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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시 상징계의 우월성
▲ 주체의 분열
거울의 위상에 대해서 얘기하고, 또 하나 중요한 게 뭐냐면 거울이라는 것은 상징계에서 이미 구
조화 되고 있다. 상징계의 우월성이 동시에 암시가 됩니다. 제가 강의 순서를 약간 바꾼 게
크리」의 구성에 따라서 도둑맞은 편지를 제일 먼저 해봤어요. 그리고 다음 시간에 문자의 심급.
그 도둑맞은 문자, 도둑맞은 편지를 얘기했는데, 다음 시간 문자의 심급에 대해서 또다시 상징계
에 대해서 얘기하려 하는데, 거울 단계는 이자관계가 아닙니다. 순수하게 무슨 말이냐면 나와
타자만이 있는 것 같지만 나와 타자를 구별시켜주는 하나의 질서가 이미 거기에 들어가 있죠. 그
게 바로 상징계입니다. 아이가 최초에 거울의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알아보게 되는 것은 어떤 과
정을 거치냐면 그 옆에 있는 엄마가 '저게 바로 너야' 라고 얘기해 줄 때 입니다. 그리고 엄
마와 동시에 서 있을 때 말을 안 해도 엄마가 아이를 안고 거울 앞에 같이 서 있으면 아이는 그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자기의 이미지라는 것을 구별해 내죠. 이 제 3의 질서, 이게 바로 언어적
인 겁니다. 그래서 거울 단계는 순수하게 이자적인 것 같지만, 동시에 이미 상징계 질서에 의해
서 거울 단계가 나와 타자라고 구조화 되고 있는 거죠. 바로 이게 거울단계에서 상징계의 우월성
입니다. 그걸 보여주는 게 이제 광학 모델인데 조금 있다가 설명하기로 하고. 기기 이제 예시된
예문을 조금 읽어 보겠습니다. 그 2쪽에 보시면 굵은 글씨로 쓴 게 다 인용문이죠. 주체는 항상
대다사 속에서 실현되지만 절반을 잃어버린다. 왜냐면 자아는 주체의 소외이사 자기 자신에 대한
오인의 구조이기 때문에, 근데 마치 주체의 소외를 얘기하면 완벽한 주체가 있고, 지금 기울에서
만들어 진 건 소외된 주체 인 것 같지만 사실 소외되고 있는 건 완벽한 주체로부터 사기가 소외
되는 게 아니라 바로 기울 이미지가 감추고 있는 문제로부터 소외된다는 겁니다. 이 문제는 기울
뿐만 아니라 언어적인 것에 대해서도 자기를 감추는 존재죠. 바로 '무' 적인 겁니다. nothing.
불이드 '네앙'이라는 무 자체는 존재의 본성과도 관계 됩니다. 결과적으로 기울적 이미지. 그리고 나중에 상징계 언어에 의해서 주체성들을 만들어 나가지만 언제나 자기의 부분을 잃어버리
면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데, 그게 이제 거울 단계에서 1차 소외로써 신형화 되는 거죠. 그 다음
에 철학의 코기토, 두 번째, 철학의 코기토는 근대인이 자기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오히
려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실하게 만드는 신기루의 온상이다. 여기서 철학의 코기토라는 것은 이
성적 주체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성적 주체는 바로 신기루의 온상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이게 바로 이성적 존재의 본 모습이다. 왜냐하면 그건 거울적인
이미지에서 규정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서 상징계의 우위성, 상징계가 거울단계에서 중요한 역할
을 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마고에 대해서 말하자면 세 번째 인용문 보세요. 우리의 일상적 경
험 속에서 상징계가 갖는 효력의 미광이 드러남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특권이다. 라고
나오죠. 바로 이 상징계와 이미지의 관계를 하나의 예로서 라캉이 잘 활용을 하는 게 바로 보아
스가 썼던 광학 모델입니다. 광학모델. 그래서 광학 모델을 얘기하면서 기울 단계에 대한 강의를
좀 정리하려고 하는데, 중요한 건 이건 바로 예시에요. 광학 모델 사체가 기울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건 아니라는 거죠. 실제로 라킹이 주목하는 거울적 이미지는 작용이에요. 이미지 자체
가 아니라 그게 나를 통해서 주체를 만들어 나가 게 하는 동일시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중요한 거
지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 자체에 고정되어 가지고, 그것을 거울단계의 본질인 것처럼 해석하면
안 되죠. 거울 단계에 대해서 두 가지를 오해하면 안돼요. 아까 스타드에 대해서는 얘기했죠? 단
계가 아니라는 거. 원형이라는 거. 또 하나는 이미지 자체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의 주제
가 동일시되면서 분열을 감수하고 거기에 매혹되면서 자기의 주체성을 일치하는 거. 그게 바로
거울단계의 본질인 거죠. 근데 이 두 가지는 상징계의 우월성을 통해서 매개가 되는 거죠.
