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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용어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분석과 사회분석에서는 몰(mole)적/분자적이라는 개념쌍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개념쌍은 변증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의 방향과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
몰(적)’이라는 것은 어떤 하나의 모델이나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집중해 가거나 모아가는 것을 말하며 자본이 모든 움직임을 이윤메커니즘에 맞추어 초코드화하는 것을 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에 있어서는 모든 움직임을 노동운동이라는 단일 전선에 편제하여 다른 흐름을 통제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몰적인 방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몰적인 방향은 생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기존에 생성된 것을 특정하게 코드화할 뿐인 것이다.
이에 반해 ‘분자적moléculaire ’이라는 개념은 미세한 흐름을 통해 다른 것으로 되는 움직임(생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세한 흐름은 반드시 작은 제도나 장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사회 전반적인 분자적 움직임도 가능하다.
따라서 미시구조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크기의 구조 및 제도 속에서 흐르는 미시적 흐름을 중시한다. 이러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의도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molaire3[mɔlεːʀ][형용사]전체적인,총괄적인 = global,total
moléculaire[mɔlekylεːʀ].분자의 2.미세한, 부분적인
투아그레Tuagre)족은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 사는 부족이다. 이들은 국경도, 나라도 없이 오랜 세월 유목생활을 해왔다. ‘투아그레’는 아랍어로 ‘사막에 사는 이들’이라는 뜻.
sociabilité[sɔsjabilite]1.사교성 2.사회성
mondanité[mɔ̃danite]1.사교 생활에 대한 취미 2.사교계의 생활 3.세속성, 현세적임
무의식과 욕망 : 욕망하는 기계에서 욕망의 다양체로 (1)
3. 기원전 10,000년: 도덕의 지질학
- 기원후 2016년: 고통기계, 희음으로부터
<지구1> 지구는 기관 없는 신체이고, 지층은 신의 심판이다.
지층들은 이중 분절이라는 구성적 현상을 나타낸다.
--- 분절은 어떤 질료의 흐름을 기본적인 구성단위로 분할하고 그것을 일정한 형식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구성단위를 ‘실체’라 하고, 그 실체들을 결합하는 규칙을 ‘형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절은 두 가지 층위에서 진행된다. 마르티네에 의하면 그 둘은 1차분절과 2차분절로 나뉘고,
엘름슬레브에 의하면 그것은 ‘내용’과 ‘표현’으로 나뉜다.
저자들은 마르티네의 개념을 그와는 역순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음운론적 최소단위로 분절되는 것을 1차분절로, 의미를 갖는 최소단위로 분절되는 것을 2차분절로 들고 있는 것 같다.
‘첫번째 분절은 불안정한 입자-흐름들, 준안정적인 분자적 내지 유사-분자적 단위들(실체)로 선별하거나 채취
한다.
분절은 거기에 연결과 계속의 통계적 질서를 부과한다. 두 번째 분절은 기능적, 밀집적, 안정적 구조(형식)를
수립하며, 이 구조들이 동시에 현재화되는 몰적 화합물(실체)을 구성한다.’
저자들은 챌린저 교수의 입을 빌어 옐름슬레브의 ‘내용’과 ‘표현’ 분절을 설명한다.
“그는 일관성의 구도 혹은 기관 없는 신체, 다시 말해 형식화되지 않고 비유기적이며, 비지층화되거나 탈지층화
된 신체와 그 신체를 흐르는 모든 흐름, 즉 원자 이하의, 분자 이하의 입자들, 순수한 강밀도, 전생명적이고 전물리적인 자유로운 특이성들을 질료라고 불렀다.
그는 형식화된 질료를 내용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두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러한 질료들이 ’선별된다‘는 점에서 실체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특정한 질서에 따라 선별된다는 점에서 형식이다(내용의 실체와 내용의 형식).
그는 기능적 구조를 표현이라고 불렀는데, 이 역시 두 가지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 고유한 형식의 조직이란 관점과, 그 화합물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실체의 관점이다(표현의 형식과 표현의
실체).”
저자들은 ‘실체’를 두고, 형식화된 질료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토성을 나타내고, 각 분절은 코드와 영토성을 모두 갖는다. 따라서 각 분절은 그 나름대로 형식과 실체를 모두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지층, 그 모든 곳에, 모든 방면에, 그것들의 내용과 표현 모두에 이중구속과 이중분절의 복수성이 작동
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하며 다시금 옐름슬레브를 불러들인다.
