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카루소라면 ‘20세기 최고의 테너’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는 전설적인 성악가입니다. 세계적 테너들도 자신들이 닮고 싶은 우상으로 100년 전의 카루소를 꼽고 있을 정도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악교사들도 여기(카루소가 최고의 테너라는)에 동조하고 있죠.
왜 이 사람에 대하여 사람들이 열광을 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음악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는 19세기의 신파조(新派調)에서 벗어나 극적 진실이 담긴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음색은 빛나는 윤기로 가득 찼고 성량도 대단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미성이었지만 1910년대를 거치면서 드라마틱한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최고의 장점은 경쾌한 벨칸토 레퍼토리에서 무거운 바그너나 베리스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오페라의 주역을 다 부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레제로, 리릭코, 스핀토, 드라마티코 등 그가 부를 수 없는 음역대(아래에서 설명)는 없어 보였습니다.
수더분하고 소탈하고 친근감 있는 인간관계도 인기의 비결이었습니다. 팬들이 보내온 편지의 답장을 스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편으로는 병원비를 도와달라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곤 했습니다.
또한 그가 이탈리아 도시 중에서도 부유하고 귀족적인 도시인 로마나 밀라노 출신이 아니고 가난하고 서민적인 나폴리 출신이라는 사실도 청중과 스타의 거리를 좁히는 데 일조했습니다. 뉴욕과 시카고로 몰려들어 힘겨운 삶의 조건과 싸워가며 신대륙에서 새 희망을 개척해 보려던 이탈리아 이민자들에게 카루소는 그런 까닭으로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 아내 아다와 다정했던 한 때
그러나 이 ‘위대한 카루소’에게도 여러 가지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렸습니다. 우선 소프라노 가수였던 첫 아내 아다와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두 아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12년 만에 갈라섰습니다. 카루소의 바쁜 일정으로 살갑게 대해주질 못했을 수도 있지만 결국 아다는 운전수와 배가 맞아 가출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카루소는 이런 아다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아다는 카루소를 위자료를 두둑하게 받아 내려고 고소를 하는 등 법정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아다는 위자료는커녕 명예훼손죄로 쇠고랑을 찰것 같으니까 아르헨티나로 바로 내빼버렸습니다. 이런 아다에게 카루소는 끝까지 생활비를 보내주었습니다. 아다와 헤어진 후 카루소는 이탈리아계가 아닌 토박이 미국인 부자집 딸인 도로시와 결혼했습니다.
두 번째는 건강문제였습니다. 워낙 체력을 타고 나서 매주 2회 공연은 기본이었습니다. 그러나 호흡과 발성에 있어서도 몸 전체를 공명강으로 이용해 신체 기능을 무리하게 소모했고, 팬들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많은 성악가들은 무리한 발성을 하지 않고 무리가 될 만한 배역을 맡지 않아 오래도록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카루소는 이렇게 스스로를 혹사시켰습니다. 그는 30대 후반부터 각종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에는 악착같이 섰습니다. 성악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성대 보호도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요란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유명한 ‘카루소 가글링’ 정도로 끝냈습니다. 소금물로 몇 분간 가글링하고 글리셀린이 포함되어 있는 증기를 목에 뿌려주는 정도였습니다.
1920년 12월 초, 카루소는 공연 도중 부서진 기둥 조각에 가슴을 강타당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통증은 옆구리로 확산되었고 며칠 후에는 <팔리아치> 공연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다시 꿋꿋이 일어나 공연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사랑의 묘약> 공연 시에 주인공 네모리노 역을 맡은 카루소의 의상이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이제는 노래하면서 각혈까지 하는 상태에 이르렀던 겁니다.
깜짝 놀란 동료 가수들과 스텝진들이 공연을 중단시켰습니다. 극장 측은 계속해서 노래를 하겠다는 카루소를 간신히 달래어 병원으로 급히 옮겼습니다. 그런데도 이틀 만에 다시 무대에 올라 베르디의 <운명의 힘>을 멀쩡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여튼 그럭저럭 노래를 이어가던 카루소는 다음해 2월 늑골 일부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고 은퇴를 결심했습니다.
* 카루소가 마지막을 보냈던 소렌토 언덕위의 베수비오 호텔
이제 카루소는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해 5월말 나폴리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소렌토에서 휴양하는 동안 잠시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7월에는 다시 상태가 악화되었고 8월 2일 나폴리의 베수비오 호텔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 카루소의 어린 시절과 가수로 성공하기까지...
카루소는 1873년 2월, 나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유한 집도 아니었습니다. 카루소는 위로 여러 형제가 있었지만 콜레라로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났고 그와 동생만 남았습니다. 작은 공장의 관리인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일을 했지만 다행히 교회에서 노래는 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카페에서 눈에 띈 덕분에 정식 성악 레슨을 받을 기회도 가졌습니다. 군대에 징집되어 들어갔지만 가장으로써 집안을 돌봐야한다는 이유로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됩니다. 그 대신 동생 조반니가 군대에 가게 됐습니다.
