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6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집했고 고종은 발달된 외국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드리겠다고 하여 부자지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는데 일본이 서구문명을 먼저 받아들이므로 서 조선보다 문화가 앞서게 되니 고종의 의견이 더 설득력이 있다.
농업국 이었던 한국도 자유진영의 미국과 공산진영의 냉전의 덕을 보아서 공업국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내가 군대생활을 할적에 사용했던 모든 공구, 장비, 차량, 전쟁무기등은 모두 미국이 일본이 미국에게 빚진 전쟁피해보상금, 배상금으로 일본을 통해서 무료로 보내준 것 이었는데 돈으로 주는것이 아니고 물건으로 지불하니 일본은 덕을 보게 된다.
이 미쓰비시 지프차는 일본이 미국에게 빚진 전쟁피해보상금의 30%는 미국이 가지고 70%는 물건을 만들어서 한국을 도우라고해서 한국군은 도요다 추럭 3/4톤[쓰리쿼타]추럭과 위의 지프를 무료로 받았는데 내가 1967년당시 15사단 DMZ수송부에서 고쳐보았던 차랑이며 두꺼운 정비교범 카탈로그의 이름은 지금도 기억을 하는 CJ3BJ4C이었다.
이 지프는 미국의 Willix의 모델을 일본 미쓰비시[삼능]회사에 기술을 넘겨주어서 만들었다.
미스비시회사는 전폭기를 만들어서 진주만을 공격했으니 국가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는것인데 미국의 거부반응으로 미씨비시차가 가장 늦게 미국에 발을들여놓왔다.
위의 지프차는 전조등 아래의 조그만 드롸이빙 라이트를 켜면 항공기에서 내려다보아도 불빛이 보이지를 않게고안이 되어있고 잔면유리를 앞쪽으로 눞히면 평평하게 되며 푸른나무로 위장을 하게끔 고안이 되어있다.
고종의 3남1녀중 의친왕의 10번째 왕자 가수 이석씨는 나와 동갑내기인데 와싱턴DC 근교에서 가수로 활약, 의친왕의 10번째 왕손이라고 스스로 소개했는데
마지막 귀국공연은 워싱턴 근교 크리스탈 시티 소재 식도원 나이트클럽에서 가졌을 적에 가보았다.
아버지는 고종의 두 번째왕자 의친왕이 62세에 19세의 홍정순궁녀가 마음에 들어서 탄생을 하여 궁궐에 살다가 전대통령시절에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서 미국으로 갔다가 10년후 고모의 장례식참석차 귀국하고 지금은 전주 한옥마을에 산단다.
아버지 의친왕은 12명의 여인으로부터 왕자12명에 공주9명이 태어났는데 현재 9명이 생존해있다고 인터넷에서 보았다.
세종로의 세종대왕상은 세종의형 효령대군의 상과 이 마지막으로 생존하는 황손 이석의 합성사진으로 세종대왕의 얼굴모습을 제작했단다.
머리 좋은 일본인들은 전쟁을 하지 않고 을사년에 대궐수비를 맡는다고 스스로 2천명의 시위대를(侍衛隊; 왕의 호위를 위하여 조직한 군대)내세워 고종황제(1886년 15세의 민비 간택)를 무력화 한 후 궁궐을 점령하고 국모(閔妃)를 살해한 후 일취월장으로 조선의 정치는 보호 차원을 빙자하여 그들이 장악 요리하게 된다.
민비는 청을 업고 쇄국정책을 쓰는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반대이었는데 장호원을 전전긍긍 하는 동안에도 고종과 내통하며 나중에는 청으로 하여금 대원군을 납치하게 하고 정권을 쥐게 됐다.
민비시해사건을 을미(乙未 年)사변이라 하는데 시해한 낭인 중 주역 급의 일본인 외손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침전 밖 흙바닥이라 하면 일본군인들 짓이니 아수라장으로 변했을 것 이어서 축소하여 실내 시해설(弑害說, 조선자객을 포함)로 은폐시켰다는 것이다.
내가배운 해아밀사사건은 1907년 황제는 이씨로 조직된 밀사(密事)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으로 하여금 네덜란드 헤이그(海牙)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서(密書, 옥새 사용)를 보내어 일본의 부당함을 국제여론화 하려고 했는데 니콜라이 황제는 영국과 일본의 화해를 목적으로 고종황제의 특사들과 만남을 자제 하라고 지시를 했다.
이준은 분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어릴 때 본 영화는 할복을 하여 창자를 꺼내어 다른 나라사람들 얼굴에 뿌렸는데 그 당시는 흑백영화이어서 피는 검게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를 가르고 나면 바로 쓰러지니 불가능한 일이다.