“표현의 구도와 내용의 구도라는 용어는... 기존의 통념들에 부합하도록 선택되었으며 매우 자의적이다.
그것의 기능적 정의에 의해서 이 두 거대자 중 어떤 하나를 ‘표현’, 다른 하나를 ‘내용’이라고 해야 정당하며 그
반대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내용과 표현은 오직 상호 결속에 의해서만 정의되며,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는 규정될 수 없다.
그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기능에서 상호 대립되는 기능소들로서, 오직 대립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만 정의
된다.” ---
기관 없는 신체란 수정란의 상태, 아직 아무것도 완전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어떤 기관으로든 고착화된 것을 가지지 않은 흐름의 상태, 잠재의 상태다. 그런 지구 위에서 지층화가 이루어진다.
‘지층은 질료의 형식을 부여하고, 공명과 잉여성의 체계 속에 강밀도를 가두는’ 하나의 ‘포획’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포획의 형식을 채취함으로서만 그 강밀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다행스러운 건, 지구 역시 지지 않고 이 심판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는 중이라는 점이다.
<지구2> 질료, 즉 일관성(혹은 비일관성)의 구도의 순수 질료는 지층의 외부에 있다.
퀴비에와 함께 비교해부학의 확립에 공헌한, 프랑스의 동물학자인 조프루아 생틸레르는 질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그것이 ‘점점 감소해가는 크기의 입자, 또는 공간으로 방사함을 통해 “스스로 전개되는” 탄력성 있는 흐름이나
유체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무한히 분할되는 연소의 과정이 이런 탈주의 예로 적합할 것이다.
전화(電化)는 그 과정의 역방향으로 전개되지만, 그 또한 이중의 집게발이자 이중분절이다.
그것은 ‘비슷한 것끼리의 인력’에 의하는 것이지, 특수한 생명 질료를 갖는 게 아니다. 다만 흐름으로서의 하나의 동일한 질료를 갖는다.
조프루아와 저자들 간의 추상 유령은 지층의 외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부학적 원소들은 특정한 장소에서 분자적 충돌이나 환경의 영향, 혹은 주위의 압력에 의해 억류되거나 제지
되어 서로 다른 기관들을 구성할 수도 있지.
그러면 동일한 형식적 관계 혹은 접속들은 완전히 다른 형식과 배합을 실행시키지.
지층 전체에 걸쳐서 실현되는 것은 여전히 동일한 추상 동물이야.
다만 정도가 달라지고, 양태가 바뀔 뿐이지.”
이 추상 유령은 위상학적으로 사고하고, 속도와 강렬도의 유목적 인간에 대해 예시하는, 포갬의 예술가다.
<지구3> 하나의 지층은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이 층에서 저 층으로 옮겨 다닌다. 그것은 이미 다수의
층을 갖고 있다. 그것이 중심에서 주변으로 옮겨가는 동시에 주변은 중심에 반작용해서, 새로운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중심을 형성한다. 흐름들은 끊임없이 외부로 방사되고 되돌아온다.
--- 상태들의 파생과 복수화의 과정을 매개적 상태로 볼 수 있고, 그 또한 매개와 포개짐 혹은 소재들의 새로운 형상들을 제시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수준에 대해 수직지층(epistrates, 바깥지층)이라는 개념을 입힌다.
지층과 그것의 토양이 되는 환경의 관계 또한 주요하게 다뤄진다.
지층과 그 외부의 관계. 외부 역시도 단순한 외부, 절대적 외부, 영구적 외부는 아니다.
때로는 그 외부 또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들은 그것을 ‘병합된 혹은 결합된 환경’이라 말하기에
이른다.
‘결합된 환경들은 영양소재와는 다른 에너지원들을 함축한다. 이 에너지원들을 얻기 전에는 유기체가 영양을
섭취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호흡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질식 상태다.’
결합된 환경, 결합된 세계의 대표적 예시가 될 수 있는 것이 진드기의 경우다.
낙하의 중력에너지-땀을 감지하는 후각의 성격-생채기의 능동적 성격, 즉 가지에 올라가서 지나가는 포유류를
냄새로 인식하고 그 위로 떨어져 그것의 피부에 들러붙는 일. 이것을 병렬지층이라 부른다.
‘손-입-혀’를 ‘먹기 위한’ 하나의 수직지층으로 두었을 때, 음식과 맛이라는 외부환경이 손-입-혀를 만나면서
그것의 병렬지층이 되는 것.---
<지구4> 오히려 코드는 탈영토화로부터 존재할 수 있으며, 재영토화는 탈코드화로부터 존재할 수 있다.
