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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8장 32절 은혜와 진리의 가치5-자유
여러분들이 많이 들으셨을 법한 자유에 대한 말 가운데 하나인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이 말을 한 페트릭 헨리는 영국이 미국을 다스리던 미국의 초기 시절의 사람입니다. 그 당시 영국은 강력한 나라로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다스렸습니다. 미국도 역시 그런 나라들 가운데 한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영국의 압제는 더욱더 강화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미국의 혁명세력은 점차 영국에 대한 저항이 점점 강해져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법면에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영국과의 전쟁을 앞두고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습니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언성만 높아질 그 때 한 신사가 일어나서 거기에 모든 미국의 많은 지도자들 앞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로인해 거기 모인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고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기 시작했고, 영향으로 그런 가운데 영국과의 긴 싸움 끝에 미국은 드디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연설이 지금 자세히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가 한 연설 가운데 중요한 한 문장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자유의 가치가 죽음을 뛰어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가 과연 죽음을 뛰어넘을 정도로 가치가 있을까요? 대답은 그렇다고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우리나라가 무려 36년 동안 일본에 의해 지배를 받았을 때 그것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이 자유로운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하여 굉장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기들의 몸을 바치면서 자유를 위해 싸웠고 결국은 일본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의 희생이 없이 그냥 다스림을 받는 것에 순응했다면 국제 사회 역시 우리 나라가 독립의지도 없고 자유에 대한 갈망도 없다고 생각해서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유를 부르짖었고 자유를 위해 희생해서 결국은 그것을 얻어 내게 되었습니다. 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자유를 향한 희생의 역사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의 이목을 대한민국에 집중시키셨고, 결국은 자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독립은 했지만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독재자와 그의 집 외에는 사실상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자유를 잃은 북한은 오늘날도 역시 착취와 억압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유가 생명보다 귀하냐고 묻는다면 공적인 자유는 개인의 생명을 바칠 만큼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적인 자유는 나라와 민족의 모든 국민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포기한 사람들을 애국지사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관계에서도 역시 자유는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는데 성경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와 진리로부터 주어지는 자유에 대하여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구약 성경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자유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자유를 위한 법도 만드셨습니다.
레위기 25장 10절을 보면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하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나라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희년제도 였습니다. 오십 년째를 거룩하게 하여 오십년이 이르면 희년이 됩니다. 그러면 그 해에는 그 이전에 노예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해입니다.
구약의 희년제도는 육적인 자유를 통한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신약은 영적인 자유를 통한 마음의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까지는 에덴 동산에서 자유로웠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따먹을 수 있는 자유와 에덴 동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에덴 동산을 벗어나 온 지구를 에덴 동산으로 만드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강제로 따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따먹으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지를 미리 알리시고 그것을 먹고 안먹고의 권한을 인간의 자유에 맞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마귀의 유혹을 받으면서 죄를 짓게 되었고 죄를 짓는 즉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으로 아담을 비롯한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그 사람 혼자만이 그것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죄는 지은 사람이 담당해야 하지만 그 죄과는 그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함께 담당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났을 때 그의 후손들은 척박한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로 인해 농사의 방해를 계속해서 받으면서 살아아면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영적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지 못하게 막는 사탄의 방해를 받으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영혼의 자유를 잃게 만드는 것은 죄며 죄는 사탄을 따라다닙니다. 사탄보다 죄가 앞선 것은 아닙니다. 죄는 사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반역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죄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과 다른 천사들을 섬기는 자리를 떠나 자기의 위치를 하나님의 보좌까지 높이려고 시도했을 때 그것이 죄가 되었고 그 이후로 죄는 항상 사탄이 가는 곳마다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사탄의 계획과 행동의 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있는 곳에는 영적인 자유를 잃게 됩니다. 육신의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영적인 자유를 잃습니다. 그 잃어버린 진리를 찾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라고 하셨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7-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진리인데 그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제자들을 택하시고 또 여러분들을 택하셔서 자신의 피로 죄값을 치루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거룩하게 구별하셨고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하신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진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게 된 사람들의 영혼을 자유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영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32절을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사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사탄을 따르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죄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서 죽습니다.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가기에 있습니다. 사탄이 장악한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영혼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모셔들여야만 가능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죄를 완전히 다 씻으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자유가 없습니다.
