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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어느날 난 요한이 가방에서 뭘 꺼낼 일이 생겼다. 지난번에 빌려 준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계속 갖고 다니기만 해서 너덜너덜해 진데다가, 현준이가 빌려달라고 그래서 먼저 읽으라고
하려는 참이었다. 어딨냐고 물어봤더니 아직도 가방에 있다길래 허락을 받고 가방을 열었
다. 물론 그냥 뒤져도 전혀 하자없는 내 성격. 그렇게 가방을 뒤지는 김에 이것저것, 혹여
이상한 사진이라도 (뭐 중고생은 아니지만) 갖고 다니는 건 아닐까 해서 이것적서 보는데,
수첩이 나왔다. 그냥 왠지 손이 가요 손이가~ 그래서 열어 봤더니, 표지 안쪽에 이현정이랑
요한이가 다정하게 찍은 스티커사진이 떡 하니 붙어있다. 헉. 이게 뭐야? 이게 뭔 일이여?
난 그 상태로 얼어붙었다.
“찾았어?”
방으로 들어오면서 요한이가 묻는다. 내가 벙쩌하고 있는 걸 본 순간
“왜, 없어?”
하다가, 내가 손에 든 수첩을 보더니 얼른 달려와 수첩을 뺏는다. 수첩을 열어보더니, 내가
봤으리란 걸 의심치 않는지, 후욱 하고 한숨을 내쉬며 창가를 바라본다.
“(조용히) 어떻게 된거야?”
“그…그게…”
“왜 너랑 이대리가 그런 걸 같이 찍어? 그것도 아주 정답게?”
“그게….”
“혹시, 너…. 사귀는 거야?”
“요원아.”
“(날카롭게) 이현정이랑, 이요한이랑, 사귀는 걸로 돼 있는거냐구, 지금? 그런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거야?”
“(한숨)하…..”
“(하.) 이제야 좀 이해가 가는군. “
최근 만날 때마다 이대리가 실실 쪼개는 거랑, 내가 모른척 할 때마다 알겠다는 듯,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 그리고 가끔, 에이, 깍쟁이~ 하면서 툭 치고 간다든지…. 갑자기
그러는 그녀의 그런 행동들은 의아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언제부터야?”
“…… 지난 여름부터. 우연히 강남역에서 만났어.”
“너 어쩔거야?”
“어…어쩌긴?”
“헤어져. 당장.”
“뭐? 안돼.”
“안된다니? 너 사귀기는 하는 모양이구나, 진짜? 너…. 어디까지 갔어?”
“뭐? 어디까지라니?”
“어떤 사이냐구. 그냥 만나서 밥 좀 먹고 그런거야? 아님, 결혼약속까지 하고 그런거야?”
“그런거 아니야. 우린…”
“그럼, 당장 헤어져.”
“뭐? 안돼. 난. 현정씨 좋아해. 아주 많이.”
“이대리, 부사장 딸이야.”
“뭐? “
“내가 미처 말을 못했는데, 사실이야. 난, 너가 그런 집사람하고 인연맺는거, 원치 않아.
사내새끼가 처갓집 덕 보는 그런 쪼잔한 인간 되게하고 싶지 않아. 그게, 널 향한 내
형제애다. 그러니까 당장 접어.”
“누가 당장 결혼한대? 우린 그냥…”
“누구는 갑자기 하루 아침에 결혼한다니? 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다 사귀고, 사귀다 정들고,
정들어서 못 헤어지니까 결혼하고 그러는거 아니야?”
“요원아.”
“아직 아빠 엄마한텐 말씀 안 드릴테니까 우리 선에서 해결하자. 돈 좋아하시는 아빠는
옳다구나 하시겠지만, 이건 아니야, 요한아. 너 지금, 아니, 우리 지금 정상적인 상태
아니잖아. 내가 니 회사에서 그러고 있구, 너도… 하… 각설하구. 어쨌든 당장 때려쳐. 남자
새끼가 니 힘으로 도전하고 성공도 해보기 전에 여자 덕보려는 거, 진짜 꼴불견이거든?
너는 그런 사람 되지 않았음 좋겠어. 내 맘 알겠어?”
“생각… 해볼게.”
“(한 숨) 후… 좋아… 너도, 너무 갑작스러울테니까 내가 더 이상 몰아부치진 않을게. 잘
생각해 보고, 결정 내렸음 좋겠다.”
난 그말만 하고 녀석의 방을 나왔다. 나도 마음 아프지만… 하지만 이건 좀 아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 때에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는 새에 신상품 프로젝트의 최종 발표가 있었다. 우리 생리대 프로젝트는 최종적으로
3위를 차지했다. 나와 방동호는 미친 듯이 방방 뛰었다. 더 좋은건, 그저 3등임에도
불구하고, 그 부상이 장난 아니라는 것. 역시 대기업은 스케일이 크고 후하다. 둘 다 1계급
승진이란다. 그러나 웃고 즐기는 것도 잠시. 난 이제야 말로, 내가 이곳을 떠날 때라는 걸
직감했다. 그런데 그 뜻을 요한이에게 전하자, 요한은 나보고 대신 자기 이름으로 그만 둬
달란다. 준석이 형이 새 프로그래머 모집한다고 그랬단다. 거기에 응모해 볼 거란다. 본인의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난 그렇게 생각하고 요한이 이름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나 또한, 요한이가 성우와 멀어지는것이 이현정하고도 헤어지기 쉽고, 혹 그게 안돼서 둘이
끝까지 간다고 할지라도, 괜한 스캔들, 예를 들면 데릴사위라든지, 부사장 파워로 성우
내에서 승진했다는 둥의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고 제 힘만으로 도전해서 성공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돼서 그 건에 대한 건 요한이의 판단에 맡기고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워낙 말단이라 인수인계할 것도 그다지 없었기에 사표는 쉽게 수리가 되었다.
