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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에 나왔던건데 너무 마음이 아팠어여...
정말 약소국가의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었다는것이..
길더라도 읽어주세여
1909년 11월 20일에 발행된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한국과 관련된 한 사건의 기사가 실렸다. ‘롱워스 부인(Mrs. Longworth)’이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저지른 적절치 못한 행동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는 엠마 크뢰벨(Emma Kroebel )이라는 여성이 쓴 책에 들어있는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여 기사화 한 것이었다.
엠마 크뢰벨(Emma Kroebel )은 독일여성으로 대한제국 황실에서 의전담당으로 1년 남짓 생활했다. 그녀는 독일로 돌아 간 후, 1909년 한국에서의 남다른 체험을 기록하여 "내가 어떻게 조선의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는가(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라는 책을 출판한 것이다.
이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실리자 그 다음 날인 1909년 11월 17일 그녀의 남편인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씨는 뉴욕 타임즈를 통해 그 기사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발표를 했다.
그렇다면 ‘롱워스 부인(Mrs. Longworth)’은 누구이며, 그녀가 도대체 한국에서 무슨 일을 벌인 것인가?
롱워스 부인(Mrs. Longworth)이란 이름은 그녀가 1906년 오하이오 출신 공화당 의원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와 결혼하면서 얻은 이름이다. 그녀의 처녀 때 이름은 엘리스 루스벨트(Alice Lee Roosevelt)로 ‘테디(Teddy)’라고 불리던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엘리스(Alice)의 아버지다.
1901년 9월, 제 25대 미국 대통령이던 맥킨리(McKinley가 뉴욕 주 버팔로에서 암살을 당하고 당시 부통령이던 루즈벨트(Roosevelt)가 대통령 직을 승계했다. 이 때 엘리스(Alice)의 나이는 꽃 같은 열 일곱 살이었는데 1902년 1월에 백악관에서 열린 파티에 등장한 그녀를 미국 신문들이 주목한 것은 물론이고 유럽 여러 나라들이 "미국의 엘리스 공주(Princess Alice)"로 앞 다투어 보도하며 일약 사교계의 주목을 끌었다.
디자이너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만든 푸른색의 옷감은 "Alice Blue" 라는 이름이 붙어 최고의 유행 상품이 되었고 그녀에게 바치는 노래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마 요즘의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얻었던 것 같다. 더구나 19세기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던 때라 그녀는 미국의 공주와 같은 존재로 부각되었다.
1900년대 초,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서방세력의 간섭으로 아시아 판도가 정치적, 제도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1905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정부관리들과 수십명의 상원의원을 비롯한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아시아 순방단(Mission to Asia)’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아시아 순방단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장녀 엘리스(Alice)가 들어있어 순방단의 행보에 백악관의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
1905년, 미스 엘리스 루즈벨트(Miss Alice Roosevelt)는 아시아 순방길에 올랐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도착한 그녀는 명실상부한 '미국의 공주'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일본 천황과의 만찬, 무도회 등의 행사가 이어졌고 이어서 필리핀과 중국을 계속해서 방문했다. 중국에서는 서태후(西太后)를 만나 진귀한 보석, 비단 등과 함께 애완견까지 선물 받았다. 그녀가 중국에서 미국 군함 오하이오 호를 타고 서해를 건너 인천에 도착한 것은 1905년 9월 19일 이었다. 엘리스(Alice)의 한국 방문에 대해 대한제국에서 남긴 기록이 있다. 1905년 당시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박사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그 분은 "Korean Review"라는 영문 잡지를 서울에서 발간하고 있었다. 이 잡지 1905년 9월호에는 엘리스 루즈벨트(Alice Roosevelt)와 아시아 순방단의 한국 도착 소식과 체류기간 동안 방문했던 장소와 행사 등이 자세하게 소개되어있다. ”9월 19일 미스 루즈벨트(Miss Alice Roosevelt)와 아시아 순방단 일행이 탄 군함 오하이오 호가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특별 열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떠났는데 객차와 기관차는 미국, 한국 그리고 일본 국기로 장식되어 있었다. 많은 한국 관리들과 군대의 장교 그리고 황실 근위대와 군악대, 각 국 공사들이 역에 도착하는 이들을 환영하러 왔으며 이들이 가는 길에는 구경꾼들이 쇄도했다. 미스 루즈벨트를 위해 황실에서는 황실 가마를 배정했고 모든 일행들에게도 관청의 가마를 준비했다. (서울에 있는) 모든 집들에는 미국과 대한제국 국기가 내걸렸는데 내걸린 미국 국기 중에는 별이나 줄무늬(Stripe)가 빠진 경우도 있었고 색깔도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국빈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20일에 미스 루즈벨트는 방문단 일행과 함께 황실을 예방하고 한국 정부의 관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21일에는 미국 공사가 주최하는 가든 파티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한국에 거주하던 미국인들이 미스 루즈벨트와 그 일행들을 만났다. 22일에는 미스 루즈벨트가 황제 폐하와 점심을 함께 했으며 오후에는 동대문(East Gate) 밖에 있는 황제비의 무덤을 방문했다.”
