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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중심에 서있는 김영선을 마지막 무더위가 한창이던 7월 26일 오후 1시 30분 전북 현대 숙소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솔직히"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감과 솔직함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누구보다 당당함이 멋있는 김영선.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을 거침없이 들을 수 있었던 인터뷰였다.
지독한 연습벌레
"선생님 권유로 축구를 시작했어요. 발탁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인데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4학년 때부터죠. 어렸을 때부터 덩치가 좋았어요. 재능이 뛰어나기 보다는 신체적인 조건이 뛰어나서 축구를 시작했죠.
처음에는 골키퍼를 했어요. 길게 하지는 않았어요. 아주 잠시였죠. 골키퍼 다음으로 한 포지션이 바로 스토퍼예요. 수비수는 저에게 천직인 것 같아요. 수비수로 뛴 이후 다른 포지션을 꿈꿔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김영선이 가진 축구에 대한 재능은 그의 말대로 다른 선수들에 비해 부족했다. 부족한 재능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습뿐이다. 또한 그만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연습이었고, 부족한 능력을 채울 수 있는 것도 연습이었다.
"솔직히 축구에 대한 재능은 없어요. 신체적인 조건만 뛰어났죠. 저는 노력형입니다. 노력한 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빠르게 퇴보하죠. 그래서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남들이 제가 열심히 운동했다는 사실을 잘 안 믿어줘요. 솔직히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좋은 선수로 성장하기 어렵잖아요.
초·중학교 때는 경기도 많이 뛰었고, 선생님께서 많이 시키셨어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운동을 열심히 했죠. 자의에 의해서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예요. 밤에 후배들을 데리고 나가서 항상 1대1 연습을 했어요. 제가 대인마크에 일가견이 있다고 평가받는데요. 아마도 이 때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 평가를 받는 거 같아요. 이러한 능력은 프로에서 오랫동안 뛸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죠.
(당시 스파링 파트너는 누구였나요?) 현재 K-리그에서 뛰지 않고 있는데요. 2000년에 신인왕을 거머쥔 (양)현정이에요. 후배들도 좋아했어요. 혼자서 벽에다 볼 차는 것보다 수비수가 있는 상황에서 볼 차는 것이 백배 낫잖아요.
대학교 때 덩치에 비해 스피드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어요. 당시 다른 선수들에 비해 스피드가 떨어진다며 비교를 많이 당했죠. 큰 충격이었고, 자극이었어요. 다시 한 번 운동을 미친 듯이 했어요. 운동장만 나가면 무조건 뛰었죠. 사실 비교 당하는 것을 싫어해요. 하지만 비교로 인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죠. 그리고 프로에 와서 김호 감독님과 최강희 감독님 밑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고요."
우승에 관해서 1인자.
김영선과 우승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김영선이 속한 팀은 대회에 나갔다하면 우승을 하고 돌아왔다. 그에 따른 성과도 대단했다.
"제가 솔직히 화려하지는 않아요. 국가대표에도 큰 욕심도 없었고요. 정말 운이 좋았어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승은 엄청 많이 했거든요. 정말 셀 수 없습니다. '우승을 저보다 많이 한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했어요. (우승을 많이 했다는 것은 모교의 전력이 강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요. 그만큼 주전 경쟁은 어렵지 않았나요?) 학창 시절에는 잘하는 거 하나만 있으면 경기에 뛸 확률이 높았어요. 제가 가진 장점인 힘을 잘 이용했던 것 같아요. 물론 선생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신 것도 하나의 이유겠죠."
수차례 우승을 하며 많은 상을 받았던 김영선이기에, 그의 프로 진출은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반대였다. 졸업을 앞둔 1997년 12월이 다 되어도 그에게 입단 제의를 한 K-리그 팀은 단 한 팀도 없었다.
"대부분의 취업이 12월에 다 이뤄지는데요. 그 때까지 프로에서 이야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실업팀에 가려고 했어요. 당시 이랜드라는 팀이 실업 최강이었는데요. (박)건하 형이 이랜드를 정상으로 올려놓고, 수원으로 갔잖아요. 현 기술위원장인 이영무 감독님이 당시 이랜드 감독이었는데요. 저에게 잘 살펴본 뒤 오라고 하셨거든요.
하지만 아버님 생각은 달랐어요. 큰 무대에서 뛰길 원하셨죠. 그래서 드래프트에 신청을 했어요. 비록 저를 원하는 팀은 없었지만, 자신감은 있었어요. 뽑히기만 하면, 주전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1997년 드래프트에는 정말 대단한 선수들이 많았다. 안정환, 이동국 등 초특급 공격수를 비롯하여 이상헌, 서동원, 박성배, 백승철, 정광민 등 K-리그 무대를 수놓은 스타들이 즐비했다. 김영선은 이 좁은 틈을 반드시 뚫어야했다.
