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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33) 하느님의 구원 의지 깨닫게 된 투덜이 예언자 요나
더운 여름에는 공포영화가 제격이다. 서스펜스 영화의 달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어린 시절의 우연한 경험에서 연출의 바탕을 얻었다. 그는 어린 시절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부두에 있는 상선 숫자를 세어 자기 방의 벽에 기록하는 일을 즐겨 했다. 아들의 이상한 행동이 늘어가자, 아버지는 히치콕에게 친구인 경찰서장에게 편지를 갖다주도록 했다. 편지를 받은 경찰서장은 히치콕을 그대로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다. 유치장에 있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어린 히치콕은 긴장감과 불안, 공포를 경험했고, 풀려났을 때 느끼는 자유의 기쁨을 체험했다. 훗날 긴장과 공포에서 해방되었을 때의 후련한 기쁨이 온다는 것을 터득해 자신의 영화에 이용했다.
성경에서 여름에 볼만한 공포영화를 만든다면 단연 요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요나서는 한가지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의 계기가 됨으로써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이 흥미를 유발한다. 하느님께서 니네베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했을 때, 요나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줄행랑을 쳤다. 요나는 유다인을 억압했던 이방인들이 회개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어쩌면 요나는 편협한 마음을 가진 애국자였다. 요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기꺼이 했지만, 사악한 니네베의 선교사가 되는 일은 단호히 거부했다.
요나가 탄 배가 커다란 폭풍우에 휩싸였고 이방인 선원들은 제비를 뽑아 요나가 폭풍우의 원인임을 알아냈다. 이방인 선원들은 심한 폭풍우 때문에 배가 망가질 판이 되자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 폭풍우는 즉시 잠잠해졌다. 하느님은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했고 요나는 사흘 밤낮을 꼼짝없이 그 안에 머물러야 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고 사흘 후 나올 수 있었다.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잿더미로 변한다며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자 니네베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에 들어갔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자 하느님께서는 계획했던 재앙을 거두셨다. 요나는 니네베가 망하지 않게 되자 하느님께 불평을 터뜨리며 화를 냈다.
요나는 성을 떠나 초막을 치고 아주까리 나무 그늘에 앉았다. 시원한 그늘에 기분이 좋았는데 이튿날 벌레가 먹어 그늘이 사라졌다. 해가 쨍쨍 내리쬐자, 요나는 더위에 기절할 지경이었다.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며 투덜거렸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아주까리 나무하나가 죽었다고 화를 내는 것을 지적하며, 니네베에 많은 사람과 가축이 있는 것을 상기시켰다.
요나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이 너무 크고 신비롭다. 인간은 편협한 생각으로 은총과 축복 속에 살면서도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메시지에 민감한 반응 보이는데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를 닫고 있는 처사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구원에는 어떤 차별이나 특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5) 아이를 낳지 못해 서러움을 당하다가 아이를 얻은 한나의 기도(1사무 1-2장)
봉헌과 겸손의 자세로 보여준 참된 고백
사무엘은 반복적으로 이민족의 괴롭힘을 당하던 판관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민족을 인도한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으로서(1,2.5-8) 아들을 주십사 애절히 기원하고(1,10-13), 어렵게 얻은 사무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한나는 자기 민족 역사의 전환기 중심에서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한나는 아이를 못 낳는 데다가 남편의 다른 부인이 그를 괴롭히고 화를 몹시 돋우었기에(1,5-6)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합니다. 먼저는 남편 앞에서 울고(1,7) 이제는 주님 앞에서 울면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1,15) “주님의 면전에서 네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아라”(애가 2,19)는 말씀처럼 기도는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쓰라린 마음과 무거운 마음과, 괴롭고 분함을 그대로 털어놓습니다.
한나가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하는 동안 사제 엘리가 그의 입을 지켜보면서 한나를 술에 취한 여자로 오해했다는(1,12-13) 사실은 당시에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소리를 내어 기도했음을 추측게 합니다. 한나는 마음속으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침묵 속의 기도도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한나에게서 두 가지 자세가 눈에 띕니다.
