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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여자 복사, 여성들의 봉사에 대한 교회의 자세는?
대축일 미사에 여자 어린이 복사는 봉사할 수 없나요? 성인 복사로 봉사하는 여성도 보기 쉽지 않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여성이 복사로 봉사하는데 특별한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본당마다 사정이 다르니 본당 신부님들의 안내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남성만 복사로 봉사하던 시절이 있었나요?
네, 분명히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복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제대 위의 복사 말고, 다른 종류의 복사도 포괄하는 말이었습니다. 즉, 예전에는 선교사나 신부님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남자 교우만 그 역할을 했었습니다. 1887년 <한국 교회 지도서>에 보면 관련 규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남자 교우여야 하고, 신부님과 함께 넓은 사목 관할 구역을 함께 여행하며 다녀야 했기 때문에 너무 나이가 많아도 안 되고, 또 너무 젊어서도 안 된다는 규정이 그것입니다. 심지어 복사에게 간식으로 술을 대접해서는 안 되고, 여교우들과 함께 있어서도 안 된다는 규정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점차 신부님의 시중을 드는 복사들에서 미사 복사가 분리됩니다. 다만, 미사 복사는 처음에는 교회의 공적인 직분을 받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시종품이라는 이름의 ‘품’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당시에 품을 받을 수 있는 남자만 복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종품이 시종직이라는 이름의 일반적인 교회 직무로 바뀌면서 (남성)평신도도 할 수 있게 되었죠.
여성이 복사 봉사를 할 수 있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69년에 발표된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이었습니다. “부제 이하의 모든 계층이 수행할 수 있는 직무는 시종직이나 독서직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에게 맡길 수 있으며, 사제석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직무는 본당 신부의 재량대로 여성에게도 맡길 수 있다.”라는 규정이 포함되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94년도에 교황청에서, 교구장이 허락하면 미사 복사를 소녀들에게도 허용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면서 어린이 여성 복사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개정된 미사 경본 총지침도 “제대에서 사제를 돕는 임무는 주교가 자기 교구를 위해 정한 규범을 따른다.”(107항)라고 동일한 맥락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여성들의 봉사에 소극적인 것 아닐까요?
우리 교회는 교회 내 여성의 중요성을 거듭 표명해왔습니다. 지난 2016년에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의무 기념일이 축일로 승격된 변화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승격을 선포하는 교령을 발표하면서 당시 경신성사성 아서 로시 대주교님은 “이번 결정은 여성의 존엄성 …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라고 발표하셨습니다.
복사를 비롯한 전례 봉사와 관련해서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난 2021년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독서직과 시종직을 여성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신 것이 바로 그 변혁의 핵심입니다. 물론 독서직과 시종직을 받지 않았어도 평신도들에게 해당 직무의 일이 이미 개방되어 있었지만, 이번 선포는 교회의 변화 의지를 교회의 직무에 제도적으로 연결하여 공식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교회가 더욱 열린 교회가 되길 바라는 교황님의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톨릭 신학28] 흠없이 거룩한 교회, 그러나 불완전하게 거룩한 교회
<교회헌장>에 따르면,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아니, “흠 없이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 ‘거룩한’ 앞에 ‘흠 없이’라는 말이 있는 거지요. 혹시 이 고백이 망설여진다면 아마도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들, 혹은 누군가가 떠올라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조금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바로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 없이 하루를 보낸 적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의인도 하루에 일곱 번 넘어진다고 하니, 그것은 인간 자체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실 완전히 거룩한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교회는 ‘불완전하게’ 거룩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교회가 ‘흠 없이’ 거룩하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에페 5,25-27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은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흠 없이’ 거룩합니다.
‘흠 없이 거룩한 교회’라는 말은 우리들 개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근본적 행위들에 대한 것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성사를 통해 구원의 은총을 전하는데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올바른 선포와 성사의 유효한 거행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계제도가 보증합니다.
한편 교회 안에는 완전히 거룩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교회헌장 8항)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죄인은 어떤 특정인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모두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께 속함으로써 거룩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저마다의 부족함을 품고 이 거룩한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거룩함은 선물이자 동시에 과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고 말씀하실 때, 사랑이 선물이자 명령인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회에 속해 있으므로 거룩함을 선물로 받았고, 동시에 교회 그리고 우리는 충만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주님이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1,44-45; 1베드 1,16) “너희는 거룩하니, 거룩해져라.”(콜로 3,12; 1테살 4,3-7; 2테살 2,13 참조) 다시 말해, “너희는, 너희인 바로 그런 존재가 되라.”는 명령입니다.(교회헌장 5장 참조)
그리고 이 명령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완전한 신의를 지켜 자기 주님의 어엿한 신부로 살아가며, 성령의 활동 아래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쇄신하여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결코 꺼질 줄 모르는 빛에 이를 것이다.”(교회헌장 9항)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34.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545항)
하느님을 잊은 인간과 세상의 결말은…
“우리는 영적으로 하느님과 가까워지길 원하면서도 영적인 삶을 어렵게 여긴다. 하지만 성인들처럼 하느님과 가까이 살면서 뛰어난 영성을 지닌 이들도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영성을 키워 나갔다.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가 ‘머리핀 한 개를 줍더라도 사랑으로 행한다면 한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로버트 윅스 「영적 성장」)
영성이란
신앙생활하면서 종종 듣는 말이 있습니다. 영성입니다. ‘한국 순교자의 영성’, ‘생태 영성’, ‘영성 훈련’, ‘성인들의 영성’ 등에서 보듯 영성이란 말은 자주 쓰입니다. 영성은 사전적으로 신령한 속성, 비물질성, 더 나아가 신을 뜻하기도 합니다. 모든 종교가 영성을 추구하듯 가톨릭교회에도 고유한 영성이 있습니다.