▲ 라캉과 하이데거
나중에 도식이라고 세 가지의 임상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 때 R도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데, 라캉이 도식과 적절한 예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게 특징이죠? 젊었을 때부터 그랬어요. 라
캉이 이제 어렸을 때 중고등학교 다닐 때,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서 굉장히 열광을 했는데, 이때 독일어를 아주 라캉이 잘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건 제가 라캉을 만
나보지 않았으니까 독일어를 잘 했는지 알 수 없는 거죠. 독일어를 잘했다는 건 읽기를 잘했다는
거예요. 말은 전혀 못하고. 그래서 나중에 하이데거를 찾아가서 만났는데, 그와 한 마디도 못했죠? 하이데거는 불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라캉은 독일어를 한 마디도 못하니까. 서로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하이데거도 라캉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죠? 저 정신과 의사라고 하는데, 저 사람이 치료를 받아야 될거 같아.' 라고 얘기를 했다고 그래요? 그리고 에크리』
를 라캉이 선생님께 드립니다. 라고 헌정을 했는데, 읽어 보고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하죠. 무슨 소린지 모를 수밖에 없죠. 이런 일화도 있어요. 하이데거하고 라캉과의 관계도 하나
증상일 수도 있는데, 재미있는 게 많이 있어요. 라캉이 초청해서 파리에도 하이데거가 오고,
라캉이 취미가 자동차였는데, 자동차에 태우고 180-90을 밟으면서 사르트르 성당을 다녀왔죠. 그
리고 뒤에 하이데거 부부 특히 부인이 하얗게 질려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고 이렇게 어쨌든 하
이데거의 환심을 사려고 했는데, 그리고 하이데거의 로고스 논문을 라캉이 번역도 했어요. 어쨌
든 젊었을 때 하이데거와 니체와 스피노자에 굉장히 열광을 했었습니다. 특히 스피노자의 윤리학
을 도식화로 만들어서 자기 방에 붙여 놓고, 날마다 봤다고 그래요. 젊었을 때부터 도식화 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했는데, 도식이 갖는 장점은 그겁니다. 하나는 누구나 이해를 하게 만드는
거죠. 수학을 말로 설명하다 보면 오해가 발생하지만 정식으로 만들어서 제시하면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착각을 할 리가 없죠?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게 합리성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는 겁니다.
수학적 도식 같은 것들은 사실 말은 라캉은 그런 것들이 이제 에크리』에서도 나타났다고 하
는데, 말은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매개이고 수단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게 말이죠. 때로는 침묵이 더 확실할 수가 있어요. 특히 서로 싸우고 난 다음에 말
을 해봐요. 그러면 말을 하면 할수록 서로의 오해가 쌓일 수밖에 없죠. 저 도식이 그걸 설명을
해요. 자꾸 상상계가 작용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진심을 보기보다 자꾸 자기 식으로 재해석 하다
보니까 한 마디 침묵이 더 많은 진실을 전해줄 수가 있는 거죠. 그렇듯이 말은 이렇게 우리를 왜
곡시키지만 도식이나 어떤 도형 같은 것. 이런 메타포들은 그러지 않기도 하기 때문에 라캉이 저
런 건 많이 활용했는데, 그 여러 가지 도식이 나오는 것, R도식은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는데, 어
쨌든 엄마와 아이. 서로에 대해서 애착을 갖는 관계죠. 근데 벌써 엄마와 아이라는 이자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라캉은 얘기해요. 왜 서로가 애착을 가지느냐. 서로 결여가 되었기 때문에 엄
마는 자기의 결여를 아이를 통해 채우려 하고, 아이는 반대로 자기 결여를 엄마를 통해 채우려고
하는 결여가 작용하기 때문에 서로 관계를 가지려 하지 결여가 없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죠. 항상 제 3항이 들어가 있어요. 3항이 언제나 두 개의 함을 매개한다는 것이 라캉의 기본
