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과학자에 도전하라
유치 의대반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의대 광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안정성과 수익, 사회적 지위 3가지를 다 갖춘 유일한 직업이 의사라는 인식이 가득차 있는거죠. 대학 입시에서 모든 서울대 학과 위에 지방 의예과가 있을 정도입니다.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의대를 간다거나, 떨어지면 서울대 공대... 과학자를 양성하겠다고 국가가 돈 들여 뽑아놓은 영재고 학생들도 의대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서울대 등 메이저 의대는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영국 대학평가기관인 'THE'가 평가한 세계대학평가 의학부문 순위에서 연세대 의대는 32위, 서울대 의대 41위, 성균관대 의대는 82위였습니다. 중국의 칭화대 의대가 5위고 영국 옥스퍼드 의대가 1위, 2위 역시 영국 케임브리지대 의대였습니다. QS 대학순위도 서울대와 연세대 위치만 바뀌었을 뿐 비슷합니다. QS 아시아 1위는 아시아 1위는 싱가포르대.
그렇게 가기 어려운 의대, 그것도 메이저 의대 들이 세계 대학순위에서는 저렇게 아랫쪽에 있는겁니다. 의대 평가 순위는 연구실적(27.5%), 교육 여건(27.5%), 논문 피인용도(35%), 국제화(7.5%), 산학협력 수익(2.5%) 등 5개의 지표인데 보시다시피 연구실적과 교육 여건, 논문 피인용도 3가지를 합치면 90%나 됩니다.
정부는 의사이면서 과학자로서 훈련을 받은 의사과학자 집중 양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기초과학과 임상 두 영역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균형있게 갖춘 전문가로서 신약 개발이나 바이오 분야 혁신을 선도하라는 겁니다. 최근 25년 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의 37%, 상위 10개 제약회사 대표과학책임자의 70%가 의사과학자입니다. 화이자와 모더나에서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주도한 사람들도 모두 의사과학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이런 의사과학자를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연간 4,000명 가까운 의치대 졸업자들이 나오지만 대부분은 임상의가 됩니다. 전공의 과정 대신 기초의학 연구를 선택하는 이사과학자 지망은 연간 30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모두들 돈 벌기 위해 '피안성'으로만 몰려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피안성: 피부고 안과 성형외과)
그럼 의사과학자는 돈을 못버냐. 천만에 만만에 말씀입니다. 의료연구분야는 반도체보다 3배나 큰 시장입니다.그런데도 국내 바이오헬스 산업은 1조 7천600억달러 규모의 세계 시장에서 몇년 째 점유율 2%의 덫에 갇혀 있습니다.
미국 의대의 경우는 한해 졸업생 4만5,000명 중 3.7%에 해당하는 1,700명이 의사과학자로 육성되고 있지만, 국내 의대는 그 비중이 1% 미만에 불과합니다. 도전해볼만한 분야입니다.
의학은 의학과 과학이 합쳐진
궁극의 융합학문으로서, 대한민국의
'브레이크스루(한계를 돌파하는 혁신)'가 될 것
-안철수 의원
KAIST와 포스텍 같은 과학기술 중심 대학들이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새 교육 과정 설립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기존 의대에서 의사과학자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의사과학자 양성이 의사 정원 확대로 이어지리란 우려도 있습니다. 이주호 부총리는 카이스트·포스텍 의대 설립을 지원하고 복지부는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연일 강조하는 분위기입니다. 현재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 그대로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국민들이 골든타임 내 필수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늘려놓으면 또 피안성 정재영으로 몰려갈 것이라는 우려도 가득합니다. 하지만 이미 국회에는 의대 신설 관련 법안만 12건이 발의된 상태. 절대적인 공급 부족을 늘리겠다는 겁니다.
의사과학자 양성 위해 서울대병원과 하버드·MIT 손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대학들은 치열한 '의사과학자' 양성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서울대병원은 하버드의대와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 'Harvard-MIT Health Sciences and Technology(HST)'를 수립하고 의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의사과학자를 배출하고 있는 미국 MIT와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서울대는 HST와 협력해 인재 양성 체계를 갖추고 연구에 집중하는 교수제를 만들어 의사과학자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고려대 의대도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고 의대생부터 전임의까지 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입니다. 장학금을 대폭 지원해서 바이오 메디컬 산업을 육성시킬 융합형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겠다는겁니다. 고대 의대는 지도교수와 학생 을 1:1로 매칭해서 60편 이상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하는 성과를 냈고,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사업에 2회 연속 주관기관으로 선정됐습니다. 경희대, 영남대, 부산대, 전북대, KIST와 컨소시엄을 만들고 2022년부터는 한양대, 중앙대, 영남대, KIST와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융합형 의사과학자 15명을 배출했고, 현재 11명이 과정을 이수 중입니다.
