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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배낭을 꾸렸다.
2박 3일 일정으로 지리산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네명의 동료들은 서울서 열차를 타고 내려오고 나는 서대전역에서 10시에 합류하기로 했다.
아내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부침개를 부치느라 정신이 없다.
배낭에 주섬주섬 몇가지 비상약과 밑반찬을 넣었다.
아내가 부쳐준 부침개를 배낭에 넣고 서둘러 서대전역으로 향했다.
서울서 진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는 제 시각에 서대전역에 닿았다.
열차에 오르니 전수남교장선생님과 이장훈 교감선생님 그리고 중학교 김은진선생 행정실 최경원선생이 반갑게 맞이한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배낭에서 부침개를 꺼냈다.
김이 무럭무럭 난다.
모두들 애주가들이라 열차가 논산을 채 지나기도 전에 소주 세병이 나뒹군다.
무궁화호 객실은 휴가철이라 빈틈이 없다.
왁자지껄한 남도지방의 사투리가 정감있게 들린다.
에세이스트 사무실에 전화를 하면서 내가 지리산엘 가고 있다고 했더니
조정은씨가 대뜸 구례에 있는 김인숙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자 김선생님이 최근 출판한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를 갖고 구례읍역으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한다.
열차는 1시가 되어 구례에 도착하고 플랫폼을 나서는데 김인숙선생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황이 되기도 하거니와 일부러 책을 갖고 나온 성의가 여간 고맙지 않다.
더구나 김선생은 우리 일행을 승용차에 태우고 섬진강 가에 있는 매운탕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매운탕과 은어튀김을 풍성하게 시켰다.
선생의 호의에 나는 몸둘바를 모르겠다.
우리 일행은 선생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는 성삼제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성삼제를 오르는 길은 가파를뿐더러 99개나 되는 커브길이어서 간혹 운전에 서툰 기사들이 애를 먹는다고 한다.
버스는 성삼제까지만 운행을 했다.
성삼제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노고단을 향했다.
휴가철이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노고단을 오르내린다.
겨우 겨우 노고단에 이르러 여장을 풀었다.
오늘은 여기서 1박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긴 산행을 해야 한다.
노고단 대피소 원추리 꽃 사이로 본 노고단 정상
저녁 무렵이 되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문득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난다.
산장 매점에 가서 맥주를 찾으니 여기는 없고 선상제 매점에 가면 맥주가 있다는 말을 한다.
나는 불쑥 김선생에게 맥주를 사러 가자고 하였다.
그러자 선뜻 김선생이 좋다고하여 둘이서 맥주를 사러 성삼제로 내려갔다.
시원한 맥주를 마신다는 생각으로 불쑥 말을 꺼냈으나
성삼제까지 다녀오려면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족히 한 시간은 걸린다.
우리는 뛰다시피 성삼제에 도착하여 우선 캔맥주 한 잔을 정신없이 들이키고 노고단으로 오르려는데
그제야 아찔한 생각이 든다.
노고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천근이다.
성삼제에서 노고단을 바라보는데 노고단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지리산 곳곳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들
캔맥주를 들고 다시 노고단으로 오르는데 여간 힘든게 아니다.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이 앞서 지름길로 올라가는데 숨이 턱아래까지 찬다.
헐떡거리며 겨우 노고단 산장에 오르니 동료들이 손뼉을 치며 반긴다.
힘들긴 했지만 보람은 있다.
7시가 넘으니 어둠이 밀려오고 구름이 노고단 고개를 넘어 간다.
등산객들은 저녁식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고 우리도 라면을 끓여 햇반을 말아먹고 술잔을 기우렸다.
성삼제까지 달려가서 사 온 맥주를 한 잔 들이키며 하늘에 떠 있는 초생달 모습이 신비롭다.
정담을 나누며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니 어느덧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내일 세석평전까지 가려면 10시간을 걸어야 되고 그러려면 아침에 일찍 출발해야 한다.
지난해 노고단 산장에서 잠을 뒤척였던 생각이 문득 떠오르자 잠 잘 일이 걱정이다.
지난해에는 산장이라 늦게 들어오는 사람, 일찍 떠나는 사람,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대 내무반 같은 산장에서 모포를 덮고 겨우 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늦게 도착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잠을 잘 수가 없다.
가면상태로 누워서 있는데 새벽 두시나 되었을까 일찍 떠나는 등산객들의 짐 싸는 소리로 요란하다.
