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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진술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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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유신귀신'이 사라지면 새 날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역사에서 준비되지 않는 '새 날'은 결코 오지 않는 것 같다. 1945년 해방의 새 날은 남북분단으로, 1960년 4.19혁명은 5.16 군사쿠데타로, 1970년 민주회복운동은 유신쿠데타의 반동으로 나타났다.
1979년 10.26거사는 '서울의 봄'을 기대했던 국민의 염원과는 달리 전임자보다 더 광폭한 압제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나갔던 귀신이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 사람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마태 12:43~45)는 형국이었다.
독재자의 품안에서 육성된 '정치군인'들이 주군이 사라진 밀림에서 산적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권력의 단맛을 즐겼고, 18년 동안 유지해온 정보기능과 공작술을 익혔다. 주변에는 길들여진 법비ㆍ관비ㆍ언비들이 줄을 섰다.
백암 박은식은 우리 민족성에 두 가지 병통을 지적했다. 첫째 너무 겁을 먹고 유약해서 감히 산을 옮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태도 즉 패배주의, 둘째는 너무 조급하고 들떠서 하루아침에 해치우려는 태도 즉 모험주의다. 지난 날의 적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거나, '개혁피로증' 운운하면서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여기에는 기득세력의 농간이 적잖게 작용한 것이지만, 결과는 국민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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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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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사람은 김재규 장군이었다.
그는 집권자의 타락상, 부마항쟁에 나타난 민심, 해외에 비친 실추된 국격, 반유신 항쟁으로 예상되는 대량 살상위기, 그리고 민족사의 연연한 의열사의 전통에서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던지고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그는 신군부에 의해 구속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기대했던 시민들의 민주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구명운동의 목소리도 지지부진했다. 정권을 노리는 대선주자들과 재야는 침묵하고 종교계에서도 대체로 방관하였다.
신군부가 주도한 군법회의는 1월 25일 김재규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2월 5일 "10.26사태는 억압의 권력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라는 연장선 위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 군사재판을 관할하는 육군참모총장 앞으로 그의 구명을 위한 〈청원서〉를 보냈다. 이를 계기로 각계각층에서 그리고 해외동포들까지 김재규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원서〉에서는 "10.26사태를 살인이라는 범법적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기본 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적, 국민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고 천명했다.
한국천주교는 70년 전 같은 날 안중근 의사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0.26의거에 심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뮈텔 주교가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유해를 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은 일제의 처사를 당연한 일" (주석 1)이라고 하였다. 또한 빌렘 신부는 1910년 3월 8일 안중근을 면회한 자리에서 "너의 흉행이야말로 전면 오해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범한 죄악은 천지가 다 용서하지 않을 바" (주석 2) 라고 악평하였다.
비록 외국인 출신 주교와 신부에 의한 망언ㆍ망발이지만 이들은 당시 조선천주교의 지도자였다. 이와 같은 '전통'에서 볼때 천주교 신부들인 사제단이 김재규 장군 구명운동에 앞장 선 것은 파격이었다. 천주교사에 중요한 기점이 되는 〈청원서〉의 전문이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석방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교회의 사명과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 증거하고자 하는 천주교의 성직자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둠이 빛을 가리고 허위가 진실을 압도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빛과 진실을 증거하다가 지학순 주교님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동료들인 성직자와 신자들을 영어의 몸으로 빼앗긴 바 있습니다.
10.26사태 이후 우리와 격리되어 감옥에 있었던 동료 성직자와 신자, 그리고 지식인과 학생들이 속속 교회와 그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음을 우리는 경하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10.26사태 이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새로운 민주헌법의 제정논의가 활발해지며 나라의 민주화가 진행됨으로써 이 땅에서는 칠흑 같은 암흑이 가시고 새로운 민주한국 건설의 위대한 도정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10.26 사태는 반민주 독재정치로 실추된 나라의 위신을 회복하는데 있어 커다란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10.26사태의 이러한 의미와 결과에도 불구하고 10.26사태의 장본인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이러한 사태발전과 격리되어 현재 1,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우리들 종교인의 입장과 견해를 밝히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기에(창세기 1.26~27), 종교인으로서 박애정신(사목헌장 4장 41항)에 따라 생명에 대한 권리는 하느님께 속한 것이며, 인본사상에 입각한 인간 생존권에 바탕을 둔 민주사조에 따라 인간의 생명은 절대 귀중한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한되어 보도되기는 하였으나 김재규 피고인의 법정진술에 의하면 10.26사태는 애국적 동기에서 출발되었고 조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 희생의 극소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부산과 마산사태의 엄청난 충격과 희생 등 10.26사태 전후의 객관적 상황에 비추어 그의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0.26사태는 억압의 권력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라는 연장선 뒤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10.26사태를 살인이라는 범법적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기본 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적, 국민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김재규 피고인의 진술에서, 대의를 위하여 소의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의 토로를 통하여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충격과 그에 따른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10.26사태의 의미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자세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1, 2심의 재판과정은 10.26사태의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는 국민적 관심에 비추어 지나치게 인색하였고 졸속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10.26사태의 영예로운 수습은 역사와 국민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10.26 사태 이후 전개되고 있는 민주화 작업이 화해와 관용의 정신으로 마침내 성취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화해와 관용의 정신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10.26사태 관련자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10.26사태의 의미와 교훈을 확인하는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과 화해야말로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는 무기요,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이제 이 같은 우리의 뜻을 모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관련 피고인들이 민주발전도상의 대의에 입각하여 극형만은 면하게 조처를 청하면서 우리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그리고 나라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기도 바치고자 합니다. (주석 3)
주석
1> 뮈텔, <뮈텔 주교 일기> 4, 414~415쪽.
2> 국사편찬위원회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서, 534쪽.
3> <암흑속의 횃불(4)>, 8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