먼저 영성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은 인간은 영적 존재이며(창세 2,7) 우리 안의 영성은 삼위일체이신 주님을 통해 형성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언급하듯 영성은 육적인 것과는 반대 개념이며 가톨릭교회 안에는 다양하고 각기 고유한 종류의 영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의 핵심은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르는 삶입니다.
영성, 사회교리의 중요한 핵심
가톨릭 사회교리에도 영성에 대해 강조한 부분이 많습니다. 인간 마음에 자리한 영성의 중요성(114항), 영적 존재인 인간(129항)을 얘기하고, 사회는 영적 실재이며 영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합니다.(386항) 또한 가톨릭교회가 추구하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요한 14,27) 영적 평화라고 말합니다.(491항)
그래서 세상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영성을 계발해야 하고(545항), 영적인 성장을 통해 사랑의 문명이 건설된다고 합니다.(545항) 또, 영성을 통한 결실이 있으니 바로 10가지 덕입니다. 사랑, 희망, 믿음(향주삼덕), 용기, 지혜, 정의, 절제(윤리덕 혹은 사추덕), 청빈, 정결, 순명(복음 3덕)입니다. 이런 덕들이야말로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육적인 생활이 아닌 영적 생활로
오늘날 신앙생활의 약화는 현 세대가 영성과 멀어져, 육적인 생활로 기울었음을 뜻합니다. 건전한 여가와 쉼, 물질의 편리를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 영성, 덕, 복음과 성경, 신앙의 가르침을 도외시하고 물질적 가치에만 몰두한다는 뜻이지요. 향락과 오락 등 영성 없는 웰빙만이 우리의 이목을 끌지는 않나요?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잊은 사회, 그래서 사랑과 용서가 사라져 가고 권리와 욕심에만 몰두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이 많은 병거와 건축물, 무역 활동을 했음에도(1열왕 9-11장) 그가 하느님을 잊어 우상숭배에 빠진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의 말로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임을(2열왕 25장) 담담히 썼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잊은 인간과 세상은 스스로 어려움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육적인 생활이 아닌 영적인 생활로의 회심이 우리 모두에게 요청됩니다.
“영성은 예수님의 성령을 따라 세상을 건설하게 하며, 사람들이 역사와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초월해 볼 수 있게 하고, 자기 형제자매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열정적 사랑을 기르게 하며, 주님께서 그들을 바라보시듯 그들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듯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간추린 사회교리」 545항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34. 기도의 길잡이(「가톨릭교회 교리서」 2683~2696항)
가장 확실한 기도의 스승은 ‘교회’
우리는 기도를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배워야 할까요?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기도를 배울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완덕의 길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의 손에 자신을 맡길 것인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스승에 그 제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2690)라고 말합니다. 올바른 기도의 스승을 길잡이로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확실한 기도의 스승이 ‘교회’뿐임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내려주시며 교회를 세상에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참으로 성인들의 처소입니다.”(2684)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하늘 나라에 들어간 증인들, 특별히 교회가 ‘성인’으로 인정하는 이들의 모범적인 삶과 전해 오는 그들의 글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도 살아있는 기도의 전통에 참여하고 있습니다.”(2683)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토니 던지는 1996년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 역사상 최악의 팀으로 평가받던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신임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던지의 가르침으로 최악의 팀이 강력한 팀으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강팀으로 변모한 버커니어스가 플레이오프에 나가 큰 경기를 할 때면 매번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2년 연속 슈퍼볼 경기에 진출하지 못하자, 던지는 해임당합니다. 다행히 한 해 동안 참담한 시즌을 보낸 ‘인디애나폴리스 콜츠’가 그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합니다. 그러나 버커니어스 때와 같은 문제가 계속 발생하였습니다.