첫째는 하느님 선물을 자신이 독차지하지 않고 아낌없이 다시 내놓겠다는 봉헌의 자세이고 둘째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자신을 꾸짖는 사제 엘리 앞에서 자신을 ‘당신 여종’으로 여기는 겸손의 자세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로 한나에게서 이미 변화가 감지됩니다. 울기만 하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한나는 기도 후에 음식을 들며 얼굴색이 밝아집니다. 또 기도의 구체적인 결과를 얻기도 전에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남편과 함께 주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후에 아이를 바치면서도 다시 두 사람은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이 사실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이는 현실의 어려움에 휩쓸리지 않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을 바친 한나는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이루시는 일의 근본적인 모습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1사무 2,1-10 참조) 한나는 넘치는 기쁨에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누구도 주님과 같지 않습니다”(2,2)는 고백은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은 없다”(탈출 9,14)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인간의 교만함과 거만함에 대한 경고입니다.(2,3) 뒤집어짐을 표현하는 열네 개의 반대말(2,4-7)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과 더불어 어떠한 인간적인 대단함도 그분 앞에서는 보잘것없으며 그것에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힘 있는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하느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역사를 이끄십니다.
이민족의 억압을 받던 이스라엘이 다윗 왕을 통해 ‘평온’(2사무 7,1)을 얻고, 엘리의 사제 가문이 몰락(1사무 2-4)한 뒤 사무엘의 등장하고, 사울이 선택되었지만 몰락하며(1사무 9-31), 한나가 사무엘을 바친 뒤 다섯 자녀를 더 얻었다는(1사무 2,19-21) 사실은 뒤집어짐을 노래하는 한나의 기도가 힘없는 이들의 하릴없는 독백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의 참된 고백임을 입증합니다.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봉인을 열다(묵시 6,1-8)
현실이 아름답고 행복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현실을 비현실로 만들어 놓는다. 성공주의… 그렇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성공해야 한다. 처절하고 지난한 삶의 현장을 어떻게든 바꿔 놓아야 한다. 새 세상에 대한 기대를 잔뜩 안고 우리는 어린양이 열어젖힐 봉인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적어도 ‘이 삶은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는 절박함을 지닌 채, 봉인을 쳐다본다.
묵시주의에 찌든 이들은 ‘봉인’을 ‘로또’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유다 사회의 숱한 묵시문학 작품들은 천상의 자리에 지상에서 ‘돈되는 것들’을 화려하게 진열하는 데 급급했다. 그리스-로마 문화 속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는 현실의 욕망을 투사한 이야기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희망하고 희망하는 것들로 인해 지금을 전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린양이 봉인을 해제하며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들은 어떠한가. 화려한가, 대단한가, 아니면 우리가 바랐던 바로 그것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인가. 불행히도 봉인이 뜯겨진 후,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인간이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 그 자체다. 네 마리의 말들이 각자의 색을 지니고 나타나는데, 천상의 영광을 가리키는 흰색, 전쟁과 불의를 상징하는 붉은색, 기근과 결핍의 검은색, 그리고 죽음의 색인 푸른색의 말. 서로 다른 색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우여곡절을 대변한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네 마리의 말들의 첫째 자리가 하얀색이라는 것. 고통과 슬픔을 가리키는 붉고 검고 푸른색들에 앞서 우리의 인생은 영광과 기쁨의 자리라는 것.
이제 우리에겐 해석의 숙제가 남는다. 고통과 슬픔의 자리가 영광과 기쁨의 자리와 교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숙제. 인생이란 게 그런 것 아닌가. 성공과 행복만이 지속되는 천국일 수 없고 슬픔과 고통만으로 짓눌리는 지옥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네 마리의 말들은 질서 정연하게 성공과 행복을 슬픔과 고통 속에서 지극히 사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사실, 이러한 관점으로 안내하는 건 다름 아닌 어린양 그 자신이었다. 죽음과 생명을 한 몸 안에 하나로 간직하는 어린양(묵시 5,6)은 봉인을 뜯어 흑백의 논리와 대립의 논리를 모조리 제거해 버린다. 그가 안내하는 세상은 저것을 부수어 이것을 살려 내는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죽어가도, 슬퍼해도, 살아나도, 기뻐해도 그 어떤 순간에도 어린양은 모든 것을 자신의 몸 안으로 수렴하며 우리와 함께한다.
주석학자들은 그런다. 어린 양이 봉인을 열어 보여 주는 것은 이 세상을 다시 보게끔 하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이 세상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묻는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냐고. 우리가 기쁠 때, 우리가 슬플 때,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다시 보는 것은 어떤 것이냐고.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가끔씩 생각한다. 마치 2000년 전 유다 사회의 묵시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로마 문화가 신들의 이름을 빌려 상상했던 것처럼.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달리 생각하고 달리 상상하고, 그래서 현실은 어떻게든 견디어야 할 객체로 남아 버겁기만 하다.
