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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현실화와 환상소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루어 질 수 없는 막연한 환상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꿈이 잠재되어 있다. 물론 집념과 오랜 노력으로 이런 꿈이 실제로 달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 소망임이 명약관화할 경우에도 언제나 인간의 내면에 떠도는 허황되고 덧없어 보이는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르셀 에메와 쿠르트 쿠센버그의 일련의 단편들과,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자젤' 시리즈, E. 네스비트의 '사미아드' 시리즈 등은 인간의 이러한 속성을 날카로운 직관과 더불어 따스한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환상소설들은 헛된 소망이 초자연적인 기적에 의하여 이루어질 경우 생겨나는 혼돈을 그리면서, 허황된 꿈의 현실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묻고 있다.
이들 환상소설들은 상당히 많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서로 다른 국가들의 작가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마르셀 에메는 프랑스 인이며, 쿠르트 쿠센버그는 스위스 태생으로 독일어로 글을 썼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미국 SF 거장이고, 네스비트는 영국의 빅토리아조 말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아동문학의 거목이다. 이것은 허황된 꿈 자체가 특정 문화권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은 보다 근원적인 것에 기인한다는 진실의 반영일 것이다.
1. 마르셀 에메
마르셀 에메는 본래 작가 지망생이 아니라 의학을 공부하던 의학도였다. 그러나 자신의 꿈과 희망이 의학이 아닌 문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과감히 미래가 보장된 의사로서의 길을 버리고 불확실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하였다. 의대를 중퇴하고 각종 막일을 전전하면서 작가로서의 꿈을 키우던 그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그의 소설 속에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주 등장하고 그들이 고난에 찬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마르셀 에메의 주인공들은 대개 소시민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들이 현실적으로 삶의 무게에 고통받는 이들의 비현실적인 꿈을 테마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필연성을 지닌다.
마르셀 에메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벽을 통과하는 사나이], [사빈느], [하늘을 나는 장화] 등의 일련의 환상적인 단편소설들이다. 이들 작품군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된 상황 속에서 쓰여졌고, 때문에 다분히 현실 도피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마르셀 에메의 주요 환상소설들은 현실 도피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진정한 예술 작품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이며, 이는 "소박성과 괴기성의 비범한 조화"라는 평을 들은 작가의 독특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음대로 벽을 뚫고 다니는 재주를 가진 괴도의 이야기를 다룬 [벽을 통과하는 사나이]의 경우를 보자. 이 작품의 주인공 뒤띠이유윌은 본래 하급 관리로 근무하던 착실한 소시민이었지만, 자신이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초인과도 같은 독특한 능력을 지녔음을 확인하고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벽을 마음대로 통과해 버리는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직장의 상사를 정신병원으로 보내 버리고, 절대로 침입할 수 없는 금고를 털게 되면서 괴도로 이름을 날린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자진하여 경찰에 체포되고, 자유자재로 탈옥을 감행하는 신출귀몰함으로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뒤띠이유윌이 괴도로 활약하는 장면들과 쌍떼 형무소 소장을 약올리는 내용 등은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신사 뤼팽]과 매우 유사하며, 심지어 일부 구절의 경우 아예 베껴 놓은 듯 똑같은 부분도 있다. 당시 프랑스 인들에게 국민적인 영웅 대접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뤼팽을 패러디하여 작품을 쓴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며, 신출귀몰하던 뒤띠이유윌의 비극적인 종말 속에 마르셀 에메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참된 주제가 숨어 있다.
세상에 거칠 것이 없어진 뒤띠이유윌은 남의 집에 마음대로 침입하여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벽 속에서 응고되어 버리는 파국을 맞게 된다. 기적과도 같은 초인적 능력을 사용하게 된 뒤디이유윌이 점차 이성적인 판단력과 도덕성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들은, 소박한 소시민 시절 억제되어 있던 여러 가지 욕망들이 마구 분출되어 버림으로서 내면의 가치관 붕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궤를 벗어난 초인적 능력을 제약 없이 사용할 때 일어나게 되는 가치관 붕괴는 [사빈느]에서 더욱 명료하게 펼쳐진다. 평범한 가정 주부로 지내던 사빈느는 가난한 화가와의 불륜을 위해 자신의 몸을 둘로 불리는 능력을 사용한다. 아무에게도 들통나지 않는 감쪽같은 이중 생활 속에 예전에 없던 기쁨을 찾게 된 사빈느는 결국 수 만 명으로 불어나 음란하기 짝이 없는 도탄 속에 내 던져지고, 도덕적 가치관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비참한 몰락을 당하게 된다.
마르셀 에메는 금지된 욕구를 현실화시키는 초인적 능력은 결국 그 당사자에게 혼란만을 가져다 줄 뿐이며, 그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기발한 상상력을 자유분방하게 펼쳐 놓으며 우회적으로 표현되고 있고, 범죄를 비롯한 각종 부도덕한 행위 역시 가차없는 질책보다는 원죄에 비롯할 따름이라는 다분히 관조적인 입장에서 유머러스하게 그리려 한다.