콜츠가 정규 시즌을 14승 2패의 역사상 최고 성적으로 마친 2005년 성탄절에 끔찍한 비극이 닥쳤습니다. 던지의 큰아들, 제이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힘이 팀 전체를 감쌌습니다. 모두가 감독을 위로하기 위해 전적으로 감독을 믿고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 다음 해에 콜츠는 슈퍼볼을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두 번이나 좌절시켰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역사에 남을 명경기로 역전승하며 승리합니다.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피의 힘이 작용하는 팀은 하나로 일치합니다. 그 팀 안에 있었던 선수들은 진정 한 감독 아래 한 팀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그리스도의 피가 흐릅니다. 그 피의 힘을 얻으려면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교회와 연결되지 않고 지나치게 사적으로 치우치다 보면 교회 안에서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에서도 멀어집니다. 고독한 은수자라 해도 그를 그 수준으로 만든 스승과 친구, 그리고 제자도 반드시 존재합니다. “마치 엘리야의 ‘정신’이 엘리사와 세례자 요한에게 전해졌던 것처럼”(2684) 개인이 받은 특별한 은총은 공동체에 통합되고 친교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당신 아드님의 피와 같은 성령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교회와의 “친교에 대한 열망이 참다운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징표”(2689)가 됩니다. 교회에서 성인들에게 배워야 하고 부모에게 배워야 하며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나의 기도가 교회의 기도가 되고 교회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될 때 기도의 여정에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톨릭 신학27]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으시나요? 이 신앙고백이 어떤 분들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어떤 부정적인 것을 체험하신 적이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믿을 교리입니다. 이 신앙고백이 좀 더 진실한 것이고, 이 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더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고백의 내용을 이해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먼저 ‘거룩하다’라는 말의 의미부터 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단어는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거룩하신 분’인 것만이 아니라 거룩함 자체이십니다. 그분은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분이고,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거룩하시고, 하느님과 관련 있는 집, 물건, 장소, 등등에 대하여 ‘거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성전, 성물, 성소, 성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탈출 19,6; 신명 7,6 참조)으로서, 다른 백성들과 구분되는 동시에 다른 백성들과 다르게 처신할 의무가 있는 백성이며, 한 분이요 유일한 하느님만을 섬길 의무가 있는 백성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한편 신약에 와서 거룩함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 이해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마르 1,24; 루카1,35) 성령으로 도유되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과 같은 한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도’(2코린 9,1; 9,12 참조)라고 불립니다. 한 마디로, 구약이든 신약이든 거룩함이란 하느님과 맺는 관계라는 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함 또한, 교회를 구성하는 어떤 개개인에서 출발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교회는 흠없이 거룩하다고 믿어진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시다’고 칭송받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 사랑하시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으며(에페 5,25-26 참조),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이 되게 하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주셨기 때문이다.”(교회헌장 39항)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한 마디로 교회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부의 뜻에 따라 성자께서 당신을 바쳐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당신의 신부이며,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모든 사람 안에서 실현하시면서 교회를 살게 하시고, 일치시키고 젊어지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은 이 교회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거룩함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33.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145항)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이 사회교리의 목적
“하느님께서는 결코 나로부터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신앙 안에서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항상 진리를 따르십시오.” (존 디어 「내 삶이 메시지다」)
훌륭한 비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세간의 귀감이 될 만한 훌륭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중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6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라고 말한 인도의 국부(國父) 간디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꼽습니다. 1930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이기도 한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무상해, 비폭력, 무소유의 사상을 통해 많은 주옥같은 가르침을 인류 가족에게 선물했습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3등 칸으로 여행해야 합니다.”, “비폭력은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 중 한 명은, 바로 간디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간디는 인도의 독립과 국민의 존엄성이 지켜지길 간절히 염원했지만 그것 때문에 한 사람도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가난한 이웃들과의 연대를 위해 스스로 노동하며 검소한 삶을 살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삶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스스로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입니다.
물론 그의 생애는 고단했고 인도의 많은 선한 사람들은 강대국의 압제 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함을 지키려 한 간디와 많은 이들의 노력은 가장 귀한 것을 지켰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가톨릭교회도 사회교리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며(「간추린 사회교리」 260항 참조) 평화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 곧 흠 없음을 특징으로 하는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488항)
사회에 만연한 미움과 증오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사회교리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수많은 성인들, 그리고 간디가 보여 준 것처럼 사랑, 기도, 노동, 검약, 이웃에 대한 자애로움을 지향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강조합니다. 더욱이 이런 덕목들은 지도자와 위정자들에게 더 절실히 요청됩니다.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적대시하며 싸워야 한다고 하고, 증오와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악순환을 불러올 뿐입니다.
법과 원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대화와 타협, 포용과 관용도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7가지 악덕을 제시했고 그중에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나부터가 하느님의 가르침, 물질만이 아닌 영성을 추구하는 삶, 화해와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의 선을 진심으로 위하는 개개인과 민족들의 상호 활동을 통해서만 진정한 보편적 형제애가 이루어질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45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