‘아! 빨리 아침이 되었으면......’
다섯시 무렵이 되었을까 내 옆에서 주무시던 전교장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 나길래 나도 따라서 일어났다.
시간이 꽤 된 것 같은데 웬일인지 김은진선생이 보이질 않는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벌써 일어났다는데
‘혼자 취사장엘 가서 아침밥을 하고 있나?’
김선생을 찾으러 아무리 다녀도 보이질 않는다.
우리 일행이 김선생을 찾으러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어디서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다른 곳에 가서 잠을 잤다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준령
우리는 서둘러 밥을 해먹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세석평전에서 잠을 자야 한다.
노고단에서 세석평전까지 가려면 10시간은 걸어야 한다.
등에 진 배낭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나마 맑은 날씨가 산행을 도와준다.
지난 해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도중에 산행을 포기하고 내려가야만 했다.
우비를 입고 비가 쏟아지는 밤길을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노고단에서 돼지령을 넘고 임걸령을 넘는다.
노고단에서 바라본 환상적인 풍경
한결같이 해발 14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걷고 또 걷는다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나오고 그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지리산길.
우리가 가야하는 천왕봉은 까마득하게 먼 곳에 구름에 쌓여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노고단에서 25.5킬로미터 오르락내리락 산길을 따라 쉴 사이 없이 걷는다.
앞만 보고 걷는데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 이르는 길은 깊은 숲이 가려져 지리산의 웅장한 모습을 볼 길이 없다.
군데군데 곰 출현지역이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숨을 헐떡이며 걷는데 노루목이 나타난다.
노루목은 반야봉과 천왕봉의 갈림길이다.
2시간 남짓 걸어 노루목에 도착하여 배낭을 풀고 바위위에 오르니 그제야 한눈에 펼쳐지는 지리산의 웅장한 자태.
널따랗게 펼쳐진 숲과 고개를 넘어가는 구름,
낭랑한 산새의 울음소리.
피로가 한순간에 풀린다.
휴식도 잠깐 “출발!“
인솔대장 김은진선생의 목소리와 함께 우리 일행은 배낭을 추스린다.
이제는 퇴직하신 나이가 일흔이 된 전 교장 선생님은
우리와 똑같은 무게의 배낭을 메고서도 조금도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고
평소 약주를 좋아하시는 이장훈 교감선생님도 웬일인지 선두를 걷는데 그 체력이 대단하다.
오히려 나이 어린 최 선생과 내가 제일 꽁무니에 쳐져서 헐떡거리며 걷는데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노루목을 지나 곧바로 나타나는 삼도봉.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가 나뉘는 경계선이다.
삼도봉에서
삼도봉을 지나자 수백개의 긴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을 내려오니 확 트이는 벌판이 나온다.
화개재. 지리산 능선에 있는 장터다.
경남에서 연동골을 따라 소금과 해산물을 가져오면
전북에서 뱀사골을 따라 삼베와 산나물을 가져와서는 물물 교환하던 장소라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숨을 헐떡거리며 봉우리를 넘을 때는 내리막길이 나오기를 기대하다가도
막상 내리막길이 나오면 또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두려운 생각이 든다.
화개재를 지나자 해발 천오백미터의 토끼봉이 눈앞에 들어온다.
갈수록 기운을 딸리고 배가 고프다.
라면에 햇반을 말아 먹었지만 오랜 시간을 걸어서 허기가 지고 다리가 후둘 거린다.
배낭에서 사탕을 꺼내 먹으며 한 발 한 발 토끼봉을 오른다.
화개재
이제 토끼봉을 지나면 그보다 더 높은 명선봉이 이어지고 명선봉을 넘으면 연하천 대피소가 나온다.
연하천대피소를 지나서도 형제봉을 넘고
벽소령고개를 넘어 덕평봉과 칠선봉, 연신봉을 넘어가야 우리가 오늘 하루 쉬어갈 세석평전이 나온다.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나오고 또 하나를 넘으면 다른 봉우리가 나온다.
점차 쉬는 시간이 짧아지고
김선생의 “5분간 휴식!” 소리가 반갑게 들린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어찌나 앙증맞고 예쁜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힘든 산행이 꽃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로 한결 힘이 덜 든다.
전수남 선생님은 일일이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것조차 힘든데 꼼꼼하게 기록을 남긴다.
식물이며 우리 일행들의 모습을 찍으면서 산행을 하는 모습이 여간 고맙지 않다.