"수원이 저를 1순위로 뽑았다는 걸 들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어요. 김호 감독님이 유명한 스타보다 실력과 잠재력을 갖춘 선수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저를 뽑아주신 것 같아요."
김영선에게, 수원에게 의미 있었던 1998년
수원은 창단과 함께 선언한 것이 있었다. 바로 3년 안에 K-리그 우승을, 6년 안에 아시아 재패를, 10년 안에 명문 구간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영선이 수원에 입단한 1998년은 수원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팬들과의 첫 번째 약속인 K-리그 우승을 반드시 이뤄내야 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수원이 창단하면서 3년 안에 우승한다고 선언했어요. 3번째 되는 해가 바로 제가 입단한 1998년이죠. 그래서 운동을 많이 했어요. 저 또한 대학교 때 열심히 했던 것이 프로에서도 이어졌죠. 정말 열심히 했어요.
첫 훈련을 거제도에서 체력 훈련 위주로 했어요. 하루에 새벽, 오전, 오후, 저녁. 이렇게 4번씩 했어요. 그렇게 열흘 넘게 했죠. 동계 전지훈련 가서도 하루에 4번씩 한 달 가까이 했어요. 운동 열심히 하는 모습을 김호 감독님이 좋게 보신 것 같아요."
김영선은 신인 첫 해 33경기를 뛰었다. 신인선수치곤 빠르게 주전 자리를 꿰차며, 많은 경기에 출장했다. 그의 첫 파트너는 올리였다. 1997-2000년까지 수원의 유니폼을 입으며 K-리그 그라운드를 누빈 올리는 자신감과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닮은 점이 많은 이 둘은 찰떡궁합이었다. 수원은 눈빛만 통하는 이 둘의 콤비 플레이로 수비가 안정되었고, K-리그 첫 우승이라는 좋은 결과도 가져왔다.
"그런 거 있잖아요. 눈빛만 봐도 통한다는 거요. 올리와 저는 눈빛만 봐도 통했어요. 올리는 저에게 첫 번째 정신적 지주였어요. 올리는 항상 자신감과 파이팅이 넘쳤어요. 저와 비슷한 면이 많았죠. 프로에 오면서 걱정이 많았었는데, 올리가 두려움을 없애주었죠. 지금은 아니지만 수원에 있었을 때, 유럽 전지훈련을 가게 되면 올리가 항상 전지 훈련장을 찾아왔어요. 올리와 딱 마주치면 말은 안 통하지만 끌어안았죠. 둘만의 통하는 교감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랑도 그렇고. 첫 경험이라는 건 잊을 수 없잖아요. 다른 게임을 떠올리라고 하면 기억이 거의 안 나는데, 프로 첫 해에 있었던 일들은 다 기억나요. 그만큼 추억이 많았죠. 수원에 입단하면서 우승에 대한 생각은 없었어요.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만 했죠, 그라운드에 서 있는 순간만큼은 최고가 되고 싶었거든요. 오기가 있었죠.
98년에 축구 열기가 대단했잖아요. 그 때 처음으로 '축구하길 잘했다.'라는 생각했어요. 시끄러운 틈 사이로 관중들이 하는 말이 다 들렸어요. 팀이 워낙 잘해서 칭찬이 많았죠. 때론 야유도 들리기도 했고요. 뛰면서도 정말 이게 프로구나라는 것을 느꼈어요. 원래 감동 같은 거 잘 안 받는데, 매우 감동적이었어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챔피언 결정전을 부상으로 뛰지 못한 거예요. 관중석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뛰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같았죠."
수원의 전성기. 1999년을 말하다.
1999년은 수원을 위한 해였다. 수원은 그 해 있었던 4개 대회 모두를 우승했다. 1998년 K-리그 우승을 더한다면 5개 대회 연속 우승이다.
"이건 (박)건하 형, (이)운재 형, (이)기형이 형, (김)진우 형도 이야기하는 건데요. 당시 수원이 멤버가 좋아서 최강을 달리지는 않았어요.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현재 전북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분위기죠.
그 때 당시 제가 (고)종수 다음으로 어렸는데요. 제 포지션이 나이와 상관없이 리드가 필요하잖아요. 리드는 감독님의 주문사항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라운드에서 형들에게 말도 많이 하고, 소리도 많이 질렀어요. 반말도 많이 했고요. 이 모든 걸 형들이 다 받아주었어요. 제가 주문한데로 움직여 주었죠. 불만을 토로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죠. 너무 고마웠어요. 분위기가 정말 최고였어요. 물론 코칭 스태프와 구단 프론터 간 분위기도 좋았죠.