생각인데, 이것이 상징계의 우월성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거울 단계 이후에
광학 모델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 1차 동일시와 2차 동일시
또 하나 광학 모델을 통해서 아까 1차 동일시 기울 이미지에 대한 1차 소외라고 할 수도 있는 1
자 동일시와 2차 동일시라는 모델을 광학 모델을 통해서 얘기를 합니다. 1차 동일시는 기술에 대
한 이미지죠. 2차 동일시는 기표에 대한 동일시에요. 아버지 이름에 대한 동일시 여기서 각자 작용하는 심급이 서로 다르죠. 1차 동일시에서는 기울적 이미지. 라캉은 이상적 자아라고 얘기해요. 나르시시즘이 대상을 삼고 있는 이상적 자아, 자기의 사랑스런 모습. 2차 동일시에 대상은 이상은 자아 이상이죠. 이 자아 이상과 이상적 자아를 구분을 해서 얘기를 합니다. 자아 이상은 상징계에 속하는 겁니다. 상징계 동일시에서 작용하는 대상이 바로 자아 이상이죠. 그 다음에 이
상적 자아는 상상계, 시간적으로 보면 상상계적 동일시가 먼저 오죠. 거울 단계에서 그 다음에 2
차적으로 상징계 동일시가 오는데 논리적 순서를 보면 상징계 동일시가 먼저 작용을 해요. 자기
자신을 먼저 구별을 해야지 이미지에 대해서 내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때문에 이미지가 아까 자
꾸 오피레이션 작용 차원에서 봐야 된다고 얘기를 했는데, 세계 속에서 묻혀 있던 이미지가 떨어
져 나오는 게 중요해요. 그게 바로 자아라는 것이죠. 세계 속에서 떨어져 있지 않으면 아까 말한
동물의 의태나 변성하고 똑같아요. 그냥 파묻혀 버리는 거죠. 세계에 근데 인간은 그 이미지가
자기 것이라는 걸 알고, 떨어뜨려서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에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그걸 통해서
매개를 하죠. 비로소 세계는 나에 대해서 존재하는 세계를 재구성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
간 이미지의 특징이죠. 그래서 인간은 단지 이미지를 보고 예를 들어서 마치 동물이 암컷을 보여주면 수컷이 발정기 흥분하듯이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게 인간 이미지의 작용이 아니에요. 이미
지는 상당히 욕망적 기제가 같이 들어가 있는 거죠. 왜냐면 자아를 만들어 내고, 자아의 주변에
대상들을 배치하는 게 이미지의 특징이기 때문에 바로 자아 이상이 없으면 이미지에 대해서 동일
시를 안 합니다 그래서 거울 단계에서 이야기 했듯이, 침팬지는 자기 이미지에 대해서 인간보다
더 빨리 알지만 싫증을 내버리기 때문에 침팬지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근데 인간은 자기 이미지
를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열광을 하면서 집착을 하는 게 바로 인간의 특징이라는 거
죠. 그래서 인간과 침팬지가 서로 다른 심리적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고, 나중에 박사
논문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지만 인간이 동물과 차이를 보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이 바로 미성숙
한 단계로 태어난다는 얘기를 라캉이 거기서 얘기를 합니다. 생물학의 이론들을 많이 응용을 해
서,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걸어 다니고 엄마 젖을 먹을 수 있고, 조금 지나면 화동을 할 수가 있
죠. 바꿔 말하면 본능의 지배력이 더 강한 게 동물이에요. 근데 인간은 본능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게 운동신경이나 구조가 미숙한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이것을 메워 주는 게 학습이죠. 인간은 배워서 자기 본능을 발전 시켜 나갈 줄 압니다. 이게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죠. 동물에 있어서
는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면 인간은 학습이 그 대신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여기서 거울적 이미지를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광학 모델을 통해서 거울 단계를 정리하도록 할게요.