군대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895년부터 카루소는 무대 경력을 쌓습니다. 나폴리에서는 시시한 작품에 출연하면서 데뷔가 지지부진했지만 밀라노에서는 좋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엄청난 환호를 받으면서 이탈리아 최고의 테너로 떠오르게 됩니다. 마침 당시 새로운 성장 산업으로 떠오른 음반업계 입장에서도 좋은 표적이 되었습니다.
* 축음기 옆의 카루소
1902년 4월에 첫 레코딩이 이루어졌고 이후 18년간 무려 500장의 방대한 녹음을 남겼습니다. 1903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진출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엄청난 출연료를 챙기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멕시코에서 공연한 카루소 음악회 입장료가 일반 노동자의 1년 급료와 맞먹을 정도라고 대서특필되기도 했습니다.
* 베수비오 호텔 테라스에서의 나폴리 만 전경
* 축음기,음반과 역사를 함께한 카루소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들어본 사람의 기분은 대체 어땠을까요? 1877년에 토머스 에디슨이 최초의 축음기를 발명하고 그로부터 10년 뒤 베를리너가 150회전 음반과 그라모폰을 개발한 뒤로 유럽과 미대륙은 순식간에 '축음기 열풍'에 휩싸였습니다.
베를리너가 음반회사 '도이치 그라모폰'의 초석을 다진 1898년에 이탈리아 테너 엔리코 카루소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진출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카루소는 그라모폰을 만들고, 그라모폰은 카루소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카루소와 그라모폰의 성장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습니다. 카루소와 함께 음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일상 속의 예술가' 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눈부신 기술이 이루어낸 투명한 음질에 익숙해진 우리는 카루소 시대의 잡음 많고 어설픈 음반을 들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합니다.
*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SP(대략 1948년 이전의 레코드판)를 통해 우리가 듣고 있는 카루소의 목소리를 파바로티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의 녹음 기술은 오늘날의 잣대로 평가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듣고 작품이나 연주 수준을 오늘날과 비교하기에는 심각한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1920년 이전의 녹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가장 위대한 테너라는 엔리코 카루소의 노래는 전부 1920년 이전에 녹음한 것들입니다. 비록 소편성이지만 오케스트라 반주조차 옛날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 소리처럼 들릴 지경이니 카루소의 위대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음질을 고려할 때 그나마 들을 만한 수분으로 발전한 것은 카루소 사후 10년쯤 되는 1930년대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지금 흘러나오는 카루소의 노래를 이런 배경을 십분 감안해서 감상하셨으면 해서 주절주절 늘어놓았습니다.
* 카루소의 장례식
* 테너의 종류
남성 성악가들의 목소리는 높이에 따라 테너, 바리톤, 베이스로 구분하는데 테너는 다시 음색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집니다.
1. 레제로
아름답고 가벼운 소리를 말합니다. 테너 중 가장 가벼운 목소리이며 질감이 부드럽고 음색이 밝습니다. 대표적인 성악가로는 루이지 알바, 체사레 발래티를 들 수 있습니다.
2. 리릭코 레제로
레제로처럼 경량급이지만 자상하고 감미로우며 서정성을 갖춘 목소리를 말합니다. 대표적인성악가로는 티토 스키파와 영화 <물망초>에 나오는 탈리아비니를 들 수 있습니다
3 .리릭코
경량급과 중량급 사이의 소리를 말합니다. 낭만적이고 서정성이 풍부한 소리가 특징입니다. 이 영역에는 훌륭한 성악가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습니다. 쥬세페 디 스테파노,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유시 비욜링 등이 그들입니다.
4. 리릭코 스핀토
스핀토는 날카롭게 찌른다는 말인데, 중량감 있고 강렬하고 통쾌한 소리가 특징입니다. 대표적인 성악가로는 베니아미노 질리, 마리오 란자, 플라시도 도밍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5. 드라마티코
폭넓고 무게 있는 소리와 위압적이고 극적이며 영웅적인 소리가 특징입니다. 대표적인 성악가로는 후란체스코 타마뇨, 죤 빅커스, 마리오 델 모나코, 쥬세배 쟈코미니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플라시도 도밍고를 여기에 넣기도 합니다.
6. 카운터 테너
여성적 높은 음색의 테너를 말합니다. 대표적인 성악가-찰스 브렛,헨리 퍼셀,안드레아 숄,브리안 아사와 데이비드 다니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7. 카스트라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거세(去勢)가수를 일컫는 말입니다. 영화 <파리 넬리>에 나오는 까를로 브로스키(실존 인물)가 바로 카스트라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