그리고 제 실력도 많이 발전했어요. 여유가 생겼죠. 매 경기 '꼭 이겨야겠다.'라는 일념으로 들어갔는데요. 이성을 가지고 뛰기 시작했어요. 저 뿐만 아니라 관중, 선수 등 모든 것을 체크하면서 뛰었죠."
당시 수원의 경기력은 역대 최강이라고 평가받는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 조직력 모두 최강이었다. 또한 모든 선수가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100% 수행했다.
"지금 최강희 감독님이 원하시는 거예요. 솔직히 경기에서 120%의 힘을 발휘하는 건 거짓말입니다. 연습 때 120% 발휘해야, 경기에서 최대 80-90% 발휘할 수 있어요. 만약 연습장에서 120% 발휘하고, 경기장에서 100% 발휘하는 팀이 있다면, 그 팀은 천하무적입니다. 그 때 수원이 그랬어요. 경기 중에 누구 하나 다쳐도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선수들끼리 파이팅도 좋았죠."
1999년은 김영선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해이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가고픈 추억이기도하다.
"저뿐만 아니라 당시 뛰었던 수원 선수들 모두 기억하는 경기가 있어요. 포항과의 경기였죠. 전반전에 3대0으로 크게 뒤지고 있었어요. 전반 말미에 김호 감독님이 '고정운, 이동국, 박태하 선수가 너무 잘하고 있으니까, 잘 막아보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투입시키셨어요. 지고 있는데도, 무슨 자신감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요. 발목 보호대를 차면서 '내가 다 막아주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생각해봐도 너무 잘한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잘했던 경기 3경기를 뽑으라면, 첫 손에 뽑힐 거예요. 결국 4대3으로 역전했어요. (이)기형이 형이 4번째 골을 터트렸을 때, 소름이 쫙 돋았죠.
사실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지금도 가끔 (고)종수와 통화하는데요. 어제(26일)도 경기 시작 전에 2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죠. 가끔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였어요. 축구화를 신는 게 즐거웠고, 경기에 뛰는 게 행복했어요. 경기에 나설 때마다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라는 기대도 있었죠."
발전을 위한 과도기
최고의 맛을 본 김영선은 2000년 이후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2000년에 피로골절로 부상을 당하며, 오랫동안 쉬었고, 떨어진 자신감은 올라오지 않았다.
"슬럼프 및 과도기였어요. 과도기는 발전을 위해 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락을 위해 오는 것은 아니죠. 힘들어서 축구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자신감이 떨어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어요. 바로 앞에 있는 선수에게 패스도 못했고, 1미터 앞에 있는 선수도 보이지 않았죠. 그 결과 경기에 많이 나서지 못했죠. 부상도 많았고요. 무엇보다도 감독님 믿음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죄송했어요. 볼 낯이 없었죠."
결국 김영선은 주전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리고 내준 주전 자리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1년 넘게 쉬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정든 수원의 유니폼도 벗어야 했다.
"당시 제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주전 자리를 내준 허탈감 같은 건 없었어요. 2002년 이후 (조)성환이가 제 위치에서 뛰었어요. (조)성환이는 제가 끔찍하게 아끼는 후배예요. 같은 포지션의 선수고 저의 단점을 커버해줄 수 있는 후배죠. 만약 제가 지도자라면 (조)성환이 같은 선수를 키워보고 싶어요.
차범근 감독님이 온 뒤, 아킬레스건이 끊어졌어요. 연습 시합 도중 다쳤죠. 1년 넘게 쉬었어요. 1년 뒤 돌아오자 제 자리는 없었어요. 경쟁 대열에서 밀려났죠. 그 때 제가 아끼던 후배가 (곽)희주예요. (곽)희주가 제자리에서 뛰는 것이 좋았고, 수원의 수비는 (곽)희주가 이끌고 가야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마토에 대한 차범근 감독님의 신뢰가 높았어요. 그 신뢰에 도전한다는 것도 무리가 있었죠."
김영선은 2006년 전북으로 이적하며, 수원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하지만 팬들과의 인연은 정리할 수 없었다. 수원 팬들은 김영선에게 레전드라는 칭호를 선물했고, 김영선은 좋은 플레이로 화답했다.
"지금도 온라인상으로 그랑블루와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랑블루가 저와 (박)건하 형, (김)진우 형, (이)병근이 형을 레전드라고 하며, 유니폼을 경기장에 걸어 놓은 걸 보았어요. 수원이라는 팀에 열정을 다해주고 간 선수들에게 선물을 해준 것 같아요. 너무 고마워요.
전북 이적 후 제 실력이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작년 수원과의 경기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뛰었어요. 경기를 마친 후 8년이라는 세월 동안 저를 응원해준 팬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크게 인사하고 왔죠."