▲ 광학 모델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들이 라강한테도 중요했는데, 왜냐민 프로이드한테는 초자아
라는 게 있었고 사아 이상이라는 게 동시에 있었어요. 근데 구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한테는 조지아는 어떤 검열, 억제, 도덕과 관계가 된다면 지아 이상이라는 것은 매우 닮고 싶
어 하는 이미지. 이정도로 구별을 했지만 둘은 명확하게 구문을 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라캉은
사이 이상과 이상적 사이를 아주 철저하게 구분하려고 했는데, 왜냐민 상상계와 상징계를 서로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구별이 되는 것들이죠. 그래서 자아이상과 이상적 자아를 예시적으로 보
여주는 게 바로 광학 단계인데, 여기서 거울 이미지가 다시 한 번 나오니까. 광학 모델은 원래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림을 뛰.... 자! 그럴싸하죠? 주체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상사, 여기서는 상사 안의 내용물이 안 보입니다. 상사 안에 들이 있는 건 꽃이에요.
그 다음에 상자 위에 있는 긴 화병이죠. 자. 여기서 첫 번째 강물이 나오는데, 이게 오목 거울
입니다. 평년거울과 다르게 오목 거울은 그걸 뒤집어서 보여주는 속성이 있습니다. 왼쪽 오른쪽.
민에 와 이게 이제 여기 비춰지민 어떤 식으로 비춰지냐민 주체가 여기서 이제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거죠. 거울의 이미지를 위에 더 올라 가야 되겠다. 여기 두사된 지점이 있고, 그 다
음에 이런 식으로 여기서 보게 되면 어떻게 처음에는 이것 밖에 안 보입니다. 근데 위치를
추적하다 보면 숨겨져 있는 게 반사가 되가지고 화병이 이렇게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목
기울이니까 가능 하겠죠. 그리고 여긴 거꾸로 되어 있지만 오목기울이기 때문에 바로 세워서 보
여주는 거죠. 여기서 이제 주체가 보고 있는 이 공간은 실제 공간입니다.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실제 공간이죠. 내가 손을 뻗치면 잡을 수 있는 이런 공간인거죠. 처음에는 이 꽃병밖에 보지 못
하지만 조금 위치를 잘 잡으면 빛이 반영이 되가지고 이게 두과가 돼서 눈에 모여서 상으로 맺혀지게 됩니다. 주체는 마치 꽃병에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게 되는 거죠. 바로 이 숨겨져 있는
꽃이 오목 거울을 통해서 이렇게 반영이 되가지고 보여 지게 되는 거. 실제 공간속에 드러나는
것. 이게 바로 광학 모델의 예시죠.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볼 수 없지만 거울을 매개로 해서 마
지 화병이 꽃을 피어있는 것처럼 보게 되고, 같은 3차원 공간에 있기 때문에 구별이 안 되는 거
죠. 물론 손을 뻗어 보면 금방 사라지겠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실제 공간의 주어진 이미지는 구
별이 안 됩니다. 이게 첫 번째 광학 모델의 예시죠. 여기서 이제 이 꽃병은 우리의 신체를 상징
한다고 볼 수 있어요. 신체의 은유. 그리고 감추어져 있는 꽃은 욕망의 대상이죠. 욕망의 대상은
실제로 보이지 않지만 주체가 어떻게 위치를 잡느냐에 따라서 마치 우리 몸에 피어 있는 꽃처럼
실제 대상처럼 우리의 시각에 잡힌다는 거죠. 그렇지만 손을 뻗어보면 사라지는 게 바로 욕망의
대상이죠? 이게 바로 첫 번째 광학 모델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단순하게 되는데 라캉이 말하는
거울의 이미지는 이런 차원이 아니에요. 거울은 평면적 거울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이해를 할 때
거울 이미지를 바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건 이제 숨겨진 공간의 꽃을 실제 공간 속에다가
구현해내고 있죠. 마치 그게 환영처럼. 근데 거울은 저렇게 입체적인 공간이 아니라 평면의 공간
에 모든 걸 투여를 해버립니다. 거울속에 비춰진 입체는 환영에 불과한 거죠. 하나의 일차원적인
면, 그 면에다 투명하게 늘어뜨린 게 거울의 이미지죠. 그래서 실제 공간이 아니라 가상의 공간