바다가 말라버린 자리에서 원시의 어류는 자기 발로 서게 된다. 그리고 그 바다의 물을 자신의 내부에 담게 된다. 탈영토화가 하나의 코드로 구축된 경우다.
또한 누군가 자신만의 고유한 영토를 만들어내려 한다면 기존의 코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뒤샹은 1917년 <엥데팡당전>에 남자 소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존의 예술작품을 흐르는 코드인, 시간과 노력과 감각의 결정체가 아닌, 떠도는 공산품을 그저 그 장소에 던져
놓은 것만으로 그는 시대의 예술가라는 영토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구5> 탈영토화 운동에 질을 부여하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그 본성이다.
그 운동이, 수직지층과 병렬지층을 구성하면서 분절화된 선분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닌, 일관성의 구도의
메타지층을 그려내는, 분해불가능하고 비선분적인 선을 따라 하나의 특이성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특이성으로
도약하는 본성을 가질 때에만, 절대적 탈영토화, 절대적 탈주선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복수적이라 해도, 그것은 일관성의 구도 혹은 기관 없는 신체의 운동이다.
이것은 일관성의 구도 혹은 기관 없는 신체 위에 지층화가 일어난 이후에야 상대적인 것이 된다.
언제나 지층이 잔여인 것이다.
권력, 혹은 이데올로기 등이 탈영토화, 탈지층화라는 일관성의 구도를 앞설 수는 없다.
<지구6> “사람들은 자주 본 것을 말하지만, ‘본 것’은 결코 말한 것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 사물은 말 안에 가두어질 수 없다. 사물은 말을 초과하고도 남는다.
우리는 말을 그에 대응한다고 가정되는 사물에 대립시켜서는 결코 안 되며, 기표를 그와 일치한다고 가정되는
기의에 대립시켜서도 안 된다. 대립되어야 하는 것은 불안정한 평형 혹은 상호전제 상태 속에 있는 상이한 형식
화들이다.
내용의 형식들과 표현의 형식들은 관련성이 매우 높으며, 항상 상호전제의 상태에 있다.
양자 간에, 혹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일치하는 일이란 결코 없다.
형식들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도 특수한 가변적 배치를 필요로 한다. 표현의 형식이 기표가 아닌 것처럼, 내용의 형식도 기의가 아니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 관계로부터 출발한 기표의 제국주의 역시 스러져 가야 할 나라다.---
모든 지층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기호체계란 없다. 추상기계는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적 코드화 속에서 지층에 감싸여,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추상기계는 다만 일관성의 구도 속에서만 전개될 뿐이며 기호와 입자 간의 범주적 구별을 갖지 않는다.
‘감옥’은 하나의 형식이지만 내용과 표현이 독립되어 별개의 지층을 이루게 되는 유형의 이중분절을 포함하고
있다.
감옥이 내용의 형식이라면 이와 상관적인 표현 형식은 비행이지만, 감옥은 비행이란 ‘기표’의 ‘기의’가 아니며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도 아니다.
법 내지 정상성에서 벗어난 행동들의 집합을 그런 말을 표현한 것일 뿐. 비행 자체는 또한 그 행위를 범죄로
간주하고 평가하는, 강간, 강도, 절도 경제범죄 등의 말로 표현되는 표현 형식을 갖지만, 동시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양상을 내용의 형식으로 갖는다.
한편 감옥은 특정한 형식의 건축물과, 수형자를 다루고 감시하는 간수들을 내용의 형식으로 갖지만, 또한 독방, 혼거방, 절도방, 폭력방, 혹은 면회, 운동, 배식, 식구통 등과 같은 고유한 언표들을 표현의 형식으로 갖기도 한다. 한편, 감옥은 소년원 검찰청, 교정국 등과 같은 바깥지층을 갖고 범죄자, 수인, 교도관 등과 같은 병렬지층을
갖는다.
<지구7> 내용과 표현의 서로 다른 형상들은 단계가 아니다. 어느 곳에나 동일한 기계권만이 존재한다.
지층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어떤 지층들은 서로에게 우위로 자리할 수 없다.
한 지층이 어떤 지층과 소통할 것인지, 어떤 쪽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것도 미리 알 수 없다.
그들이 갖는 일관성의 구도는 모든 비유를 지우고 오직 현실적인 것만으로 구성된다.
수준의 차이나 크기 또는 거리의 질서상의 차이를 무시한다.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간의 차이를, 내용과 표현 간의 차이를, 형식과 형식화된 실체 간의 차이를 무시한다.