뉴욕타임즈에 실렸던 엠마 크뢰벨(Emma Kroebel)의 책 내용인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제 바야흐로 시작되려는 참이다. 크뢰벨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 황제는 미국 대통령의 딸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환영을 표하기 위해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황제비의 무덤(홍릉) 근처에서 야외 리셉션을 열기로 결정했다. 황실의 의전을 담당하던 엠마 크뢰벨(Emma Kroebel)도 관리들 및 궁녀들과 함께 리셉션 준비를 위해 홍릉으로 갔다. (리셉션 장소는 아마도 영휘원(永徽園) 이었던 것 같다. 영휘원(永徽園)은 동대문 밖 청량리에 있는 고종황제의 비(妃)인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를 모신 홍릉(洪陵) 구역이다. 고종황제가 미국대통령의 딸과 아시아 방문단을 위한 환영리셉션을 이곳에서 열기로 한 것은 아마도 몇 년 전 일본이 명성황후에게 저지른 만행을 알리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짐작케 한다. 명성황후의 묘는 고종황제 승하 후 1919년에 남양주군 금곡으로 옮겨졌지만 이곳은 아직도 ‘홍릉’으로 불리고 있다.)
아래의 글 부분이 뉴욕타임즈에 실렸던 내용이다.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먼지의 폭풍이 우리에게 몰아닥쳤고 그 먼지 속으로부터 한 무리의 말 탄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무리의 선두에는 위세당당하게 말을 타고 나타나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자주색의 긴 승마복을 입었고 그 아래에는 몸에 꼭 맞는 승마용 바지를 반짝거리는 승마용 장화 속에 접어 넣은 것이 얼핏얼핏 보였으며 승마용 채찍을 한 손에 들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큰 코끼리 석상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곁눈으로 흘낏 보더니 재빨리 말에서 내려서 순식간에 그 코끼리 석상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롱워스(Nicholas Longworth)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쳤다. 이것을 본 우리 일행은 그녀의 그런 망나니 같은 짓에 경악했고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저지른 그와 같은 무례한 짓은 한국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말 중차대한 순간이었는데 차와 다른 음식이 나오면서 위기의 순간이 지나갔다. 그러나 엘리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그 이 후로는 어떠한 감사의 인사도 없었고 그녀는 모건 공사 부인과 잡담을 나누면서 씩씩하게 샴페인을 마시고 또 다른 음식들을 즐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엘리스는 모두에게 말에 오르라고 명령하고는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과 함께 버팔로 빌처럼 말을 타고 떠나갔다."