그리고 또한, 이제 내가 성우를 관두면 명실공히 더이상 현준이와 만나야 할 이유도
없어지고 해서 내마음은 상당히 가벼웠다. 안 그래도 그 일 이후 요즘 우리의 만남은
뜸했으나, 현준이는 여전히 우리집에 이유없이 놀러오곤 했다. 하지만 난 이제 복수고 뭐고,
그 더러운 이중인격자를 거의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현준이는 180도 바뀐 나의 태도에
벙쩌해 하고 있는 참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인수인계할 파일을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뛰어들듯이 총무과에 들어온 방동호가 날
보고 외친다.
“응?”
“너 그만 둔다구?”
“어..어… 어디서 들었어?”
“인사과 윤대리.”
“야, 그런거 비밀아니냐? 왜 너한테 그런거 까발린다냐?”
“지금 그게 문제냐? 그리고 사람들 다 알고 있어. 근데 너 나한테 까지 숨기다니.. 정말
서운한데? 금요일에 너 시간 괜찮으면 환송회한다는데? 담주부터 꽤 바빠지거든. 근데, 왜
그만 두는데? 뭐 고민있냐? 애로사항이 뭐야? 내가 상담해 주리? (요원이 어깨에 손 처억)”
“(씨익) 됐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자. 응?“
“그래. 말 나온 김에 환송회 끝나고 하자. 환송회 끝나고 둘이서 2차 갈까? 내가
학~실하게 상담해 줄테니까, 응?”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자기 자리로 가버리는 동호. 동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젠 정든 이 곳이랑도 이별이구나. 생각하니까, 인수인계도 그렇고 세심히 하나하나 더
보게 되는 것이. 마음이 징~ 하니 아팠다. 이제 그만 관둘 사람이라, 더 이상 무리한
잔업도 시키지 않고, 그냥 내 인수인계 파일만 만들면 끝이라 난 맨날 남들이 말하는
초저녁에 끝나 집에 갈 수 있었다.
***
금요일. 딱히 다른 스케쥴도 없고, 또 담주부터 사람들 바빠진다는데… 그래서 그냥
환송회 하게 됐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너무나 잘 해주셨던 차장님, 과장님, 그리고
대리님들, 그리고 여사원들도 너무 정이 들어버려서 난 그만 울음이 나올 뻔 했지만,
뽀록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안간힘을 써서 참았다. 모두들 그렇게 헤어지고, 나랑 동호는
지난 번에 약속한 대로 둘이서 2차를 갔다. 언제나 단짝처럼 붙어다니고, 신제품개발도
같이 한 사이라, 모두들 배려해 주었다. 눈치없이 따라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난 이미 못
마시는 술을 몇 잔 마신 상태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동호가 잘 간다는 바에 가서 카운터에 앉았다. 난 머리가 너무
아파서 무알콜 음료로 하나 시키고 앉아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눈알이 튀어 나오려는 듯이 아팠다.
“야, 그래도 우리 꽤 친했다고 생각하는데. 안그러냐?”
동호가 먼저 말을 건다.
“그래. 나도 아쉽다. 나중에 밖에서 또 만나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과연? 이제 이걸로 얼마 안있음 내 남장도 끝이 나는데, 언제 어디서
우리가 또 만나겠어?
“그것만 알아둬. 너가 어디 있든지 난 너 편이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난 네 겉모습에
집착하지 않아. 너가 어디에서 뭘 하든지, 너 편이 될거야. 그게, 우리의 우정이라는거다.
응? 알겠냐? “
뭔지 모르지만 꽤 멋있는 말을 해준다. 난 그 말을 음미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머리가 아픈
탓도 있었다. 그냥 멍하기만 했다.
“그것만 기억하라구. 너가 어딜 가든, 뭘 하든, 너가 노가다 뛰든, 사업하다 쫄딱 망하든, 너
모습이 할아버지든, 할머니든, 심지어 남장 여자라도 말이야.”
남장여자?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면서 눈이 번쩍 뜨여졌다.
머리가 아파서 손으로 감싸고 앉아 있던 나는 서서히 팔을 내렸다. 여전히 약간 멍~한
상태로 스르륵 고개를 돌려 동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동호는 아무말 없이 앞만 보면서
마구 마구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이 자식.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그는, 그 후로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통에 한계가 왔다. 그냥 그렇게 술을 마시고 있는
동호에게 난,
“나, 먼저 갈게. “
하고 말했다. 그러자, 아무 말 없이 손을 휘휘 저어 먼저 가라고 손짓한다. 난 바텐더에게
팁을 쥐어 주고, 동호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바를 나왔다.
첫댓글 허걱...그런 일이 .... 눈치 채고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알고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