일관성의 구도의 고유한 세 요인들은 강렬도의 연속체, 입자 혹은 기호-입자들의 결합적 사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통접이다. 이들은 추상기계에 의해 작용하며 탈지층화한다. 여기에는 규칙들이 있다.
구도화의 규칙과 다이어그램화의 규칙. 이는 뒤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보이게 될 것이다.
<지구8> 일관성의 구도 위에서 전개되거나 지층에 감싸여지는 한, 모든 면에서 기계적 배치들은
추상기계를 실행시킨다.
--- 1. 기계적 배치는 한 지층 위에서 내용과 표현의 상호적응을 수행하고, 내용의 선분들과 표현의 선분들
간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을 보장하며, 지층이 수직지층들과 병렬지층들로 분할되도록 유도한다.
2. 지층들 간에서 그것은 하부지층으로 복무하는 것들 간의 관계를 보장하며, 이에 상응하는 조직상의 변화들을 유발한다.
3. 일관성의 구도로 나아간다. 특정한 지층 위에서, 지층들 사이에서, 그리고 지층들과 구도 간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추상기계를 실행시키기 때문이다.---
기계적 배치가 지층들 간의 관계를 조절하고, 각 지층의 내용과 표현을 조절하는 한, 그것은 간지층이다.
또한 그것은 일관성의 구도와 접촉하며 필연적으로 추상기계를 실행시키므로 메타지층이기도 하다.
각 지층에 감싸인 채 존재하며 에쿠메논(세계적인 수준에서의 통합성 내지 보편성)을 정의한다.
일관성의 구도 위에서 그 탈지층화를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플라노메논(일관성의 구도로 인도하는 것)적이기도
하다.
<지구9> 이제 모두가 떠나는 중이다. 희음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그의 그림자는 시계모양인지 관
모양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희음 자신이다.
희음은 그렇게 흐물흐물해지며 일관성의 구도를 향해 스스로 빨려 들어간다.
<일관성의 구도, 수프, 그리고 샘이라는 지층들>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진드기가 좋겠다, 진드기. “냄새가 지나가는구나.
내 발 디딜 땅이, 내 촉수를 위한 땅이 지나가는구나.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아, 이 달고 끈적한 피는 나의 꿈, 나의 숨, 나의 마리아.”
진드기는 이렇게 포식에 성공한다. 냄새를 맡고, 뛰어내리고, 들러붙고, 빨아먹음으로써.
그것은 능동적, 지각적 성격들로 이루어진 결합된 환경, ‘결합된’ 세계다.
('이것은 그 자체로 이중분절이다'라는 텍스트의 의미에 대해, 세미나 시간이 질문이 나왔는데,
그 부분을 돌이켜 생각해 본 바로는 이렇다.
결합된 환경을 이루는 그 지층에는 능동이라는 결로 흐르는 지층이 하나 있고, 동시에 지각이라는 결로
흐르는 지층 또한 존재한다.
이것은 단계도, 위계도, 순서도 없이 동시에, 하나의 지층 안에서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분절한다.
바로 그 현상이 이중분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결합된 환경들을 다른 말로 ‘병렬지층’이라 한다. 병렬지층의 앞에 ‘수직지층’(바깥지층)이라는 얼굴이 있다. 진드기로 하여금 흡혈‘하게 하는’ 모든 끌어당김들이 병렬지층이었다면, 진드기 자체, 진드기 내부의 분절들이 그와 상관하는 수직지층일 것이다. 흡혈‘하기 위한’ 모든 분절들.
결합된 환경이라는 말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환경이라는 말의 지평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한쪽에 환경이 있다면 다른 쪽엔 무엇이 있어야 할까.
그가 확장한 ‘환경’이라는 말에는 그 맞은편에 응당 있어야 할 법한 원소, 화합물, 유기체, 결정체, 주체 같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수프’만이 합당하다. 내내 수프인 그것은 일시적으로, 간헐적으로, 그리고 불시에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그 다른 것은 등 뒤에서, 어둔 가랑이 틈새에서, 동공의 뒤편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수프다.
처음부터 수프였고, 언제까지나 수프다. 수프, 이것이 이 텍스트에서 ‘일관성의 구도’라 불리는 것 바로
직전의 것이다. 그것은 지구라는 거대한 알이자, 기관없는 신체다.