이런 내용을 담은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실리자 그 다음 날인 1909년 11월 17일 당시 엘리스의 남편이던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가 뉴욕 타임즈를 통해 그 기사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발표를 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글을 쓴 엠마 크뢰벨(Emma Kroebel)을 비난하고 결코 한국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신성한 코끼리가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숭배물(idol) 이었을 것이고 모든 방문객들이 존중해야 하는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분명 그런 방식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엠마 크뢰벨이라는 여성을 기억하지도 못하며 당시 방문단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아마 크뢰벨이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기자가 엘리스를 직접 인터뷰하려 했지만 롱워스씨는 앨리스가 어떤 경우에도 인터뷰를 하지 않는 룰을 지킨다고 하면서 대신에 엘리스는 그 책에 실린 내용을 전해 듣고는 크게 웃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여기에 답을 줄 단서가 코넬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1905년 경에 한국주재 미국 공사관에서 공사 서기로 근무했던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Dickerman Straight)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남긴 편지와 수 백장의 사진과 그림 등이 코넬대학교 도서관의 귀중본 컬렉션(Willard Dickerman Straight Digital Collection)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 귀중한 자료들 속에 ‘루즈벨트 양의 한국에서의 사건’을 담은 사진이 발견되었다. 이 사진의 뒷면에는 "Alice Roosevelt at Seoul" 이라고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사진 속의 석상이 코끼리는 아니지만 석상인 석마(石馬) 위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은 사람은 분명 엘리스(Alice) 이고 장갑을 낀 그녀의 손에는 크뢰벨이 말한 것 처럼 말채찍이 들려져 있었다. 결국 엠마 크뢰벨(Emma Kroebel)의 말이 맞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대통령의 딸인 엘리스(Alice)가 어떻게 명문가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성격을 지녔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엘리스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그녀의 성장과정이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1884년 뉴욕의 맨하튼에서 그녀가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역시 엘리스(Alice)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그리고 같은 날 그녀의 외할머니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녀의 아버지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갓 태어난 딸을 여동생에게 맡기고 서부로 떠나버렸다.
몇 년 후 그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의 곁에 새로운 아내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시어도어는 뉴욕주 주의회의 상원 의원과 뉴욕 주지사를 거치며 바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태어나자 마자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정치 활동에 바빠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아버지로 인해 어린 엘리스는 늘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새 어머니가 있었지만 그녀는 몸이 약해서 앓아 눕는 일이 많았고 또 엘리스 밑으로 태어난 동생들이 있다 보니 엘리스가 느끼는 외로움을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 한 엘리스가 아버지의 관심을 얻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반항적이고 엉뚱한 행동들이었다. 이런 성향은 그녀를 매우 독립적이고 활발한 말괄량이와 같은 여인으로 만들었는데 이런 모습은 순종적이고 다소곳한 숙녀의 모습을 최고로 간주하던 당시 상류사회 여성들의 기준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사냥을 즐기고 거친 야외 생활을 좋아하던 아버지 시어도어의 성격이 유전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엘리스는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달랐다. 술도 잘 마시고 공개적으로 담배도 피웠다.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는가 하면 경마장에서 남자 도박사들과 어울려 도박을 하거나 포커판에서 남자들과 함께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백악관에서 애완동물로 뱀을 키울 정도로 엉뚱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인 시어도어가 "나는 나라를 통치하던가 아니면 딸을 단속하던가 둘 중의 한 가지 밖에 할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같이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그녀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왔다고 해서 달리 행동했을 리는 만무하다. 아무튼 홍릉 사건 이후, 9월 23일에는 동궐(East Palace)에서 가든 파티가 열렸고 그날 엘리스 루즈벨트는 한국인 여성 기독교인들을 상동 교회에서 만났으며 스크랜튼 박사 댁의 넓은 정원에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독일 공사관 만찬, 북한산으로 승마, 일본 여학교 방문과 기타의 여러 일정을 마친 방문단은 9월 29일에 서울을 떠나 특별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최근에 있었던 홍수로 인해 철도의 사정이 좋지 않아 일행은 대구에서 하루를 묵었고 대구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이 이들을 접대했다. 이 후 부산에 도착한 일행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시모노세키로 갔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씨애틀에 도착한 것이 10월 말이었다. 