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지난해 11월 8일 오후 영국 옥스퍼드대 맨체스터 칼리지 본관 3층 철학과 빌 맨더(37) 교수실.
2학년 앤서니군이 칸트 철학에 관해 맨더 교수와 1대1 토론수업(튜토리얼)을 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자유인식에 대한 학생의 해석이 올바르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그 자유인식을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해석해 보겠나?” “….”
금세 대답이 나오지 않자 맨더 교수는 “에세이가 부실하다”고 공박했다.
얼굴이 붉어진 앤서니군은 “이틀 밤을 샜다”고 항변했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토론 없이 수업 없다.’
선진 대학을 유지하는 비결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원칙이다.
수업 중 토론이 성립되려면 학생은 물론, 교수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작년 10월 초 칭화대 신문방송학과 커뮤니케이션 수업.
‘민의란 무엇인가’가 주제였다.
교수가 “민의는 항상 옳은 것이며,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면 민의로 볼 수 있다”고 말하자 즉각 학생들의 손이 올라갔다.
“한국 전쟁에 미국과 중국이 모두 국민들의 찬성에 따라 군대를 파병했는데 모두 옳을 수 있습니까.”
“민의를 수치로만 따진다면 1000만명이 넘는 수련자가 있는 파룬궁(법륜공)은 왜 불법입니까”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교수는 진땀을 흘리다 발언을 취소하고 “같이 연구해보자”는 선에서 수업을 끝냈다.
이날 토론을 지켜본 서울대 출신 유학생 박유경(30)씨는 “앞자리 몇 명만 수업에 충실하고 그나마 억지춘향식으로 발표하는 한국 대학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 대학에서 늘 하던 대로 토론식 수업을 진행하다가 낭패를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한다.
96년 부임한 화학부 김희준 교수는 원래 토론수업으로 진행하던 자연과학개론 수업방법을 지난 2학기부터 강의로 바꿨다.
김 교수는 “미리 발표자를 지정해주고 발표내용을 점수화하겠다고 엄포를 놔도 자신이 발표할 내용 이외의 다른 참고서적은 읽어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토론을 기피하는 것은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의 대학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중견 교수들의 기피증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서울대 인문계열 K(36) 교수는 “대학원 과목을 정할 때 토론 수업은 으레 젊은 교수들의 몫으로 미뤄진다”고 말했다.
동경대 문학부 3학년 고바야시씨. ‘일본 에도 시대 역사학 특수 강의’란 과목을 수강하는 그는 당시 사회상과 문제점을 분석하는 수업을 위해 3주 전부터 발표 소재를 교수와 상의했다.
“세미나 수업 90분 중 발표시간은 50분이고, 나머지는 동료 학생과 교수의 질문에 답합니다.
수업 후엔 탈진 상태가 되지요.” 이런 개인 발표는 한 학기에 5차례 정도 행해진다.
옥스퍼드의 유서깊은 ‘튜토리올’ 수업은 조금만 준비가 미흡해도 학생들에게 엄청난 질책과 추궁이 떨어지기 때문에 학생 스트레스의 주 원인이 되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1년 24주 내내 교수와 ‘토론’을 벌이면 많은 아이디어가 생기는 건 사실이에요.”(김인욱·옥스퍼드대 2년 현대사·경제학 전공)
싱가포르 국립대의 튜토리올은 학생들을 몇 개 조로 나누어 공동 프로젝트를 제출하게 하는 점이 영국과 다르다.
지난해 가을 학기 정치학과에서는 ‘음란 웹사이트(인터넷 포르노그라피)의 사회·경제적 가치’를 평가하는 보고서가 제출되는 등 주제선정이 자유롭다.
학생 개개인의 참여 정도·출석·창의성·발표 내용을 구분해 성적을 내기 때문에 토론준비를 소홀히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스탠퍼드대는 2001~2002 학기에 ‘신입생을 위한 토론 강좌’만 225개를 개설했다.
이들 강좌의 최대 인원은 과목당 16명. 토론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주제도 ‘하와이안 기타’(음악과), ‘쿠바의 문학과 혁명’(스페인어학과) 등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다.
자유로운 질의 응답과 교수에 대한 도전과 비판을 허용하는 것은 물론, 이것이 기회가 돼 나중에 유명 교수와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스탠퍼드에도 토론이 곤란한 대규모 강의가 있기는 하다.
이럴 경우 교수들은 강의록을 인터넷에 띄우거나 VTR로 녹화해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한다.
또 전체 수강 학생을 10여 명씩 나눠 박사과정에 있는 강의조교(TA)들이 방과 후에 지도하는 ‘섹션(section)’ 수업을 개설한다.
스탠퍼드 경제학부 TA인 심일혁씨는 “학생들은 섹션수업을 통해 대강의에서 소화하지 못한 내용에 대해 직접 물어보고 얘기할 기회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교수와의 접촉을 늘리는 교육방식도 교수대 학생의 비율이 낮기 때문에 가능하다.
옥스퍼드대 1:9.6, 스탠퍼드대 1:7, 싱가포르대 1:13 등 선진 대학들은 대부분 낮은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스탠퍼드는 한 수업에 학생이 15명 이하인 경우가 전체 수업의 75%를 차지한다.
이에 비해 서울대는 학비는 싸지만 1:21.9(학사 15.6명, 석사 4.5명, 박사 1.8명)로 제대로 된 학사지도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스탠퍼드 비즈니스 스쿨의 황승진 교수는 “토론 수업은 ‘학생들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 목표”라며 “교수가 칠판에 쓰고 이를 받아 적는 식으로는 미래에 대비하는 창의적 학생이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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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일반- 상식
[서울대와 세계 일류대] 토론없이 수업 없다.
탄소같은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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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1.1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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