전북에서 마지막 열정을
지난해 젊고 가능성이 무한한 팀으로 변모한 전북에게 가장 필요한 선수는 바로 젊은 선수들을 하나로 잡아줄 수 있는 노장 선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김영선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다. 지난해 3월 전북 최강희 감독은 AFC 챔피언스 리그 다렌 스더과의 경기에서 패배한 뒤, "김영선의 부재가 컸다."고 말하며. 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꼭 전력이 제가 있다고 해서 좋아지고, 없다고 해서 나빠지는 건 아닙니다. 감독님께서는 저의 파이팅을 기대하시는 것 같아요. 노장 선수가 파이팅이 있으면, 그 선수로 인해 팀 분위기 자체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죠. 개인 경기는 모르겠지만, 단체 경기는 그런 것이 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거 같아요. 이것도 실력에 하나겠죠.
전북에 온 뒤 주변에서 '좋은 감독님 밑에서 편하겠다.'라는 말을 자주해요. 사실 작년이 제일 힘들었어요. 팀을 이끌어야한다는 부담감이 컸죠. 나이가 들면 들수록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올해가 더욱 힘든 것 같고요. 힘든 저의 마음. 누가 알겠어요."
전력 면에서 전북은 수원보다 떨어진다. 그래서 김영선의 화려한 우승 기록은 전북 이적으로 끝마칠 것 같았다. 하지만 우승은 김영선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화려하게 빛을 냈다. 지난해 전북은 K-리그 팀 최초로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덤으로 FIFA 클럽 월드컵에 출전하는 기쁨도 누렸다.
"제 인생이 진짜 웃겨요. 희한하기도 하고요. 제가 새로운 팀으로 옮긴 첫 해는 무조건 우승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도, 고등학교 1학년 때도, 대학교 1학년 때도, 수원에서도 우승을 했죠. 작년에 전북에 왔고 AFC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했어요. 우승하는 건 정말 타고 난 것 같아요. 가족들도 신기해해요.
솔직히 처음에는 우승했다는 것을 못 느꼈어요. 일본에 가서 실감을 했죠. 'FIFA 클럽 월드컵이 이렇게 큰 대회였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그 대회에서 큰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다만 긴장해서 플레이를 그르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K-리그를 대표하기 때문에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주고 싶었죠."
2006년 전북과 2007년 전북의 모습을 비교한다면, 비교의 추는 2007년 전북 쪽으로 기울 것이다. 전북은 지난해 많은 경험을 통해 많은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 하지만 김영선이 바라보는 전북의 모습은 부족하기만 하다.
"작년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하지만 아직 멀었죠. 실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분위기죠. 선수와 코칭 스태프 간의 융화가 잘되어야 해요. 그러면 운동장에 나가는 것이 즐겁고, 치열한 주전 경쟁이 펼쳐져도 행복하죠, 그런 분위기가 되면 팀은 상위권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팀이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팀의 수준이 올라가고, 질 높은 경기를 펼쳐야 하는 거예요. 질 높은 경기를 펼친다면 승리는 당연히 따라올 거예요. 선수들끼리 열심히 해서 좋은 경기를 펼치는 팀으로 가는 것이 목표예요."
'프로 10년 차' 김영선의 나이는 어느덧 32살이다. 이제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은퇴 후 삶을 준비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을 은퇴 후 어떤 삶을 걸을 것인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정말 솔직히 축구라는 사회에서 벗어나, 다른 사회에서 일하고 싶어요. 물론 축구를 떠나서 산다면 후회는 하겠죠.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때, 축구를 떠나긴 힘들 것 같아요. 결혼도 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도 생각해 볼 때요. 트레이너부터 조금씩 시작하려고요. 그리고 큰 무대에 프로에서 뛰고 싶어요. 잘 안되더라도 상관없어요.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러면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하실 건가요?) 언제까지 뛰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제 이익만 생각하면 끝까지 오랫동안 뛰고 싶어요. 하지만 현재 젊고 좋은 선수들이 많잖아요. 그 선수들이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제가 걸림돌이 되기 싫어요.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은퇴하려고요."
K-리그 명예기자 김정현
첫댓글 영선선수 킹왕짱이에요!!!
scots 님 요즘 경기 보시나 ㅎㅎㅎ 경기 보시는분들은 다 아실듯.. 잘점 해봐여 김영선선수 집중좀 합시당.
문제는 이정호 선수나 김현수, 김인호 선수도 그 이상으로 믿고 맏기기엔 좀 그렇다는거 ㅜ
저는 워낙 작년에 아챔의 아우라가 커서 ㅋㅋㅋ
근데 이게 왜 수원 소식인가요...ㅠ 전북 화이팅....
난 당신이 골먹히지 않으려고 골대에 머리 부딪히면서 공 걷어내느걸 봤습니다.ㅏ 감동 그자체였습니다.. 그때가 종합운동장시절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