마르셀 에메의 환상소설 중에는 시간에 대한 가치관 혼란을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시간 배급 카드]와 [법령]의 경우 SF라 보아도 무방하다.
[시간 배급 카드]는 사회의 비생산적인 인구를 인위적으로 줄여나가는 생존 제한 조치를 통해 건전한 근로자들의 삶을 보장한다는 계획을 정부가 시행한다는 이야기를 다룬다. 모든 사람들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매겨 각각에게 허용된 생존 시간을 결정하고, 한 달에 그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날짜가 명시된 카드를 배급하여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지만……. 처음엔 남보다 많은 생존 시간을 허락 받은 사람들이 으스대며 살아가지만, 사람들 사이에 겪은 시간대가 서로 차이가 난다는 문제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중에 가서는 시간 배급 카드가 거래되는 바람에 혼란이 극대화되어 결국 이 제도는 폐지되고 만다. 이 작품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흘려 보내는 시간의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면서, 시공간의 왜곡으로 인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기발한 착상만큼이나 빈틈없는 구성으로 짜여져 있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법령]은 [시간 배급 카드]에서 시도된 시간에 대한 인위적인 통제를 극단적으로 확장한 경우를 다루고 있으며, 시간을 17년 되돌린다는 말도 안 되는 법령이 포고됨으로써 진짜로 주인공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17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겠다는 법령의 포고 이후 처음엔 아무런 현실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때문에 온갖 철학적 논쟁들과 형이상학적인 탁상공론들만 난무할 뿐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숲 속에서 잠시 길을 잃고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자 실제로 자신이 17년 전의 과거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러한 시간여행은 워싱톤 어빙의 [립 밴 윙클]을 정 반대로 되돌려 놓은 듯한 구조로 진행되어 간다. 주인공은 17살이나 젊어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젊고 활력이 넘치는 아내와 재회하고는 큰 기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그 동안 살아 왔던 경험들이 앞으로의 17년간의 삶을 김빠진 되풀이에 불과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좌절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한 시간의 굴레에 사로잡혀 지겨운 삶을 계속하게 되는 이야기는 켄 그림우드의 [리플레이]라든지, 영화 [시간의 블랙홀] 등에서 리얼하게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마르셀 에메는 주인공에게 미리 살았던 앞으로 다가올 17년간의 기억들을 통째로 망각하게 된다는 행운을 부여함으로써 고통스러운 반복을 살짝 피해가고 있다.
마르셀 에메는 당시 프랑스 문단에 만연해 있던 암울한 글쓰기를 배제하고, 재치 있는 문체와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솜씨로 기발한 상상력을 형상화하는 환상적인 작품들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말로도 여러 차례 번역되어 이런저런 선집에 작품들이 흩어져 실렸으며, 그의 대표작을 모은 단편집만 하더라도 '범조사', '과학과 인간사', '백상' 등에서 되풀이 간행되었다.
2. 쿠르트 쿠센버그
쿠르트 쿠센버그는 마르셀 에메와는 달리 형이상학적이고 예술적인 치장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단편들에서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소시민적인 마르셀 에메와는 거리가 있으며, 훨씬 귀족적이고 격이 있어 보인다. 마르셀 에메가 삶의 애환과 운명에 얽매인 소시민들에게 따스한 동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면, 쿠르트 쿠센버그는 오직 기발하고 환상적인 모티브를 있는 그대로 즐길 뿐이다. 그의 작품들은 기존의 단편들보다 훨씬 짧고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뚜렷한 기승전결 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만을 작품의 테제로 삼아 이야기를 흘려 보내고 있다.
쿠르트 쿠센버그의 수많은 아주 짧은 단편소설들은 호시 신이치의 Short-Short Story의 전범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호시 신이치가 SF에서 소재를 차용한 것 말고는 사실상 별반 차이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르트 쿠센버그는 순수한 환상을 토대로 기괴한 결말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평범한 일상사의 이야기를 테마로 삼을 경우라도 비틀기와 뒤집기를 통해 표현하기를 즐겼다.
쿠르트 쿠센버그 역시 마르셀 에메와 마찬가지로 기발한 상상의 세계를 익살이 넘치면서도 뛰어난 문예 오락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단순한 우화나 꽁트로 끝나지 않고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것은 그만큼 작가의 역량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셈이다.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는 쿠르트 쿠센버그의 작품들은 '책나무'에서 [장미 도둑], [성냥 전쟁], [유리 도시] 세 권 속에 작가의 대표작을 대부분 갈무리하여 번역 출간하였고, 이를 [바보는 웃지 않는다 1~3]라고 표제를 바꾸어 재출간하였다.
