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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주 여 행
신라와 백제의 국경, 경상 ‧ 전라 ‧ 충청의 접경
무주군은 삼국시대에 신라 땅인 무산현(茂山縣)과 백제 땅인 적천현(赤川縣)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뒷날 무산현은 무풍현(茂豊縣)으로, 적천현은 주계현(朱溪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조선 태종 때 무풍현과 주계현을 합치면서 각기 첫 글자를 따서 무주(茂朱)가 되었습니다.
전라북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무주군은 경상남 ‧ 북도와 충청남 ‧ 북도 등 4개 도와 접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통일신라 이전까지 무풍면은 신라에 속해 있었고, 나머지 지역은 백제에 속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바로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나라의 경계를 이루었던 곳이어서 혼례절차나 장례절차에서부터 모든 예법이 서로 달라 혼인이나 상거래는 물론 자유롭게 왕래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역감정의 대립이 심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 지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무주군은 오랫동안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접경지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생활권도 경상권 ‧ 전라권 ‧ 충청권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곳 사람들의 말씨에는 충청도 말과 전라도 말과 경상도 말의 특색이 고루 섞여 있습니다.
한풍루(寒風樓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각, 한풍루는 무주 읍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남대천(南大川) 건너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풍루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어린이 놀이터, 게이트볼 등 각종체육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넓은 잔디밭이 있어 매년 8월이면 반딧불이 축제가 열립니다.
수많은 명사와 묵객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경관을 글로 남기며 풍류를 즐겼는데, 특히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류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한풍루를 호남지방의 삼한(三寒 : 전주 한벽당(寒碧堂), 남원 광한루(廣寒樓), 무주 한풍루) 중 으뜸으로 꼽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선조 32년(1599)에 다시 지었고, 1910년의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불교포교당(佛敎布敎堂)으로 사용되면서 일본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기도 했으며, 영동(永同) 양산면(陽山面) 가곡리의 금강변(錦江邊)으로 옮겨져 금호루(錦湖樓)라는 현판으로 바꾸어 걸게 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1971년 무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당초에 위치했던 남대천(南大川) 건너편인 당산리(堂山里)의 남산자락 언덕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무주 땅의 형세는 행주형(行舟形)이라 합니다. 돛대가 배의 중앙을 굳게 눌러 배의 안정을 꾀하듯이 무주 땅의 평화를 위해 무주 중앙 지점에 한풍루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풍루는 무주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습니다.
머루와인 동굴
무주 양수발전처의 작업 터널로 사용되던 곳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무주 머루와인의 숙성 및 저장, 판매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적상산 전망대 가는 길에 있는데, 2009년 6월 13일 오픈했습니다. 와인하우스와 머루와인 비밀의 문(270m), 기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와인을 음미하며 비교해 보고 구입해 갈 수도 있습니다.
적상산(赤裳山 ‧ 1034m) ‧ 적상호(赤裳湖) ‧ 천일(天一)폭포
적상산은 무주군 적상면의 한가운데에 기봉(1034m)과 향로봉(1025m)이 마주하여 솟아 있습니다. 정상 일대는 흙으로 덮인 육산(肉山)이지만 해발 800~900m 쯤의 산허리부터는 검붉은 퇴적암이 400m의 층암절벽을 이루어 산중턱을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바위산으로, 이곳 바위의 이름이 치마바위입니다.
바위 색까지 검붉은 이 일대에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면 마치 여인네가 붉은 치마를 두른 듯하다고 붉을 赤, 치마 裳의 ‘赤裳山’(적상산)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연중 등산객의 80%가 단풍 절정기인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집중될 만큼 적상산은 가을 단풍의 명산이며, 한국 100경의 하나입니다.
적상산 산정호수인 적상호는 적상산 분지(해발 800m)에 위치한 인공호수로 양수 발전소에 필요한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든 댐입니다. 호수를 향해 오르는 약 4km의 드라이브코스는 지리산 횡단도로를 연상케 하는데, 무척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줍니다. 높이 40m인 천일폭포는 폭포 위로 유일하게 하늘만 보인다고 해서 ‘天一’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내도리(內島里) 앞섬유원지
무주 내도리는 말 그대로 육지속의 섬마을입니다. 휘어지는 강의 모습도 뛰어나고 강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 또한 수려합니다. 내도리(內島里)로 들어가려면 무주 읍내를 지나 마을 사람들이 ‘앞섬다리’라 부르는 내도교를 건너가야 합니다. 이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앞섬마을 사람들은 무주 읍내로 가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다녀야 했습니다.
이곳 내도리는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무주 · 진안 · 장수 등 금강 상류의 네 고을 가운데서도 특히 경치가 좋은 지역으로 꼽은 곳 중 하나입니다. <택리지>는 `전도(前島)와 후도(後島), 죽도(竹島)'라는 세 곳을 금강 상류의 비경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 전도와 후도가 바로 이곳 내도리에서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에 이르는 앞섬과 뒷섬 지역입니다.
