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5일(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 후 제11주 -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 요한복음 6 : 26~35 )
Ⅰ. 「 앞 사람만 따라 가다 」
마라톤은 긴 시간 동안 자기 자신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힘들고 고독한 스포츠 경기 중에 하나입니다. 마라톤은 때로 순위보다도 42.195㎞를 완주한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기도 하는 스포츠입니다. 2013년 4월 28일. 영국 선덜랜드에서 열린 마라톤 풀코스 경기에서 결승선에 들어온 마라톤 선수 중에 단 1명을 빼고는 5,000여 명 모두 실격처리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의 시작은 2위로 달리고 있던 선수가 지정된 코스를 잠시 벗어나 달렸기 때문입니다.
이 선수는 코스에서 벗어났다 다시 원래 코스로 돌아오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수는 자신이 잘못 달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2위 선수를 뒤따라 달리던 나머지 선수들도 모조리 이 선수를 따라 잘못된 코스로 달렸던 것입니다. 주최 측이 경로표시를 확실하게 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앞사람만 따라갔던 5,000명의 선수들은 마라톤의 전체 코스인 42.195㎞에서 고작 264m를 덜 뛰게 되어 결국 모두가 실격처리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줄곧 선두를 달리고 유일하게 정확한 경로를 따라 달렸던 ‘마크 후드’가 우승을 했고, 이 마라톤에서 유일한 완주선수가 되었습니다. 선(先)험자의 경험과 방향성 제시는 후(後)험자에게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멘토(mentor)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 한발 앞서 달리는 사람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그냥 따라 달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앞서 달리는 사람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맛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앞 사람을 따라가기만 한 사람은 그 실패를 어떻게 수정하고 극복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 순간에는 좀 더 신중한 태도로 임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늘 앞뒤를 잘 살피고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믿음의 선배들은 눈에 쉽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냥 그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주님의 뜻과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Ⅱ.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사는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경제를 잘 돌아가게 하면 정치를 잘한다고 말합니다. 경제를 성장시키고,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서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훌륭한 정치가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오늘날은 예수님 당시보다 훨씬 경제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경제우선주의, 즉 돈이 우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도 돈도 가지고 가지 말고 옷도, 신발도 더 준비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전도하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계산이 빠릅니다. 계산일 빠르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밝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니까 그 옥합에 담긴 향유의 가격을 계산해 냅니다. 광야에서 5천여 명의 사람들이 조금씩 먹으려고 한다면 최소한 2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측합니다. 재리(財利)에 밝지 않으면 이런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제자들만 그럴까요? 우리는 다를까요?
혹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가지고 계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드려야 얼마나 드리겠습니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재리에 너무 밝으면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이 급식하는 기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6:15) 군중들은 왜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자 했을까요? 예수님이 그들을 배부르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좋아서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썩을 양식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늘양식을 위해 일합니까?
Α. 우리는 혹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아닙니까? (27a)
우리는 살아감에 있어서 양식을 먹어야합니다. 양식이라는 말보다는 ‘밥’이라는 말이 더 친근합니다. 밥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입니다. 밥을 먹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 일합니다.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식량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27a)고 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이 있고, 영생의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썩을 양식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냥 쉽게 ‘육체를 위한 양식’이 썩을 양식이고, ‘영혼을 위한 양식’이 영생의 양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육체를 위한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육체를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육적 양식이라기보다 ‘잉여 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쌓아놓은 양식을 말합니다. 한 농부가 풍년이 드니까 곡식을 쌓아둘 창고를 확장할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문제점 중 하나가 쌓아놓는 것입니다. 쌓아놓으면 굳이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산이 어느 정도 쌓이면 그 이자만으로도 살 수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의 꿈이 건물주가 되는 것이랍니다. 건물주가 되어서 임대료 받아먹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6일 동안 일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쌓아놓는 것입니다. 바로 이 쌓아놓은 물질이 ‘썩을 양식’입니다. 남는 것은 반드시 썩는다는 것이 만나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만일 땅에 많이 쌓아놓으려고 일한다면, 이는 주님의 말씀대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요, 무의미한 삶입니다.
Β.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27b).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중요하듯이, 육적인 생명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인 생명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육체가 없는 영혼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역시 생명의 밥입니다.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 즉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면, 단순히 육체와 영혼을 2등분할 수는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쌓아놓기 위하여, 즉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27b) 우리는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영생의 양식은 인자(人子), 즉 예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 후에 시험하는 마귀를 향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떡으로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밥은 당연히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밥만 먹고 사는 것은 온전한 삶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될까요? 물론 성경을 읽은 것은 매우 중요하고, 우리의 영성에 매우 유익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Γ.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29)
예수님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시자, 군중들은 다시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 군중들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우리는 일이라는 말을 힘들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일이 없으면 더 힘듭니다. 노인이 되어 경험하는 네 가지 고통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위고(無爲苦)’라고 합니다.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일로 인한 스트레스나 힘에 부치는 지나친 일 때문에 일을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 중 하나가 “땀을 흘려야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2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살고, 믿어야 구원받고, 믿어야 회복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회복되어야 그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하는 노예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노예는 일을 부려먹기 위해 두지만, 자녀의 존재는 일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자녀는 그 존재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회복해야합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다시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주고,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와 함께 있기만 해도 됩니다. 나중에 성장하고 나면 부모를 위하여 효도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자녀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시작입니다.
Ⅲ.
로마제국 말기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광활한 태양과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경탄하면서 정작 가장 경탄해야 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탄하지 않는다.” 이 말은 산, 바다, 태양, 별들 그리고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바로 우리가 가장 귀한 ‘걸작품’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의 외모를 바꿀 수 있다면 바꾸겠는가?” 어느 여론조사 기관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상당수의 남성과 여성들이 바꿀 수 있다면 자신의 외모를 바꾸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외모를 포함하여 자신의 존재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울에 비친 여러분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세요. 당신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생각,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 자신뿐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바로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보물입니다. 당당한 자신감으로, 가장 귀한 ‘걸작품’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타락한 사람은 걸작품에 흠결이 생긴 것입니다. 그 흠결을 지우면 다시 걸작품이 됩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와 흠결을 깨끗하게 지우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잘 믿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되시기를 축복(祝福)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