에 맺혀진 것. 이게 바로 거울상입니다. 이게 이것과 어떻게 차이가 나냐면 이건 실제 공간에 주
워져 있어 때문에 실제 욕망인 것처럼 주체에게 다가 오지만 가상의 공간은 평면성 때문에 허망
함이라는 게 더해질 수 있는 것들이죠. 두 번째 광학모델에 가보면 이게 다 드러나게 되는데, 두
번째가 거기 그려 놓은 겁니다. 거기 도표를 보시면 거기 나오죠? 같이 한 번 그릴게요. 아까와
차이가 나는 게 뭐냐면 꽃병이 밑에 있는 거죠. 그 다음에 꽃이 위에 있습니다. 실제 공간에 다
있는 거죠? 아까처럼 여기 위치에서 본다면 꽃병이 바로 서면서 그 위에 꽃이 피어 있는 게 보여
지겠죠? 이게 첫 번째 모델인데, 두 번째 모델은 주체의 위치가 바뀝니다. 여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거죠.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꽃도 안보이고 꽃병도 안보이고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되죠. 중요한 건 평면거울을 여기에 놓는 거죠. 그러면 아까 주체가 여기서 바라볼 때 꽃
병이 바로 서면서 꽃이 피어 있는 게 보이겠죠? 이게 그대로 여기에 반영이 되가지고 보여질 검
니다. 그렇죠? 그러다 보민 주체는 여기서 봤을 때 이 평민적인 이 밑에 평민화 된 이미지죠? 꽃
이 꽃빙에 피어 있는 게 보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까는 손을 뻗는 공간속에 꽃이 있었지만 주
체 자신의 모습도 평면거울에 비춰지게 되겠죠. 평면거울에. 그러면 자기와 마주보게 되는 대상
이 한 공간에 동시에 자리잡게 되는 거죠? 실제로 나는 그 공간에 있는 게 아니라 이만큼 떨어져
서 지금 바라보고 있는 거죠. 아까와 다른 건 아까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없는데 지금은 저 뒤에
서서 대상 옆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 내가 똑같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거죠. 바로 이게 굉민
화 된 공간입니다. 실제로 이 공간은 가상의 공간에 불과한 거죠? 아까처럼 손으로 민원 수 있는
실제의 공간이 아니라 가상의 공간이고, 평면거울을 통해서만 보여 지게 됩니다. 이건 나중에 라
캉은 이렇게 기울이기 시작 하다보면 처음에는 똑바로 었던 주체와 병이 일그러실게 아닙니까?
뒤로 넘어갈수록?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리게 되죠. 그리고 다시 올리면 일그러진 계
이렇게 나타나면서 다시 나타나겠고, 반복이 될 겁니다. 지금 주체가 유일하게 관찰을 할 수 있
는 것은 평면거울의 덕택입니다. 평면거울이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죠. 이게 바로 라캉은 대
타자로 부르는 거예요. 실제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우리 자신이 실제화 된 공간에서 보는 것 같
지만 평면거울이 그걸 비춰 줄때만 볼 수 있다는 거죠. 더구나 평면거울이 누워버리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거죠. 평면거울이 어떻게 자리를 잡아주느냐 에 따라서 주체는 그 욕망의 공간속에
자기가 같이 있는 것과 욕망의 대상을 볼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반 정도만 만약에 평면거
울이 올라 와 있다고 한다면 비틀비틀 왜곡된 이미지로 보게 될 것이고, 바로 내가 아니라 평면
거울이 움직임에 따라서 대상들이 보여지는 것. 이게 바로 상징계의 은유인거죠. 여기서 주체는
실제 이 공간에 있지만 실제 공간. 근데 여기서는 가상의 공간. 가상의 공간 속에 화병이 이렇게
있고, 그 다음에 여기 꽃이 피어 있는 거죠. 그 다음에 이제 여기에 주체의 위치가 여기로 이동
을 하게 됩니다. 실제 공간과 가상의 공간이 딱 나눠지죠. 딱 나눠지면서 가상의 공간속에 비춰
진 것들이 평면거울이 기울기에 따라서 보여 지는 것들이죠. 바로 이게 거울 단계의 예시 인데,
왜냐면 평면화 된 이미지에 비춰지는 모습은 이상적 자아를 상징 합니다. 근데 이상적 자아는 거
울이 조금만 위치를 바꿔 버리면 비뚤어져서 어긋나서 쭈그러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거죠.
그런 예시로서 제가 오늘 그림을 안 갖고 왔는데, 다음에 홀바인 그림을 하나 보여 드릴 텐데,
홀바인 그림을 보면 아나모포즈라고 그러거든요? 어느 장소에서 보면 뿌옇게 해골처럼 보여요.