3. 아이작 아시모프 [작은 악마 아자젤]
아이작 아시모프는 부연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거장이며, SF 문단의 공룡이라 할 수 있다. "만성 집필 중독증"에 걸렸다는 말까지 있었던 그는 참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썼는데, 심심풀이로 그랬는지 혹은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썼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자젤(Azazel)' 시리즈라 불리는 아주 뛰어난 일련의 환상소설들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본래 '아자젤'은 본래 [성서]에 나오는 '아사셀'인데,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혼자서 뒤집어쓰고 광야로 쫓겨나는 속죄양을 말한다. 작품 제목 때문이었을까? SF가 아닌 분명한 환상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이 단편소설들은 '아자젤'이라는 아주 자그마한 도깨비가 인간들의 헛된 소망을 들어주면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소동을 그리고 있다. 초인적인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다가 도덕적인 가치관 혼란에 빠져 파국을 맞이하는 마르셀 에메의 작품들과는 달리,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은 악마 아자젤]에서는 도깨비 아자젤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기적을 베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소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언제나 엉뚱한 결과를 유발한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아자젤은 백수 건달 조지에 의해 인간 세상에 불려져 나오고, 조지가 자기 친지들의 덧없는 소망을 현실화 시켜 달라고 조르면 겉으로는 무척 귀찮아하면서도 대개 기꺼이 기적을 베풀어준다. 농구 선수에게는 언제 어느 때나 정확한 슛을 던질 수 있데 하고, 가수에게는 하루 동안 완벽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못생긴 여인을 아름답게, 술이 약한 여성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아자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순전히 남을 위해 기꺼이 기적을 베풀지만, 언제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다. 농구선수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아무 쪽에나 마구 골을 성공시키게 되어 농구를 그만두고, 미를 얻은 여인은 자신의 남편을 버리게 되었으며, 술이 세진 여성은 엄청나게 살이 찌고 만다. 갑자기 소원이 성취됨으로서 얻게 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혼란뿐이고, 그 혼란들은 결국 아자젤이나 조지의 선의와는 무관하게 소원을 성취한 자를 불행하게 만들뿐이다. 즉 불합리한 소원은 인간의 삶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뿐이지만, 그 불합리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딜레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자젤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다.
아자젤 시리즈를 읽다보면 아시모프가 본질적으로 유머 작가로서의 소질이 다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작품들이 언제나 불행한 결말로 도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유쾌하게 읽혀진다.
아자젤 이야기는 아동용으로 편집되어 조금씩 소개되어 오다가 '고려원'의 [코믹 SF 걸작선]에 그 개막편에 해당하는 작품이 실렸고, '작가정신'에서 [흰 눈 사이로 달리는 기분] 표제로 아자젤 시리즈에 대부분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리고 '한뜻'에서 나온 아시모프 유고 단편집 [골드]에 실려 있는 [칼]이라는 단편을 잘 살펴보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창작기계가 써낸 단편소설 중 한 편이 아자젤 이야기이다.
4. E. 네스비트 [사미아드 내 소원을 들어 줘]
아시모프의 아자젤 시리즈가 사람들의 소원을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테마를 다루는 아주 웃기는 이야기를 이미 하나 알고 있다. 꼬마 아이들 다섯이 동네 황무지로 달려가 모래 속에 파묻혀 사는 요정에게 매일같이 자기 소원을 하나씩 들어 달라고 조르고, 모래 요정은 언제나 기꺼이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지만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재난으로 직결되는 통에 한바탕 소동을 겪게 되는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카피카피 룸룸 카피카피 룸룸"이라는 주문과 함께 [모래 요정 바람돌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물에 절대로 닿아서는 안 되는 포동포동한 모래 요정 '사미아드'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작은 악마 아자젤]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모래 요정 바람돌이]의 원작인 '사미아드' 이야기는 영국 아동문학의 거장 에이트 네스비트(Edith Nesbit)의 [다섯 아이들과 그것(Five Children and it)]을 통해 처음 선보였고, 이 작품의 속편격인 시간여행을 다룬 SF [부적 이야기(The Story of the Amulet)]에서 다시 다루어진다. 사미아드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소원을 마구잡이로 들어주는 바람에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이 벌어지기 일쑤인데, 자신의 소원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과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미아드 간의 커뮤니케이션 부재가 문제의 핵심이다.
마르셀 에메의 작품들이 기적으로 인한 도덕적 가치관 혼란으로 파멸하는 주인공을 그렸고,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은 악마 아자젤]이 소원의 실현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이야기를 다룬 것에 반해, '사미아드' 이야기에서는 단 하루 동안만 소원이 유효하다는 제약 조건이 있기 때문에 성가신 사건들과 불행은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나게 된다. 어른들의 운명을 다룬 마르셀 에메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이야기와는 달리, 에이트 네스비트는 천진한 어린이들의 소원에 관계된 것이기에 면죄부까지 주고 있는 것일까? 하여간 작가는 아이들이 소원의 실현으로 인한 불행 속에서 자동적으로 구원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미리 마련해 둠으로써, 아이들의 운명이 소원에 좌우되지 않고 언제나 열린 가능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에이트 네스비트의 사미아드 이야기를 다룬 우리말 번역본은 '지경사'에서 편낸 축약본 [사미아드, 내 소원을 들어 줘 (Five Children and it)]가 유일하다. 그렇지만 애니메이션 [모래 요정 바람돌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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