실제 이 마을은 동네 어귀를 휘감아 도는 금강의 물줄기가 기암절벽을 치고 나가며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냅니다. 스물세 해 동안 무주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이곳을 즐겨 찾았던 소설가 박범신은 내도리를 자신의 문학적 자궁이라 말합니다. 무주읍 뒷산인 향로봉 전망대에서 조망되는 내도리 전경은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무주의 향토음식-어죽
금강의 상류지역인 내도리 앞섬여울과 뒷섬여울은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내도리는 오래 전부터 어죽 요리가 유명했습니다. 어죽은 금강 수계(水界)의 주민들이 한여름 냇가에서 멱을 감으며 즐기던 음식인데, 이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무주의 별미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무주의 젖줄인 남대천과 금강에서 잡아 올린 모래무지, 빠가사리, 피라미, 누치, 갈겨니 등 웬만한 민물고기는 모두 어죽의 재료가 됩니다. 우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민물고기 내장을 빼고 손질하여 2시간 이상 푹 삶아서 뼈를 발라낸 후, 삶은 국물에 쌀을 넣고 끓이면서 고추장을 풉니다. 쌀이 익을 때쯤 수제비를 떠 넣으면서 대파, 마늘, 생강 등 갖은 양념을 넣습니다. 기호에 따라 후춧가루를 첨가하기도 합니다.
나제통문(羅濟通門 ‧ 구천동 제1경)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을 가로지른 작은 바위산인 석견산 능선으로는 본래 설천과 무풍을 오가던 사람들이 넘어 다니던 고갯길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1910년경)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그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옮겨가기 위해 무주에서 김천과 거창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산줄기의 암벽을 뚫어 만든 높이 3m, 길이 10m의 굴을 뚫었습니다.
당시 굴 위쪽 마을은 "기미니마을" 아랫쪽은 "이미리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그 굴의 이름을 '기미니굴'이라 하였습니다. 1963년에 무주구천동 33경을 선정하면서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는 유래에서 나제통문(羅濟通門)이라 부르게 됐습니다. 이 통문의 양쪽으로 위치한 무풍 방면의 이남(伊南)과 무주 방면의 새말[新村]은 행정구역상 무주군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판이하게 다르다고 합니다.
이 나제통문의 동쪽에 있는 무풍면은 '십승지지(십승지지)'의 하나로 꼽히던 곳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과 같은 큰 변란이 났을 때 이곳으로 피난해 와 숨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주 군민의 대부분이 그때 피난 왔던 사람들의 자손으로서 무주군의 대표적인 성씨인 밀양 박씨, 안동 권씨, 문화 유씨를 비롯해서 열여덟 개 성씨의 중시조가 모두 이곳에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무주 구천동 33경(景)
전라북도 사람들은 동북쪽의 산간 지방을 '무진장'이라고 부릅니다. 무주군과 진안군과 장수군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무주군은 무진장 지역에서도 가장 산이 많고 지형이 험한 곳입니다. 그래서 옛적 한때 어둡고 깊고 으슥한 곳을 '무주구천동 같다'고 빗대어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집 왔네 시집 왔네/ 무주야 구천동에 시집 왔네"로 시작되는 '시집살이 노래'는 이 외진 산골에 시집와서 어렵게 생활하는 새색시의 한과 설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주군은 다른 어느 군보다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무주구천동 때문입니다. 덕유산의 북쪽 골짜기를 따라 약 25km에 걸쳐 펼쳐진 구천동계곡은 땅이 풍화작용을 받기 쉬운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덕유산 정상부 가까이에서 발원하는 금강 상류의 한 지류인 원당천(元唐川)의 물이 급경사를 이루며 뱀처럼 꼬불꼬불 흐르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수많은 소(沼)와 담(潭), 폭포와 기이한 바위와 동굴들이 곳곳에 만들어져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천동 33경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관문이었던 나제통문(羅濟通門 ・ 제1경)에서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香積峰 ・ 제33경)까지 70리 길에 펼쳐져 있습니다. 나제통문에서 삼공리까지 40리 길 오른편으로 와룡담(臥龍潭 ‧ 제4 경) ・ 학소대(鶴巢臺 ‧ 제5경) ・ 추월담(秋月潭 ‧ 제9경) ・ 만조탄(晩釣灘 ‧ 제10경) ・ 파회(波淮 ‧ 제11경) ‧ 수경대(水鏡臺 ‧ 제14경) 등의 14경이 외구천동입니다.