일곱 개의 봉인이 모두 열리는 묵시 8,1은 반 시간의 침묵을 언급한다. 그리고 곧장 일곱 천사의 일곱 나팔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늘은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는다. 하느님의 신비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고 우리에게 남은 건, 지금 살아가는 삶 자체다. 어린양이 봉인을 여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볼 새롭고 신비스러운 진리나 계시를 전해 주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제대로 직시하라고, 그 세상을 어떻게든 껴안아 보라는 격려와 위로가 아닐까.
사실, 영광스럽고 기쁜 인생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세 번째 검은 말의 출현에서 얼마간 짐작할 수 있다. 네 생물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목소리가 이러했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이며 보리 석 되가 하루 품삯이다.”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가정했을 때, 어떤 목소리가 말하는 밀 한 되의 값은 1세기 당시 거래되는 가격의 여덟 배에 가까운 금액이다. 검은 말을 타고 있는 이가 들고 있는 저울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경제적 상황을 상징하며 서민이 감당해야 할 힘겨움을 암시한다. 오늘도 여전히 서민은 힘들고 재화의 편중은 심각하다. 인생이 고달픈 건, 나누지 않아서다. 서로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아서다. 서로의 경쟁과 경쟁을 위한 개인의 처절한 노력이 당연시되는 현실에서 이런 생각은 너무 순진한가. 경쟁과 그를 위한 노력에 익숙한 나머지 서로의 능력으로 서로를 향해 승부수를 띄우는 현대사회를 폴란드 사회 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은 ‘액체 현대’로 요약한 바 있다. 서로의 다양한 욕구가 발산되면서 우연과 혼돈,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상은 그 자체로 ‘액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기댈 만한 귄위도, 챙겨야 할 정체성도, 뜨겁게 지켜야 할 신념도 제거된 개인’의 절박한 사냥터가 현대 사회라는 말이다. 결핍과 기근을 가리키는 세 번째 말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는 두 번째 붉은 말의 당연한 결과이리라. 서로가 서로를 사냥하는 ‘액체 현대’의 메타포가 붉은 말이고 그 ‘액체 현대’의 실체가 검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르다. 어린양을 기반으로 탄탄한 성을 쌓고 열두 개의 문을 모든 민족들에게 열어젖히고 되도록이면 많은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는(묵시 21장 참조), 그래서 살아가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모조리 전가하지 않고 공동체의 친교 안에 함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고달프고 외로울 수 있다. 배고픈 이를 위해 밥 좀 나누자고 말해야 하고, 목마른 이를 위해 함께 마시자고 외쳐야 하기에. 어린양이 봉인을 열어 놓는 건, 우리 신앙인이 현실 안에서 해 나가야 할 친교의 과업을 제안한 것이리라.
세상을 달리 보기 전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 현실의 어려움과 부조리와 슬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기쁨과 행복의 전제 조건이 아닐까. 세상은 하얗다. 세상은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이 가득한 곳이다. 그런 현실이 아픈 건, 이 세상 말고 저 세상, 다른 세상을 꿈꾸는 우리의 비겁함 때문이 아닐까. 지금 우리 인간의 삶 안에 태어나시고 살으시고 죽으셨던 예수님 어린양이 봉인을 열어 다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가 사는 이 삶이 부디 아름답고 행복하기를… 못나고 슬프고 아픈 삶도 그 어떤 삶보다 소중하고 황홀한 삶이 되기를…, 어린양은 우리를 다그친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모압 여자 룻의 속량과 수숙혼(嫂叔婚)
룻기는 구약성경에서 드물게 이방인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인 책입니다. 여기엔 베들레헴의 기근을 피하여 모압으로 이주했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와, 귀향하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봉양한 모압 며느리 룻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둘의 운명을 반전시켜준 배경은 옛 이스라엘에 존재했던 속량 제도(레위 25,23-31)입니다. 속량 제도는 ‘백성이 가난 등의 이유로 가산을 팔았어도 언제든 되살 수 있다.’는 원칙을 골자로 합니다. 본인에게 능력이 없으면 형제나 친족이 대신 대가를 치러줄 수 있었는데요, 이런 대속자를 성경에서는 “구원자”(레위 25,25; 룻 4,3-4 등)라고 칭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조언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보아즈 곁으로 가 “어르신은 저의 구원자이십니다.”(룻 3,9)라며 자신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지요.