노고단을 출발한지 3시간 반을 걸어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오르락내리락 고개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긴 계단이 나오고
그 계단을 헐떡거리며 올라가다보니 이제 힘이 빠져 더 이상 걷기조차 힘들 즈음에
확 트이며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연하천 대피소.
천왕봉을 향해 가는 등산객들이 점심식사 준비로 분주하다.
우리도 배낭을 내려놓고 점심을 준비한다.
김선생과 최선생이 서둘러 식사준비를 한다.
물을 길어다 라면을 끓이고 각자 조금씩 준비한 밑반찬을 꺼내 놓으니
산에서는 이만하면 진수성찬이다.
라면에 햇반을 말아 먹으니 꺼졌던 배가 불끈 일어난다.
식사는 김선생과 최선생이 준비하는데
나는 옆에서 멀건히 바라보며 먹기만 하는 것이 미안하여 물을 길어 오다보니
이장훈 선생님은 햄을 꺼내 별도로 식사준비를 하고 있다.
이선생님은 어찌나 햄과 소시지를 좋아하는지
우리가 식사준비를 할 때마다 배낭에서 별도로 먹을 것을 꺼내 드신다.
햄이나 미숫가루를 꺼내서 드시는 데 ‘저걸 먹고 어찌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도 조금도 힘든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항상 선두에서 길을 안내한다.
간단하게 설거지를 끝내고 걷다보니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허기가 진다.
연하천에서 형제봉을 지나 벽소령 대피소를 지날 무렵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형제봉을 지나며 기암절벽에서
벽소령 산장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있으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노고단에서부터 만난 등산객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일행을 반긴다.
산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잠시 보았을 뿐인데도 쉽게 정이 들고 서로 가져온 것들을 나눠 먹는 모습이 어찌나 정겨운지 모른다.
배가 고프다고 하자 이장훈 선생님이 미숫가루를 타 주는데 그걸 한 컵 들이켜니 한결 낫다.
벽소령을 지나는 길에 잔돌이 깔린 길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고 해발 1500미터가 넘는 덕평봉과 칠선봉이 우리 앞에 다가선다.
헐떡 거리며 봉우리를 오르는데 내 뒤를 따라오던 최선생이 여기서 1분만 쉬어 가잔다.
최선생의 말이 구세주의 말처럼 들린다.
앞서 가는 사람들이 가든 말든 잠시 쉬었다 가야겠다.
늘 행정실에서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다보니 등산이라고는 평소 갈 수조차 없는
덩치가 큰 최선생이 이렇게 지리산 산행을 하는 것이 참 대단해 보인다.
최선생과 나는 배낭에 넣어온 사탕을 나눠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오래 쉴 수가 없다.
오늘 세석평전까지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석평전 산장을 예약해 놓아서 날이 저물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해 가면서 또 봉우리를 오른다.
그렇게 봉우리를 넘으니 내리막길에 샘이 나오는데 선비샘이다.
덕평봉에서 바라 본 천왕봉(저 멀리 구름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봉우리)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지리산의 한 기슭인
덕평마을에 이씨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씨 노인은 불우한 시골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데다가
설상가상로 얼굴마저 추하게 생겨 사람들은 모두 이씨를 모두 멀리하며 홀대하였다.
이씨 노인은 못생긴데다가 항상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서러웠으며
단 한번만이라도 사람 대접을 받으며
선비처럼 고결하게 살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식하고 외모가
추하게 생긴 이씨 노인을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으며 자기를 찾아오는 것조차 꺼렸다.
그러던 중 이씨 노인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여인네를 만나 두 아들을 두게 되였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이씨 노인은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가난을 면치 못했으며
사람들로부터 항상 냉소와 천대 속에 살았다.
이씨 노인은 이렇듯 뜻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고생으로만 연명하다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 때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으면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산에서 샘물을 마시면서 항상 샘터에 합장을 하는 것을 보아왔던
이씨 노인은 죽어서나마 공경을 받고자하는 생각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이씨 노인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의 유언대로 상덕평 샘터 위에 아버지의 묘를 쓰고 장사 지냈다.
이씨 노인을 장사지낸 후 상덕평 샘터를 찾은 지리산 등산객들은
샘터에서 물을 마신 후 항상 샘을 향하여 합장을 하니
이씨 노인은 평생에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받고 싶었던 대접을 무덤 속에서나마 받게 된 것이다.