길쭉한 남성의 성기같이 근데 약간만 위치를 바꾸면 해골처럼 이렇게 보인다고 그럽니다. 그걸
아나모포즈라는 광학 기구를 통해서 보면서 그리는 게 홀바인 그림이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라캉
*
이저 상황을 예시를 하죠. 시각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서 이미지가 해골로 보이기도 하고 남근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들. 실제 홀바인 그림들은 계단을 내려갈 때 해골이 딱 나타나게
그려져 있다고 하는 거죠? 바로 여기서 가상의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이게 바로 상상적 자아 상
상화된 자아. 혹은 이상적 자아, 이상적 자아를 보면 주체는 저게 바로 나다. '내가 닮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저거다.' 라고 하지만 그것은 평면거울이 기울기를 어떻게 조절해주냐에 따라서
좌우 되는 거죠. 거울이 상징하는 것은 이상적 자아고, 아니 자아 이상이죠. 그 다음에 'mio
idail' 이 두 가지를 구분해서 이상적 자아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 자아 이상은 상징계에 속하는
것. 그리고 상징계가 기울기를 어떻게 잡아주느냐에 따라서 이상적 자아가 어떻게 나타나기도 하
고, 사라지기도 하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보아스의 모델을 변형을 해서 설명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보아스의 모델은 어디까지나 예시에요. 실제 이미지를 가지고 아까도 얘기하지만 자아와 자
아 이상을 구별하면 안 되고, 자아 이상과 이상적 자아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서 '저 거울에 비친 니 모습 좀 봐 얼마나 예뻐'하고 다독거리고 보여주고 사랑스럽
게 할 때 이상적 자아는 아이한테 상상적 아름다움의 동일시로 다가오게 되죠. 그리고 지아 이상은 그렇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아이가 올 때 “남자 아이가 그린 걸 가지고 울면 안
돼. 씩씩해져야지" 이런 식으로 사회적으로 제시하는 기준이 있죠? 아니민 "여자애가 그렇게
거칠어서 어떡하니 여자애가 좀 얌전하고 이렇게 사회적으로 자꾸 제시하는 이게 바로 지아
이상인 거고 이상적 자아라는 긴 하나의 이미지의 상으로서 너의 아빠처럼 너의 엄마처럼 이렇게
되야 되지 않겠냐. 이렇게 제시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작용하면서 주체 자기의 주체성을 만들
어 가는 거죠. 결정적인 것은 지아 이상 즉 상징게 그다음에 상징계의 영향을 받으면서 상징계를
보완해주고 같이 가는 게 바로 상상적인 대상이 이상적 사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죠? 저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광학 모델을 든거지 저길 이미지 차원으로 구별을 하시면 안돼요. 실제 공간과
가상적 공간에 너무 메이년 안 되고, 나중에 자아 이상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서 주체
에게 다가 오게 됩니다. 주체가 동일시하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이름이죠. 아버지가 아니라 아
버지 이름이죠. 그지만 아버지 이름을 동일시로서 받아들이기로 할 때 동시에 아버지의 이마고도
따라다닙니다. 그래가지고 만약에 흩어머니한테서 키우는 아이가 어떻게 오이디푸스를 겪냐 하면
라캉 같은 경우는 자아 이상이라는 것은 꼭 실제 아버지로부터 올 필요가 없어요. 너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상기시켜주기만 해도 되고, 할아버지가 있다면 할아버지를 상기시켜주면 되요. 남자애
면 남자 아이로서 여자애 여자 아이로서 혹은 양반집이면 양반집 아이로서 이런 식으로 제사
되는 게 자아 이상이고, 자아 이상과 이상적 자아와 같이 가면서 주체는 자기의 어떤 주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지고 나면 그게 내가 됩니다. 내가 돼서 모든 과정에
출발점에 놓이게 되는 거죠. 나는 원래부터 이런 존재인 것처럼 생각이 되면서 나를 중심으로 가
족관계와 세계가 다 설명이 되는 거죠. 이렇게 보면 뒤늦게 구성된 주체라는 것들이 사건에 있어
서는 설명에 있어서는 제일 앞에 가가지고 놓이게 되는 이런 구조가 만들어지게 되고, 이런 것들
이 라캉이 주체라는 것은 하나의 언어의 효과에 불과하다. 그리고 언어의 효과는 그 이전에 상상
적 동일시를 통해서 평면화 된 거울 이미지. 자기를 동일시함으로써 마들어진다. 근데 이 동일시
의 결과는 인간에게 행복이 아니라 동일시의 안도감과 더불어 하나의 불안의 요소를 계속 제품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불일치라는 것들을 여러 가지를 통해서 극복해 나갈 수밖에 없
고, 이 극복의 과정이 욕망인 거죠. 그래서 욕망은 선택이 아니랄 인간이 실존하는 존재의 양상
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원래 불일치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불일치한 걸 대상을 통해
서 메워보려고 하는 거죠. 자기의 이상적 자아를 크게 만들어 봐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지 거기
