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으라 (에페 4,22-24)
긴 장마가 끝이 나고 본격적인 더위가 눅눅한 습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폭염을 피해 시원한 쇼핑몰이나
카페에서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단다. 사람들은 '먹사니즘'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듯 먹고
즐기는 일에 진심인 듯하다. 페이스북 담벼락에는 맛있게 먹은 음식을 서로 자랑하는 듯 소개하는 이야기가 많다.
삶의 양식이, 우선순위가 많이 변했다. 맛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먹고 배가 부르냐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
세계는 배부르면 그만인 동물들에게서나 어울리는 세계다. 광야 생활에 지쳐 투덜거리던 히브리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행복해서 배가 부른 나라가 아니라 배가 불러서 행복한 세상'이라고 오해하고
그렇게 여겼다. 욕심을 날마다 비우고 버리는 연습을 하다 보면 덜어진 만큼 빈자리에 행복이 그득해진다.
조금씩 조금씩 욕심을 비우다 보면 오히려 튼실해지고 행복해지는 나라가 약속의 땅 하느님 나라다.
히브리 사람들은 오랜 광야 생활에 지쳐 모세와 아론에게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를
추억하면서 왜 광야로 끌고 나왔느냐”며 불평했다(제1독서 탈출16,2-4.12-15), 히브리 즉, 하삐루(용병, 노예,
떠돌이 등 하층민을 총칭하는 말)들은 약속의 땅을 찾던 광야에서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돌판에 새겨 서원(誓願)했던 첫 마음은 뒷전이고, 노예살이 때 먹었던 고기를 그리워하며 아우성을 쳤다.
오죽하면 노예의 궁색한 처지를 행복하다고 여겼을까? 참 딱하고 고약한 일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행복한 나라, 인권이나 평등 따위의 근사하고 거룩한 말은 개에게나 주고 당장 배불리 먹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주일 값없이 실컷 배부르게 먹었던 사람들이 오늘 복음(요한 6,24-35)에서는 예수께 따지듯이 묻고 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아예 대놓고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라며 졸라 댄다. 시도 때도 없이 늘 배부른 인생을 살게 해 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옛 인간을 벗고 새 인간을 입게 해달라는 청탁을 듣고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따끔하게 타이른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으려면 올바로 듣고 먹어서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지 마라.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으라"
(제2독서 에페4.17.20-24).
사람이 산다는 건 어떤 형태로든 '밥'을 구하는 일이다. 이웃 종교인 불교에서는 밥을 짓고 나누어 먹는 일,
'공양'을 중요한 수행으로 여긴다. 그래서 “밥만 제대로 할 줄 알아도 중노릇 한다”, “한 철 공양주만 잘해도
평생 먹을 복이 생긴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서 그런게 아니라 사실, 밥을 짓는 일은 생명의 집을 지어 바치는
것이요 먹는 일은 생명을 가꾸고 키우는 일이다.
우리 가톨릭교회도 듣고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아니, 듣고 먹는 일은 우리 신앙의 처음이요 마침이다.
말씀(성경)을 들어서 믿음을 북돋우고 거룩한 몸(성체)을 받아먹는 사람은 무럭무럭 자라서 하느님의 사람,
새사람이 된다. 올바로 듣고 먹어야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을 수
있게 된다. 내 남 없이 신앙인 노릇 제대로 하는 새사람이 되려면 올바로 듣고 먹어야 한다.
( 20240804연중 제 18주일)
공검 본당 주임
김영식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