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지은(再造之恩)의 뜻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입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서 구해준 것을 뜻하지요. 한국사에서 이 용어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낸 명나라, 그 중에서도 특히 당시 황제였던 만력제의 공덕을 칭송하는 용어로 사용되지요.
이 단어에 집착한 건 역시 선조입니다. 의병이나 조선 장수들의 공은 폄하하고 명나라의 업적만을 높게 세운 것이지요. 의주로 도망친 선조가 떨어진 왕권을 다시 세우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명나라의 참전은 분명 외교적 노력의 결과였으니까요. 물론 형평성이 심히 안 맞아서 당대는 물론 현대에도 비판받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선조의 목적은 그렇다 치고, 실제로 명나라의 참전이 조선 입장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고 재조지은이란 단어는 허상에 불과한 걸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당시 참전한 명군이 행패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인 것은 상당부분 사실입니다. 본국으로부터의 식량 보급이 여의치 않아 군량을 대부분 현지에서 보급(이라 쓰고 약탈이라 읽습니다)했고, 상국의 장수라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 관료들은 물론 임금까지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지요. 당시 항왜 중 어여문이라는 매우 유능한 장수가 있었는데, 이런 명군의 행동에 항의하다가 처형당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에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까지 했지요. 참빗은 얼레빗보다 더 촘촘합니다. 그러니까 명군이 주는 피해가 일본군보다 더 크다는 것이지요. (다만 이건 과장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히 일본군의 약탈이 훨씬 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모를 받으면서도 조선은 명나라의 참전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사대주의 같은 허황된 논리 때문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지요.
우선 당시 조선군과 명군의 총병력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 조선군의 최대병력은 17만, 명군은 5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지속되며 병력수가 완전히 역전되게 됩니다. 정유재란에 이르면 명군의 병력은 11만까지 늘어나고 같은 시기 조선군은 3만까지 떨어지게 되지요.
조선이 병력을 이렇게 줄여버린 것은 생산능력의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입니다. 자주 강조하지만 하여튼 ‘군대=돈’입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병농일치제인 만큼 대군을 유지하려면 농사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지요. 그런데 병사들도 먹으면서 싸워야만 하는 만큼 이런 상황을 장기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때문에 조선은 병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 및 전쟁복구, 보급에 힘쓰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명군으로 채워 전선을 유지시켰지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명군을 총알받이로 사용해 자국민의 피해를 줄인 겁니다.
대중매체에서는 명군을 무능하게 묘사하는 일이 잦지만 실제로 그렇게 무능하기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당시 지휘관인 이여송만 하더라도 기존 관군들이 진압에 애를 먹던 보바이의 난을 수월하게 진압해 능력을 인정받던 장수였고, 그들이 가진 절강병법 및 화력은 분명 조선 및 일본보다 우수했지요.
실제로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편제 및 교리, 무기 등을 다급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결과 류성룡의 건의로 전쟁 중 설치된 것이 ‘훈련도감’이지요. 이 훈련도감은 훗날 고종이 군제개혁을 할 때까지 약 300년 간 조선 군제의 뼈대가 됩니다.
명나라는 군사적인 것 외에도 조선에 큰 도움을 준 일이 있습니다. 임진년 이후 조선에는 전쟁과 함께 대대적인 기근이 닥쳤는데, 만력제는 자국 재정을 털어 산둥 지방의 쌀 백만 석을 매입하고 몽땅 조선에 지원합니다. 이게 말이 백만 석이지 지금 수치로 따지면 9만 톤입니다. 전근대에 이 많은 양을 수송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명나라의 상인들에게 수송을 담당시켰는데, 그 비용은 모두 명나라의 예산에서 나왔습니다.
때문에 명나라의 역사서인 <명사明史>는 임진왜란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립니다.
"전쟁을 한동안 하다가 히데요시가 죽자, 모든 왜는 돛을 올려 모두 돌아갔으며, 조선의 난리 또한 평정되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범한 이후, 전후로 7년, 잃은 병사가 수십만, 수백만 석의 군량이 소진되었다. 명과 조선은 승산 없는 싸움을 했다."
-<명사>, 만력 26년(1598)
이런 연유로 중국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보바이의 난, 양응룡의 난과 함께 만력삼대정이라 불리며 명나라 멸망의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만력제는 자국의 기틀이 흔들릴 정도로 조선에 열성적인 지원을 했지요. 신하들이 만력제를 ‘명의 황제가 아닌 조선의 황제다’라고 말하며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종합하자면 재조지은이란 거창한 말이 나오는 게 무리는 아니란 겁니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조선은 힘을 온존시킬 수 있었고, 만력제의 지원은 사회 붕괴 직전까지 간 조선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지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당대의 의리론은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도 고마워하는 게 맞지요.
또한 사대부들이 이 관념을 계속 끌고 간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나라를 망하게 만들면서까지 의리를 지키겠다고 할 정도로 생각 없는 집단은 아니었지요. 광해군 시기에 있던 사르후 전투 파병, 명나라 멸망 후 수만의 한족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충분히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후대에는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 같은 걸 만들어서 이게 새로운 폐단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적어도 재조지은의 관점이 조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에 대단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요. 유교는 엄연히 현실정치의 학문이며 사대부 정치가들이 학자이기 이전에 경세가였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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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내용만 보면 당시 명나라의 황제였던 만력제가 매우 훌륭한 인물처럼 보일 수가 있으나, 어디까지나 조선 입장에서 고마운 거지 중국 내에서 만력제의 평가는 그냥 명나라 멸망의 원흉입니다. 그것도 여타 폭군처럼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든가 간신배들에게 놀아났다거나가 아닌, 왕정 시대에는 매우 참신한 파업이라는 형태로 나라를 망쳐버렸지요.
첫댓글 그넘의 재조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