룻기에는 나오미의 밭과 룻의 수숙혼이 모두 속량의 대상으로 나오지만(4,3-6), 사실 수숙혼이 속량 문제와 관련되는 건 룻기에만 등장합니다. 밭의 속량은 레위 25,23-31에 규정되어 있으나, 과부의 속량에 관한 율법은 오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명 25,5-10의 수숙혼도 방계 친족이 아닌 직계 형제 간에 적용되던 율법입니다. 그런데 룻에게는 보아즈보다 “더 가까운 구원자”(룻 3,12)가 있었기에, 율법에 의하면 보아즈는 첫 번째 대상자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고인의 형제가 수숙혼을 거절한다 해서 그 의무가 다음 형제나 친족에게 자연스레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창세 38장에 등장하는 유다의 며느리 타마르의 경우는 직계 형제들이 차례로 수숙혼을 한 뒤 세상을 떠났기에 그 의무가 계속 넘어갔던 것입니다. 만약 그 의무가 한 형제의 거절로 다음 형제나 친족에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거였다면, 그 의무를 거절한 형제에게 침을 뱉어 수치를 주게 한 신명 25,9의 조치는 애초에 정당한 게 아니었을 터입니다. 더구나 신명 25,7에 따르면, 과부가 나서서 시숙의 의무 이행을 촉구할 수 있는데, 룻기에서는 룻도 나오미도 보아즈에게 그런 촉구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밤을 틈 타’ 보아즈의 구원자 권리 수행을 유도하는데, 보아즈가 스스로 그리 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아즈보다 우선권을 지녔던 다른 친족은 밭의 속량과 함께 ‘과부의 속량’, 곧 룻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룻 4,5-6).
그러므로 룻의 수숙혼은, 전적으로 유다인 시어머니와 이방인 며느리 사이에 형성된 특별한 고부 관계에 감동한 보아즈가 자비심으로 행한 결과입니다. 보아즈는 밭의 속량권에 룻의 수숙혼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친족으로서 도덕적 의무감에 이 둘을 묶은 듯합니다. 말하자면,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그 임무를 행하여 고인이 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이름을 잇고 나오미에게는 며느리와 자손을, 룻에게는 보호막을 제공해주려 한 겁니다.
이렇게 상대방에 대한 연민과 자비의 마음은 사랑으로 발전하여 이후 룻과 보아즈의 후손은 다윗 가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인류를 위하여 스스로 희생하신 구세주의 계보로 성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섬기는 사람, 모든 이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마르 10,35-45)
갈릴래아에서 얼마나 멀리 왔을까?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엉켜만 갑니다. 이미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헤로데 당원들에게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로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정치적 계략으로 자신의 스승을 해하려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 스승님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라고 벌써 세 번이나 말씀하시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사람들을 모아 잔혹한 로마제국의 압제를 물리치고 민족의 진정한 정치적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그들의 귓가에서 소곤거립니다.
제자들이 이런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 갑자기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을 드립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 ‘이런 약아빠진 사람들을 보았나.’ 다른 제자들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두 사람을 쏘아붙입니다. “너희가 뭔데 우리는 빼놓고 스승님께 높은 자리를 달라는 것이냐. 너희 형제만 스승님의 제자냐?”
이미 그들 가운데 서열을 다투며 논쟁을 벌이다가 스승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에도(마르 9,33-37 참조)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으로 또 말씀으로 그동안 수도 없이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당신이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그 끝에 어떤 영광이 자리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이 지상에서 메시아의 왕국을 세울 것이고, 그때가 되면 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높은 자리만 차지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섭섭함, 아니 답답한 마음마저 드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다시금 제자들을 다독이며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마르 10,38) 그러면서 당신이 받아야 하는 잔, 당신이 받으셔야만 하는 세례를 받을 수 있냐고 물으시자,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마르 10,39)라고 장담합니다. 과연 두 제자는 스승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과 세례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으로 겪게 될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세속적인 영예와 영광이 아닌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면서 겪어야 할 고통입니다. 대답은 시원하게 잘했지만, 두 제자는 이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다른 제자들이라고 해서 나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당신이 영광스럽게 부활할 때, 당신이 온 삶으로 보여주신 사랑으로 다른 이를 섬기고 다른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사랑으로 완전히 자신을 내어줄 때, 비로소 하느님 안에서 진정 높은 사람, 첫째가 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랑으로 섬기고 서로에게 낮은 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면서도 늘 높은 자리, 영예로운 자리,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만을 원하는 우리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떤 마음이실까요?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모세의 죄와 벌
유다 광야 맞은편에 자리한 모압 평야의 느보산에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을 이끈 예언자 모세가 잠들어 있습니다. 한 무리의 노예 집단에 지나지 않던 이스라엘을 가나안 입구까지 이끌며 당당한 민족으로 성장시킨 지도자입니다. 신명 34,10은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전합니다. 그런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신명 34장), 이는 마싸와 므리바에서 지은 죄 때문이었습니다(민수 27,14; 신명 32,51). 바로 탈출 17,1-7과 민수 20,2-13에 서술되는 사건입니다. 다만 민수기에는 마싸 없이 므리바만 나와 지명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어쩌면 한 장소를 칭하는 지명이 두 개여서 민수기에는 그 가운데 하나만 쓰인 것일 수 있습니다. 마싸와 므리바가 병행어로 등장하는 신명 33,8과 시편 95,8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줍니다.