이 사건이후 회의 참가 활동비 지출이 밝혀져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당하게 되는데 친일파 송병준은 고종에게 “친히 동경으로 가셔서 천황에게 사죄를 하든가 자결을 하시오!” 했다니 이 말 한마디가 그 당시 친일파의 위력을 대변한다.
외할머니께서는 이완용(매국노라고 초등학교에서 배웠다)의 셰퍼드 개를 보았다고 하셨는데 아마도 1909년 이재명에게 칼을 맞았다니 적이 많아 호신용으로 사용한 것 같다.
고종의 맏아들 순종이 심장마비로 승하하니 의친왕이 등극을 했으나 일본을 싫어하니 이완용은 말을 잘듣는 연친왕을 세우고 이완용이 서명을 하여 조선은 종지부를 찍게된다.
미국에서 페어펙스 군에서 사용하는 경찰견 셰퍼드는 버지니아의 한국인농장에서 사간 셰퍼드가 머리가 가장 좋다고 정평이 나 새끼를 낳는 족족 사간다는데 그분 집에 가보니 덩치가 큰 만큼 소리도 크게 짖어 내 귀가 따가울 정도로 폐를 끼쳤다.
일본은 조선의 기를 꺾기위하여 광화문(1968년 복원 때에도 중앙청과 나란히)을 옮긴 후 남산의 가미사마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그 자리에 궁궐 바로 앞을 가리는 4층 총독부(해방 후에는 중앙청이 됨)석조건물을 천년이라도 견딜 정도로 튼튼히 짓고 일장기를 꽂는다.
일본이 조선에서 한 가지 좋은 일을 한 것은 1885년 설치한 전보(나도 1973년에 사용 한 적이 있음)인데 전깃줄을 사람들이 잘라 훔쳐가니 이를 지키는 군인이 필요했다는데 그 당시 신문에 고어로 “서울서 의주까지 전신을 보내랴면 통신국에 가서 국문으로 보내되 한 자에 동전 두푼식이면 천리 사이에 말이 통한다더라.” 라고 보도했단다.
문민정부시절 유일무이한 유품의 중앙청 존폐(存廢)를 국민여론에 부치는데 “도시 미관에 좋지 않고 일본의 압제가 되 살아 나며 일본의 기백에 꿀리기 싫다.”라고 하여 흔적도 없이 옛날로 되돌아가니 그동안 빌미로 삼아오던 ‘한반도 강점의 노른자위’를 잃었다는 나의생각이다.
일본발음으로 ‘다게시마(たけしま)’라 하지만 한국 신문에는 ‘다케시마’ 라 하는데 일어에는 닿소리, ㄱ,ㅅ,ㄷ,ㅎ, 의 오른쪽 위에 점( ”) 2개를 찍어 된소리로 사용하며 ‘ㅋ, ㅌ, ㅍ, ㅊ’의 발음은 없으니 나는 된소리를 사용한다.
예로 신사(しんしどう; 젠또우; 紳士), 영토(りょうど; 료또; 領土), 담판(だんぱん; 딴반; 談判)” 등이 있다.
예를 들어서 시간이 많이 흐른 후 후손들 간에 국가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국제 사법재판소에 ‘독도’ 라는 한국이름은 소수인데 외국에서 대대로 보관해 온 ‘竹島’ 라고 된 수만 부의 지도와 가끔 소유권을 주장하는 재판소에서 사용하던 수많은 녹취록(錄取錄)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들이 소유권을 주장한 것은 오래 전부터라고 합법화를 부르짖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반증이 미약할 때 어느 나라에 승소를 안겨 줄는지? 국가간에는 변수가 많아 예측을 불허하며 밑져야 본전이니 그들은 포석(蒲席)을 깔고 면면(綿綿; 不絶)히 앉아서 때만 되기를 기다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 같다.
일본이 재빠르게 서구문화를 먼저 받아들였지만 한국은 지금도 뒷북을 치는 듯 하며 그들은 후손들을 위하여 간단한 자료로서 크게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 일본은 지금부터 시작하여 100년 후를 내다보는 게 아닐까 하는 나의 생각이다.
아무튼 현제 6가구에 7명을 호적에 두어 무인도를 유인도로 만 든 것은 잘 한일 같은데 지금도 일본은 영해를 넓히기 위하여 독도를 터무니(터를 잡았던 흔적)없이 그들의 소유라고 심심하면 주장 하고 있으니 입맛이 조금은 씁쓰름하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