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 수첩에 남긴 시
- 양산박을 추억하며
소네트 시
도시의 변방에 있어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주막
광복동 끝자락의 낭만 주점
양산박의 빛바랜 탁자 앞에 앉으면
길을 걷다가 섬광처럼 떠오른
방송 소재 한 편을 지워버린다
소주 한 병을 마시면
고지대 철탑산에서
봄철에 얼어 죽었다는
강제 철거민들의 아우성과
이름모를 달동네에서 쓰러진
어느 백혈병 어린이의 신음소리를
조각조각 오려 붙여
바람막이 벽지로 만든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겨레 신문의
모퉁이 기사가 되살아나
살풀이 춤을 추는 까닭에
사치스러운 방송 소재 한 편을 지워버린다
소주 두 병을 마시면
자유와 민주수호라는 미명아래
동생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던졌고
형은 방패와 최루탄으로 막아야만 했던
어두운 시대의 영화같은 얘기와
검은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패로
구원 없는 이 나라의 늪 속에 빠져
가난이 죄인줄도 모르고 삶을 포기했던
보통 사람들의 슬픈 노래도 지워버린다
소주 세 병을 마시면
가진 자가 이 세상에 너무 많아
가난한 아티스트들이 더 외롭다는
쟁이들의 넋두리도 지워버리고
평생을 사는 동안
단 한 편의 시를 남길지라도
단 한 곡의 음악을 남길지라도
단 한 폭의 그림만 남길지라도
예술가는 영원히 존재하므로
빵이 있어야만 예술도 존재한다는
이시대의 퇴색한 황금분할법을 지워버린다
먼 훗날
마주할 사람이 없어
외로운 시간이 더 많아 질지라도
오늘도 빗물처럼 고여드는
양산박의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훌훌 훌훌
맑은 술잔속에
깨끗이 지워버린다.
* < 양산박>은 부산의 광복동에 있는 작은 주점의 이름 이다.
80~90년대 초. 시인,화가,소설가,무용인,연극인등의 예술가들과
방송인,신문기자등의 언론인과 학자 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 였다.
지금도 어느 시인이 경영하고 있다.
이 시는 1991년 < 한국 방송 프로듀서 연합회보>에 실렸던
PD 시절에 쓴 나의 시를 퇴고한 것이다.
- 시인 소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