민수 20,2-13의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체에게 마실 물이 없었다··· 백성은 모세와 시비하면서 말하였다··· ‘어쩌자고 당신들은 주님의 공동체를 이 광야로 끌고 와서··· 죽게 하시오? ··· 여기는 곡식도··· 석류도 자랄 곳이 못 되오. 마실 물도 없소.’ ···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지팡이를 집어 들고··· 저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마시게 하여라.’ ··· 모세가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바위 앞에 불러 모은 다음,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반항자들아,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 주랴?’ 그러고 나서 모세가···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과 시비한 므리바의 물이다.”
이 일에서 모세가 지은 죄는 흔히, 주님께서 ‘바위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낸 데 있다고 해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바위를 두드리지 않을 거면 하느님께서 지팡이를 왜 집어 들라고 하셨을까요? 더구나 같은 사건에 대해 말하는 탈출 17,1-7에서는 모세가 지팡이로 두드려서 물을 냅니다. 여기서 모세의 죄는 지팡이로 바위를 친 것보다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주랴?”라고 말한 데 있는 듯합니다. 곧 물을 내게 하는 힘은 하느님께 있는데 주님의 거룩함은 드러내지 않고, 마치 그 힘이 자신과 아론에게 있는 양, 백성이 모두 보는 앞에서 스스로 과시한 것입니다. 이 일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을 바로 마주한 곳에서 잠들게 됩니다. 대신, 그의 시종으로 활동을 시작한 여호수아가 탈출 2세대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실 모세가 이집트 탈출 과정에서 보인 활약상을 생각해보면, 그에게 내린 벌은 과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운명을 선고받고도 불평 한마디 없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한 모습은 신명 34,10이 언급한 모세의 위대함을 엿보여 줍니다.
[성경, 다시 보기] 생명의 빵 = 씹어야 맛이 난다
흔히들 “오병이어(五餠二魚)”라고도 하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마태오 14장, 마르코 6장, 루카 9장, 요한 6장). 그런데 유독 요한 복음에서는 그 사건 이후, 몸을 피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찾아 나서고 그분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그분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육신을 배 불리는 빵이 아니라, 그 표징으로 인해 어떤 숨은 뜻을 드러내시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표현으로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2) 이 말씀과 함께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십니다. 이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고,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보고 믿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도 합니다. 세 번째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말씀으로 “생명의 빵인 그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고 하십니다. 그분이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말씀과 함께하신 것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 문제의 심각성이 생겨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기를 포기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시몬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으로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생명의 빵이 무엇인지를, 그분께서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시고자 하는 당신의 살과 피가 무엇인지를! 그것은 당신의 살과 피, 즉 당신 전부를 주시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신의 말씀, 즉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새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살을 먹는다는 단어입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φαγειν-파게인)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φαγητε-파게테)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이 두 단어(파게인과 파게테)는 먹다라는 단어 “에스티오(εσθιω)”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세 번(요한 6,54; 6,56; 5,57), “내 살을 먹고(ο τρωγων-호 트로곤)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이란 표현에서는 먹는다(에스티오)라는 단어 대신 씹는다(트로고)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요한 6,58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εφαγον-에파곤)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ο τρωγων-호 트로곤)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었다”에서는 에스티오(먹다)라는 단어가, “이 빵을 먹는 사람”에서는 트로고(씹다)라는 단어가 구별되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이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생명의 빵은 먹는 빵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빵은 먹는 것이지만, 말씀은 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먹는 것이 아니고, 뜻을 깨치고 깨달을 때까지 씹고 씹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두 단어를 구별하여 번역한 것은 킹 제임스(1611/1769) 영어 번역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