후일 이러한 내막을 안 마을사람들은 불우했던
이씨 노인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하여 이 샘을 선비샘이라고 부르자고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선비샘에서 목을 축이는데 물이 어찌나 시원한지 피로가 싹 가시고 힘이 솟는다. 그
제야 먼 곳을 바라보니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천왕봉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선비샘에서 목을 축이고 산을 오르니 영신봉이 눈에 들어온다.
영신봉!
그 모습이 신비스럽고 장관이다.
구름이 넘어가는데 신비스런 봉우리가
구름 사이에서 보일 듯 말 듯 그 멋진 자태를 쉽사리 보여주질 않는다.
파릇파릇한 식물이 자라고 바위에 낀 이끼에 예쁜 꽃이 피었는데 깜찍한 소녀처럼 앙증맞다.
영신봉의 장엄한 모습에 도취되어 오르고 내리는 험한 산길을 걷는 것이힘든 줄을 모르겠다.
영신봉을 지나 기력이 떨어지며 어깨가 아파오는데 앞서가던 김은진 선생의 말이
이제 오늘 우리가 하루 밤을 잘 세석평전이 곧 나온다고 한다.
김선생의 말에 고무되어 배낭을 추스르고 힘을 내어 걷다보니
정말 세석평전이 눈 앞에 들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난다.
노고단을 출발해서 11시간의 산행 끝에 세석에 닿은 것이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산장
저녁 일곱시 날은 어둑어둑해질 무렵.
세석평전의 모습은 시끌벅적한 풍경이 흡사 시골 장터 같다.
우리보다 앞서 도착한 노고단에서 만났던 다른 일행들이
우리를 반기며 선뜻 자리를 내어주는 마음이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다행히도 세석평전은 노고단 산장에 비해서 잠자리가 편했다.
많은 사람들이 천왕봉의 일출을 보겠다고 장터목 산장으로 가는 바람에 비교적 잠자리가 한가했다.
밥을 먹고 세석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술 잔을 주고받는데
두런두런 일행의 말소리가 정겹게 들리고 술이 술술 목구멍을 넘어간다.
살아서 백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나무
점차 날이 어두워지고 밤하늘엔 은하수가 수를 놓는다.
이 얼마만에 보는 은하수의 모습인가.
어린시절 멍석을 깔아 놓고 잠을 자며 보았던
그 은하수를 수 십년 만에 다시 대하니 그 감격이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동료들이 권하는 술 잔에 정이 묻어나고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모두들 한결같이 착하고 좋은 이들이다.
지난해에도 함께 지리산엘 왔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도중에 종주를 포기하고 돌아갔는데
이번 산행은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밤하늘에 온통 별천지다.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을 보니 새벽 두시다.
밖으로 나와 새벽공기를 마시며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하수가 온통 수놓은 세석평전의 하늘을 언제 또다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다가 잠자리에 드는데 어젯밤 노고단에서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노고단에서는 어찌나 코를 골고 술 냄새가 진동을 하든지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다들 조용하게 잠을 잔다.
나도 덕분에 잠을 잘 자고 아침 5시에 일어났다.
편하게 잠을 잔 탓에 한결 몸이 가볍다.
아침도 역시 라면에 햇반을 말아 먹었다.
이장훈 선생님은 우리가 식사를 할 때마다 혼자서 먹을 걸 준비하는데 햄 아니면 미숫가루로 끼니를 때운다.
당뇨가 있어서 집에서는 사모님이 햄을 못 먹게 한다는데
이참에 원 없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먹음직스럽게 먹는다.
6시 40분에 세석을 출발해서 촛대봉에 오르니 저 멀리 천왕봉이 바라보이고
우리가 하루 묵었던 세석평전의 산장이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촛대봉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데 까마득히 노고단이 구름 사이로 보인다.
우리가 저곳에서 걸어왔다는 말인가. 믿기지가 않는다.
세석에서 장터목 가는 길은 참으로 절경이다.
구름이 고개를 휘감아 넘어가고 널따란 숲이 시야에 들어온다.
구름위를 지나는 신선처럼 그렇게 휘적휘적 걷다보니 8시 40분이 되어서 장터목산장에 도착했다.
이제 천왕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천왕봉에서 백무동계곡으로 내려가려면 다시 장터목으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배낭을 장터목에 놓고 천왕봉을 향했다.