배에서 내리는 엘리스 곁에는 각 국에서 받은 선물과 함께 중국에서 구입한 엄청난 양의 실크가 든 상자가 가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순방길에 동행했던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와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34년에 출판된 엘리스 루즈벨트의 자서전 ‘Crowded Hours’ 에서 엘리스(Alice)는 한국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은 원하지 않았으나 속수무책으로 일본의 손아귀 아래 이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퍼보였고 낙담한 것 같았다. 그들의 몸에서 힘이라는 힘은 모두 빠져 나가버린 것 같았다. 거의 모든 장소에 일본 장교들과 병사들, 그리고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자서전 내용에는 엘리스(Alice)가 고종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인상도 적고 있다. "황제와 곧 이어 마지막 황제가 될 그의 아들(his son)은 우리 공사관 곁에 있던 궁전에서 내밀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며칠이 지나 그 궁전의 유럽식 건물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였다. 우리는 먼저 이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고 땅딸막한(squat) 황제는 나에게 자신의 팔을 내밀지 않은 대신(손을 내밀어 엘리스가 잡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서둘러서 좁은 계단을 내려가 특히 주목할 것 없고 조그마한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음식은 한국식이었는데 황실 문장으로 장식된 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내가 사용한 그릇들은 식사 후 나에게 선물로 증정되었다. 궁전을 떠날 때 황제와 그의 아들은 각자 나에게 자신들의 사진을 주었다. 그 두 사람은 애처럽고 (세상사에)둔감한(pathetic,stolid) 인물들이었으며 황실로서 그들의 존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 자서전의 글은 진정 말괄량이 엘리스 루즈벨트 양이 느낀점을 적은 것인지 아니면 당시의 아시아 판도를 훤히 알고있던 주변의 도움을 받아 적절하게 쓴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아시아의 판도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대한제국 황실의 존재가 얼마남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1905년의 엘리스 루즈벨트의 아시아 순방단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한 관리가 동행하고 있었다. 훗 날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였다. 그는 당시에 미국 육군성(Department of War) 장관이었는데, 미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아시아 순방단에 특파되었다. 1909년 7월, 아시아 순방단의 첫번 째 기착지였던 일본에 도착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는 7월 29일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를 만나 모종의 비밀협약을 맺었다. 훗날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알려진 이 협약의 내용인 즉, “미국이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하는 대신에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이 주요 내용이었다. 결국 한일합방의 예비공작을 이들끼리 일본에서 만나 비밀리에 끝냈던 것이다. 이런 비밀공작을 끝내고 중국과 필리핀을 들린 후 한국으로 왔던 미국대통령의 딸 엘리스(Alice)와 순방단 일행을 대한제국 황실은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던가. 고종황제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비밀스런 협약은 알지 못한 채, 기울어져 가던 대한제국의 운명을 걸고 이들을 통해 한미 공수동맹(共守同盟)을 맺으려 노력했다. 엘리스 일행의 서울 방문에 대해 당시 서울에 있던 일본공사관에서도 크게 신경을 쓰지않았다. 조선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스 루즈벨트 일행이 서울을 떠난 두 달 뒤인 1905년 11월 9일, 일본은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으로 ‘을사보호조약’을 강행하려 했다.
고종황제가 협약 안에 동의하지 않자 11월 1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엘리스 루즈벨트 양이 한국 방문기간 동안 묶었던 곳도 손탁호텔 귀빈실이었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1월 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했다. 1905년 11월 17일, 이렇게 물리적인 강압 아래 작성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발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제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통감을 주재시켜 조선을 장악 했다.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 여성이 바로 미스 엘리스 루즈벨트(Alice Roosevelt)였다.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그 모습을 본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자리에 있던 우리 일행이 한국 왕실의 격식에 따라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으나 이 "의용 기병대의 딸(Rough Rider's daughter)"은 이 모든 것을 장난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환영의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것은 몇 마디의 고맙다는 말, 그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무덤가에서 무덤을 수호하고 있는 동물들의 조각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듯 했다.
아오빡쳐 그래 미국의 저런게 공주라는거지...........퍽도 자랑스럽겠네
저망할년
에휴..........좀 맞아야겠다...
이상한나라의 엘리스다 이년아 더러운 앨리스 개더럽지
죽는다 진짜 아오 이 빌어먹을 년
아오 쌈싸대기를 날려버려
헐 조올라 개냔이네 개년 허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