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슬하 - 정끝별
썩지도 못하는 고무대야가 엎드린 채 끝내 품었던 것들
습습한 부엽토와, 부엽토에 반쯤 파묻힌 소주병과 손잡이가 빠진 호미와 푸석 해진 검은 비닐봉지와, 비닐봉지 속 여전한 영빈중화반점 일회용 라이터와 판콜 에이 갈색병과
그런데 저 빨간 고무대야는 언제부터 엎드려 있었을까?
지난 늦여름 붉은 흙에 엄마를 묻고 있을 때 한낮 햇살 아래 한갓진 흰나비 한 마 리가 날아들었다 오래전 가을 아버지를 묻을 때도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는 데
열리면 움직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 누가 다녀간 걸까?
인기척에 놀란 지네인지 노래기인지 소주병에서 뛰쳐나와 으다다다 다급하게 마 른 풀더미 틈으로 사라졌다 더는 지키지 못한 아버지 취중 진담처럼
그래 판콜에이는 아버지 만병통치약이었지
비닐봉지를 들어내자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 가까스로 기어가다 피딱지처럼 말라 비틀어진 담쟁이덩굴 열매들 사이에서 그쳐 섰다 엄마도 먼 길 가다 느릿느릿 멈춰 서곤 했는데
왜 하필? 지렁이도 오래 그치면 큰 개미들 몰려올 텐데
봄은 어디까지 왔나 한식 즈음이면 식솔들을 이끌고 발부리로 땅을 툭툭 차며 소주 와 간편 제수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산길을 오른다 생전의 아버지 엄마처럼
유해한 몸으로 품어내는 무해한 것들도 있는 거라며
한식에 한나절을 슬다 유해한 것들을 고무대야에 쓸어 담아 산길을 내려온다 누가 생일을 맞았는지 마을 사람이 팥시루떡을 돌리고 있다
엄마 아버지는 이제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인간을 버리고서야
ㅡ계간 《시와 세계》(2024, 여름호) ****************************************************************************************************** 추석을 앞두고 차례를 없애는 대신 성묘로 대신키로 했기에 맏딸과 함께 선산을 찾았습니다 20년전에 입향조 묘역을 만들 때에 십시일반 도움을 준 후손들을 새긴 비석에도 때가 끼었네요 후손들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살기에 동네 한복판 묘역은 늘 허허롭겠지요 얼마전까지는 그나마 한식 추석 무렵에 벌초는 해 왔는데 올해는 추석을 앞두고 겨우 벌초만 했네요 동네에서 몇 마장 떨어진 선산은 흩어져 있던 조상 무덤을 한 곳에 모아 비석을 세운 묘역으로 꾸몄지요 이산 저 산 옮겨다닐 여력도 없어질 게 뻔하여 궁여지책으로 6년전에 실행했습니다 고향 마을 빈집은 점점 페가로 변해가고, 선산 잡목들이 우거져서 묘역도 가려졌습니다 올 겨울에는 사람을 사서 묘역정비를 해둘 생각입니다 손녀들이 나중에 찾아갈 것을 대비하는 일도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됐습니다 조상 없는후손은 없지만 혈연에 대한 인식이 어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