매표소를 지나면 제15경 월하탄(月下灘)에 이어 인월담(印月潭 ‧ 제16 경) ・ 사자담 (獅子潭 ‧ 제17경) ・ 청류동(淸流洞 ‧ 제18경) ・ 비파담(琵琶潭 ‧ 제19경) ‧ 다연대(茶鉛 ‧ 제20경) ・ 구월담(九月潭 ‧ 제21경) ・ 금포탄(琴浦 灘 ‧ 제22경) ・ 호탄암(虎灘巖 ‧ 제23경) ・ 청류계(淸流溪 ‧ 제24경) ・ 안심대(安心臺 ‧ 제25경) ・ 심양담(新陽潭 ‧ 제26경)・ 명경담(明鏡潭 ‧ 제27경) ・ 구천폭포(九千瀑布 ‧ 제28경) ・ 백련담(白蓮潭 ‧ 제29경) ・연화폭(蓮花瀑 ‧ 제30경) ・ 이속대(離俗臺 ‧ 제31경) 등의 선경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구천동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확실한 자료가 없이 전해오는 이야기로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중 구천 명이 숨어서 수도하는 곳이라 하여 '구천둔(九千屯)'이라 하다가, 그것이 구천동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골짜기 마을에 살던 구(具)씨와 천(千)씨의 집안싸움을 어사 박문수가 해결해 준 뒤로 이곳을 구천동(具千洞)이라 부르다가 '九千洞'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구십 리 멀고 먼 계곡에 천 가지가 넘는 초목이 있다 하여 구천동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일사대(一士臺) 일원(구천동 제6경)
한말의 우국지사인 연재(淵齊) 송병선(宋秉璿)이 국운이 기울어가자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서벽정(棲碧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둔 소요하면서 영호남 지역의 선비들과 함께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당시 선비들이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선비'라는 뜻으로 동방일사(東方一士)라고 칭하였으며, 일사대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송병선은 또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 무주구천동에 무계구곡(武溪九曲)을 정하고, 일사대를 제4곡이라 하였습니다.
일사대(一士臺)는 무주구천동 계곡을 흘러내려온 원당천(元塘川)의 침식작용에 의하여 발달된 하식애(河蝕崖)로, 원당천이 돛대 모양의 기암(奇巖)을 휘어감고 도는 모습이 마치 물로 성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하여 수성대(水城臺)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파회(巴洄 ‧ 구천동 제11경) ‧ 수심대(水心臺 ‧ 구천동 12경)
‘파회 ‧ 수심대 일원’은 연재 송병선이 이름 지은 명소로 바위에 '巴洄'라고 새겨져 있으며 고요한 소(沼)에 잠겼던 물이 급류를 타고 쏟아지며 부서져 물보라를 일으키다 기암에 부딪치고 제자리를 맴돌다가 기암 사이로 흘러들어가는 곳입니다. 무계구곡 중 마지막 명소로 알려져 역사 · 문화적으로도 가치가 매우 크다고 인정되어 명승 제5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수심대(水心臺)는 신라 때 일지대사가 이곳의 맑은 물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고 도를 깨우친 곳이며, 물이 돌아 나가는 곳이라고 하여 수회(水回)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잘 생긴 기암괴석이 절벽을 이루며, 병풍처럼 세워져 마치 금강산과 같다고 하여 일명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립니다.
덕유산(德裕山) 설경 산행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으로, ‘덕이 넉넉하다’는 뜻의 ‘德裕’란 산 이름답게 넉넉한 품을 지닌 산입니다. 남쪽 지역에 자리 잡고 있지만 서해의 습한 대기가 이 산을 넘으면서 뿌리는 많은 눈 때문에 최고의 겨울 산행지로 꼽히는 곳입니다. 첩첩으로 이어진 크고 작은 연봉들의 눈 덮인 모습이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연상케 하여 ‘작은 히말라야’라는 애칭으로도 불립니다. 1975년 제 10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빼어난 눈꽃 풍경 포인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덕유산으로 향합니다. 주목과 구상나무가 많은 향적봉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꽃들이 가득 피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꽃과 더불어 서리꽃까지 핀 황홀한 설국이 펼쳐집니다. 바다에서 불어온 습한 바람이 차가운 겨울 공기에 얼어 주목에 하얗게 핀 상고대는 산행객들을 몽환에 빠뜨릴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곤돌라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보이는 덕유산 일대의 전경은 백색의 천국과도 같습니다.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한 눈에 펼쳐집니다. 한 마디로 장관입니다. 탑승 12분이면 6km 거리인 설천봉(雪天峯 ‧1,522m) 정상에 도착됩니다. 설천봉에 있는 상제루(上帝樓)는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지상의 행복을 축원하기 위해, 국내에서는 최고 높은 위치에 지어진 목조건물입니다. 이곳 휴게소에서는 북쪽으로 적상산 안국사가 바라보이고 맑은 날엔 지리산 주능선과 가야산, 팔공산 등 많은 산들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설천봉에서 500m 거리를 15분 정도만 걸어 오르면 덕유산 정상 향적봉에 이릅니다. 향적봉(香積峯)이란 이름은 향적목(香積木) 즉 주목(朱木)이 군락을 이루었던 데서 붙여진 것이고, 옛날엔 지금의 향적봉 대피소 아래 ‘왕생수(王生水)’ 샘이 있던 곳에 향적암이란 절이 있었습니다. 정상에 서면 북쪽의 칠봉(칠불봉, 1,305m)과 신선봉, 북서쪽의 적상산, 남쪽의 남덕유산 등이 조망됩니다. 눈으로 덮인 봉우리들이 구름에 걸려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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