흐름으로, 자유로운 강렬도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이중분절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언어학자 마르티네의 1차분절과 2차분절, 그리고 옐름슬레브의 내용과 표현이라는 두 축의 이중분절 개념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념을 그 형체도, 맛도 남지 않을 정도로 아주 꼼꼼히, 또 말갛게 씹어서 몸 안으로 흘려
보내도록 하자.
다만 그것을 먹었다는 사실만 남도록. 저자들이 더 깊이 속삭이고자 하는 것은 이중분절의 방식이나 그 각각의 구체적 분류가 아니니까. 내용과 표현의 서로 다른 형상들, 즉 지층들은 단계가 아니며, 서로에게 어떤
위계도 지우지 않으니까. 수준, 크기, 거리의 질서 또한 염두에 두지 않으니까.
그것들은 단지 구도화와 다이어그램의 규칙만을 따를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몸과 시간과 공간은 서로에게 겹쳐진 채로 흐른다.
어느 곳에나 동일한 기계권만이 존재하는 것.
이 순간, 모니터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뒤샹의 얼굴을 하고 내 쪽을 바라본다.
코드는 탈영토화로부터 존재할 수 있으며, 재영토화는 탈코드화로부터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샘’을 펼쳐 보인다. “난 ‘예술작품은 시간과 노력과 감각의 결정체다’라는 기존 관념을 흐르는 코드 따위는 무시해 버렸어.
대신 나의 예리한 매발톱으로 막 굴러다니는 남자소변기 하나를 낚아챘을 뿐이지.
그리고 그걸 갤러리란 공간 안에 툭 던져놓은 게 다야. 쏘 왓!” “맞아요, 그게 당신을 희대의 예술가로, 당신이 던져놓은 그 공산품을 새 시대의 예술이라는 하나의 영토로 만들어 준 계기죠.” 나는 그에게 브라보를 외치며, 혹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두 분이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다 말하며.
(그 음악은 4분 33초로 이루어져 있다. 4분 33초 안에 그의 모든 연주가 끝나기도 하고, '4분 33초'라는 시간에 대한 지시어로만 그의 음악이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그 음악 안에는 사실 그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저 침묵만이 있을 뿐. 존 케이지는 그렇게 음악이라는 영토를 '소리 없음'과 혹은 그 '소리 없음을 듣는
소리'의 영역으로까지 탈주하게 했다.
'잘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전통적 음악 코드로부터의 탈코드화를 통해서 말이다.)
5. 기원전 587년, 기원후 70년:
몇 가지 기호체제에 관하여
“유태인의 역사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광범위한 사건을 무시할 수는 없다.
두 개의 시점(기원전 587년, 서기 70년)에 행해진 사원의 파괴가 그것이다.
사원(Temple)의 전체 역사, 즉 계약궤(契約櫃)의 유동성과 붕괴가능성, 솔로몬에 의한 성전(聖殿)의 건설,
다리우스 시절에 행해진 그것의 재건설 등은, 느부갓네살 및 티투스 시대의 중대한 두 순간에 발견된,
파괴라는 갱신적 과정(procès)과 관련없이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유동적이고 깨지기 쉬우며 파괴된 사원. 계약궤는 더 이상 사람들이 갖고 다니는 조그만 기호 상자가 아니다. 기표에 닥치는 모든 위험을 막아주는, 동물이나 양이 점하고 있던 부정적일뿐인 탈주선은 이제 불가능하게
된다.
악이 우리를 다시 덮치리라는 공식이야말로 유태인의 역사에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탈영토화된 선을, 속죄양의 선을 따라 가야하리라.
그 선을 기호로 바꾸면서, 그리고 그 선을 우리의 주체성, 우리의 정욕, 우리의 소송 내지 요청의 긍정적
선으로 만들면서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속죄양이 되리라. 우리는 어린 양이 되리라.” 129-130
기호체제(régime de signes)란 무엇인가?
우리는 특정한 표현의 모든 [종류의] 형식화(formalisation)를, 최소한 그 표현이 언어적인(linguistique) 한
에서 기호체제(régime de signes)라고 부른다. 하나의 기호체제가 하나의 기호계(une sémiotique)를 이룬다. 118
1)기표적(의미작용적인; signifiante) 기호체제
로버트 로위(Robert Lowie)는 부인에게 배신당했을 때 크로우 족과 호피 족이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주고 있다
(크로우 족은 유목적인 사냥꾼인 반면, 호피 족은 제국적인 전통을 갖는 정착민이다).