또, 전일제 박사과정 사업, Physician-Scientist 사업과 혁신형 의사과학자 사업을 통해 엘리트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을 취진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대의료원 소속인 전공의나 임상강사가 의사과학자 양성 과정 중 하나인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하면 입학금 50%와 등록금 80%를 지원합니다.
KAIST 의학과 공합을 융합한 8년 과정의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 과정 추진
KAIST는 3년 간의 집중적 의학 교육과 1년 간의 의학 및 인공지능(AI), 바이오 융합 교육을 실시하는 의사과학 기초 과정 후 다시 의학과 과학을 융합한 4년 박사 과정을 밟는 커리큘럼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전 문지캠퍼스에 420억원을 투자해 혁신 디지털 의과학원을 설립, 첨단 의과학 연구와 바이오 의료 분야 창업 지원의 본거지로 키우기 위해 현재 KAIST 본원에 있는 의과학대학원을 새 캠퍼스로 이전합니다. 김하일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축구로 보면 지금의 의사과학자가 의학과 과학을 잇는 미드필더였다면, KAIST는 창의적 융합을 가능케 할 윙어를 키우려 한다고 말합니다.
KAIST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 교육 과정 (자료=KAIST)
하지만 기존 의료계는 대학 중심의 의사과학자 양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의대가 있는 대학은 보통 공과대나 자연대, 보건대 같은 기존의 생태계를 활용해서 연구중심 의대를 만들수 있다는 겁니다. 기초의학 분야 연구기관 및 연구자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고, 미국 하버드대와 MIT, 보스턴 지역 병원과 같이 의대와 과학기술 특성화대학 간 컨소시엄을 활성화하겠다는 겁니다.
어쨌든 임상 경험의 한계는 과기중심 대학의 단점, 임상의 육성에 초점을 맞춰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는 것은 의대의 단점입니다. 의사 정원도 민감한 문제입니다. 의료계는 의사과학자 양성이 의사 정원 확대로 이어지는 것에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KAIST와 포스텍 등은 연구개발과 창업 중심의 교육을 받은 의사과학자들이 개원 임상의가 될 확률은 낮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KAIST가 추진하는 의학 교육 과정엔 레지던트 과정이 없고, 개원의를 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추가로 마련하겠다는것이 카이스트의 입장입니다.
의사과학자 과연 과학자로만 남을까?
임상의(의사)가 되면 안정되고 예측가능한 경력을 쌓을 수 있지만, 의사과학자는 연구비가 부족하고 안정적 일자리를 얻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임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의사는 연구자 경력을 포기할 가능성이 큽니다. 의학박사와 과기 분야 박사를 함께 수여하는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이 비교적 잘 갖춰진 미국 학계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암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로서
안타까운 사례들로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현대의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결국 과학기술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의사과학자가 돼서 그 답을 찾겠다
KAIST 차유진 연구교수
KAIST 신경과학·인공지능연구센터 차유진 교수는 의학의 한계를 넓히는 의사과학자로 진료실이 아닌 연구실에서 세상의 더 많은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의사과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청년의사). -출처 청년의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카이스트) 신경과학·인공지능연구센터 차유진 연구교수(박사)가 의사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이유다. 특히 차 교수가 이날 연단에 올라 한 졸업생 대표연설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며 회자됐다. 골육종을 앓던 '민지'가 세상을 떠난 일을 계기로 의학의 한계를 넓히는 의사과학자로 진료실이 아닌 연구실에서 더 많은 환자들을 살리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의사과학자'가 됐다.
인턴 시절 흉부외과를 돌며 첫 환자로 만난 아이가 민지였다. 다리에 생긴 골육종으로 한 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지만 암을 이겨내겠다는 굳은 의지로 나를 뭉클하게 했다. 하지만 폐에 암이 전이된 민지의 상태는 나날이 악화됐고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다. 무력감을 느꼈고 회의감도 들었다. 이후에도 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가 돼서 만난 환자들을 떠나보내며 연구자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의사지만 의학지식이라는 한계 안에 있을 수밖에 없음에 답답함을 느꼈다. 의사과학자로 사람을 살리는 존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사과학자가 되기까지 19년이라는 긴 여정이 있었다. 지난 2004년 카이스트 학부에 입학해 원자력공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중 충남대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가 됐다. 살리기 위해 애썼던 환자들을 먼저 떠나보내며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카이스트로 다시 돌아와 연구에 매진했다.
"과학과 의학을 모두 아는 의사과학자가 있다면 빠른 중개연구 혹은 기술 검토·임상시험 허가 등에 관여할 수 있고 통상적으로 걸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해 신의료기술이 사장되는 것을 예방하고 의학지식 확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의료 패러다임이 정밀의학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현재 진료 관념은 의사의 경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연구하는 문화가 의학의 주류 문화에 가까워질수록 과학자의 시각을 정밀하게 임상적인 결정을 하고 의료인들 사이에서 이것을 존중하는 의료 문화도 확산하리라 생각한다." - 차유진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