수 작업을 하게 한다. 이 프로젝트는 '프로젝트 알파'라는 암호로 불리게 된다.
■로버트 다이아몬드(Diamond·57) 바클레이즈은행 회장: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다
9월12일. 그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침을 삼켰다. 기자가 있나 없나. M&A의 순간은 늘 비밀스러워야 했다.
뉴욕 리먼브러더스 본사였다. 그는 취재진을 따돌려야 했다. 영국에서 세번째로 큰 은행의 수장인 그는 며칠 전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리처드 펄드 리먼브러더스 회장을 만났다. 미국 4위의 투자은행을 인수할 절호의 기회. 할만한 게임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그에겐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는 미국 정부의 보증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틀 뒤 미국 정부는 "안된다"는 최후통첩을 해왔다. 그는 협상을 포기했다.
그날 저녁 그는 맨해튼의 유명 스테이크하우스인 스미스앤울렌스키로 가고 있었지만, "차가운 맥주나 마실까"하고 마음이 바뀐다. 그러던 중 휴대전화가 울렸다. 리먼브러더스의 COO인 허버트 맥데이드였다. 맥데이드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더라도 바클레이즈가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제안했다. 다이아몬드는 무릎을 쳤다.
그는 파산법을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9월16일, 그는 리먼브러더스의 북미(北美) 사업부문을 인수하는 데 합의한다. 부실 채권은 빼놓고 알짜만 쏙 빼가는 계약이다. 9회 말 2사 만루 뒤에 큰 찬스가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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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
■워런 버핏(Buffett·78)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20년 만의 재도전
당대 최고의 투자 고수로 꼽히는 그가 지난 23일 골드만삭스에 5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것은, 최근 몇 주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희망적인 뉴스 중 하나였다.
그는 이번 금융위기에 앞서 312억 달러(약 34조원)의 현금을 쌓아놓았지만, 1년 이상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은인자중 끝에 드디어 지갑을 열었다. 오마하(Omaha)에 사는 그는 '오마하의 현인(賢人)'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존경받는 투자자이지만, 온갖 소동이 정리된 뒤에야 뛰어드는 그의 모습은 약은 여우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는 투자은행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 그는 1987년 블랙먼데이 직전에 투자은행 솔로몬브러더스에 7억 달러를 투자했다. 당시 투자은행들은 정크본드(투기등급채권)에 투자했다 큰 손실을 본 뒤 자본금 확충을 위해 투자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고, 버핏은 바겐헌팅(저가매수)에 나섰다. (요즘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월가는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워런 버핏이 투자한 뒤 솔로몬은 기록적인 7000만 달러의 부실자산 상각을 발표한다. 그리고 뒤이어 주식시장의 대폭락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솔로몬은 증권 거래 스캔들로 파산 위기에 빠지고, 버핏은 위기 극복을 위해 솔로몬의 회장이 되어 9개월간 경영을 맡기도 했다. 10년 뒤 솔로몬은 지금의 씨티그룹에 팔렸고, 버핏의 투자금 7억 달러는 17억 달러로 불어났다. 하지만 버핏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고, 그 뒤 그는 투자은행에 대한 투자를 망설이게 된다. 그런 그가 20년 만의 재도전에 나선 것이다.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CDS(Credit DefaultSwap·신용파산스와프)
기업 파산 위험 자체를 사고 팔 수 있도록 만든 파생금융상품. 부도의 위험만 따로 떼어 내 매매할 수 있기 때문에, 채권자는 부도에 따른 원금 손실을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