시편 146편 7절은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얻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데 누구를 통하여 그 일을 이루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를 주십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을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그러니까 갇혀 있다는 것은 사탄과 사탄이 다스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포로되어 있고, 눌려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갇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갇혀있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유를 잃은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고, 감옥같은 무덤에 갇혀 계시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인해 영적인 감옥에 갇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실 수 있게 되신 것입니다. 그냥 자유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서 거룩하게 하시면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적인 사람들은 자신도 예수님이 주신 참 자유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영적인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아직도 사탄과 율법에서 구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율법에서 구속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량하심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인이라는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아 하면서도 예수님이 주신 생수를 바로 곁에 두고도 그것을 먹으면 살 수 있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시지 못하고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교회 밖의 사람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자기의 행위를 의롭고 선하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려는 자기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믿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평가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보실 때 이 세상의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악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이나 선을 행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도진, 개진이라는 것입니다. 별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천원찌리 음식을 파는 식당에 가서 한끼의 밥을 먹고 배부른 사람이나, 한끼에 몇 백만원짜리 하는 식당에 가서 먹는 사람이나 배부른 것은 똑같고, 포만감을 느끼는 것은 똑같은 것과 같습니다.
죄는 작게 지나 크게 지나 죄인인 것은 똑같고, 선을 적게 행한 사람이나 많이 행한 사람이나 하나님의 선하심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인이 자기의 힘과 지식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질 수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의로운 것처럼 의로워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셨던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수고는 강에 가서 고래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죽도록 고생하며 포기하지 않고 그물을 던질지라고 결코 강에서는 고래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고래를 잡으려면 바다로 나가야 하는 것처럼 구원을 받으려고 하거나 거룩함을 입으려고 하거나 영혼의 자유함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 조건도 걸지 않으시고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고치실 때 네가 이것을 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들을 구원하신 것으로 끝내셨습니다. 다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이 너무나 감사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하신 일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행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요, 노력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요, 자기의 신념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먼저인 것입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고,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로 말미암아 구원과 거룩함과 자유하게 된 여러분들은 어떤 자리에 자신을 세웁니까? 갈라디아서 5장 13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그 자유를 악이용하여 육체의 이익을 얻는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신 것처럼 구원받은 여러분들 역시 예수님이 자신에게 주신 자유를 자기를 위해 사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쓰기 위해 서로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금식하는 이유까지도 하나님이 섬기라고 하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금식을 합니다.
이사야 58장 6절을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 금식을 작정하는 데 그 이유가 다른 사람의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기 위해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다른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는 멍에의 줄을 끌러주기 위해 금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 금식하신 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이 시대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인해 그들을 섬기기는 일을 위해 금식할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에게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금식을 잘합니다. 일주일도 하고, 열 흘도 하고, 이십일도 하고, 사십일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흉악과 멍에와 압제당하는 데서 구원해주기 위해 금식은 며칠이나 합니까? 단 삼일은커녕 단 하루도 못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야할 때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부생활에서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아내는 남편 안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남편은 아내 안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 밖에서 자유로우면 그 가정은 겉잡을 수 없이 파괴되고, 남편이 아내 밖에서 자유로워도 그 가정은 겉잡을 수 없이 파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자유는 서로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5장 15-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복된 가정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늙어서도 신실하게 지키는 그런 가정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생수를 마시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보령시내에도 많은 교인들 가운데 떠돌아다니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것같지만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 목회자와의 관계, 그리고 성도 서로와의 관계가 견고할 때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습니다. 부부의 자유가 서로 안에서의 자유인 것처럼 교회안에서의 자유 역시 떠돌아다니는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의 한 지체로서 다른 성도를 섬기며 헌신하는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내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세계적인 선교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데 부족함없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줄아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9절 말씀을 보면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좋지만 너무나 지나쳐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유는 좋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교회를 섬겼던 사도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편지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자유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16절에서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악을 가리는데 사용하기 위하여 자유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여러분들의 자유를 포기할 줄 아십니까? 구약 시대에 희년을 선포하고 종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내보내는데 종이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명기 15장 16-17절입니다.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이 종은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됩니다. 주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내리는 결단입니다.
자유한 여러분의 신앙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마치 부모가 자기가 번 돈을 마음껏 쓰고 놀러다니고 싶어도 자기를 낳으신 부모와 자기가 낳은 자식들. 그리고 형제들과 이웃들을 위해 절약해가면서 그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을 지키시며 자유를 잘 사용하십시오. 다른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른 성도들의 신앙을 잘 세워주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은혜와 진리 안에서 받은 자유는 여러분들뿐 아니라 교회와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도 유익하며 불신자들에게까지도 복이 되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를 허락하셨고 그 안에는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고상하고 거룩하며 탁월하며 영원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주신 은혜와 진리의 가치는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의 무엇을 주고 바꿀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탕진할 수도 있고 아니면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유 역시 그러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17절을 보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고 그로인해 주신 자유가 섬김으로써 증거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