“부인이 배신했을 때 크로우 인디언은 그녀의 얼굴에 깊은 칼자국을 만들어버리는 반면, 동일한 불행의
희생자가 된 호피 족은 침착함을 잃지 않은 채 은거하여, 가뭄과 기근이 그 마을을 덮치길 기도한다.”
어느 쪽이 편집증이며, 전제주의적 요소 내지 기표적 체제인지, 또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던 ‘광신’(狂信;
la bigoterie)인지 알 수 있다.
“사실 호피 족에게는 [기표의 연쇄처럼]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 재앙, 집 안에서의 사건 하나가
우주의 체계와 관련되어 있으며, 거기서 각각의 수위(水位)는 다양한 상응성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평면 위의 격동은 다른 수위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격동의 투영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고 도덕적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120
의미화의 중심에 대해, 기표 그 자체에 대해 말할 것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원리만큼이나 순수한 추상이며, 다시 말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핍이든 과잉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호가 다른 기호로 무한히 소급된다고 말하는 것이나 기호의 무한한 전체(ensemble)가 지고(至高)한(majeur) 기표로 소급된다고 말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기표의 이러한 순수한 형식적 잉여성(redondance)은 특수한 표현적 실체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이 표현적 실체에 대해 안면성(visagéité)이란*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122
* visage는 얼굴과 표정이란 뜻이 동시에 있다. 저자들에 의하면 얼굴은 머리로부터 탈영토화된 것이어서,
표정을 통해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때론 얼굴로, 때론 표정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얼굴을 돌린다”와 같은 표현이 있어서, visage는 대개 표정보다는 얼굴(안면)로, visagéité는 표정성
보다는 안면성으로 번역했다.
기호의 기표적 체제는 여덟 개의 측면 내지 원리에 의해 정의된다.
(*전통시대의 왕조둘이 기표체제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지만, “정당, 문학운동, 정신분석협회, 가족, 부부
관계 등 중심화된, 위계화된, 수목형에 따라 조직된, 예속주체화된 모든 집단들에서 기표체제를 확인할 수
있다.”)
1)기호는 [다른] 기호로 무한히 소급된다(기호를 탈영토화하는 의미화의 무제한성).
2)기호는 기호로 환원되고 끊임없이 되돌아온다(탈영토화된 기호의 순환성).
3)기호는 하나의 원환에서 다른 원환으로 비약하며, 끊임없이 중심을 바꾸는 동시에 그 중심에 일치시킨다
(기호의 메타포 내지 히스테리).
4)원환의 확장은, 기의를 제공하고 기표를 남아돌게 하는 해석에 의해 항상 보장되어 있다(사제의 해석).
5)기호의 무한한 전체는 결핍만큼이나 과잉으로 나타나는 지고의 기표로 소급된다(전제군주적 기표, 체제
의 탈영토화의 극한).
6)기표의 형식이 실체를 갖거나, 기표가 얼굴(Visage)이라는 신체를 갖는다(재영토화를 구성하는 안면성
이라는 특질의 원리)
7)체계의 탈주선은 부정적 가치를 할당받으며, 기표적 체제의 탈영토화 능력을 넘어선 것으로 단죄된다
(속죄양의 원리).
8)비약과 규제된 원환, 예언자적 해석의 규칙, 안면화된 중심의 공공성(publicité), 탈주선의 취급, 이 모두
에게서 그것은 보편적인 속임수(tricherie)의 체제다. 124
2)전(前)-기표적(전-의미작용적인; pré-signifiante) 기호체제
기호없이 작동하는‘자연적’코드화에 훨씬 근접해 있다.
여기서는 어떤 것도 표현의 유일한 실체로서 안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 기의의 추상에 의해 내용의 형식을 제거하는 경우도 전혀 없다.
심지어 협소한 기호적 전망 속에서 내용을 추상하는 경우에조차도, 그것은 기표에 의한 권력 장악을 피
하고 내용 그 자체에 고유한 표현 형태를 보존하는 표현 형식의 다원성과 다의성(polivicité)을 위한 것
이다.
그리하여 신체성, 몸짓성, 리듬, 춤, 제전의 형태가 음성적 형태의 이질성 안에서 공존한다.103)
표현의 다양한 형식과 실체들이 교차되고 잇닿는다. 그것은 선분적인 기호계지만 기표적인 순환성과
싸우는 다선적(多線的)이며 다차원적인 기호계다. 124
3)반(反)-기표적(반-의미작용적인; contre-signifiante) 기호체제
사냥꾼 유목민과 달리 무서운 살육 및 전쟁 유목민의 그것이다).