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근데 실제로 그것은 언제나 깨질 수 있는 허구적인 그리고
좀 허상적인 이미지인 거죠. 그건 여러분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만 해보셔도 되요. 나
의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을 안 해요. 아마도 살아오면서 많이 바뀔 겁니다. 자기 자아
이미지가 자기 또 자아 이상도 많이 바뀔 거예요. 어려서 생각했던 자기 이미지와 대학에 들어와
서 생각하는 것과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이 바뀌는 거죠. 저도 그런 걸 많이 경험합니다. 학창
시절에 얘기가 통했던 애들이 지금 만나면 안 통하는 애들이 많이 있어요. 개가 바뀐 건 아닌데,
그렇죠. 자아 이상이 바뀌었겠죠. 그렇게 이해하며 넘어가는 데 그렇게 우리는 상징계가 어떤 식
으로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서 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주체성의 길을 여는 근
본적인 것들은 상징계예요. 결과적으로 그리고 상징계가 자리를 잡아주기 때문에 비로소 투영된
공간에서 나의 위치가 결정이 되는 것들이죠.
▲ 거울 단계의 활용
자 그러면 거울 단계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거울 단계가 어느 식으로 활용에 될 수 있는냐.
예시만 하고 강의를 맺도록 할게요. 거울이라는 것은 모든 상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가능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대해서 열광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보여
지는 이미지와 나를 동일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근데 영화관이 꼭 거울의 이미지
에 그대로의 반영은 아니에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고 있는 나를 그 속에 두잉
되게 만드는 그 구조가 중요한 거죠.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할 때 영화 감상자는 제 3자적인 위치
에 있으면서 사진에 대해서 개입하는 존재가 됩니다. 투명한 인간이 되는 거죠. 당사자가 아니라
내려다보고 전개되는 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서 관망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는 그런 존재.
이렇게 동일시하고 끌어당길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봤을 때 우리가 감동을 할 수도 있는
것들이고, 그런 것들이 가능해지는 거죠. 또 하나는 『에크리』를 예시로 해서 텍스트라는 게 라
킹한테는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다고 그랬는데, 바로 상상계적인 작용이라고 할 수
있죠. 텍스트라는 고정성은 없고, 텍스트는 언제나 그때그때 재해석 되는 작용만이 있을 뿐이다.
텍스트는 욕망의 대상 자체가 되는 것들이죠. 그리고 나중에 상상계적인 거울 단계의 기능들은
오브제 아라는 길 동해서 아주 구체화 됩니다. 오브제 아. 지금은 가능성만 예시하기 때문에 간
난하게 말씀드리는데, 오브제 아는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되죠. 누구에게는 오브제 아가
집일 수도 있고, 자동차 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여자 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돈일 수도 있어
요. 다 자기가 두여하는 대상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거죠. 이게 바로 나의 욕망의 대상이야. 그렇
지만 그건 순수하게 나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죠. 이미 타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마지 짝패같이 르
네 지라르가 얘기한 욕망을 하기 때문에 나 역시도 거기에 대해 욕망을 하게 되는 거죠. 결국 거
울 단계가 우리한테 주는 것들은 인간의 욕망은 순수한 주체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
하는 거다. 어떻게 보면 욕망의 대상은 타인이 욕망하는 거죠.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나는 욕망
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상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사람들
이 타인이 원하는 게 무얼까? 그게 나의 욕망의 대상일까? 이렇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
바로 이렇게 거울단계를 통해서 인간의 경험들이 구조화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저건 영원한
심리적인 원형으로 작용을 하는 거죠. 거울 단계가 결국 심리학자가 만들어낸 용어지만 저걸 가
지고 활용을 하게 되면 라캉의 천재성을 인정해 줄만해요. 그렇지 않아요? 또 재미가 있으니까
많은 이론에서 써먹기도 하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