김선생의 말이 천왕봉까지 대략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어깨에 배낭을 메지 않으니 한결 걷기가 쉽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을 가는 길은 지금까지 보아 온 그 어느 곳보다 경치가 아름답다.
모처럼 경치를 감상하며 천왕봉을 향해 가는데 곳곳에 고사목이 즐비하고
살아서 백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나무가 멋스럽기 그지없다.
구름은 고개를 넘고 구름을 따라 우리도 고개를 넘다보니
어느새 천왕봉이 눈앞에 들어오고 이제 통천문만 지나면 천왕봉이다.
하늘로 통한다해서 통천문인가.
통천문을 지나 이제 천왕봉을 눈앞에 두고 있을 무렵.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선녀인듯 모습이 아름다운 한 여인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내려 오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길이 가는데 참 별스런 일도 다 있다.
같은 문학회회원인 김향신 선생이다.
어찌나 반가운지 함박웃음 짓는데 서로에게 일행이 있어서 긴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했다.
나는 오르고 김향신 선생은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네 인생 또한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오르는데 삼대가 덕을 쌓아야 일출을 볼 수 있다는
해발 1915미터의 천왕봉이다.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구름이 휘휘 준령을 넘는데
여기가 천왕봉이라는 말인가?
천왕봉이라는 이름 석자가 새겨진 비석 앞에 앉아 사진을 찍는데
여기는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
짙은 구름 때문에 시야가 가려서 먼 곳은 보이질 않는다.
지금쯤 저 구름 아래는 폭염으로 길거리를 걷기조차 힘들터인데 추워서 오래 머물 수가 없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며 다시 천왕봉을 내려와 장터목 산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는 올라갈 일은 없고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한 결 가볍다.
그동안 그저 힘들게 걸어가느라 보지 못한 꽃이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장터목으로 내려가는데 절경도 이런 절경은 없다.
장터목에서 점심을 먹고 백무동계곡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이 마냥 좋을 듯 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이 이어지는 돌계단.
가파른 길을 오르는 것 못지않게 힘이 든다.
그나마 그 힘든 돌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고 걷는데
이젠 근력이 다 한 듯 어깨가 처지고 발걸음이 천근같이 느껴진다.
가다 쉬고 가다 쉬기를 수없이 반복하다보니 돌계단을 내려가는데 만도 대 여섯 시간.
이젠 더 이상 갈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다하는데 그곳이 바로 백무동.
앞서간 김선생이 주막에 파전 한 접시와 동동주를 시켜놓고 우리를 맞이하는데
따라주는 시원한 동동주를 한 잔 쭉 들이켜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맛은 처음이다.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일들이 한 순간에 다 씻겨나가고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하다.
버스를 타고 남원으로 가서 열차를 타려니 오후 6시인데
김선생은 12시가 넘어 떠나는 열차표를 사놓았다.
목욕탕을 찾아 목욕을 하고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고기를 모처럼 먹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노래방에 가서 술을 마시며 신나게 놀다보니
꿈같이 시간이 흐르고 자정이 넘어서야 우린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며칠 동안은 집에 꼼짝 않고 들어앉아 피로를 푸는데
원기가 솟고 산행의 할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데 동행한 일행들이 보고 싶다.
모두들 고마운 이들이다.
내 인생에 이처럼 감동적인 일을 또 언제 경험할까?
한 걸음 한 걸음 떼기조차 힘들었지만
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아름다운 경치를 언제 또다시 볼 수 있으랴!
첫댓글 <노고단 일기 ? >힘들게 읽었습니다.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ㅋㅋㅋ 그래도 걸어갔던 사람에 비하면
장쾌한 등반기록을 읽고 있자니 함께 산행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산을 왜 오르는가. 누가 물으면 “산이 그곳에 있으니까 ” 라고 했다지요. 악전고투 끝에 산행을 마치면 그 성취감은 이루 말 할 수 없다면서요. 저도 경험한 바에 의하면 오랜 시간을 함께 사서 고생한 동료 일행들이 친 형제들과 같이 친근감을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 긴 시간을 등반한다는 것은 아무나 , 누구나 할 수없는 苦行의 길이고 克己의 순간순간 들 이겠지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추억으로 남겨질 긴 산행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또 가려구요. 제 힘이 닿은 한 매년 지리산 종주를 하고싶습니다.
저도 20대에 두 번 종주 했어요. 꿈 같아요. 걸음걸음 깜짝 졸랄 뭔가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깨어보니 생각나지 않는 꿈 같이 희미하네요.