여기서 이 기호계는 선분성에 의해서보다는 오히려 산술과 기수법(numération)에 의해 이루어진다.
확실히 수는 선분적 혈통의 분할 내지 재통합에서 이미 막대한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또 기표적인 제국적 관료제에서 결정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수는 표상하고 의미작용하지만, “그것[수]와는 다른 것에 의해 촉발되고 생산되고 야기된다.”
반대로 번호적 기호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표시 외에는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다양하고 유동적인
재분할을 표시하며, 그 자체로 기능들과 관계들을 수립하며, 총체를 이루기보다는 배열(arrangement)을
이루며, 수집보다는 분배를 행하며, 단위의 조합보다는 절단과 이행, 이동과 축적에 의해 작동한다.
이러한 기호는 국가장치에 반하여(contre) 그 나름대로 지휘되는 유목적 전쟁기계의 기호계에 속한다.
수를 세는 수(Nombre nombrant)105)10, 50, 100, 1000...등의 번호적 조직과 그에 연관된 공간적 조직은
분명히 국가의 군대에 의해 재장악되지만, 힉소스(Hyksos)에서 몽고에 이르는 스텝의 거대한 유목에
적합한 군사적 체계를 우선 보여주며, 혈통의 원리에 포개진다.
비밀과 정탐은 전쟁기계(la machine de guerre)의 이 번호적 기호계에 중요한 요소다. 125
4)탈-기표적(탈-의미작용적; post-signifiant) 기호체제
탈-기표적(탈-의미작용적; post-signifiant) 기호계는 새로운 특징으로 인해 의미화에 대립되며 ‘주체화’(
subjectivation)라는 독특한 절차에 의해 정의된다.
(*그리고 저자들은 편집증적이고 해석적인 기표화의 관념적 체제와 열정적이고 탈-기표적인 주체적
체제를 구분한다.) 126
따라서 우리는 전제적, 기표적, 편집증적 기호체제와 권위적(autoritaire), 탈-기표적, 주체적 내지 정욕적
기호체제를 구별하고자 한다.
분명히 권위적인 것은 전제적인 것과 동일하지 않고, 정욕적인 것은 편집증적인 것과 동일하지 않으며,
주체적인 것은 기표적인 것과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두 번째 종류의 체제와 앞서 정의된 기표적 체제를 대립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 것의 경우 기호나 기호들의 묶음은 방사적인 순환적 그물망으로부터 이탈하여, 자기 나름대로
작동하게 되며, 마치 열려진 좁다른 길 위로 휩쓸려가듯이 곧은 선 위로 풀려나간다.
기표적 체계는 이미 탈영토화된 기호들에 고유한 지표를 넘어서 탈주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 선은 속죄양을 탈주케 하면서 그것에다 부정적 가치의 도장을 찍었다.
이 선은 긍정적 기호를 부여받았으며, 거기서 존재이유나 목표를 찾는 인민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점유
되었고 추구되리라고 이야기되리라. (---)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한 인민이 앞서와 같은 망상의 유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좌표
위에서 그려진 망상의 지도가 자신의 좌표 위에서 그려진 인민의 지도와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편집증적 파라오와 정욕적 히브리가 그러한가?
유태민족의 경우 기호들의 한 그룹은 자신이 포괄되어 있던 이집트의 제국적 그물망에서 이탈하여 사막
을 향해 뻗은 탈주의 선을 따라간다.
가장 권위적인 주체성을 전제적 의미화에 대립시키면서, 가장 정욕적이고 가장 덜 해석적인 망상을 편집
증적이고 해석적인 망상에 대립시키면서, 요컨대 선형적인 ‘소송(procès) 내지 요구’를 방사적인 순환적
그물망에 대립시키면서. 너의 요구, 너의 소송, 이것이 바로 모세가 자신의 인민에게 행한 말이다.
소송(Procès, 절차)은 수난(Passion, 정욕)의 선을 따라 진행된다. 129)
카인은 죽음을 모면하게 해준 기호[징표]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신에게서 얼굴을 돌린 신으로부터 얼굴
을 돌려 탈영토화된 선을 따라 간다.
카인의 징표[기호]. 그것은 제국적인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 아닐까?
유태의 신은 집행유예를, 유예 속의 실존을, 무한한 연기(延期)를 발명한다.112)
그런데 그 신은 자신과의 새로운 관계로서 서약(alliance)의 긍정성을 발명하는데, 이는 주체가 언제나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벨은 아무 것도 아니며, 그의 이름은 헛된 것이다.
