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6500m의 웨스턴쿰 빙하에서 8848m 높이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수직고 약 2400m 높이로 치솟아 있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히말라야 거봉의 수많은 등반로 중에서도 가장 험난하다는 평을 듣는 벽이다. 바위와 얼음, 눈이 뒤섞인 남서벽에 길을 낸 것은 75년 영국 보닝턴 원정대와 82년 구소련 원정대 2개 팀에 불과하다. 특히 보닝턴 팀은 18명의 세계적인 산악인을 비롯해 108명이 참가한 대규모 원정대였고, 구소련 팀은 27명의 막강한 대원으로 구성된 원정대였던 데 비해 박영석 팀은 대원 5명과 셰르파 7명의 소규모 원정대였다는 점에서 코리안 루트 개척은 더욱 값지다 할 수 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박영석에게 한 맺힌 벽이었다. 91년 첫 도전 때는 해발 7000m대 벽에서 100m나 추락했다. 이틀간이나 의식을 잃었을 만큼 큰 사고였다. 그런데도 그는 헬기로 긴급 구조돼 후송된 카트만두의 병원에 누워 벽에 걸린 에베레스트 사진을 보며 다짐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기다려라.’ 93년 다시 도전했다. 동국대 단일 대학 산악부 원정이었다. 그는 그 등반에서 막판에 장비가 모자라 남서벽 등반을 포기해야 했으나, 남동릉 루트로 변경해 국내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그 등반에서 후배 대원 2명이 추락사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박영석의 에베레스트에 대한 집착은 그로써 끝나지 않았다. 1996년에는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긴 북동릉에 도전했다. 불운은 계속 되었다. 이 도전 역시 눈사태로 사다(우두머리 셰르파)가 사망하고 박영석은 갈비뼈 두 대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면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잠잠하던 에베레스트 열기가 다시 살아난 게 산악 그랜드슬램에 성공한 이듬해인 2006년이었고, 그 해 횡단등반에 성공하자 남서벽으로 다시 눈을 돌린 것이다. 이번엔 이전에 두 차례 등반했던 보닝턴 루트가 아닌 신 루트였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한국인의 길을 내고자 하는 꿈이었다. 그러나 남서벽은 그에게 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2007년 첫 번째 도전 때는 제4캠프(7900m)에서 머물던 대원 2명이 소리 없이 흘러내린 눈에 텐트가 무너지면서 1300m 아래 설원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사고를 당한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5년 넘게 한 지붕 아래서 살면서 히말라야 등반과 극지탐험을 함께 해온, 혈육 같은 후배들이었다. 그는 한동안 후배들에 대한 죄책감에 눈만 뜨면 술독에 빠져 지냈다. 정신을 차린 뒤에는 산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두 후배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순 없었다.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첫댓글 *** 한국인으로 이름을 남긴 고상돈대원에 이어 원로산악인이신 박영석님도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산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 하였네요. _그는 영원한 산사나이로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였기,에 그의 죽음은 육신은 산에..., 영혼은 우리 마음 속에 깊은 곳에 간직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