걷는 내내 행복하셨지요? 걷고 있는 그 자체가 좋아서 저도 가끔 산에 가곤 합니다. 읽는동안 저도 행복했습니다.
산을 보면 무작정 오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저는 물이 있는 강이나 바다 쪽으로 많이 가서 산은 조금 뜸한 편입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지게 지고 산에 나무하러 많이 다녔지요. 그래서 산토끼며 노루, 멧돼지 등을 자주 만나기도 했는데 그때는 무서운 산짐승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놈들을 만나면 식욕이 당겨 한 점 구워 먹고 싶은 생각이 납니다. 지리산은 고향 가까이에 있어서 몇 번 올라가 봤지요. 좋은 산에 가셨네요. 즐겁게 놀고 쉬고 하시다가 오세요.
저는 산을 무척 좋아하지만 바다 가까운데 사는 선생님이 젤 부럽습니다. 나중에 여건이 되면 꼭 선생님처럼 바다곁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지영샘! 산좋고 물좋고 공기 좋은 지리산을 다녀오셨군요. 방학이 좋긴 좋은 가봅니다. 자주자주 좋은 곳을 다녀 온 김샘의 이야기가 들려오니..... 그리고 참 건강하십니다요. 부러버요.
도를 닦는 기분으로 몸과 마음을 닦으려고 애 많이 씁니다. 지리산 산행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이면 풀 코스로~~ 아 옌날이여....그 때 디카라도 있었다면 대학 1학년 때였으니 벌써 26년이나 지났내요...아~~`언제 다시 한 번 그 길을 가 보나....화엄사에서....부러워요....나도 선생님이나 될 걸 그랬나...쩝 -_-''''
시간내서 다시 한번 가보세요. 너무 좋더라구요
좋은 추억이 되었겠네요.고령?ㅋㅋ에 족적을 남기셨군요. 축하합니다. 무척 부럽군요.
지리산에 가보니 내 나이면 고령이더라구요.
구름도 함께 넘어가네요. 엊그제 지리산 오두재를 넘었습니다. 차로 쓍쓍^^
구름도 넘고 구름따라 사람도 넘고 그런답니다.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온지 5년이나 되었네요.선생님의 사진을보니 아직도 구상나무는 잘있군요.생생한 현장 르뽀를 대합니다.
불이 나서 구상나무가 많이 죽었다네요. 새끼 구상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더라구요
우와 우와~ 우와 우와~ 김지영선생님 지리산 종주를 하셨군요. 지리산 가고 싶던 차에 지리산 산행기를 읽으니 핑 눈가가 젖습니다. 지리산 종주... 일곱 번은 한 것 같은데 가고 또 가도 그래도 가고 싶습니다. 둘이서도 가고 셋이서도 갔는데 그 중 혼자 갔을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우와~~~ 지리산 가고잡다~~
대단하시네요. 일곱번씩이나. 저는 15년전에 중산리서 천왕봉으로해서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까지 종주를 한적이 있구요. 종주를 하기는 이번이 두번째랍니다. 내년에도 또 가려구요. 지리산엘 다녀오니까 며칠동안 온몸에서 힘이 솟구치는데 그게 바로 정기인 모양입니다. 지금도 지리산의 정경이 눈에 아른 거립니다.
저도 며칠 전 중산리~천왕봉 코스 다녀왔는데 어쩐지 온몸에 힘에 솟구치는 것 같습니다. 다리가 아파 걷기도 힘들었는데 그래도 영광의 상처다 싶어 뿌듯하기만 하더라구요^^ 또 가고 싶어요.
지리산엘 다녀오니 온몸에서 기운이 올라오더라구요.
저도, 꼭 지리산이 고향 같아요.
그럼요, 그럼요. 지리산 다녀와서 일년 하고 안 다녀온 일년의 차이는 엄청나지요. 작년 6월에 혼자 다녀온 후 아직 못 갔는데 약효가 떨어져서 그런지 글도 한 편 안 나옵니다. 한 번은 12월 산불방지기간으로 입산통제할 때 혼자 가서 사흘을 눈속을 걸으면서 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끝내 안 나타나더군요. 곰이 나타나면? 붙잡고 탱고를 추려고 했거든요. ㅎㅎ
입산통제기간에 혼자 지리산 가는 거, 절대 따라하시면 안 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