카인이 진정한 인간이다. 기표의 얼굴과 선지자의 해석에, 또 주체의 치환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더
이상 날조와 속임수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배신(trahison)의 체계, 보편적 배반의 체계로서, 거기서는 신이 인간을 배신하는 한, 새로운 긍정
성을 정의하는 신의 분노 안에서 진정한 인간 역시 끊임없이 신을 배신한다. 131
예수는 배신의 체계를 보편화한다.
그는 유태인의 신을 배신하며, 유태인을 배신하며, 신으로부터 배신당한다(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또 그는 진정한 인간인 유다로부터 배신당한다. 그는 스스로 악을 짐지지만, 그를 죽였던 유태인 역시
스스로 그것을 짐지게 된다.
예수는 신의 아들임을 입증할 기호[징표]를 요구받자 바로 요나의 징표를 내보인다.
카인, 요나, 예수는 세개의 거대한 선형적 소송(절차)을 이루며, 거기에서는 기호들이 밀려들고 연잇는다.
그 밖에 다른 것도 많이 있다. 모든 곳에서 탈주선을 향한 이중적 얼굴돌리기가 나타난다. 131-132
하지만 다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있으니, 오이디푸스 이야기(histoire)가 바로 그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거의 그리스적 세계에 고유한 것이다. [그 이야기의] 전반부 전체는 제국적이고 전제적이며,
편집증적이고 해석적이며 예언적이다.
하지만 그 후반부 전체는 오이디푸스의 방황에 관한 것으로, 그 자신의 얼굴과 신의 얼굴로부터 이중적인
얼굴돌리기(détourment)의 탈주선을 보여준다. 질서지워진 채 넘어설 수 있는 엄밀한 한계 대신에,
혹은 반대로 넘어설 권리를 갖지 못하는 한계(신 앞에서의 오만함) 대신에, 오이디푸스가 그리로 빨려들어
가는 한계 자체의 도피가 있다. 해석적이고 기표적인 방사 대신에, 바로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새로운 소송
(procès; 과정)을 재시도할 수 있게 용인해주는 잔여로서, 주체적이고 선형적인 과정이 있다.
아테오스(atheos)라고 불리는 오이디푸스.
그는 죽음이나 추방보다 더 가혹한 무엇을 발명하는 셈이다. 그는 기묘하게도 긍정적인 분리의 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을 선택하며, 거기서 그는 방황하고 살아남는다.
횔더린과 하이데거는 거기서 표정[얼굴]의 변화와 근대 비극의 탄생이라는 이중의 얼굴돌리기가 탄생하고
있음을 보았고, 거기서 그들은 기이하게도 그리스인의 덕을 본다.
즉 [그 이야기의] 귀결점은 살해나 급작스런 죽음이 아니라 집행유예 아래 살아남는 것이고 무한한 연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니체는, 오이디푸스는 프로메테우스와 반대로 그리스인의 유태적 신화로서 정욕(Passion) 내지
수동성에 대한 찬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의 카인이다. 정신분석으로 되돌아가자.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에 달려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 하나의 혼성적인 기호계다.
즉 그것은 얼굴의 방사를 본다면, 의미화와 해석의 전제적 체제다. 하지만 그것은 또 얼굴 돌리기를 본다면,
주체화와 선지주의(先知主義)의 자동적 체제다
(환자의 배후에 자리잡은 정신분석가는 이로부터 그 모든 의미를 끄집어낸다).
기표 및 해석의 순환적 발전과 주체성의 선형적 과정을 동시에 언급함으로써, “기표는 다른 기표에 대해
주체를 표상[대표]한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최근의 시도는 전형적인 혼합주의(syncrétisme)에 속한다.
두 개의 절대적으로 다른 기호체제가 하나의 혼합물로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위에서 가장 음험하고 나쁜 권력이 자리를 잡게 된다. 132-133
천의 고원 6장 -
'신의 심판'에 반대하여 봉기한 날
6장의 제목을 구성하는 ‘1947년 11월 28일’. 아르토가 유기체에 반대하여 기관 없는 신체를 선언한 날
이라고 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신의 심판에 반대하여 봉기한 날”로 규정한다.
이쯤에서 하나의 딜레마에 빠진다.
과연 『천의 고원』의 6장을 요약한다는 게 의미있는 일인가, 하는 형태로.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는 게
목적이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개념들을 요약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형태로.
그렇다면 ‘기관 없는 신체’에 관한 하나의 에세이를 적어야 하나?
며칠을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더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